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는 로스엔젤스에 사는 둘째 딸 집에 가서 지내고 왔습니다. 두 살, 다섯 살의 손자 둘이 있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를 잘 따라주어서 재미를 톡톡히 보고 왔습니다. 둘째 놈에게는 새 장난감이 거의 없고 형이 쓰던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첫째보다 둘째는 주위의 관심을 적게 받고 자라기가 쉽나 봅니다. 특히 큰 애가 학교에서 공부를 더 잘하거나 특기가 뛰어나거나 하면 둘째는 더욱 움츠려지게 마련이죠.
우리 부부가 딸 둘을 키울 때도 그런 경향이 없지는 않았나 봅니다. 우리는 공평하게 자녀들을 대했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본인, 특히 둘째 딸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저는 장남인 관계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어머니는 아이들과 항상 같이 계셔서 좀 더 자세히 관찰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는 언니보다 조금 못한 둘째 손녀에게 더 관심을 쏟으셨고 역성을 들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자란 둘째 딸이 제 둘째 아들에게도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며 이게 세상 이치로구나 느끼며 혼자 미소를 지었습니다. 하루는 안방에 들어가 벽에 걸린 사진을 둘러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중 옛날 사진 하나가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노는 자기(둘째 딸) 어렸을 때의 사진인데 예쁜 프레임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나의 어머니가 손녀와 즐겁게 노시는 모습을 보니 울컥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필라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쓴 글을 찾아보았습니다. 벌써 16년이 지났지만, 이 글로 인해 그 당시의 일들이 생생히 떠 올랐습니다.
생명 승계(承繼)의 원리
어머니가 돌아 가신지 벌써 다섯 달째 접어들었다. 상(喪)을 치르고 나서 나의 삶은 이상하게 그 전 같지가 않다. 어느 친구의 말처럼 길을 걸어 다닐 때면 빈 항아리가 거꾸로 서서 가는 것 같이 허허하고, 잠자리에 누우면 뿌리가 뽑힌 커다란 나무처럼 참담해지기도 한다.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하고 길 가다가도 어머니 비슷한 노인의 뒷모습만 보아도 눈물이 핑 돈다.
어느 때는 이 지구 자체가 가벼워진 느낌이 들기도 하고 땅이 금방 꺼질 것처럼 푹석푹석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어머니는 생전에 골다공증으로 십수 년을 앓으셨는데 매년 눈에 띄게 체구가 작아지고 몸무게도 가벼워졌다. 마지막 3년 자리를 보전하고 누우시더니 나중에는 열 살 정도 아이의 키와 체중으로 줄었고 언제나 통증과 변비에 시달리셨다.
어쩌다 내가 시간을 내어 어머니와 같이 있으려 하면 ‘나는 괜찮으니 어서 가서 네 할 일이나 해’ 하시며 손사래 질로 나를 내보내시곤 했다.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장기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위 사람들이 충고해 주었기에 나는 비교적 느긋하게 어머니의 임종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어머니는 다섯 시간여의 혼수상태 후 돌아가셨다. 식구들에 둘러싸여 마지막 숨을 몰아쉬실 때 나는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어머니의 발을 감싸 잡았다. 오랜 병고에 시달린 까슬까슬한 조그만 발이 내 손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 체온을 잃어가고 있었다. 창졸간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너무나 아쉽게 어머니는 가셨다. 진작 이럴 줄 알았으면 억지로라도 좀 더 시간을 내어 함께 지냈어야 하는 건데 하는 죄스러움과 안타까움이 젖은 나뭇등걸에서 나는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숨을 거두시고 나자 슬플 수 있는 것도 잠깐, 해야할 일들과 제반 절차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이 일과 저 일,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도 눈물은 주책없이 흘러 머리를 혼란 시켰다. 집에 빈소를 차리고 손님 조문을 받고 이것저것 준비하며 사흘을 정신없이 보냈다. 서울에 살고 있는 큰딸 꽃님이가 아들 재율이와 함께 날아왔고, 워싱턴에서 일하는 둘째 딸 소라도 도착했다.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두 손녀는 유난히도 슬피 울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두 살의 손자 재율이는 엄마가 우는 것을 이상한 듯이 쳐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엄마 다리를 붙잡고 저도 앙앙 울음을 터트린다.
뷰잉(Viewing) 때 관 속에 누워계신 어머니의 얼굴은 평안하셨다. 지긋지긋한 누런 병색도 보이지 않았고 평소의 인자하심이 온몸을 감돌았다. 뷰잉 예배를 마치고 모두들 묵묵히 집으로 돌아왔다. 조용한 저녁 식사 후 나는 먼저 이층 내 방으로 향했다. 층계 끝, 내 방으로 가려면 어머니 방을 지나야 한다. 이사 온 이후 줄곧 10여 년간 쓰시던 방이다. 생전에 늘 그랬던 것처럼 나는 무심히 방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고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스위치를 올리니 머리맡 전구가 예전과 같이 빛을 내며 방을 밝혀 주었다. 침대 머리맡의 성경, 탁자 위에 놓인 한국말 라디오,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 벽에 걸린 교회 달력, 디지털 시계, 장롱 등등 모든 것은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그때처럼 이불 속으로 손을 넣어 보았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이불 속은 차갑기만 했다. ‘어머니’하고 조용히 불러 보니 대답 대신 주루룩 눈물이 흐른다. 얼굴을 닦으며 나는 방을 나왔다.
다음 날 새벽, 나는 일찍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길에 다시 어머니 방문 앞에 서서 문고리를 돌렸다. 이젠 습관이 되었나 보다. 차가운 문고리가 손에 닿자 엊저녁에 느꼈던 그 허전함이 다시 가슴을 메인다. 그러나 문을 여는 순간 냉기 대신 무언가 따뜻함이 얼굴에 느껴졌다.
‘어?’ 의아한 마음으로 어머니 침대로 눈길을 돌렸다. 당연히 비어 있어야 할 그 침대에 누가 누워서 콜콜 잠을 자고 있었다. 서울에서 엄마와 같이 온 손자 재율이 녀석이다. 밤새 같이 잤던 엄마는 벌써 일어나 부엌에 내려갔고 재율이만 혼자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창 커튼을 통해 들어오는 간접 광선은 곤히 잠든 재율이의 얼굴을 비추며 싱싱한 생명의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 빛은 머리맡 어머니의 성경 표지에도 떨어져 닳아빠진 표지 금박 글씨 위에서 희미하게 어른거리고 디지털 시계는 부지런히 시간의 변화를 숫자로 바꾸고 있었다.
이 방 모든 물건들이 침대에서 잠자고 있는 새 생명인 재율이를 중심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활력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한 폭의 북유럽 그림 앞에 서 있듯 나는 그 자리에 조용히 서서 이 빛이 벌이는 축제를 바라보았다. 이 장면을 기억에 깊이 새겨두고 싶어 눈을 감았다. 마음의 문이 열리고 빛은 내 가슴 속으로 흘러 들오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가 이 침대에 누워계신 모습이 보인다. 평소의 그 정다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어머니의 모습은 점점 자꾸 멀어지며 흐려져 가고 있었다. 마치 영화가 끝나고 불이 들어오는 순간의 영상처럼.
나는 눈을 떴다. 아직도 창으로 들어오는 그 빛은 재율이의 발그스름한 뺨 위에서 춤을 추며 무언가 나에게 손짓하는 것 같았다. 아,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생명승계(生命承繼)라는 것이로구나. 성경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바로 이런 원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창가로 가서 커튼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어머니가 즐겨 가꾸시던 조그만 텃밭이 눈에 들어왔다. 누워계셨던 지난 3년 동안 그대로 방치해 두었더니 지금은 잡초밭으로 변해 몰골이 사나워졌다. 방책, 철망들도 제멋대로 쓰러지고 넘어져 있었다. 많은 노인들이 그렇듯이 어머니도 밭에서 손수 재배하신 채소를 식탁에 올리는 일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다. 이사 오자마자 어머니는 마당 구석 양지바른 곳에 채소밭을 가꾸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 드리기로 작정하고 농기구 가게에 가서 부삽 곡괭이 등 여러가지 연장들을 구입했다. 어머니는 교회 친구분들에게 조언을 들으며 각종 씨앗을 얻어 오셔서 나를 시켜 심게 하셨다. 항상 조용하신 어머니가 밭에서 일하실 때는 양반이 머슴부리듯 그렇게 아들에게 명령을 하신다. 목소리도 힘차셨다.
문제는 나였다. 서울 태생인 나는 집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벽에 그림 액자를 걸 못이나 치고 전구를 갈아 끼우는 정도였다. 어머니의 명령대로 척척 밭일을 할 수가 없었다. 핀잔도 많이 받았지만 그건 저 푸른 하늘의 구름만큼이나 행복한 꾸중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밭의 모양이 그런대로 이루어지고 몇 가지 채소 씨가 종류대로 심어졌다. 얼마 있으니 신기하게도 파란 싹이 고개를 내미니 물 주고 피 뽑아내는 일이 조금씩 재미있어진다. 그다음은 야생 동물들과의 싸움이다. 방책을 세우고 철망을 치는 일은 더 힘들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어머니와 나는 참으로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냈다. 창문으로 밭을 내려다보며 그때를 회상하던 나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년 봄에 서울에 갔던 큰 딸네 식구들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고 했으니 그 애들과 텃밭 복구 사업을 해야겠다. 일하는 중 아내가 쥬스라도 가져오면 잠시 땀을 닦으며 아이들에게 할머니 이야기를 해 주어야겠다.
그 애들과 같이 일할 생각을 하니 가슴 속에 잔잔한 희망이 솟는다. 이렇게 해서 부모를 잃은 슬픔은 자식들을 바라보며 위로를 받고 다시 이 아이들 속에 나를 심으며 살아가게 되나 보다.
[정홍택]
서울대학교 졸업
KOCHAM(Korea Chamber of Commerce in U.S.A.) 회장
MoreBank 초대 이사장
Philadelphia 한인문인협회 창설 및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