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돌아와요 부산항에

조총련 고국방문단도 울고, 갈매기도 울고

황선우·황선우·조용필

<돌아와요 부산항에> 노래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에 의한 조총련 모국방문과 맞물린 곡이다. 1974815일 제29차 광복절 기념식 날, 북한의 지령을 받은 문세광(1951~1974. 일본 오사카 출생) 장충동 국립해오름극장에 신분을 위장하고 잠입한다. 그는 휴대용 도시락 속에 권총을 숨겨 들어와서 박정희 대통령을 향하여 권총을 발사한다. 이로 인하여 대통령은 죽음을 면하였지만,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그날 국군 서울지구병원에서 고인이 된다. 이때,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다라는 보복공격의 결기가 융기(隆起)하였지만, 대통령은 조총련에게 모국방문의 빗장을 열어주는 대승적 조치를 한다. 북한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한 모국(대한민국)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에 따라 1975913, 추석고향방문단 698명이 2주일 일정으로 부산항 제1부두로 입항을 한다. 이때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울려 퍼진다.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가고파 목이 메어 부르던 이 거리는/ 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날의 꿈이었지/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도/ 부딪쳐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았었지/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가사 전문)

 

이 노래 원곡은 1970년 황선우가 작사 작곡하고 가수 김해일(본명 김성술)이 불렀던 <돌아와요 충무항에>이다. 안타깝게도 김성술은 이듬 해 대연각 호텔 화재(1971.12.25 서울 중구 충무로 대연각 호텔에서 일어난 화재사고. 사망 163, 부상 63)로 사망하고 노래만 남았었다. 이것이 1972<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제목이 고쳐져서 조용필에게 넘겨졌었다. 이것을 1975년 조총련 모국방문단에 맞추어 가사를 개사한다. 이별한 연인을 그리워하는 부분을, 헤어진 혈육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감성 포인터를 맞추었다. 모국방문단이 들어오던 날, 부산항에는 이 노래가 정식으로 음반 취입을 하기도 전에 울려 퍼졌고, 부산항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부모 형제도 울고 갈매기도 울었다. 그들은 포항·울산·창원·구로공단·부천 등지를 둘러보면서 모국 대한민국의 발전상에 놀랐고, 자신들의 애환을 담은 <돌아와요 부산항에> 노래에 울었다. 가고파 목이 메어 부르던 고국의 거리는, 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날의 꿈을 깨웠다. 노래는 경부선을 타고 서울을 강타하고 전국을 태풍 속에 몰아넣는다. 노래가 음반으로 나오기 전에 인기를 먼저 얻은 것, 1978년 대학가요제의 여신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도 음반발매보다 인기가 앞서갔던 노래다. 26세 조용필은 이 노래로 인기의 날개를 달았다. 음반은 이듬해인 1976년에 발매된다. 안치행 편곡집, 서라벌레코드 음반 앨범번호 K-8015.

 

재일교포들의 모국방문은 북한으로 간 것이 대한민국 보다 훨씬 이전이다. 19591214, 재일본 조총련 교포들이 눈물의 북송선 만경봉호를 타고 북한으로 간 것이 시작이다. 그들은 2006년 북한이 대륙간탄도탄미사일을 시험 발사를 할 때까지, 무려 300여 회 9만여 명이 그 배를 타고 북한으로 갔다. 일본 서해안 니가타항에서 북한 동해안 청진항으로. 그 첫 출항 후 16년이 지난 1975913, 조총련 698명이 추석성묘단으로 대한민국의 부산항에 발을 들려 놓았던 것이다. 이즈음에 문주란이 부른 노래가 <눈물의 북송선>이다.

 

https://youtu.be/sfOhQkdexro

 

<돌아와요 부산항에> 작사 작곡가는 부산 영도 출신 황선우다. 그는 이 노래를 지을 때, 해운대·달맞이 고개·청사포·동백섬·태종대를 같이 거닐며 사랑을 나누다가 아버지의 근무지 이전(해양연구소)으로 목포로 이사를 간 첫사랑 연인을 그리워하며 만들었단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구절의 원곡가사는 내 님이여였다. 황선우가 1969년에 처음 만들었을 때 제목은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다. 황선우는 이곡을 통영 출신 김해일(본명 김성술)과 음반 작업을 같이했다. 이때 김해일이 통영과 관련된 노래를 부르면 통영시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 제목을 <돌아와요 충무항에>라고 바꾼다. 오늘날의 통영은 그 당시 충무시였다. 김해일이 이 곡에 가사를 붙여 197012월에 불렀다. 이후 김해일은 군대 입대를 했고, 1971년 휴가를 나왔다가 대연각 호텔 화재로 사망하고 말았다. 1972년 황선우는 이 곡을 김트리오 멤버였던 조용필에게 줬다. 제목을 <돌아와요 부산항에>라고 다시 바꾸고 가사도 개사하였지만, 이때도 곡은 크게 히트하지는 못했었다. 이 버전은 일명 <돌아와요 해운대에>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2절에 해운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76년 조용필이 다시 이 곡을 빠른 템포로 편곡한다.

 

이 노래 발표 이전 조용필은 부산의 밤무대 무명가수 생활을 했고, 당시 매니저는 국가대표 축구선수 출신 이회택, 그가 안타기획 안치행에게 조용필 음반을 부탁했다. 이때 안치행은 킹레코드에 트로트와 록을 섞은 일명 <록뽕>으로 편곡한 멜로디를 제안했다. 이때 박성배 사장은 일본 스타일이라며 이의를 달았단다. 하지만 안치행은 박성배와 협의하여 음반을 냈단다. 이것이 100만 장 판매 신화를 낳는다. 1964년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에 이은 100만 장 판매음반이다.

 

부산항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개항된 항으로 설명하지만, 조선 태종 714077월에 이곳을 출입하는 일본 선박들의 관리를 위하여 경상도 병마절제사가 신분증을 발급하면서 부산포와 염포(울산)로 개항하였다. 따라서 부산항은 6백 년 역사의 항구이며, 1592413일 일본군이 700여 척의 배로 공격해옴으로 임진왜란이 시작된 곳이다.

 

조용필은 1950년 화성에서 출생하여 1968년 경동고를 졸업하고 웨스턴컨트리그룹을 조직하여 주한미군부대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그 후 조용필은 이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스타덤에 올랐으나, 대마초사건(1975.12.3.)에 연루되어 활동을 중단하였다가 1979년 스물아홉 살에 <창밖의 여자>로 복귀하여 2020년대까지 한국대중가요의 살아 있는 황제로 우뚝하다.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했던 문세광은 1951년 일본 오사카 출생이다. 그는 이 사건 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서대문 서울구치소에서 197412월 교수형으로 22세의 생을 마감했다. 그는 재일본 한국인으로, 일본식 이름은 난조 세이코였다. 그의 아버지는 오사카시에서 석면제품 제조업자였고, 문세광은 세이키 상고 2학년을 중퇴하였고, 고등학교 시절에 김일성 선집·마오쩌둥 어록 등을 탐독하면서 좌익사상을 접했었단다. 그는 1973년 조총련 정치부장 김호룡으로부터 지령을 받았으며, 공작금 50만 엔을 받았었단다. 문세광은 19745월에는 오사카에 정박 중이던 만경봉호에서 사상 교육을 받았다. 유행가는 역사다. 트로트 열풍시대, 재미와 흥미를 넘어 의미를 더할 수 있는 노래가 창작되고 국민적으로 열창되어서, 유행가로 코스미안을 지향해 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유차영]

시인, 수필가

문화예술교육사

트로트스토리연구원장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3.02 14:34 수정 2021.03.02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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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