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갇혀 고생 고생하다가 알을 깨고 나오면서 시라는 언어를 뱉어놓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거나 치열한 실험정신으로 쓴 시들에게 많은 점수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젊은 시절부터 그러하지 못했다.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자연 속에서 뒹굴며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자연예찬론자가 되어버린 탓이다. 어릴 적부터 산과 바다가 좋았고 달이 휘영청 밝은 밤이면 이유 없이 눈물이 나기도 했다. 봄비가 오면 그냥 좋아서 비를 맞았고, 여름날 찌는 듯한 황톳길 고갯마루를 넘으며 땀 밤벅이 되어 풀내음을 맡기도 했다. 가을이면 자전거를 타고 끝없이 핀 코스모스 길을 달렸고, 겨울에는 눈 쌓인 산골에 박혀 누군가를 기다리기도 했다.
자연은 편안하고 거짓이 없는 아름다움이다. 젊은 날 질풍노도처럼 이 골목 저 골목 기웃거리다 나이 들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수많은 도전과 실험 끝에 내린 결론이리라. 일정한 잣대로 생각의 울타리를 쳐놓고 고민하는 삶이 얼마나 편협한 일인가를 알고 나면 자연은 우리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길가에 핀 민들레꽃이 더욱 강인하게 보이고 찔레꽃 향기가 더욱 달콤하게 느껴진다. 밤하늘의 별은 더욱 빛나고 그리움과 사랑은 그 애절함과 깊이를 더해간다. 우리가 결국 돌아가야 할 곳은 자연이기 때문에.
평소 알고 지내는 시인에게 시를 어떻게 써야하는지 좀 가르쳐 달라며 시작을 위한 책을 한 권 소개해 달라고 한 적이 있다. “그냥 쓰면 되는 것이지 지금 이 나이에 누구의 말을 듣거나 책을 읽고 시를 쓸 것이냐?”고 했다. 그렇다. 나는 시를 쓰면서 무슨 기교를 부릴 생각도 없고 어떤 사조의 영향을 받고 싶지도 않다. 다만 편안한 마음으로 쉽게 쓰고자 할 뿐이다.
시는 감동이 있어야 한다. 읽고 나면 ‘아! 바로 이거야!’ 하면서 가슴이 뭉클하거나 눈물이 핑 도는 시라야 한다. 밤새 잠 못 이루며 다시 읽고 싶은 시가 명시가 아닐까. 그런데 요즘에는 백 번을 읽어도 해독이 잘 안 되는 시들이 많다. 독자의 수준이 낮아서 그렇다고 하기엔 왠지 씁쓸한 느낌이 든다. 시는 몇몇 암호 해독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호흡해야 할 문학의 꽃이기 때문이다.
나는 섬을 좋아한다. 섬에 가면 순수가 남아있어 좋고 공해가 없는 자연 그대로라 좋다. 섬은 고립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내게는 대 자유다. 그러다 보니 전국의 섬은 거의 다 섭렵했고 결국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있는 오곡도라는 작은 섬에 내 영혼의 짐을 내려놓았다. 허물어져가는 토담집 하나를 수리하여 주말이면 가끔 가서 쉬고 온다. 난방은 장작불을 때고 텃밭을 가꾸어 풋고추, 상추와 같은 먹거리를 생산한다. 소득 없는 아름다움을 기르는 꽃밭도 하나 만들었다. 샘물은 두레박으로 길어서 먹는 곳이다.
이제 이 섬에는 어촌계장 내외분이 살고 있을 뿐이다. 태풍 매미가 왔을 때, 아버님처럼 모시던 노인 한분이 모진 비바람에 집을 잃고 세상을 등지자 말없이 눈물을 흘렸던 일이 엊그제 같이 느껴진다. 염소가 자유를 노래하고 동백꽃이 애절한 섬마을 처녀의 사랑을 이야기 하는 곳! 때 묻지 않은 자연 속에서 애틋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섬은 내 시의 고향이다. 섬은 내 어릴 적 보릿고개 가난과 아련한 추억들이 원형 그대로 화석이 되어 묻혀 있는 곳이다. 섬에 대해 내가 이토록 천착하는 것은 언젠가 돌아가야 할 자연과 우주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이봉수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