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열한 거리>에서 주인공 병두(조인성)는 부하들과 밥상을 앞에 놓고 ”식구(食口)란 건 말이여, 같이 밥 먹는 입구녁이여.”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식구(食口)'는 ‘밥을 같이 나눠 먹는 사람’이란 뜻이다. 서양에도 동반자 또는 친구라는 뜻을 가진 'companion'이란 단어가 있는데, 원래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하나의 빵을 나눠먹는다'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봄이 한창인 이맘때 온 식구가 봄을 가득 담은 향긋한 밥상에서 옹기종기 모여 함께 식사하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여져 나오는 미더덕 된장찌개, 쌀가루와 버무려 쪄낸 쑥버무리, 쫄깃하게 삶은 꼬막을 봄 향기 가득 품은 미나리와 버무려 만든 미나리꼬막무침까지, '식구'들과 함께하는 저녁 밥상은 매일 선물처럼 느껴졌다. 그때 그 시절의 밥상은 음식과 음식에 담긴 정을 함께 나누는 귀한 시간이었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어머니 손맛이 듬뿍 담긴 음식과 '식구'들의 정이 느껴진다.
가족은 친밀하고 따뜻한 유대로 묶어진 애정의 원천이었다. 밥상은 그 가족들을 한데 불러 모아 서로의 얘기를 꺼내놓게 하는 소통의 매개체이자 통로였다. 김이 피어오르면서 밥 짓는 냄새가 진동하는 부엌 풍경은 안락하고 여유 넘치는 가족을 나타내는 상징 같은 것이었다.
이후 산업화가 가속화되고 경제가 발전하면서 외식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했다. 이에 따라 식사 장소도 가정의 밥상에서 음식점의 테이블로 영역이 확대되었고, 밥을 함께 나눠 먹는 '식구'도 가족에서 친구, 직장동료, 선·후배 등으로 다양해졌다. 집에서 가족들과 음식을 함께 나눠먹는 문화도 음식점으로 그대로 옮겨져 왔다. 가족 구성원들의 외부 활동이 과거보다 활발해지고, '혼자 있으면 잘 안 해 먹는다'는 1인 가구의 증가와 함께 배달음식산업의 급성장이 '식구'의 의미를 급격히 변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요즘 유튜브를 비롯해 TV 예능프로그램에서는 ‘먹방’과 ‘쿡방’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시장조사업체에서 몇 년 전 세계 22개국 15세 이상 남녀 27,000명을 대상으로 요리시간을 분석한 결과,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이 집에서 요리를 해먹는 시간은 3.7시간으로 세계 최하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다 보니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는 비율은 점점 하락 추세에 있으며, 하루 1회 이상 외식하는 비율은 가파른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결국 ‘먹방’과 ‘쿡방’은 요리에 대한 한국인의 대리만족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최근의 코로나19 사태로 인류는 새로운 가치를 찾아야 하는 언택트 뉴노멀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동안 산업화 시대 경제성장과 효율성에 밀려 '요리를 잃은 음식문화'는 바야흐로 대전환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코로나 감염 때문에 외식문화가 크게 위축되는 바람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우리의 음식문화가 가정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변곡점이 만들어졌다. 온 가족이 식탁에 모여 앉아 엄마, 아빠가 직접 만든 따뜻한 음식을 즐기면서 맛을 공유하는 느린 일상의 아날로그 식사를 재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족끼리 밥을 같이 먹을 수 있는 자리를 자주 마련해 '식구'의 의미를 되살리는 것이 가족공동체 회복이다. 밥상머리 대화에서 가족 구성원 간 소통이 원활해지면서 따뜻한 가족애와 공감대가 형성될 뿐 아니라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자녀들의 인성도 살찌울 수 있다. 가족 간 식사는 단순히 음식만 먹는 영양적 행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산업화·현대화·도시화·핵가족화를 받아들이면서 우리 곁에서 사라져간 '잃어버린 밥상'. 우리 다음 세대들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시간 여행을 통해서 밥상에서 만나게 되는 자연여행, 더없이 즐거운 먹거리 여행을 추억할 수 있을까.
코로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제대로 잘 먹고 사는지 한번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