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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원종은 왕권 위에 군림하는 무신정권을 타도하려고 원나라로 가서 속국이 될 것을 자청하였다. 몽골은 병사를 보내 최우와 김준의 무신정권을 타도하였다. 대몽고에 항몽하던 강화도 삼별초 군은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군대였다.
1270년 6월 원종이 삼별초의 해체를 명하자 강화에서 배중손과 노영희는 왕족인 온溫을 왕으로 옹립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고 고려 원종에 도전하였다. 마침내 삼별초는 전라도로 가서 경상. 전라 충청을 장악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삼별초 군은 1천여 척의 함선을 타고 진도로 이동하였다.
원종은 여·몽연합군으로 진도로 간 삼별초군 토벌에 나선다. 삼별초가 진도에 도읍을 정한 것은 몽고군의 진격을 막기 위함이었다. 용장산성을 짓고 대몽 항쟁의 본거지로 삼았다. 김방경이 이끄는 여·몽 연합군 1만 8천 명이 개성에서 배를 타고 진도에 진출하여 1271년 5월 진도 기습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섬이라 바다로 못 올 줄 알았던 연합군이 상륙하여 처절한 전투 결과 용장산성이 무너지면서 삼별초 군이 패퇴하였다. 전투에서 패하자 일부 병사와 궁녀들은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배중손은 병사를 둘로 나누어 전라·경상도에서 새로운 힘을 구축하면서 제주도에 본영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여몽 연합군 전투에서 배중손이 죽자 부장 김통정은 삼별초 군을 데리고 제주로 본거지를 옮겼다.
제주에서 성을 쌓고 완벽한 국가 형태를 갖추고 고려에 저항하였다. 그런데 김방경의 여몽 연합군 300척과 1만명의 병사가 제주로 상륙하여 제주도를 함락하였다. 제주항전에서 살아남은 병사는 고작 200여 명이었다. 김통정 장군은 부장인 이문경 장군을 불렀다.
“이 장군, 장군은 꼭 살아남아야 합니다. 제주를 떠나 유구로 가십시오. 그곳에 가면 옛 가야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세요.”
“알겠나이다. 장군, 기어이 살아남아 끝까지 항몽 투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김통정 장군은 숨을 거두었다. 이문경은 살아남은 삼별초 병사 200명을 거느리고 오키나와로 떠났다. 그는 유구 중산국의 쇼하시왕을 만났다. 쇼하시왕은 자국의 방어를 위하여 항몽군인 삼별초를 기쁘게 맞았다.
“용맹스런 고려의 항몽 삼별초 장군의 본국 입성을 축하합니다.”
“불운에 처한 우리를 받아주신다니 그 은혜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쇼하시왕은 이문경 장군을 오키나와 중산국의 병무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삼별초 군은 막강한 해군력으로 증강시켜 여러 제도를 제압하였다. 그리고 중산국에 고려 망명정부를 세웠다. 어느 날 쇼하시 왕이 이문경 장군을 불렀다.
“이장군, 류구는 해양 다제도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런데 해상의 왜구들이 나타나서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나가서 왜구를 제압하시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모조리 쓸어버리겠습니다.”
이문경 장군은 고려의 삼별초가 양성한 해군을 데리고 가서 왜구 집단을 쓸어버렸다. 당시 왜구는 남송 멸망 정부군과 서남 전쟁에서 패한 일본 남부군과, 해적들이 모인 단체였다. 이문경 장군은 왜구 대장인 이바시노에게 명하였다.
“이바시노 장군, 해상의 왜구를 데리고 유구로 오십시오.”
“우리를 받아주는 조건이 뭡니까?”
“류구의 백성으로 정착시켜 편안하게 살게 하겠소.”
“장군,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수장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는 대마도에 은둔한 모든 왜구를 요구로 데리고 왔다. 쇼하시 왕은 이문경 장군을 총대장으로 이바시노를 정복 군장으로 임명하여 정복 사업을 벌였다. 마침내 이문경 장군은 삼별초 함대로 유구의 36개 섬을 모두 장악해 버렸다. 비로소 위대한 유구 제국이 탄생하였다. 그리고 유구는 8만이란 해군력을 보유한 강력한 해상국가로 부상하였다.
1372년 중산의 2대 철시왕은 삼별초군의 힘을 빌려 완전한 통일을 완성하고 1383년 손자 쇼하시(3대)는 나하에 수리성을 축성하고 강력한 통일 국가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문경 장군에겐 다른 뜻이 있었다. 유구의 삼별초 함대로 여.몽군을 치고 새로운 고려를 만들 야망을 갖고 있었다.
이문경의 삼별초 함대는 병선 3,000척에 8만의 수병을 거느린 동북아 최대 병력이었다. 명나라와 일본, 고려와 조선은 이들을 왜구라고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장군은 삼별초 함대를 만들고 본토 회귀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이문경 장군이 죽고 그의 아들 이무일이 군부를 장악하였다. 그가 실제의 유구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부친의 뜻을 받들어 강력한 삼별초 유구 해군으로 고려를 칠 야심을 가졌다.
아무튼, 그 후 삼별초는 200년 동안 오키나와 제도를 장악한 통일 국가로 번창하였다. 오키나와 행정 청사가 있는 나라시는 난세이 군도의 최대 도시이며 유구 왕국 수도이다. 나하의 수리성은 15세기에 조선의 건축양식으로 지은 순수한 목조 건축물이었다. 수리성을 둘러보면 낯익은 풍경에 놀란다. 건축양식과 주민들의 풍습이 우리와 흡사하다. 오키나와 전통 요리인 돼지 족발은 그 맛이 한국의 족발 맛과 비슷하고 메밀로 만든 전통 술 고룡은 막걸리 청주와 비슷하다.
2
유구의 왕국은 쇼하이 왕(1531년-1623년) 때 포르투갈의 침략을 받아 명맥을 유지하다가 가고시마의 무사들에 의하여 망했다.
1609년 일본은 임진왜란을 끝으로 센고쿠 시대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총애를 받은 요시히로 시마즈 장군은 요시히사, 도시히사, 이에히사 3 동생과 같이 규슈를 지배하여 막강한 센코쿠 다이묘로 성장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유구를 침공하여 일본 영토로 만든 요시히로 시마르 장군에게 사쓰마번을 주고 충성을 맹세 받았다. 유구의 행정장관 이정(이문영 장군 후손) 장군은 쇼하이 왕께 간청하였다.
“전하, 지금 왜구장 아카하치와 요시히사가 유구를 침략했습니다.”
“장군, 어쩌면 좋겠소?”
“최후의 일각까지 유구를 지킬 것입니다.”
그러나 규슈의 무사군단 세력이 너무나 완강해서 버틸 수가 없었다. 사쓰마의 요시히로 시마르 장군이 수리성을 침공했다. 총리대신 이정이 끝까지 투쟁하였다. 그러나 순식간에 수리성이 시마르 장군의 군대에 무너졌다. 이정은 최후의 혈전을 각오하고 사쓰마군에 항거하였다. 그러나 사쓰마 군은 끝까지 저항한 국왕과 대신 삼사관 등 100명의 저항군을 체포하였다. 요시히로 시마르는 삼별초 함대를 해산하고 이정 장군과 100여명의 관료들을 민중이 보는 앞에서 펄펄 끓는 기름 솥에 삶아 죽이고 시신을 꺼내 보였다.
“잘 보라, 앞으로 사쓰마에 항거하는 자는 이렇게 죽일 것이다.”
요시히로는 경고를 하고 유구를 다스렸다. 1865년 일본의 유신 정권이 탄생하자 시마르 정권은 유구의 마지막 왕을 도쿄의 메이지 정부로 끌고 갔다
“유구는 이제부터 일본의 통치를 받는다. 백성을 다치지 않으려면 항복 문서에 조인을 하여라.”
명치 정부 참사관의 명령이었다.
“항복을 하면 국왕인 내게 유구 통치권을 주겠습니까?”
“일본령이 되는 동시에 오키나와 현으로 개칭되며 네게 통치권을 부여하겠노라.”
“좋습니다.”
마침내 유구 왕은 항복 문서에 조인하였다. 마침내 1879년 일본 제국은 무력으로 유구 왕국을 붕괴하고 명치유신 정권에 소속시켰다. 이리오모테의 삼별초의 망명 정부군은 고려 행궁을 고려 신궁으로 변조했고 국왕의 증손녀인 하미코는 시녀로 변신하여 신전을 지켰다. 그녀의 후손들은 고려 신궁에서 대대로 조국 잃은 한을 사미센을 켜면서 달랬다. 오키나와 민요 ‘봉숭화’는 그들의 한의 노래였다.
*탄사구하나(봉숭화)
봉선화 꽃을 발끝에 물들이고 부모의 말은 마음에 물들이고
하늘의 별무리는 셀 수 있지만 부모의 말은 헤아릴 수 없구나.
밤바다로 나가는 배는 북극성을 향하고 나를 낳아준 부모는 나만 바라보나니
보석도 닦지 않으면 녹슬어버리니 마음을 갈고 닦아 세상을 살아가리.
*가증 :허균은 삼별초 군이 사령부가 있었던 이리오모테를 율도국이라 하였다.
[김용필]
KBS 교육방송극작가
한국소설가협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마포 지부 회장
문공부 우수도서선정(화엄경)
한국소설작가상(대하소설-연해주 전5권)
전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