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가가 사랑과 이별을 아물면 히트곡이 되고, 역사를 아물면 100년 애창곡이 된다. 한국대중가요 100년에 걸친 유행가는 88만여 곡, 음반을 발표하고 활동을 한 가수는 44만여 명이다. 이들의 인기온도계의 부침(浮沈, 뜨고 가라앉음)을 이러한 맥락에서 짚으면 틀림이 없으리라. 1972년 은방울자매 목청으로 세상에 나온 <팔도항구>는 이런 맥락의 절창이다. 이 노래는 같은 해 김부자가 리메이크를 했고, 이어서 은방울자매와 김부자가 듀엣으로 열창을 했었다.
삼다도 제주에는 해당화 피니/ 비바리 가슴엔 사랑도 피네/ 노을 진 서귀포 하늘이 곱구나// 이별의 부산항구 연락선 뜨니/ 손수건 흔들며 우는 아가씨/ 정들자 이별에 가슴이 아프구나// 오동도 여수항구 동백꽃 필 때/ 맺어진 인연이 남남이 되니/ 나 혼자 쓸쓸히 진남관 찾았네// 삼천포 아가씨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님이 서울로 가니/ 한 맺힌 가슴엔 슬픔만 쌓이네// 유달산 돌아서서 굽어 보면은/ 안개 낀 삼학도 밤은 깊은데// 영산강 물결 위에 조각배 흘러가네// 잠이든 군산항구 뱃길을 따라/ 끝없이 더듬는 옛 추억 따라/ 갈매기 날개 끝에 파도만 밀려오네// 밤 깊은 인천항구 비가 내리면/ 혼자서 마시는 그 술잔 위에/ 떠나간 당신의 얼굴이 비치네.(가사 전문)
<팔도항구> 노래는 서귀포항·부산항·여수항·삼천포항·목포항·군산항·인천항 등으로 노래 속 화자가 배를 타고 돌고 도는 항구노래다. 노랫말을 지은 정두수(1937~2016)는 이 노래를 지을 때, 속편을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이미 저 하늘의 별이 되셨으니 어찌하랴. 아마도 <조선팔경가>(대한팔경)가 이 곡의 모티브가 아니었을까. 1971년 음반, A면에 <팔도 항구>, B면에 <목화꽃 고향>를 실었다.
노래는 제주도에서 출발하여 부산을 기점으로 남해안 한려수도를 돌고 돌아 전라도를 거쳐 인천항까지를 단숨에 달려간다. 만남과 이별의 항구서정을 나긋나긋하게 펼친다. 동백꽃도 피고 지고, 조각배도 흘러가는데, 중간에 진남관을 찾는다. 화들짝 정신이 번쩍 드는 곳이다.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이순신 장군이 조선 수군 1만여 명을 수련하면서, ‘남쪽에서 쳐 들어오는 왜놈 군인들을 진압’하기 위한 곳이었다. 그리고는 정두수의 고향 삼천포로 향한다. 팔도 유람선이 전라도 여수로 갔다가 잠시 뱃머리를 돌렸던 것이다. 여수 진남관(鎭南館)은 보물 제324호, 국보 제304호다. 여수시 동문로 11, 옛날 군자동에 있다. 조선시대 4백여 년 간 조선수군의 본거지였던 전라좌수영이다. 1593년 조선은 바다를 지키기 위한 수영(水營)과 육지를 지키기 위한 병영(兵營)을 나라의 요로(要路)에 설치를 했었다. 이러한 군사제도는 진관제도와 제승방략제를 거치면서 1895년경 까지 이어진다. 병영사령관의 대표자는 권율장군(1537~1599), 수영사령관의 대표자는 이순신장군(1545~1598)으로 봐도 좋을 듯하다.
진관은 조선 전기의 지방군사조직. 1457년(세조2) 중앙에 오위체제를 정비하면서 지방군사조직으로 진관체제를 정비하였다. 전국에 주진, 그 밑에 거진, 거진 산하에 작은 진을 설치한 지방군사조직이다. 주진 책임자는 각도의 병마절도사, 거진 책임자는 절제사와 첨절제사, 지방관 부윤이나 목사 및 부사가 겸직하였다. 특수 지역에는 만호(萬戶, 경비중대장)를 두었다. 각 진관은 평상시 주진의 통제를 받았으나 유사시에는 독자적인 작전권을 행사하여 한 진관이 패퇴하면 다른 진관이 방위의 공백을 메워서 싸우게 하는 연계적인 체제였다. 행정관리가 군사지휘관을 겸한 결함을 가진 제도였다. 제승방략은 유사시에 각 고을의 수령이 그 지방에 소속된 군사를 이끌고 본진을 떠나 배정된 방어지역으로 가는 분군법. 세조 때 완성된 진관체제가 전국 방위망으로 지나치게 광범위하여 실제 방어가 어려워서 개선한 제도다. 진관체제에서 정병과 수군 유지가 어려워지자, 군사가 아닌 층까지 동원하여 전쟁에 임하는 제승방략이 응급으로 실시되었다. 중종 때의 삼포왜란, 명종 때의 을묘왜변을 겪으면서 시도된 전략으로서, 후방지역에 예비군사가 없기 때문에 1차방어선이 무너지면 그 뒤는 막을 길이 없는 전법이다.
진남관은 전라좌수영의 지휘소, 훈련장 겸 사령부다. 정면에 있는 망해루는 일본제국주의 강제점령기에 철거된 것을 1991년에 재 복원한 2층 누각이다. 또한 1599년 선조 32년에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시언이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진해루 터에 세운 75칸의 객사다. 그 후 절도사 이도빈이 1664년에 개축하고 숙종 42년(1716) 94대 이여옥 수사 때 화재로 소실되고, 숙종 44년(1718) 95대 수사 이재면이 다시 건립하였다. 일본제국주의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1910년(경술년)에는 여수공립보통학교를 시초로 여수중학교와 야간상업중학원으로 사용된 바 있다. 건평 240평, 정면 15칸, 측면 5칸. 기둥 68개의 단층 목조건물이다. 유행가 속에 나라가 있고, 나라 속에 백성들의 결기가 배어 있다. <팔도항구> 노래는 동해안 속초항·묵호항·죽변항 등과 서해안 당진항·서산항을 들러지 않은 아쉬움은 있지만, 진남관(鎭南觀)이 압권이다.
은방울자매는 1962년 결성한 박애경·김향미 듀엣이다. 박애경은 1956년 <한 많은 아리랑>으로, 김향미는 1959년 백영호의 <기타의 슬픔>으로 데뷔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쇼 무대에서 콤비로 부른 노래가 좋은 반응을 얻자, 듀엣을 결성한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김시스터즈와 이시스터즈, 김치캣, 정시스터즈 등 걸 그룹이 있었으나, 트로트풍 걸 그룹은 은방울자매가 처음이었다. 1989년에 김향미 대신 오숙남이 합류했다. 이름은 은방울꽃에서 따왔다. 이 꽃은 서양에서는 ‘성모마리아 꽃’이라고 하며, 청아함의 상징이다. 아일랜드에서는 ‘요정의 놀이터였다’고 하여, ‘요정의 사닥다리’라고도 한다. 한자로는 영란화, 속칭으로는 색시꽃이라 하였다. 금사향이 부른 노래 <홍콩아가씨> 화자가 손에 들고 파는 꽃도 이 꽃이다.
박애경과 김향미는 고향이 밀양으로 같다. 이들은 1960년대 대표적인 트로트 듀엣이다. 큰방울 박애경(본명 박세말)은 부산여상 3학년 때 국제신문사가 주최한 콩쿠르에 출전해 2등을 차지했다. 당시 심사위원은 한국의 슈베르트 진주 출신 작곡가 이재호(1919~1960)였다. 이재호는 3.1독립운동이 발발한 해에 태어난 독립만세둥이다. 그해 조선의 26대 임금, 대한제국의 초대황제 고종께서 불의에 승하(1919.1.21.)하신 해다. 두 사람은 일본의 쌍둥이 자매 듀엣 고마도리에 영향을 받아 의기투합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다. 뾰족한 송곳은 어떤 호주머니 속에 넣어 감추어도 돋보일 수밖에 없다. 대중문화예술의 끼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더군다나 오늘날과 같은 합숙훈련을 통한 개성 쇄멸(刷滅)시대가 아닌, 개인의 재질이 바탕이 되던 그 시절에야 당연히 개인의 끼가 최우선 에너지였다. 재미와 흥미 위주의 트로트 열풍에 역사의 의미는 언제쯤 매달릴까.
[유차영]
시인, 수필가
문화예술교육사
트로트스토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