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연강의 인문으로 바라보는 세상] 문학과 훈장과 아우라

신연강


이번 겨울을 모처럼 겨울답게 느꼈다. 며칠 동안 영하 20도 안팎의 날들을 보내면서 자연스레 군 복무 시절의 혹한을 떠올리게 되었다. 젊은 시절 한번은 경험할 일이라서 일부러 눈이 많이 오는 추운 전방지역에 근무를 자원했다. 겨울이면 거대한 산맥을 넘어오는 강풍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떠밀어가고, 체감온도 영하 30도를 자주 오르내리는 외딴 기지였다. 한번은 혹한과 폭설로 부대로 들어오는 전력이 차단된 적이 있었다. 그 바람에 3일 동안을 눈 속에 고립되었고, 세면과 양치를 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치기도 했다. 어느 날 사령부로부터 사령관이 부대시찰을 올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점심을 먹고 작전벙커를 향해 언덕을 오르던 중, 마침 헬기에서 내려 본부를 향하던 장군 일행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멀리서 반짝이던 별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온 상황. 위관장교로 후배들을 인솔해가던 중에 자신도 모르게 일등병처럼 관등성명을 대고 경례를 해서 예를 표했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장군으로부터, “추운 날씨에 고생이 많다.”라는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장군의 일성은 추운 곳에서 고생이 많습니다. 잘 부탁합니다.”라는 감사와 격려의 말이었다. 그 느낌은 그 후로 오랫동안 뇌리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전역을 한 뒤 수년이 지난 어느 시점에 방송에서 장군의 참모총장 임명 소식을 접하게 됐다.

 

참 군인이란 그런 것이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일로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게 된다. 인품과 그릇의 크기를 알 수 없기에, 형식적으로나마 사회적 예를 갖추다 보면 그중엔 자신을 무슨 에베레스트나 태평양 바다쯤으로 생각하는 어처구니없는 인사들을 보게 된다. 군 복무 시절, 계급장을 다 떼고 땀 범벅이 되어 함성을 지르던 유격훈련장에 나이든 인사가 갑자기 뛰어들어서 헐떡였다. 체력 면에서 그야말로 저질 체력이라 할 그런 모습에도, 잠시 짬이 나면 그는 자신의 계급을 들먹이고 훈장을 운운했다. 그런 자들일수록 알고 보면 자질과 인격은 형편없고, 병사들은 안중에 없으면서 돌아가면 집 담장이나 고치고 마당 쓸 생각이나 하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런 인사들을 병사들은 우스갯소리로 똥 장군이라 불렀었다.

 

군 생활과는 다르겠으나, 사회 일각에서 비슷한 양상을 발견하기도 한다. 첨단과학의 시대에 살다 보니 사회변화가 몰라보게 빠르다. 이런 변화의 속도는 문학과도 무관치 않다. 그 속도는 우리가 글을 쓰는 시대의 속도를 반영하는 것. 이 얘기는 결국 소설이 겪는 위기를 말함과 동시에, 시와 에세이가 추구할 방향과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현대인은 너무도 숨 가쁘게 살아간다. 질풍노도의 낮을 보내고, 저녁엔 위로가 필요하다. 빌딩이 산처럼 솟은 콘크리트 계곡에서 별은 화려한 네온사인에 묻혀 빛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수많은 (복잡다단한) 삶의 파고로 인해 저 하늘의 별이 인간존재를 인도하고, 소설이 흐트러진 사회를 재건하는데 이바지하리라던 희망은 사라진 지 오래다.

 

현대인은 너무 바빠서 소설을 읽을 시간이 없고, 소설이 영상과 소셜미디어에 독자를 뺏긴 지도 오래되었다. 반면, 시는 비교적 짧다는 점에서 독자를 붙잡을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시는 너무도 개별적이고 난해해 소수만의 유희로 전락함으로써 시인이 자신을 유폐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시의 깊이가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된다. 이는 상상력 없이는 해독이 불가한 현대시의 난해함 때문이며, 다양하고 개성적(천차만별)인 시가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 시가 더는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현대시는 비록 외형은 간단하지만 절대 단순하지 않은 점, 그리고 해독(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많은 작가가 산문(에세이)집을 내고 있다. 그들은 본령이 아닌 부업의 영역에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다. 무엇이 독자로 하여금 소설가의 산문을 들여다보게 하는가. 산문의 장점은, 깊이는 소설에 못 미치나 현실(시류)을 잘 반영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도 산문은 원하는 즉시로 시류를 반영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독자들의 즉각적 반응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 큰 강점이다. 그런 점에서 에세이로 대표되는 인문학 글쓰기야말로 현실을 가장 잘 반영하고 독자와의 소통을 확장함으로써,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내포하고 기대를 할 수 있는 장르이다.

 

산문의 본령에 몸담은 한 사람으로서, 매력 있는 작가의 좋은 글은 항상 가슴을 울린다는 것을 안다. 루키의말보로맨의 고독이란 에세이를 읽다보니, 일본 오모테산도와 아오야마 길의 사거리에 있는 커다란 간판 얘기가 나온다. 그곳 한 빌딩 옥상에 있는 말보로맨 간판은 앞면은 말안장을 짊어지고 담배를 물고 있는 카우보이지만, 뒷면은 나무 기둥으로 세운 판자때기 간판이다. 이 간판의 뒷면은 앞면과는 달리 그저 판자를 잇댄 널빤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루키는 말한다. 뒤쪽을 지탱하려면 긴 받침대가 필요하고, 거친 판자 면은 사진을 부착할 수 없는 그야말로 투박한 판자때기이다. 그런데, 이런 뒷면이 그냥 그 자체로 거친 들판의 말보로맨 이미지와 딱 들어맞는 것이 하루키의 평이다. 그에 의하면 뉴욕에서 필라델피아를 향해 가는 길에 말보로맨 간판이 보인다고 한다.

 

하루키는 필라델피아에서 북상하면서 그 세움 간판을 유심히 지켜본 것 같다. 말보로맨은 거미 같은 이상한 형태의 판자 울타리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간판의 뒷면)이 말보로맨의 제2의 자아라는 것을 느끼면서, 왠지 그것을 보면 가슴이 설레었다고 하루키는 고백한다. 소박하고 포장하지 않은 그대로의 투박한 삶의 이면이 더욱 편하고 살갑게 느껴진 것이다. 그런 그의 글을 읽고 나서, 말보로맨을 생각하면 왠지 석양 속에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노을 속에 휘파람을 불며 의기양양한 모습이라면 어떻게 비칠까. 노을은 노을답게 운치해야 하고, 그 속에 말하고 싶은 것도 말하지 않는 비움과 넘어섬이 있어야 진정성 있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한 손으로 방 문고리를 꼭 잡고 상상력이 다 빠진 다른 손으로는 글을 써간다면, 그것은 취미이고 아마추어리즘일 뿐이다. 말보로맨으로 인해 우리에겐 안쓰러운 불편한 상상력이 작동한다. 채워지지 않는, 애달픈, 담배 연기처럼 사라지는. 빈 들판 위에 허허한 모습으로 조금은 외롭게 서 있는 말보로맨. 그 모습 속에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어떤, 아우라가 맴돈다.



 


[신연강]

인문학 작가

문학 박사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1.27 11:55 수정 2021.01.27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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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