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히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입니다. 반면에 책을 읽는 데는 조금 또는 꽤 많은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굳이 시간을 내서 왜 소설을 읽느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답하기가 조금은 망설여집니다. 어떤 이는 부담 없이 읽는 재미로, 어떤 사람은 교훈을 얻을 수 있어서, 또 누군가는 심원한 주제가 있어서라고 답할지 모릅니다.
산문집 『읽다』를 펴낸 김영하 작가라면, “정신의 미로를 헤매는 기분 좋은 경험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또한,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은 “감춰진 어떤 것을 찾는 묘미 때문”이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파묵은 “소설에는 우리가 그 존재를 믿으며 찾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김영하는 한술 더 떠서, 소설을 찾는 이유는 “어떤 주제나 교훈을 얻기 위함도 아니고, 감춰진 중심부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도 아니며, 그저 ‘헤매기 위해서다’ ”라고 주장합니다.
책을 읽다 보니 은근히 화가 나는데…. 꾹, 참고 조금 더 읽어가기로 합니다. 앞의 언급보다 조금 점잖은 표현을 쓴다면, 소설을 읽는 이유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이상한 세계에서 어슬렁거리기 위해서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인즉슨, (그에 의하면) 좋은 독서란, 한 편의 소설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가가 만들어놓은 정신의 미로에서 헤매는 기분 좋은 경험을 하는 것이라는군요.
그가 자신의 산문집 『읽다』에서 거론한 작품들은 플로베르의 『마담보바리』와 카프카의 『성』이었습니다. 이 작품들을 통해 김영하는 ‘정신의 미로’ ‘여정’ ‘감춰진 중심부’ 등을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머리도 식힐 겸 부담 없이 읽을거리를 찾다가 이 산문집을 만나게 된 것은 어느 사서의 권유 때문입니다. 또한, 누군가 잘못 전해준 정보 때문이기도 합니다.
도서관에서 후배를 만났습니다. 잠깐 얘기를 하던 중, 후배는 저와 아주 다른 스타일로 써 내려간 글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굴비낚시통신’을 얘기하더군요. 헤어지고 나서 바로 그 책을 찾았지만, 그러한 책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다른 도서관을 전전하다가 윤대녕 작가의 ‘은어낚시통신’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다시 검색을 통해 김영하의 ‘굴비낚시’를 찾게 되었는데, 이것이 아마도 후배가 언급했던 그 책인 듯싶었습니다.
『굴비낚시』를 대출하려 아무리 서가를 뒤졌지만 찾을 수 없기에 사서에게 문의하니, 오래된 책은 보존서고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같은 작가의 작품이니 대신 『읽다』를 대출해주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읽다’는 ‘굴비’ 대신 낚인 셈입니다. 하지만 가볍게 읽으려 했던 책이 의외로 이것저것 아주 묵직하게 들어 있는 책으로 바뀌었으니, 『읽다』를 읽다 그만 내팽개치고 싶었습니다. 생각이 더 많아지고…. 그래서 일찍 반납하려다 보니, 또 몇 페이지를 읽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내던지지 못하고 끝까지 다 읽게 되었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그가 그 책을 통해 ‘거부할 권리’를 마구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해지는 저녁, 주옥같은 내용이 허기진 제 뱃속으로 들어와 위와 장에 마구 들러붙었습니다. 그리곤 뇌로 마구마구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특히 강하게 점착되는 것은 그의 ‘몰개성론’이었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린다면, “내가 경험한 미로(나의 삶의 여정)와 타인이 경험한 미로(타인의 삶의 여정)가 모두 다르지만, 우리는 화폐경제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교환할 수 없는 것들을 무가치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말 소중한 것은 교환할 수 없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몰개성적 존재’가 되는 것을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당당히 그래야 합니다. 아니,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격류에 휩쓸려가다 보니, ‘생존’이 ‘개성적 삶’을 딛고 위로 올라와 물 밖으로 숨을 내쉽니다. 하나의 개체며 구성 요소로서 그리고 집합 일부로 우리는 꽤 쓸모있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기업은 우리를 소비의 주체로 만들어버렸고, 카드사는 개개인을 하나의 카드로 간주하며, 정당은 표 한 장을 소유한 유권자로, 그리고 유용한 통계는 우리를 하나의 유의미한 데이터로 간주합니다.
이 같은 상황에선 ‘몰개성적 존재’가 되는 것을 거부할 권리가 더없이 소중해집니다. 편안하게 읽을거리로 시작한 여정이, 늦은 시간에 『읽다』를 읽다 말고 에세이 한 편을 쓰는 일로 마감됩니다. 이제 글 한 편 대충 마치고 나니 배가 몹시 고픕니다. 그러나 김영하를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굴비낚시』 대신 『읽다』를 낚고, 배고픈 것 이상으로 처절할 권리를 담은 글 한 편 남깁니다. 생각보다 『읽다』가 묵직해서…. (세심하게) 읽다 보니 두통은 있지만, 그래도 고맙기만 합니다.
김영하 작가가 『읽다』의 서두에서 ‘독서’를 정의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상기해봅니다. “독자는 ‘독서’라는 위험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흔드는 사람이다”라고 근사하게 표현하는군요. 참 마음에 드는 문구입니다. 몰개성적 존재를 강요하는 시대에 맞서 발칙한 도발을 할 수 있는 작가, 흔치 않겠지요. 건투를 빕니다. Je vous souhaite bon courage!
[신연강]
인문학 작가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