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시대가 도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매사에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세상이 어지럽도록 급변하고 있다.
그 실례實例로 신문新聞으로 읽히던 종이신문은 구문舊聞이 되어 구독자가 급감해 사양斜陽길에서 그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고, 코로나 사태로 재택근무가 실시되면서 직장으로 출퇴근하는 일이 아련한 추억이 되고 있는가 하면 대중의 쇼핑이 아마존이나 쿠팡 등 전자상거래로 편리하게 바뀌면서 백화점 몰이나 상점들의 폐업과 줄도산이 속출續出하고 있지 않은가.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고 일체 만물이 끊임없이 생멸변화生滅變化하여 한순간도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불교의 근본교리가 있고, 범어梵語로는 무상을 ‘아니타Anita’, 팔리어Pali language로는 ‘아니짜Anicca’로 인도 힌두교사상의 집약서인 ‘우파니샤드Upanisad’에서 강조되었던 상주설 常住說의 반대개념이 있지만,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가 있다면 다름 아닌 ‘사랑’이 아닐까.
2015년 9월 15일 출간된 우생愚生의 졸저拙著 [어레인보우 시리즈] 첫 번째 <무지코 칸타타Mujico Cantata>에 실린 ‘사랑의 송가Ode to Love’를 아래와 같이 옮겨보리라.
샤이니 가수 다섯 분에게 바치는 송시 ‘Ode to 샤이니’
그룹 ‘샤이니’가 새 정규앨범 ‘Odd’를 냈다는 반가운 소식에 이렇게 몇 자 적는다. 몇 년 전 K-Pop Paris 공연을 DVD로 보고 그 당시 세 살짜리 우리 외손자가 샤이니의 노래와 춤을 제일 좋아하며 따라 하는 바람에 우리도 샤이니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수록곡 ‘러브씩 Love Sick’은 데뷔곡인 ‘누난 너무 예뻐’와 이어진 노래로서 ‘누난 너무 예뻐’가 짝사랑하는 누나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노래라면, ‘러브씩’은 그 누나와 오랜 시간 만나면서도 ‘아직도 널 생각하면 가슴이 아릴 정도로 너무 좋다’는 내용이라니, 수많은 다른 남성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겠지만 어쩜 이렇게도 내 심정을 그대로 잘 표현해주는지 감탄해 마지않을 뿐이다.
나이 80이 다 되어가는 이 할아버지의 아직도 끝나지 않은 내 평생 전공이 다름 아닌 ‘짝사랑’이기 때문이다. 서너 살 때부터 나보다 두 살 위의 작은 누나를 짝사랑하기 시작했고, 열 살 때 ‘바다’라는 동시를 지어 이 누나에게 바쳤다.
고등학교 시절 서울 동대문 밖 보문동에 살 때 동부성결교회 학생회 회장 일을 보면서 주일학교 선생님이시던 나보다 네 살 위의 정현숙 ‘누나’를 짝사랑하느라 몇 년 동안 거의 죽도록 상사병을 앓았었다.
그 후로도 1959년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 종로에 있던 고려당 빵집에서 만난 인상이 코스모스 같은 아가씨를 잠시 사귀다가 실연당한 채 그 상처는 아물지 않고 매년 가을이면 가슴 깊이 더 아프게 도지고 있단다.
샤이니 새 앨범의 ‘로망스’는 미니앨범 ‘에브리바디 Everybody’ 에 수록된 ‘빗속 뉴욕’처럼 한 도시에서 만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별의 길’은 1집 앨범 수록곡 ‘사랑의 길’과 연결되며, ‘사랑의 길’이 사랑을 시작하는 내용이라면 ‘이별의 길’은 그 사랑이 끝나는 내용이라는데, 평생토록 짝사랑으로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되는 체험에서 우러나온 제안을 하나 해보고 싶다. 샤이니의 다음 앨범 만드는데 참고가 되었으면 해서다.
샤이니 본인들이 잘들 알아서 선택해 결정할 일이겠지만, 다음 새 앨범 제목으로는 이번 앨범 ‘오드 Odd’와 발음이 비슷한 ‘오우드Ode’라 하면 어떨까? ‘사랑의 송가 Ode to Love’로 말이다.
아무리 여러 번 짝사랑을 하고 실연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죽도록 미치도록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사랑의 길은 절대로 이별의 길이 될 수 없음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해주었으면 해서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할 수 없어, 한없이 안타까울 뿐이고, 끝나기는커녕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임을, 다시 말해 내가 사랑하는 네가 내가 될 때까지 말이어라.
2021년 4월 11일자 코스미안뉴스에서 [시가 있는 하루] 이태순의 ‘몽당연필’을 보고 너무도 반갑고 놀라웠다. 마치 1983년 하와이에서 48세 때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나의 작은 누나가 너무너무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신비神秘롭게 환생幻/還生이라도 한 것처럼, 이 누이도 나보다 2년 먼저 평안북도 태천泰川에서 태어나 ‘태泰’ 자字가 붙은 태순泰順이, 나는 태상泰相이 되었으니.
그뿐만 아니라 이 누나와 ‘연필’ 한 자루 갖고 싸웠던 에피소드가 있다. 우리말에 ‘토끼가 제 방귀 소리에 놀란다’는 말이 있지만 내가 서너 살 때 일이었으리라. 두 살 위의 작은 누나하고 연필 한 자루 갖고 ‘내 꺼다 네 꺼다’ 싸우다가 마지막에는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내가 사생결단死生決斷을 하다못해 ‘너 죽고 나 죽자’며 누이의 손등을 연필로 찔렀다. 그러자 연필심이 부러지면서 누이의 살 속에 박혀 버렸다. 그런데도 야단은 누이만 맞았다. 누나가 어린 동생하고 싸웠다고.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연독鉛毒이 몸에 퍼져 누나가 죽게 되면 당시 일정시대 일본 순사(경찰관)가 와서 나를 잡아갈 것이라고 겁에 새파랗게 질린 나는 순사가 우리 집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기 무섭게 죽어버리리라. 그렇게 마음먹고 광에 있던 엽총 총알 만드는 납덩어리를 하나 들고 나는 한동안 손안에 꼭 쥐고 있었다. 그때 만일 순사인지 아닌지 확인도 안 하고 누가 대문 두드리는 소리만 듣고 내가 그 납덩어리를 꿀꺽 삼켰었더라면 나의 삶이 아주 일찍 끝나버렸을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지 않았어도 그 후로 나의 몸에는 흉터가 몇 군데 생겼다. 젊은 날 나의 ‘코스모스 아가씨’와 실연 끝에 동해바다에 투신했다가 척추 수술받고 허리에 남은 큰 수술 자리 말고도 나의 오른쪽 손등과 왼쪽 눈 옆에 흉터가 남아 있다.
손등에 난 흉터는 내가 너더댓 살 때였을까 장난이 너무 심하다고 나보다 여섯 살 위의 큰 누나가 혼내주려고 나를 앞마당에 있는 장독대 밑 컴컴한 지하실에 가두자 그냥 있다가는 그 지하실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고 죽는 줄 알고 다급하고 절박한 나머지 주먹으로 지하실 유리창 창문을 깨는 바람에 생긴 것이다.
그리고 왼쪽 눈 옆에 난 흉터는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 한때 예수와 교회에 미쳤을 때 하도 교회 목사님이나 부흥 목사님들이 설교로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고 매 순간순간 바로 전 순간순간에 생각으로 숨 쉬듯 짓는 ‘죄’를 ‘회개하라’라고 하시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따라 길을 가면서도 수시로 눈을 감고 기도하며 ‘회개’ 하다가 길가에 있는 전봇대 전주電柱를 들이 받고 이 전주에 박혀있던 못에 눈 옆이 찢어져 생긴 것이다. 그 즉시 즉시로 회개하지 않으면 당장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떨어지는’ 줄 알고. 그때 눈 옆이 아니고 눈을 찔렸었더라면 나는 애꾸는 장님이 되고 말았으리라.
이처럼 너무 눈앞에 아른거리는 현상에만 집착 현혹되다가는 얼마든지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궁지에서 빠져나오기는커녕 그 수렁에 더 깊이 빠져들어 가는 것이리라. 흔히 여자고 남자고 ‘기왕에 버린 몸’이라고 ‘될 대로 되라’며 자포자기하는 수가 많지만 어쩌다가 실수로 아니면 신수身數가 사나워 어떤 불행이 닥치더라도 이를 더 큰 불행을 예방하는 하나의 예방주사 맞는 액厄 때움으로 삼을 수 있지 않겠나.
좀 짓궂게 얘기해서 가령 네가 너무 웃다가 또는 오래 참다가 오줌을 찔끔 쌌다고 하자. 그렇다고 네가 똥까지 싸고 주저앉아 뭉갤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얼른 씻고 옷을 갈아입으면 될 것을. 그런데 나도 한 번 이런 과오를 범했던 일화를 밝혀보리라.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정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남모르는 고민과 자책으로 자학自虐의 행로行路를 걸어온 나의 숨은 비화 秘話라 할 수 있으리라.
내가 대여섯 살 때 엄마가 집 잘 보라고 나를 집에 혼자 두고 (요즘 영어로는 home alone) 외출하시면 엄마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나는 집 안 청소를 깨끗이 다 해놓고 엄마가 어서 돌아와 칭찬해 주실 때만 기다렸다. 하루는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가 안 돌아오시기에 심심해서 나는 책장에 꽂혀있는 책 중에서 이것저것 뽑아 그림 구경을 하는데 어느 책갈피에서 일본 춘화春畵 사진이 여러 장 쏟아져 나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보다 열다섯 살 위의 큰 형님이 감춰둔 사진들이었으리라.
가슴이 콩콩하도록 잔뜩 호기심에 차 사진들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노라니 나의 어린 고추가 발딱 서지를 않겠는가. 고것을 만지작거리면서 장난을 치다 보니 미치게 기분이 막 좋아지다가 손끝에 기운이 쏙 빠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연히 자위행위를 일찍 자습자득自習自得한 나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없이 이 ‘짓’을 하면서 번번이 죽고 싶도록 말할 수 없는 수치심에 사로잡혔다.
다섯 살 때 돌아가신 아빠도 키가 크셨고 형들도 큰데 나만 키가 작은 것이 한창 자랄 나이에 성장호르몬 기운을 ‘가운데 다리’로 다 뽑아버려 그럴 것으로 생각하고 스스로를 탓할 뿐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엄마는 내가 몸이 늘 약한 것이 공부를 너무 열심히 잘해서 그럴 거라고 낳은 자식 열둘 가운데 살아남은 6남매 중 나를 노골적으로 편애하셨다.
다른 형제들은 보리죽도 잘 못 먹을 때 나 혼자서 쌀밥에 계란과 고기를 싫어지도록 먹을 수 있었다. 우리말에 계란이냐 달걀이냐 하는 말이 있듯이 신神이든 부모이든 정말 신다운 부모다운 신이 나 부모라면 그 어느 특정 인종이나 민족, 자식 중에 그 어느 누구를 편애하지 않으리라. 편애하면 편애받는 자식은 물론 자식들 모두에게 다 나쁠 테니까. ‘선민選民’이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다는 말이다.
남달리 성욕뿐만 아니라 식욕도 왕성해서였는지 늘 과식을 하다 보니 소화불량이 심해 초등학교도 5학년까지만 다니고, 시골 가서 약물을 먹고 쉬라고 일 년 휴학까지 했다. 나는 시골에 가 있는 동안에도 자위행위는 계속했다. 매번 죽도록 후회하고 다시는 안 하리라 결심에 결심을 했지만 이건 마치 내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겠다는 것만큼이나 부자연스런 억지였었다.
책도 못 가지고 가서 일 년을 판판이 놀다가 남들은 중학교 갈 때가 되었는데 나만 빠지는구나 생각하니 좀이 쑤셔 백리 길을 걸어 서울로 돌아와 5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가장 좋다는 경기 중학교 입학원서를 써달라고 했다.
6학년 수업을 다 빼먹고 어떻게 시험을 치겠느냐는 선생님 말씀에도 막무가내로 떼를 써 결국 나는 경복중학교에 입학원서 내고 응시해 합격했다. 비록 내가 가겠다던 경기중학교에 못가고 경복중학교에 들어갔지만, 어머니의 나를 편애하시는 극성은 날로 더해갔다. 형제들 가운데 제일 공부 잘하고 똑똑해 장래성 있다며.
그럴수록 형제들 눈총 맞기가 싫고 아버지 없이 홀몸으로 6남매 키우시는 어머님 짐을 좀 덜어드리겠다는 생각으로 집을 어서 나가 고학을 해보리라는 마음을 먹어 오던 중, 중학교 1학년 때 어느 날 밤 일어난 한 ‘사건’으로 나는 가출하고 말았다.
작은 누이하고는 어려서부터 많이 싸우면서도 썩 잘생긴 누나를 내 ‘애인’이라고 뽐냈었는데 어느 날 밤 한방에서 자다 내가 누나를 겉으로 살짝 범할 뻔한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자위행위 때문에 늘 죽고 싶도록 자책감에 괴로워했었는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더 엄청난 ‘죄’를 지을 뻔했으니 이제는 정말 한강물에라도 빠져 죽어버려야겠다고 집을 뛰쳐나갔다.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다 신문팔이가 돼 다른 신문팔이 소년들과 신문사 지하실에서 합숙하면서 그토록 내가 자책감과 수치심을 느껴온 자위행위와 누나를 건드릴 뻔한 것까지 남들도 다 하는 짓일 뿐 결코 ‘죽을죄’가 아니란 것을 깨닫고 나는 심한 죄책감에서 나 자신을 스스로 해방시키기 위해 온갖 생각과 자료를 다 동원, 내 몸뿐만 아니라 마음과 정신까지 자위하게 되었다.
내친김에 오족(五/汚/誤足) 아니 사족(四/死/蛇足)을 하나 달아보리라.
얼마 전 (2015년 3월 4일자) ‘토론도 션Toronto Sun’에 실린 기사 하나가 화제가 되었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나이지리아에서 한 여성이 남편의 거대한 성기 때문에 성생활이 힘들다는 이유로 결혼 1주일 만에 이혼 신청을 하는 웃지 못할 일이 발생했다.
나이지리아 잠파리주에 살고 있는 아이샤 나눕파와는 “남편과 결혼한 후 잠자리를 가졌고 이는 악몽 그 자체였다. 남편의 성기가 너무 큰 탓에 극심한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로부터 건네받은 진통제까지 복용하면서 시도를 했고 도저히 결혼 생활을 이어가지 못할것임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남편 마이지나리는 법정에서 “교제하는 동안 쓴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면 이혼에 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기사였다. 그 밥에 그 반찬이라고 배부른 소리인지 배고픈 소리인지 아니면 배아픈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사치가 아니고 치사스런 부부였음에 틀림없다. 문제는 이들에게 사랑이나 정情 같은 것이 털끝만큼도 없었나 보다.
만일 이 부부에게 사랑이 있었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으리라. 남자가 음경확대가 아닌 축소수술을 받거나 여자가 유방확대하듯 질확대 수술을 받을 수도 있지 않았겠나. 어디 그뿐이랴. 여자의 옥문출입이 정 힘들다면 그 대안代案으로 구강口腔이나 심지어 동성애자들처럼 항문성교肛門性交라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인정人情이든 우정友情이든 연정戀情이든 애정愛情이든 정情을 주고받는 것이 참된 인간관계가 아니던가. 사랑해서 결육結肉이 아닌 결혼結魂한 사이라면 길은 있었으리라. 땅길이든 물길이든 다 사랑으로 숨 쉬며 같이 꿈꾸는 하늘길이리.
이런 꿈길이란 우리의 몸통이자 숨통인 우주처럼 가도 가도 끝 간데 몰라라. 와도 와도 닿는 데 없어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