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문명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데는 여러 발명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고대에 불을 사용하게 되면서 인간은 야수로부터 안전을 담보할 수 있었고, 타 종족에 대한 비교우위의 유리한 고지를 확보했을 겁니다. 인류의 문자 사용 이후, 인쇄술이 보급되면서 정보 지식을 대중화할 수 있었고, 증기기관 발명과 전기 사용은 인류가 시간과 공간을 단축하고 어둠을 헤치고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후 컴퓨터와 인터넷의 확산, 그리고 소셜네트워크의 발전으로 인류문명은 정점을 찍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문자를 살펴볼까 합니다. 삶의 많은 부분을 문자에 의존하면서, 혹시 우리가 잃은 것은 없는가 하는 점입니다. 저도 삶의 많은 부분을 문자에 의존하는 사람으로서, 삶에서 문자의 공간을 배제한다면 저의 삶 또한 누에고치 집처럼 껍데기만 남게 될지도 모릅니다. 문자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 ‘책 문화’-그것을 잃는다면 삶이 아주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하는 것이 제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몸을 움직이기가 점점 귀찮아집니다. 생각만 많아짐으로써 팔, 다리는 가늘어지고, 몸통은 호리호리해지며, 머리만 큰 존재(뭐, 그렇다고 문어를 생각지는 말아주세요)-바로 ‘빅 브레인’(미국 소설가 커트 보니것의 『갈라파고스』에 나오는 미래형 인간)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물론 보니것은 감정은 없고, 이성만 살아있는 가상 속 인간을 상정한 것입니다만).
문자가 주는 부정할 수 없는 이로움과 혜택에도 불구하고 ‘문자 유감’을 표하는 이유는 문자로 인한 상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눈을 뜨고도 세상에 눈먼 사람이 되도록 하였고, 세상 만물과 어울림을 포기하도록 만들었으며, (어릴 적) 간직하였던 감수성과 상상력을 상실케 하였습니다.
듣자 하니, 시각이나 청력을 잃은 사람은 좀 다른 감각이 깨어있다고 합니다. 대개 나이가 들면서는 청각뿐 아니라 시각도 떨어진다고 합니다. 말년에 시력을 잃은 보르헤스가 이런 얘기를 했다는군요. “눈이 먼 사람들은 일종의 보상을 받는 것 같다. 눈먼 사람에게 시간은 뭔가를 계속 채워 넣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시간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이니까.”
생각해보면, 문자로 인해 인류는 자신감을 넘어 오만만 마음을 갖게 됐으며, 자연을 벗하여 어울리는 대신 정복하고 착취하는 삶의 태도를 보이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또 다른 경우를 보면, 옛날 어르신 중에 일제강점기 또는 불우한 환경으로 인해 한글을 터득지 못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식수준을 떠나 그들 중에는 삶의 지혜를 보여주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전통문화나 생활 속에서, 그분들이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득한 경험과 지혜를 통해, 문자로 터득한 지식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탁월한 아이디어와 사고를 보여주니까요. 이런 경우 그들이 속한 마을공동체와 전통문화 속에 그들의 삶이 함께 녹아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요즘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면서, 기성세대(저를 포함한)의 장년층과 이전 선조들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그때의 삶은 자연을 벗하고 자연에 기반을 둔 공동체의 삶이 아니었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남자아이들이라면 잣 치기, 비석치기, 심지어 땅따먹기, 연날리기 등과 같이 나무 도구를 사용하여 땅을 밟고, 종종 하늘도 쳐다보면서 몸을 부대껴 놀았습니다. 또 여자아이들이라면 땅을 발로 집고 뛰어오르며 총총 뛰어다니는 고무줄놀이, 돌로 만든 공깃돌 놀이, 나뭇잎 따기 등 자연 소재에 몸을 섞는 놀이를 즐겼습니다. 겨울밤에는 한 이불 속에 여러 명이 발을 집어넣고 살을 부대껴 가면서 귀신 얘기며, 실뜨기 놀이랑 또 가끔 동양화(화투) 전시회를 하던 기억도 납니다. 그리고 벌칙을 받게 되면, 캄캄한 들판의 시커먼 구덩이에서 무 몇 개를 꺼내어 죽으라고 달려왔지요. 껍질만 벗겨서 수저로 긁어먹던 그때의 무는 어느 과일보다도 달게 느껴졌습니다.
오래전 추억이지만, 아직 문자에 의존하지 않았던 시절의 소중한 경험이며, 살아있는 삶의 감성이었습니다. 아쉽지만, 성인이 되어서 다시 찾을 수 없는 무한한 상상력과 감성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뭐, 그렇다고 인류가 쌓아온 문자 문명을 소홀히 하거나, 내팽개치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니까요. 다만, 문자로 이루어진 우리의 현대문명이 가져온 의도치 않은 폐해나 상실을 한번 되짚어보고 싶었습니다. 문자로 인한 문명의 윤택함이 얼마나 큰데, 그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냐.’라는 비판을 감수하고, 오늘 ‘문자 유감’을 표해봤습니다. 가끔 활자를 매개하지 않고서 우리 몸과 마음으로 세상 속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문자에 대한 유감, 오늘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비판은 달게 받겠습니다, 흠….)
[신연강]
인문학 작가
문학박사
전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