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필의 인문학 여행] 천혜의 요새 북한산성

숙종은 왜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을 완성했나

김용필

 

북한산성은 전투와 피난 성곽으로 천혜의 요새이다. 세계 어딜 가도 이만한 전투 성각은 없을 것이다. 물론 도성이 함락되면 이동하는 행궁을 목적으로 지었으나 천혜의 지형에 완벽한 행궁과 전투를 양행하는 성곽은 없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병자호란 때 북한산성으로 피신했더라면 국왕이 얼음 땅에 머리를 박는 삼전도 치욕은 없었을 것이다. 10만 대군이 몰려오는데 벌판으로 피신을 하였을까? 고백컨데 신료들이 북한산으로 피신하는 것이 힘들어서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한양도성 밖에 북서쪽으로 2개의 외성이 있다. 탕춘대성과 북한산성이다. 두성 다 한양성이 위태로울 때 행궁으로 지은 성곽인데 숙종이 사활을 걸고 완성 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병자호란의 치욕적인 수모를 통탄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북한산성은 행궁으로 지었고 탕춘대성은 임시 피난처로 지었는데 역병을 격리하는 피신성이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망국의 수치를 당했다.

 

북한산성으로 피신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천추의 한이로다.’ 숙종이 울고 있었다. 어리석은 신하들이 왕을 죽였어. 10만의 청나라 기병이 휩쓸고 오는데 별것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고 강화도로 가려고 했는데 미적거리는 바람에 피신할 시기를 잃었고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을 놓고 논의 끝에 등정이 쉬운 남한산성으로 결정했다는 어리석은 주화파들이 농간이었다.

 

강화도 피신이 늦었다니 어디로 간단 말이오?”

인조 왕이 안절부절못하였다.

북한산성으로 가야 합니다.”

척화파들이 말했다.

북한산성은 임금이 피신할 수 없는 암산입니다. 그리고 행궁도 없고요. 남한의 산성이 안전할 것입니다.”

주화파들은 이미 행로를 결정하였다. 강화도는 이미 길이 막혔고 북한의 산성은 길이 험하여 임금이 오를 수 없고 결국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했다. 남한산성에서 45일을 버티었으나 삼전도에서 추운 겨울날 인조 왕은 얼음 땅에 3번 엎으러 절하고 항복의 하였다. 처참한 국치였다. 북한산성으로 갔더라면 기병 군단이 청군이 산을 오를 수 없어서 달라졌을 것이다.

그 후 임진란. 병자호란의 수모를 안 숙종은 결심하였다. 북한산에 완벽하게 요새화된 행궁을 만들자. 북한산은 지형 자체가 요새였다. 고산과 암벽 사이에 성을 쌓으면 철벽의 행궁이 되는 것이었다. 원래 북한산성은 백제 건국 때부터 행궁 보류였고 효종은 중흥사에서 북벌군을 훈련하여 청을 치려고 했던 것이다.

 

. 북한산성 축성의 역사

 

한성백제, 132년에 처음 성곽을 축성하다. 346년 근초고왕의 북정군을 훈련하였고 475년 개로왕이 장수왕과 격전을 벌이다가 죽은 곳이며 553년 신라 진흥왕이 백제군을 정벌하고 북한산 순수비를 세웠으며 603년 고구려 영양왕이 신라의 진평왕을 승복시킨 곳이고 1232년 고려 고종과 몽골군이 치열하게 싸워 전승한 곳이며 1387년 고려 우왕이 산성을 재축성하여 이성계와 대립 하였고 1659년 효종이 북벌군 양성하면서 송시열이 쌓았다. 1704-1711(6년 완성) 숙종이 성을 쌓고 행궁을 지어 요새화하였다.

 

. 북한산성 구조

 

북한산성은 의상봉. 보현봉. 노적봉. 만경봉. 백운봉. 원효봉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이다. 이 산과 산 사이의 험악한 암벽에 성을 쌓아 성안에 행궁과 어영청 등 병사기지와 12개의 사찰을 두었다. 산성곽엔 11개 문과 3개의 암문을 두고 철저한 경계를 강화하였다. 11 성문은 대성문. 보국문. 대동문. 용암문. 위문. 용암문. 위문. 북문, 서암문. 대서문. 중성문이고 3 암문은 가사당암문, 보왕당암문. 청수당암문이다. 정문은 궁에서 창의문을 지나 형제봉길을 오르는 대성문이다. 그리고 성안의 행궁엔 한양성의 6부 행정 입법 사법기관을 두었고 12개 절과 암자는 외부로 보기엔 절이지만 당시 성을 지키는 병사의 숙소였다.

 

효종은 이곳 성안에서 10만 대군을 양성하였고 12개 암자는 병사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성안의 중심 사령부는 중흥사였다. 그리고 중성문이 뜬금없이 대서문을 지나 중앙에 방패막이로 섰는데 이유가 있었다. 의상봉 끝자락에 대서문이 있고 원효봉 끝자락에 죽은 시신을 효자동으로 실어나르는 시구문 (수암문)이 있는데 이곳이 지형이 너무 낮아서 외침방어의 사각지대였다. 그래서 대서문을 지나 한참 올라가서 중성문 성벽을 가로막아 이중 방어가 가능하게 설계하였다. 북한산성은 전투성곽으로 지어서 작전이 용이하게 설계된 요새이며 행궁이었다.

 

.북한산성을 축성한 사람들(북한지 기록)

 

1745년 북한산성 축성을 기록한 북한지를 보면 숙종 때 승려 성능 장군(8도 도총섭)의 감독하에 승려와 병사들, 그리고 전국 8도에서 동원된 부역꾼들이 구역을 나누어 6년 동안 축성하였다. 성능(1703-8도도총섭 八道都摠攝)이 완성하고 서윤(8도도총섭)이 완벽하게 관리하여 숙종에게 바쳤다. 당시 북한산성 축성에 총 30만 명이 동원되었고 5만 명의 병사와 승려 1만 명이 동원되었던 대역사였다. 그리고 5,000명의 병사가 항상 주둔하였다. 그런데 경복궁이 불타던 날 이곳 행궁과 사찰. 중흥사가 모두 불타버렸다. 일본군의 짓이었다.

 

탕춘대성은 왜 세웠나?

 

1718년 숙종은 신완 장군에게 일러 탕춘대성을 짓게 하였다. 한양성이 무너지면 북한산성으로 가는 길목에 탕춘대성을 이용할 목적이었다. 그러니까 탕춘대성이 무너지면 북한산성으로 갈 양이었다. 그러나 탕춘대성을 짓는 진짜 이유는 역병 환자를 구휼하는 격리 성이었다.

 

숙종이 정실부인을 역병으로 잃고 탕춘대성을 1년 만에 짓게 하였다. 숙종은 아버지 현종 때 일어난 경신대기근의 가뭄과 전염병으로 500만 조선인 중에 120만이 죽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숙종 당대에 1695을병대기근이 일어났다. 이때 천연두 전염병이 창궐하여 많은 백성이 죽었고 굶주린 백성은 한양으로 모여들었다. 숙종은 이들 환자를 탕춘대성으로 격리시켜 구휼소를 짖고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바로 선혜청과 평장이었다.

 

숙종의 북한산성 행차길

 

6년에 걸친 대역사였다. 탕춘대성 북한산성을 완성하고 숙종은 크게 환호하며. 아들 연잉군(영조)를 데리고 북한산성 축성 행사 길에 올랐다. 북한산성 행로는 경복궁을 나와 창의문에서 백악산을 둘러 백사실을 지나 형제봉에서 대성문으로 가서 행궁으로 가는 정행로인데 임금이 산행이 힘들어 고양 땅으로 돌아 대서문에서 시작하여 중성문 중흥사를 지나 행궁으로 가는 기마를 탔다.

 

아바마마, 어떻게 이런 험한 암산에 행궁을 지었는지요?” 영조가 물었다.

이곳은 완벽한 요새다. 그 어떤 적도 이곳은 오르지 못할 것이다.”

국가 위급 시에 쓰는 행궁이란 말이죠. 행궁이라면 남한산성이 있지 않은가요?”

남한산성. 요새가 아니란다. 어떻게 벌판으로 피신을 한단 말이냐?“

 

숙종은 남한산성의 비사를 이야기하였다. 할아버지 효종은 삼전도의 비극을 마음에 새겨 북벌을 계획하였다. 그래서 북한산성에서 북정군 사령부를 짓고 병사를 훈련하였으나 효종의 의문의 죽임을 당해 북벌은 실패하고 말았다. 숙종은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북벌을 계획하면서 북한산성에 완벽한 행궁을 지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유

 

임진왜란 중에도 명나라는 후금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미 명나라는 기울고 있었다. 기세를 잡은 후금의 누르하치는 선조왕에게 병사를 보내 일본군을 막겠다고 했으나 왕과 관료들이 반대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세자로 있을 때 명나라가 조선을 돕는 것은 형식적인 예의에 불가하다는 것을 알았다. 오히려 일본과 계략하여 조선을 양분하여 일본과 나눠 먹기 작전을 폈던것이다. 아무튼, 임진왜란이 끝나고 광해군이 왕으로 등극하면서 친명과 친청의 다중 외교를 펼쳤다. 후금의 태조 누르하치는 광해왕에게 조선을 형제국으로 섬기고 조선을 치지 않겠다는 약조를 하였다.

 

그런데 친명파들은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를 배반할 수 없다며 기우는 명나라를 섬기며 청을 외면했다. 광해와 누르하치는 서로 불가침 조약으로 형제 의를 맺었는데 인조가 이를 파기하고 명나라 편을 들어 후금을 무시하였다. 누르하치가 죽고 청태종이 등극하면서 광해군과 아버지 약속을 어긴 조선에 항의했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숙청하는 우를 범하였다. 청태종이 화가 나서 직접 병사를 동원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조선을 친 이유는 인조가 광해군을 숙청한 것을 분개하여 일어난 일이다. 당시 관료들은 국제정세의 흐름을 너무 몰랐다. 이렇게 북한산성은 역사적으로 외침에 대비한 보류이며 요새이고 행궁으로 지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둔다.

 

* 참고 :가장 존경받는 조선의 왕은 세종, 성종, 광해. 숙종. 정조이고 가장 최악의 왕은 연산군. 인조. 선조다.


 

[김용필]

KBS 교육방송극작가

한국소설가협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마포 지부 회장

문공부 우수도서선정(화엄경)

한국소설작가상(대하소설-연해주 전5)

김용필 danmoon@hanmail.net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3.13 09:49 수정 2021.03.13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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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