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생사의 경계가 흐려졌습니다. 일상의 경계도 희미해졌습니다. 코로나는 예전에 목마르면 시원하게 한잔 들이키던 그 코로나가 아닙니다(옛날에는 작은 갈색 병에 담겼던 앙증맞은 맥주였습니다). 하나뿐인 목숨을 가뿐하게 빼앗아가는 무서운 코로나입니다.
첨단의 인류문명을 한순간에 좌초시킨 코로나. 그 어떤 핵무기나 생 화학 무기보다도 문명을 더 위협하고, 인간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공포의 바이러스. 이 추세대로라면 외계의 어떤 생명체나 집단도 결코 지구에 오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혹, 외계 생명체가 있다면 말입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역시 제어(통제)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지금에야 질병 대처(백신 개발)와 예방적 조처를 할 수 있으니까요. 전 세계적으로 정신적, 심리적 충격은 상당히 커서, 현 상황대로라면 앞으로도 공포가 무한히 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일상에 스며든 코로나. 얼마나 똑똑한지 스스로 변형을 일으키며 진화하는 것 같습니다.
의학계가 최선을 다하고, 방역단체가 고군분투하며 애쓰는 만큼, 각 개인도 마음을 정돈하면서 차분히 코로나를 달래야 할 것 같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찾도록 오래된 동요를 불러봅니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이렇게 부르던 동요가 있었는데요, 이 노래를 코로나에 불러줍니다. “잘 자라 코로나야! 자장, 자장, 코로나야, 잘~자~거라.”
처음 코로나가 발병될 무렵에 쓴 글이 있습니다. 그때 ‘처음이휴영’(處陰以休影: 그늘에 들어야 그림자가 쉰다)이란 문구를 인용했는데요, ‘존재가 바쁜 만큼 그림자도 고되었을 테니, 자신을 따라다니던 그림자를 쉬게 하고 휴식을 취하게 하라’는 뜻이지요. 한여름이건 한겨울이건, 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따라다니느라 고생했을 그림자를 놓아주고, 이승을 편히 떠나게 하자는 바람이었습니다. 그 당시(2020.3.23) 한국의 사망자가 100명을 넘어서고, 전 세계적으로는 1만 2천 명이었던 것이, 지금 현재(2020.12.25)는 한국 773명, 세계적으로 174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그러니 코로나를 통제하기 위한 백신 개발과 접종이 그만큼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도 큰 희생과 많은 죽음 앞에 예수님도 부처님도 가슴 아파합니다. 햇빛을 한가득 안고 찰랑거리던 강물도 눈물로 뿌옇게 흐려졌습니다. 줄지어 떠나는 망자들께 조의를 표하면서, 기도로 코로나를 달랩니다. “잘 자라 코로나야.” 2020년의 ‘메리 크리스마스’ 아닌 매우 ‘낯설고 이상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이천 년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지상에 오셨던 예수님의 그 넓고 깊은 뜻. 그 언약을 믿으며 두 손을 모읍니다.
[신연강]
인문학 작가
문학박사
전명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