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구 칼럼] 나의 고문변호사

문경구

 

나에게 할당된 노동시간을 제하고 갖는 자투리 시간조차 짭짤하게 써먹는 중요성을 알게 해주는 미국 친구가 있다.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 친구가 나에게 있어 준다는 것은 만날 때마다 감춰두었던 세상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느낌이다.

 

일상이 유머인 친구와 농담에 익숙지 못한 내가 나누는 대화는 물에 뜬 기름의 시작이다. 그 자리에 또 누군가가 있다면 벽을 둘러싼 화가들의 아름다운 그림들이 관심을 두고 바라보고 그때마다 어울려주는 커피향이 있다. 아름다운 그림들과 그리고 커피향과의 어울림이 두 사람에게 주는 시간의 소중함도 이렇게 큰 줄 몰랐다.

 

아마도 이것이 우정이라는 인간애일 것이다. 무엇보다 그 친구는 천구백년대에 일찍 시작된 유명한 캘리포니아 화가들의 그림을 수집한다. 늘 그림 그리는 일에 관심이 큰 나는 뒤 따라다니면서 얻는 영감으로 그림을 그리기 좋아했다.

 

궁합으로 치면 찰떡같은 취미가 우리 우정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데 큰 몫을 한 것 같다. 처음에는 미국 사람들과의 인간관계가 극히 형식적이고 나누는 인사도 지나치게 사무적인 것 같았다. 베푸는 친절조차 진심보다 형식이 더 강하게 느껴져 깊은 속내를 알 수 없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너무 많은 인정머리 정이 미국 사람들에게는 꼬리만큼도 볼 수 없었다. 참고 기다리던 인내의 끝에는 달콤함보다 쓰디쓴 열매만 주렁주렁 달릴 것 같았다. 나누던 대화가 끝을 맺지 못하고 헤어질 때도 늘 서로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 예의와 격식을 갖춘 꼭두각시들의 인형극 같았다.

 

꼭두각시들에게는 당연히 정이 있을 수가 없다. 사람은 서로 마음이 맞아야 인간관계가 오래가는 법이라고 했다. 어제까지 몰랐던 사람들이 확실한 법의 틀에 맞춰 가야 하는 변호사와 의뢰인과의 호흡도 맞지 않으면 사건은 풍파를 만난 배가 된다.

 

그 미국 친구는 해가 지는 서쪽, 서양에서 태어나 서풍이 불어오는 길을 걸어 늙어가고 나는 해가 뜨는 동쪽에서 와 사는 동양사람인 만큼 사는 모습도 다르다. 동과 서, 한쪽이 잠자리에 들려면 한쪽은 일어나 해를 맞이해야 하는 하늘의 이치를 따져만 보아도 맞는 것이 하나도 없을 거라고 믿었다.

 

두 사람에게 똑같은 봄이 찾아왔어도 그 봄을 보낼 때는 서로 다른 운명의 봄이 된다. 마치 관상이 다르고 사주팔자가 다른 세상 사람들이 바로 친구와 나처럼 다른 인생관으로 지구를 따라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똑같으면 못산다는 말인가보다.

 

친구와 나는 동과 서가 달라도 너무 다르건만 한 번도 일치되지 않는 일로 마음을 상해본 적 없이 서로 존중하며 우정을 지켜왔다. 이곳에서 학업을 마치지 않고 늦게 시작한 나의 이민생활은 미국 생활 모두가 질문투성이이요 의구심뿐이다. 무엇을 하나 구입해도 깨알 크기의 설명서에부터 질려버린다.

 

나는 중요한 민원이나 관공서 서류하나를 제출하기 위해 내가 작성해 놓고도 완벽하게 작성이 되었는지 나에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백인 친구에게 검토해 달라고 부탁하여 완벽함이 확인된 뒤 친구의 오케이 답이 떨어진 뒤 보내야 안심이 된다.

 

언제나 미션을 들고 그 친구를 만난다. 아마도 나는 미국 친구를 나만을 위해 고용된 고문변호사로 철저히 여기며 살아온 것 같다. 미국에서 태어나 학교를 나온 학생들에게 한국말과 한국의 얼을 담아주기 위해 부모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한국 사람의 모습을 한 체 미국 사람의 정서로 돌아서는 자체를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내가 한국인의 얼굴을 접어두고 미국 친구같은 얼굴로 아무리 살려 해도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것과 같다. 나는 한시도 잊지 않고 미국 사람임을 자부하고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믿었다. 물이든 기름이든 잘 융합되어 미국인들처럼 휘젓고 다니며 살게 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미국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나의 인생관에서 가장 커다란 착각임을 깨달았다.

 

착각 속에 갇힌 나를 유죄라고 인정하게 된 것도 나의 고문변호사 친구 덕분이었다. 겨울잠을 자고 봄이 되면 깨어나는 개구리는 겨울과 봄의 햇살을 착각하지 않는다. 분명 봄 햇살의 부름으로 경칩에 꼭 세상 밖으로 나온다고 한다.

 

세월의 방향을 잃은 착각 속에서 살아온 나에게 사계절은 착각이었다. 두 얼굴을 지녔다는 서양인들에게는 어느 쪽이 진실인지 모르는 그 얼굴조차도 착각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행동에 앞서 많은 생각을 하는 모습의 진실이 담긴 진짜 얼굴을 보지 못한 나의 잘못이었다.

 

나의 눈 속에 친구는 그저 보고 배운 친절일 뿐 얼마나 진실했었나를 한 번도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나는 그 착각을 깨우치고 그 친구의 실체를 그대로 인정하는 법도를 깨우치고 나니 그 또한 고문변호사의 법전 속에 있는 잘 사는 방법이었다. 미국 사람들은 지나치게 법대로 살기를 좋아하는 모두가 법률가라고 흉보다가 그만 내가 닮고 말았다. 내가 바로 속 좁고 융통성 없는 사람인 거다.

 

누구나 생로병사의 운명을 피할 수가 없다. 독신인 두 사람 중 먼저 앓아누우면 내가 간병인이 되어줄 거라는 믿음조차 착각이 아닌가 했다. 서양인 친구는 착각 속에 사는 나를 통하여 동에서 떠오르는 참된 의미를 이미 깨달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 불쑥 자신 앞에 남겨진 모든 것들을 나의 이름 앞으로 꼼꼼하게 해 두고 누가 먼저든 간 사람 사후의 자신을 부탁한다고 했다.

 

에덴의 동쪽인 나는 서쪽 친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우정의 진실이란 동양이든 서양이든 불변의 진실이다. 그 친구는 침묵으로 진실을 지어낸 철학자이다. 친구가 동쪽의 진리를 찾아 나서는 동안 왜 나는 서쪽을 고집하며 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걸까. 후회하면서 온기를 뒤돌아보니 너무도 멀리 왔다.

 

그 길에서 친구는 떠나지 않고 나를 기다려 주었다. 친구의 가슴에는 늘 진심의 서풍이 불어온다. 하늘을 가득 채운 서풍이 불어오면 밖으로 나가 바람결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러 오는 친구의 서풍이 가슴에 다가온다.


 

[문경구]

미주한인크리스찬문학협회공모 수필당선

문경구 kimurgin@hotmail.com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1.04 10:39 수정 2021.01.04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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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