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구 칼럼] 아기 장난감의 숨은 뜻은

문경구

 

커피 한잔에 가벼운 아침 식사를 위해 맥카페에 들어서면 그 안에 늘 먼저 와서 머물러있던 정겨운 사람들의 따스하던 정열이 식어버린 지 오래다. 늘 떠나갈 듯 자지러질 듯한 웃음으로 반갑게 맞아주던 어린 멕시칸 종업원들 얼굴도 어디에 숨어있는지 찾아내기 어려울 만큼 코로나라는 존재만이 혼자 카페 안을 가득 지키고 있다.

 

밖에 줄지어 선 긴 차량들이 눈 깜짝하는 사이에 음식을 주문해 가는 움직임이 유난히 감사히 느껴지는 코로나 세상의 아침이다. 안에서나 밖에서나 흔해빠진 코로나뿐이다. 이런 재난에 사람들이 집에서 끓이고 지지고 볶아 손이 많이 가는 일상의 요리를 하지 않아도 될, 가장 손쉽게 찾아 즐길 수 있는 맥도널드의 간편한 음식만으로도 그만큼의 정신적 갈등을 덜어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마음 같아서는 U.N의 세계식량기구에 특별히 간청하여 노벨상에 의뢰해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도깨비방망이가 따로 없다. 이름을 대기만 하면 뚝딱 한 상이 나오는 맥도널드 상차림에서 평화를 만난다. 손에 쥐고 있는 작은 라디오에서는 한국 전방에 첫 한파가 찾아왔다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캘리포니아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길은 하나로 통한다고 하는데 한파는 코로나 역병을 피해 무사히 찾아왔는가 보다. 하늘은 아파하지 않는 맑은 모습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하늘은 어디서부터 왔는지 궁금해진다.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찾아온 걸 보면 그곳은 코로나를 모르는, 이전의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 틀림없다.

 

내 발길도 내 머리도 허락하지 않아도 눈을 감고도 찾아 나설 수 있다는 낯익은 공원이 있다. 두려움을 피해온 이곳이야말로 나는 물론 모든 세상 사람들이 코로나를 피해있는 피난처로 믿었다. 계절마다 찾아와 들러가는 공원에서 서성대는 늦가을마저 숨이 멎어 보인다.

 

벤치 위에 달도 물어다 놓고 해도 물어다 놓던 새들도 자취가 없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줄기차게 공원까지 따라와 계절조차도 따돌려 보내려 하는 것인가. 여름꽃들이 어금니를 악물고 참아낸 흔적만이 나뒹굴어 진 자리로 가을이 죽어가고 있다. 그 값진 낭만의 자존감은 어디에서부터 길을 잃은 것일까.

 

이제는 치유되지 않은 가을은 무슨 수로 아픈 사람들을 어루만져 줄 것인가. 가을이 죽었다. 서로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과의 싸움도 지치는데 역병이라는 약봉지까지 끌어안고 신음해야 하는가를 땅에 누운 여름꽃의 주검을 위로하며 이해하려 해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 모두를 훌쩍 뛰어넘어서 지금의 기억들을 내일로 갖고 가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여느 해와 똑같이 농사를 짓는 친구가 한해 수확의 수고로움을 마무리하는 소식에도 코로나가 따라와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을 가을 전원 속 친구가 걱정된다. 그가 일구어낸 사진 속 밭에서 수확을 기다리는 배추도, 무우도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는 느낌이다.

 

가을 들녘에 서서 참새들의 오금을 저리게 하던 허수아비도 마스크를 써야 할 것 같다. 참새들이 몰려다니며 허수아비를 조롱하러 찾아와도 더 이상 그들을 내칠 수가 없게 된 지금, 친구는 허수아비도 외면한 외로운 농부가 되어 서 있다. 서리가 내린 전방이나, 친구의 전원에나, 내가 앉아 있어야 할 맥도널드 카페에나 코로나는 안하무인으로 눌어붙어 있다.

 

코로나는 마스크 하나면 만병통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 그 말은 진실일까. 면역 치료제, 백신 주사약이 개발되어 간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조차도 믿음을 주기에 너무 불안하다. 차라리 동굴 속 박쥐들처럼 자체적인 바이러스를 만들어 서로 나누어 쓰는 방법을 써야 할 것 같다. 그렇게 해서라도 면역을 강하게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흑사병으로 전멸하다시피 한 스페인 이야기가 전설처럼 시간이 흐른 뒤가 되어서야 코로나도 역사 위에 이름을 얹어 놓으려는 속셈인가. 그 어느 누구도, 공원 벤치도 알 길이 없는 하루는 여전하다. 모두의 생명줄인 소규모 상공인들의 노래방 사업도 코로나에 의해 전멸되어 가고 있다는 뉴스가 나온다.

 

한민족의 전통적인 가무문화들이 도산해 버렸다는 절망적인 뉴스에 라디오를 꺼버렸다. 모두를 잊어보려 먼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당황하는 아기엄마의 애처로운 모습으로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에 시선이 멈췄다. 아기 울음에 놀란 엄마는 아기가 목청 높여 울어야 하는 모든 사실을 아는냥 그대로 실천에 옮기고 있다는 중이다.

 

그 비밀의 열쇠를 손에 쥔 엄마는 재빠르게 아기의 마스크를 벗기자 아기는 단 일초도 걸리지 않은 순간에 가짜 울음이었다고 까르르 웃으며 두 팔을 하늘로 올려 살 것처럼 뛰어댄다. 겁이난 아기엄마가 잠시 뒤 다시 아기의 마스크로 얼굴을 가려 주자 또다시 죽을 것 같이 목청을 높여 운다. 아기엄마의 예측처럼 마스크를 내리면 아기는 다시 또 살았다는 듯이 좋아서 날뛴다.

 

말 못 하는 아기는 얼마나 갑갑하고 고통스러워 똑같이 울음과 웃음을 반복하는 법을 배웠을까. 그렇게라도 해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벌써 알고 있었다. 마치 태엽으로 움직이는 장난감 인형처럼 등 뒤에서 태엽을 감아주면 생명을 머금은 아기가 되었다가 태엽이 풀리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울어댄다.

 

몇 번을 울었다 웃었다 태엽에 맞추어대는 아기의 일상은 운명이 되었고 아기엄마의 고통도 똑같은 일상이 되었다. 아기의 운명이 유모차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공원에 머무는 장난감 아기에게까지 사태는 넘을수록 첩첩산중이다. 코로나는 무슨 이유로 어린 아기에게까지 고통을 주어야 하는 걸까, 죄 없는 아기가 아니면, 아기도 죄가 있어 저렇게 통곡하듯 울어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해서라도 아기는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삶의 속성을 배우는 고요한 사투를 벌이는 중인지 모른다.

 

 

[문경구]

미주한인크리스찬문학협회공모 수필당선

문경구 kimurgin@hotmail.com


전명희 기자  


전명희 기자
작성 2020.12.14 11:16 수정 2020.12.1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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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