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연대 나온 남자야”
“자랑스러운 연세인! 봉준호 동문’
“봉봉봉자로 시작한 말은 봉준호, 봉준호, 봉준호, 보옹주운호오”
일일이 셀 수도 없는 현수막이 연세대학교 입구부터 모든 교정 빌딩에서 휘날리고 있다. 최고 학문의 전당이라는 연세대학에, 동문이 만든 영화 하나가 이렇게 상아탑을 온통 덮어버리니 만일 노벨상을 받은 졸업생이 나오면 어떤 해프닝이 벌어질까? 과연 칸의 ‘황금종려상’은 대단한 賞인가보다. 온 세계가 떠들썩하다. 한국 영화 100년사에 처음이란다. 그런 영화라면 나도 정식으로 돈을 내고 극장에 가서 감상을 해야 인사가 되겠지. 연세대학과 상관없이 나도 한국인이니까.
이 영화에 대한 작품평을 수많은 전문가들이 경쟁적으로 써 대고 있는 현실에, 나같은 신출내기가 공연히 끼어들었다가는 큰코다칠 게 뻔하다. 그렇다고 조용히 있자니 좀이 쑤신다. 영화를 세 번 볼 정도로 열광했으니, 느낌이 없을 수 없잖은가. (앞으로 줄거리에 대한 스포일러가 나올 것이니 아직 영화를 안 보신 분은 여기서 덮어도 좋다.)
영화 초두에 ‘연세대 재학증명서’가 나온다. 그런데 이것은 가짜다. 기택(송강호)의 딸 ‘기정’이 컴퓨터로 조작해서 만든 위조문서다. 어찌나 정교한지 이것을 본 아버지의 감탄사가 기차다. “야, 서울대학에는 ‘문서위조과’ 같은 거 없냐?”
전반부의 전개는 ‘기우’라는 째지게 가난한 재수생이 동생 ‘기정’이 만들어준 가짜 연세대재학증을 가지고, I.T 기업 박 사장 딸의 가정교사로 취직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영어를 가르치면서 가정교사 ‘기우’와 주인집 딸은 급속히 가까워지고, 기우는 엉뚱한 신분상승의 꿈을 키운다. 여기까지 보고 나서, 나는 ‘아, 그렇고 그런 영화겠구나’, 지레짐작을 하며 나름대로 두 영화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 전에 본 <태양은 가득히>라는 영화였다. 명석하고 똑똑하지만 가난한 ‘알랭 드롱’이 이탈리아에 유학 가서 귀국하지 않는 재벌의 아들을 죽이고, 모든 서류를 위조하여 아들 행세를 한다. 영화 속 ‘드롱’의 그 바다 빛 파란 눈동자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기생충>을 보며 아들 ‘기우’를 ‘드롱’에 대입해 보았다. 하지만 ‘기우’는 ‘드롱’의 카리스마에 미치기는커녕, 그저 얍상한 연대 스타일 젊은이일 따름이다. 영화가 진전되면서 여동생 ‘기정’이가 더 ‘드롱’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다. 재치와 행동력이 남다르고 손재주, 컴퓨터를 다루는 솜씨가 능란하다. 비록 ‘미술과’ 낙방생이지만. ‘기정’의 機智로 아버지(기택)를 사장 운전수로 들이고, 아버지는 다시 속임수로 아내 ‘충숙’까지 집안 가정부로 취직시킨다. 이래 놓고 보면 <태양은 가득히>의 알랭 드롱 역할은 한 개인이 아니고 ‘기택’ 가족 전원이라고 보아야겠다. 어떻게 이 가난뱅이 가족이 재벌 집을 통째로 삼킬까’ 하는 구도를 머릿속에 그려보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나는 완전히 헛짚었다. 후반부터 또 하나의 가족(문광과 근세 부부)이 등장한다. 영화의 대결 구도가 빈부(貧富)라는 대칭구도(對稱構圖)에서 발전하여 貧者(the poor) 對 더 貧者(the poorer) 對 富者(the rich)라는 삼각구도(三角構圖)로 바뀌었다. 그뿐 아니다. 이제부터 기택 가족이 먼저 풀어야 할 문제가 ‘주인집과의 연결’이 아니라, ‘문광 가족의 제거’로 급선회한다.
만일 하층 구도의 두 가족이 힘을 합쳐 부자 가족과 대결했다면 다른 영화들과 다를 바가 없겠는데, 이 영화는 나의 예상을 비웃으며 제멋대로 나간다. 기택 가족은 지하에 있는 문광 부부를 먼저 없애야 한다고 판단했다.
여기서 어렸을 때 들은 옛이야기가 생각났다. 아주 옛날에 어떤 사람이 좋은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욕심껏 살다 죽었단다. 당연히 지옥불에 떨어졌지. 하루는 저 위에서 부처님이 내려 보다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 혹시 저 사람이 생전에 좋은 일 하나라도 한 적이 있는지 다시 조사해 보라고 명하셨다. 한 가지 좋은 일을 했다고 한다. 어느 날 거미 한 마리가 기어가는 것을 본 그는 밟아 죽이려다가 마음을 돌려 살려주었다는 보고였다. 부처님은 명하셨다. ‘거미줄을 내려 저 불쌍한 인생을 올려주어라’
거미줄이 그의 머리 위에 내려오니 얼른 잡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한참 오르다 보니 자기 밑으로 수많은 영혼들이 그 줄을 잡고 따라오고 있었다. ‘아이고, 거미줄 끊어질라’ 생각한 그는 올라갈 생각보다는 아랫사람들을 차서 떨어트리려고 버둥댔다. 이를 본 부처님은 그 줄을 위에서 몽땅 잘라버리라고 명하셨다. 영화에서 기택은 이제 신분상승의 꿈보다, 더 밑으로의 추락을 무서워하게 된 것이다.
사건은 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지기 전, 주인 가족이 야외로 피크닉을 가느라 집을 비운 날 저녁에 일어났다. ‘호랑이 없는 굴에 토끼가 선생’이라고 기택 가족은 주인집의 거실에서 유리창 밖 스펙터클한 ‘자연현상 쑈’를 비싼 주인집 양주로 반주하며 거나하게 즐기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사모님이다. 비가 너무 와 피크닉이 취소되고 이제 7분이면 집에 도착할 테니, ‘짜파구리’면을 금방 먹도록 준비하라는 전화였다. 초비상이다. 누가 누구에게 지시할 것도 없이 각자가 음식, 가구들을 척척 홱홱 7분 만에 깨끗이 정상으로 되돌렸다. 가정부 충숙만 남고 세 식구가 집 밖으로 탈출해야 하는데… 그것만 빼고.
미처 피하지 못한 기택, 기우 그리고 기정은 거실 소파 밑에 숨었다. 바로 그 소파 위에서 사장 부부는 부부관계를 맺는다. 본격 섹스에 들어가기 전 그들은 기택과 그 가족에 대한 험담을 가볍게 주고받는다. 그들에게서 풍겨나는 찌질한 가난의 냄새에 대해 악감정 없는 잡담을 나누다가 성적 흥분상태로 진입한다. 본인들이야 둘만 있는 줄 알지만, 아들딸과 같이 숨어서 꼼짝없이 듣고 있어야만 하는 家長 기택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아니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 밤이 지나고, 박 사장 아들의 생일 파티가 정원에서 손님들을 초대해 성대하게 벌어진다. 무드가 한창 무르익을 때, 부엌칼을 손에 든 근세가 마당에 들어서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는 먼저 생일케익을 들고 있는 ‘기정’에게 달려가 가슴에 칼을 꽂았다. ‘알랭 드롱’에 가장 근접했던 ‘기정’이를 말이다. 그녀는 칼 맞고 피 흘리며 죽어가면서도 쿨(Cool)했다. 쿨하기 때문에 기정은 죽어야 했다. ‘기정’의 행동, 두뇌 그리고 매너는 부잣집 맏딸이어야 어울리지, 반지하의 냄새 나는 가난에는 영 맞지 않는다. ‘드롱’이 막판에 결정적 비극을 맞듯, 그녀는 그렇게 비극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동익 사장 또한 죽어야 했다. 동익 사장은 근세의 가슴에 박힌 스테익 꼬챙이를 빼주려 했다. 그러나 근세의 몸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코를 막고 내버려 둔다. 그리고 자동차 키(key)만 주워 달아난다. 이를 본 기택은 딸의 가슴에서 빼낸 칼을 가지고 쫓아가 동익을 찌른다. 왜 기택은 딸을 죽인 근세보다 먼저 동익을 죽였을까?
그렇지, 그 냄새 때문이다. 비록 자기 딸을 죽였지만 근세의 냄새는 기택에게 동료의식을 불어 넣었던 것이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냄새는 계층을 말해주는 계급장이었다.
이 영화의 주제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첫째는 ‘자식사랑’이 아닐까? 그것도 ‘있는 자들’의 ‘일그러진 자식사랑’ 말이다. 21세기 이 시대를 ‘과잉시대’라고 정의한다면, ‘富者들의 자식 사랑’은 선을 넘어 너무 멀리 갔다.
기우가 사장 집에 가게 된 동기도 가정교사로였다. 그 집에 첫발을 디딜 때 기우는 가정부가 집 여기저기 박힌 화살 뽑는 것을 본다. 그 집 아들이 마구 쏘아댄 인디안 화살들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부잣집의 부모는 자녀들을 중심으로 팽이처럼 돌아간다. 영화 피날레도 엄마가 친구들을 불러 자기 아들 생일잔치를 하다가 벌어진 일이다. 동익 사장도 이에 질세라 아들을 위해 우스꽝스러운 인디언 깃털모자를 쓰고, 운전수에게까지 ‘근무의 연장’이라며 강제로 쓰게 한다. 어쩌면 봉준호 감독은 富者들의 빗나간 자식사랑을 흘겨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다. 영화 곳곳에 배치한 계단에 대해서이다. 사각형 구도 사장집 내부 우아한 계단, 지하실로 내려가는 좁고 어두운 시멘트 계단 등 계단이란 원래 아래층과 위층을 연결, 소통시키는 구실을 한다. 영화에는 여러 모양의 계단이 보이고 사람들이 오르내리지만, 정작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소통이 없다. ‘있는 자’와 ‘없는 자’라는 높낮이는 있지만, 위에서 밑으로의 일방통행적 명령만이 존재한다.
비(雨)도 부자 편에 선다. ‘위에 사는 자’에게는 미세먼지를 씻어주는 청량제이지만, 저 아래 ‘빈촌’에는 재앙의 폭군이 된다. 마지막으로, 사건이 법적 사회적으로 다 마무리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엄마와 아들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아들 기우는 자꾸 웃는다. 형사가 형사 같지 않다고, 의사가 의사 같지 않다고 심지어 여동생 기정의 영정 앞에서도 웃는다. “헤헤헤헤.”
그 ‘헤헤’ 속에 나는 무언가를 찾아냈다. 기우는 생각했을 것이다. ‘모든 것은 꿈이고 연극이라고, 이 엄청난 사건이 실제 나에게 일어날 수는 없어’라고. 꿈이 깨고, 연극의 막이 내리면, 부자는 값비싼 의상을 벗어 던질 테고, 지하 반지하 주민을 연기했던 사람들도 냄새나는 옷을 벗으리라. 죽었던 사람들도 부스스 일어나고, 칼 맞은 사람들도 몸에 묻은 피를 지울 것이다. 그리고 다 같이 큰 상에 둘러앉아 축배를 들 것이다. ‘이제 지상에서 우리의 연극은 끝났다.
헤헤헤헤.’
계획은 무슨 계획. 무계획이 상팔자야, 기우야.
[정홍택]
서울대학교 졸업
KOCHAM(Korea Chamber of Commerce in U.S.A.) 회장
MoreBank 초대 이사장
Philadelphia 한인문인협회 창설 및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