[이태상 칼럼] 우리 가슴에 코스미안 나무를 심어볼거나

이태상

 


매년 연말 크리스마스 때가 오면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특히 서양뿐만 아니라 서구문명에 길들어진 세계 각국에서 거의 모든 가정마다 관습적으로 생나무를 잘라서 파는 크리스마스트리를 사다 집안에 장식한다.

 

최근 세상 떠난 나보다 두 살 아래 큰 처남은 질색이었다. 멀쩡한 생나무를 베어 잠시 집안에 장식용으로 쓰고 나선 쓰레기로 버리는 이런 미친풍습에. 그는 어렸을 때 병아리를 키워 닭이 되면 닭 모가지를 비틀어 잡아먹는 걸 본 이후로는 평생토록 닭고기를 절대로 먹지 않았다.

 

내 둘째 처남 딸은 어렸을 때 밥상에 오른 생선 알찌개를 보고 뭐냐고 물어 물고기 새끼가 될 알이라고 하자, ‘아이고 가엾어라, 죽기 너무 어린데! Oh, poor things, too young to die!’ 하더란다.

 

흔히 창조행위는 신()들과 시인(詩人)들의 소관(所管) 사항으로 취급하고 치부해버리지만, 우리 보통 사람들도 이 창조의 제한 구역에 들어갈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소나무 한 그루를 심기 위해 신이나 시인이 일 필요는 없다. 삽 한 자루만 있으면 된다. 촌 무지렁이 농부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무가 있으라 하니 나무가 있으리라.

Acts of creation are ordinarily reserved for gods and poets, but humble folk may circumvent this restriction if they know. To plant a pine, for example, one need be neither god nor poet; one need only own a shovel. By virtue of this curious loophole in the rules, any clodhopper may say: Let there be a tree-and there will be one.

 

이는 현대 환경운동의 창시자로 자연생태계보존/보호주의의 대부(Godfather of Conservationism)라 불리는 알도 레오폴드 (Aldo Leopold 1887-1948)의 말이다.

 

Aldo Leopold (January 11, 1887 April 21, 1948) was an American author, philosopher, naturalist, scientist, ecologist, forester, conservationist, and environmentalist. He was a professor at the University of Wisconsin and is best known for his book A Sand County Almanac(1949), which has sold more than two million copies.

 

Leopold was influential in the development of modern environmental ethics and in the movement for wilderness conservation. His ethics of nature and wildlife preservation had a profound impact on the environmental movement, with his ecocentric or holistic ethics regarding land. He emphasized biodiversity and ecology and was a founder of the science of wildlife management.

 

현재 점점 악화되는 기후변화와 코로나 팬데믹으로 온 인류는 물론 전() 지구 생태계의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최대 위기에 처한 오늘날 우리 모두 그가 남긴 엄중한 경고의 말을 심각하게 경청해 더 이상 지체없이 어서 개과천선(改過遷善)해야 하리라.

 

모든 생물체 집단의 통전성(統全性)과 안전(安全)과 자연미(自然美)를 보존(保存)하지 못하는 일은 다 크게 잘못된 것이다.

A thing is right when it tends to preserve the integrity, stability and beauty of the biotic community. It is wrong when it tends otherwise.

 

자연보전(보호)주의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된 상태를 위한 것이다. 존재의 수레바퀴와 그 촉을 제대로 보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급선무(急先務)이다.

Conservation is a state of harmony between men and land. To keep every cog and wheel is the first precaution of intelligent tinkering.

 

자연과의 하모니를 갖고 유지한다는 것은 친구와 조화(調和)를 이루면서 우정(友情)을 쌓는 것과 같다. 친구의 오른손을 잡으면서 그의 왼손을 잘라버릴 수 없는 일이다.

Harmony with land is like harmony with a friend; you cannot cherish his right hand and chop off his left.

 

농사짓는 농토가 없다는 것은 두 가지 영적(靈的)인 위험을 안게 된다. 그 하나는 우리가 먹는 아침 음식이 (땅이 아닌) 식품점에 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열기(熱氣)가 아궁이 화로(火爐)에서 생기는 거라고 잘못 알게 되는 것이다.

There are two spiritual dangers in not owning a farm. One is the danger of supposing that breakfast comes from the grocery, and the other that heat comes from the furnace.

 

인간에 의해 개발되고 길들여진 상태가 아닌 자연 그대로를 보고 즐기며 누릴 수 있는 젊은 시절이 내게 있었다는 것을 나는 더할 수 없는 축복 천만다행으로 여긴다.

I am glad I will not be young in a future without wilderness.

 

현대의 (종교적인) 교조(敎條)는 그 어떤 대가(代價)를 치르더라도 편리(便利)함을 최우선시(最優先視)하는 것이다.

The modern dogma is comfort at any cost.

 

무동작(無動作)의 날개를 타고, 피어오르는 안개 속에서 창공에 마지막 원을 그리면서 먹이를 찾아 두루미 선학(仙鶴)이 착륙(着陸)하면 갯벌에 새날이 시작된다.

On motionless wing they emerge from the lifting mists, sweep a final arc of sky, and settle in clangorous descending spirals to their feeding grounds. A new day has begun on the crane marsh.

 

세상엔 야생적(野生的)인 것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럴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There are some who can live without wild things and some who cannot.

 

생태학적으로 벌()처럼 부과되는 교육은 상처 속에 혼자 산다는 거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별 땅에 가해지는 상처 대부분이 일반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생태학자는 마치 타조(駝鳥)처럼 그의 연구실에 머리를 처박고 소위 과학으로 빚어지는 모든 불행한 결과물이 자신의 소관 사항이 아니라고 외면하든가 아니면 그 지역사회에 죽음의 질병 증상이 만연(漫然)한데도 자신들은 건강하다고 믿고 그렇지 않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주민들의 의사로서의 책무를 한사(限死)코 기어이 수행하는 것이다.

One of the penalties of an ecological education is that one lives alone in a world of wounds. Much of the damage inflicted on land is quite invisible to laymen. An ecologist must either harden his shell and make believe that the consequences of science are none of his business, or he must be the doctor who sees the marks of death in a community that believes itself well and does not want to be told otherwise.

 

괴이(怪異)하게도 야생 동물 윤리에 있어서 특기할 사항은 밀렵(密獵)꾼의 행위를 감시하거나 박수 쳐줄 사람이 없다는 거다. 자신의 행동을 다른 사람들의 감시가 아닌 자신의 양심에 따라 이행(履行)하는 수밖에 없다는 걸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는 사안이다.

A peculiar virtue in wildlife ethics is that the hunter ordinarily has no gallery to applaud or disapprove of his conduct. Whatever his acts, they are dictated by his own conscience, rather than a mob of onlookers. It is difficult to exaggerate the importance of this fact.

 

한 마리의 제비가 왔다고 해서 여름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 무리의 오리가 짙은 안개 속으로 호수에 내려앉으면 봄이 온 것이다.

One swallow does not make a summer, but one skein of geese, cleaving the murk of a March thaw, is the spring.”

 

그 어떤 동물이나 식물을 보고 그 게 무슨 쓸 데가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지(無知)의 극치(極致)를 나타내는 거다. 이 지구 땅덩어리의 구조(構造) 얼개 틀거리 짜임새가 온전(穩全)한 것이라면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든 못하든 그 각 부분 또한 온전한 것이다. 우주 생태계가 우리가 좋아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영겁의 세월을 두고 만들었다면 쓸데없어 보이는 그 어떤 부분이라도 내친다는 것은 천하의 천치(天痴) 백치(白雉) 바보나 할 짓이다.

The last word in ignorance is the man who says of an animal or plant, “What good is it?” If the land mechanism as a whole is good, then every part is good, whether we understand it or not. If the biota, in the course of eons, has built something we like but do not understand, then who but a fool would discard seemingly useless parts?

 

자연의 진가(眞價)를 알아볼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예술에서와 같이 우선 예쁜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점차로 아름다운것들에게로 확대된다. 이 아름다운 것들의 무궁무진한 가치는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경지(境地)에 이른다.

Our ability to perceive quality in nature begins, as in art, with the pretty. It expands through successive stages of the beautiful to values as yet uncaptured by language.”

 

우리가 절대적인 정의(正義)나 자유(自由)를 얻을 수 없듯이 자연과의 완전한 조화도 이룰 수도 없으리라. 그래도 우리는 계속 노력할 수밖에 없다.

We shall never achieve harmony with the land, any more than we shall achieve absolute justice or liberty for people. In these higher aspirations, the important thing is not to achieve but to strive.

 

상상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지도(地圖)에 난 공백(空白)은 쓸데없는 황무지(荒蕪地)이지만 다른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가치 있는 곳이다.

To those devoid of imagination a blank place on the map is a useless waste; to others, the most valuable part.

 

오로지 산()만 오래도록 있어 왔기에 늑대 이리의 울음소리를 객관적으로 들을 수 있다.

Only the mountain has lived long enough to listen objectively to the howl of the wolf.

 

또라이반골기질(反骨/叛骨氣質)은 사회적인 동물이 성취(成就) 도달(到達)할 수 있는 최상(最上) 최고(最高)의 진화(進化)된 단계(段階)이다.

Nonconformity is the highest evolutionary attainment of social animals.”

 

교육이란, 어쩔 수 없이, 하나를 보기 위해 다른 것에 눈을 감는 거다.

Education, I fear, is learning to see one thing by going blind to another.”

 

, 옳거니, 우리 모두 어서 단군신화로 돌아가야 하리라. 세계 인류 모두가 말이어라. , 정녕, 단군할아버지, 아니 우리 곰할머니 만세로다.

검은고라니사슴(Black Elk)’이라 불린 북아메리카 인디언 마법사(Hehaka Sapa, commonly known as Black Elk, 1868-1950)가 병든 사람이나 동식물을 위해 외던 주문(呪文)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땅할머니시여,

내 말 좀 들으시오.

당신 품안에서

우리는 관계를

맺고 있지요.

 

두 다리, 네다리, 날개 달린 짐승,

그리고 당신 몸 안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 다 당신의 자손들이지요.

 

그러니 우리 모두다

서로 친척임을 알지라오.

 

미 대륙의 원주민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우리 한민족과 같은 몽고족이라 하지 않나. 그렇다면 단군 할아버지 아니 우리 곰할머니께 빌어볼거나.

 

비나이다

비나이다

 

물아일체

피아일체

홍익인간

 

인내천

우주인

나그네

 

코스미안

동식광물

 

하늘과

별들과

바다와

 

그 속에

숨 쉬는

모든 것

 

숨 멈춘듯한

무생물까지도

나 자신으로

느낄 수 있게

깨우쳐주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


전명희 기자

  


전명희 기자
작성 2020.12.08 09:45 수정 2020.12.08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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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