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구 칼럼] 마음의 깃 한단 접어 올리기

문경구

 

오늘 차량등록국에서 볼일을 보던 중 한 직원으로부터 받은 불친절함이 종일 머리끝에 서 있었다. 해당 창구에 가서 불만 신고를 남겨놓고 싶을 만큼 불쾌감으로 마음의 상처를 받았지만 나는 마음의 깃을 한 단 접어 올리면서 차분한 생각을 지어냈다.

 

무턱대고 내가 손해 본 자존심만 되돌려 받으려고 불만을 털어놓는다면 바라던 나의 분노는 다소 해소되었을지 모르지만 분명 해당 직원은 남은 시간에 대한 업무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는 상처를 받게 될 거다. 그 직원은 나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깨닫게 될 테지만 핵산처럼 번지는 마음의 번뇌로 힘들어지는 것은 결국 그 직원이 아닌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체념하자, 나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은 그가 나에게 준 상처가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낸 상처라고 마음을 먹으면서 차츰 화가 가라앉고 본래의 내 모습을 찾아갔다. 나의 참을성 있는 배려가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보이지 않는 힘을 얻게 한 것이다.

 

그것을 나는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아집을 벗어 놓는 법을 언제 배운 것일까. 잠시 서 있던 그 자리에서 찰나지만 참선의 경지를 찾아냈다. 내 욕심만 생각했었다면 나는 지금의 이 순간을 갖지 못했을 거다. 똑같이 불손한 태도를 보았을 다른 여러 사람들 속에서 나는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참선을 택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았던 것이다. 그런 나를 도와준 보살이 바로 그 담당관이라고 생각하니 무겁던 생각들이 새털처럼 가벼워 갔다.

 

모두가 욕심이다. 그 직원에 대한 나의 욕심을 놓지 못했던 미움의 시작이 먼저였었다. 잠시 머물러 사는 공간이면 충분할 것을 사람들은 무슨 욕심과 아집을 그렇게도 많이 짓고 사는 걸까. 아침 뉴스에서 또 다른 세상의 아집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한국 어느 산속에 있는 천년 사찰 하나가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 속 온갖 욕심의 아집이 불타오르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았다.

 

저마다의 집착과 욕심과 아집을 내려놓으려 찾아가는 곳을 불태워버렸으니 이제 어디로 가서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나. 대형화재라고 하면 어느 공장의 화재에서처럼 시커먼 연기를 하늘에 내뿜으며 모든 것을 앗아가는 그런 화재를 생각하지만, 이번 사찰의 화재는 그런 화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찬란한 불꽃이었다. 마지막 타는 순간까지도 어떻게 저런 맑고 영롱한 불빛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저 모습으로 승화하기 위하여 천년의 자리에서 버티고 서 있었던 세월이었는가 보다.

 

어둠 속으로 타오르는 예술적 불빛이 너무 화려했다. 붉은색 기둥이 오랜지 빛 화염과 만나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온 세상 사람들의 번뇌를 모두 태워버리는데 충분할 것 같았다. 대웅전에서 설법을 듣던 천년의 발길들이 갈구하던 온갖 욕심의 망상이 모두 허무이었다고 일러주는 불길 같았다.

 

천년의 사찰은 한순간 일개 수행승의 감당할 수 없는 분노로 다시 천년을 향해 되돌아갔다. 그렇게 아름답던 천년이 허무하게 무너져 가는 것도 참지 못하는 중생들이 빚어낸 욕심에서였을까. 그럼 욕심만 버리면 모든 인간사가 해결된다는 것을 알리려는 의미였을까. 인간의 추악한 욕심을 불살라 버리려고 내 기억 속의 아름다운 탱화가 불 속으로 승화하느라 그렇게 아름다웠던 것일까.

 

천년의 역사 속에 피어있던 연꽃무늬 문살의 빛나는 색들도 사라지고 그 자리엔 분명 허무만

남았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 수행승의 욕심이 천년의 사찰을 태워버릴 수 있었으니 이 세상에

욕심의 힘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는가 보다. 그 수행승도 그를 찾아오는 중생들에게 모두가 욕심으로부터 오는 것이니 비워내야 한다. 내려놓아야 한다. 마음을 가볍게 지녀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말해 주었을 것이다.

 

그 수행승의 설법을 들은 중생들은 다시 비워내는데 더 큰 번뇌를 안게 될 것 같다. 정작 그런 자신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발버둥 치다 대웅전 기둥을 모두 쓰러뜨리고 만 것이다. 마음을 비운다고 마음을 버린다고 하면서 더 많이 더 높이 쌓아 올린 욕심의 끝에서 결국 천년사찰은 사라지고 말았다.

 

옛말에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절이 싫은 중이 불을 지르지 않고 떠나갔다는 현명한 소리를 들었다면 천년사찰은 후대에도 찬란하게 이어졌을 것이다. 속세에 있는 중생인 우리들도 죽을 만큼의 고통도 다 참고 사는데 절집에 있는 중이 화를 참지 못했다니 참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오늘 마음에 두었던 그 직원과의 갈등을 그대로 끌어안고 있었다면 나도 그 수행승처럼 불을 지르고 말았을 거다. 마음의 지옥을 만들고 번뇌의 고통으로 많은 시간을 괴로워했을 것이다. 순간의 선택을 잘하는 것,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이 되어보는 것,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서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지혜라는 것을 깨달은 소중한 하루였다.

    

[문경구]

미주한인크리스찬문학협회공모 수필당선

문경구 kimurgin@hotmail.com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3.16 12:21 수정 2021.03.16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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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