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가라앉지 않으려면 헤엄쳐라 Sink or Swim (1): 인간도처유청산人間到處有靑山 Cosmos in Chaos

이태상

 

오늘 아침 (2021425일자) 뉴욕타임스)가 제1면 톱기사로 현재 전 세계 코비드-19 (Covid-19) 확진자 수의 거의 반이 인도에서 발생하고 있어 시신屍身 화장火葬 불길이 끊임없이 쉬지 않고 치솟고 있다며 사진과 함께 보도했다.

 

가라앉아 익사溺死하지 않으려면 헤엄치라고 Sink or Swim이란 영어 표현이 있다.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 적자생존適者 生存의 법칙은 어느 개인이고 민족이고 간에 온 인류뿐만 아니라 동식물動植物 가릴 것 없이 모든 생물에게 적용되는 것이리라.

 

지난가을 KBS 2TV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한글날을 맞이해 특집으로 꾸민 조선의 DNA, 내 안의 K-에서 이날치X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범 내려온다를 불러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날치는 전통적인 판소리에 현대적인 팝 스타일을 적절하게 조화시킨 음악을 구사하는 팝 밴드로서 그룹 이름은 조선 후기 8명창 중 한 명인 이날치李捺致(1820-1892)에서 따왔는데 이날치가 젊어서 줄타기를 하였는데 날치와 같이 날쌔게 줄을 탄다고 하여 날치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이날치X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는 2020730일 공개된 한국관광공사의 Feel the rhythm of Korea 시리즈에 참여했고, 배경음악은 순서대로 이날치 1집범 내려온다,’ ‘어류도감,’ ‘좌우나졸이 사용되었는데, 유튜브, 페이스북, 틱톡, 중국의 아이치이와 더우인 등 매체에 광고되면서 공개된 지 한 달여 만에 세 유튜브 영상의 총 조회수가 7300만을 넘어섰다고 한다.

 

우리 한민족이야말로 예부터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잡초雜草의 지혜와 은근과 끈기라는 기질 氣質로 온갖 돌림병과 천재지변 외에도 수많은 외침外侵과 내란內亂을 극복하며 반만년을 살아오지 않았는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 한 예로 지난 85년의 세월을 살아온 나 자신의 삶만 돌아보더라도 너무도 믿기지 않도록 기적 중의 기적 이상으로 경이롭고 신기하기 그지없다. 그러면서 언제 어디에서나 인간도처 유청산人間到處有靑山임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1936년 말 평안북도 태천에서 태어나 일정시대와 8.15해방을 겪고 1950년 초여름, 6.25 전쟁이 터졌다. 내가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간 직후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 가족도 서울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한강의 다리가 다 끊겨 피난도 갈 수 없었다. 나의 아버지는 삼대독자 외아들인데다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나 자식을 열다섯이나 두셨다. 그렇지만 내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고 나는 몸도 마음도 크게 자라지 못한 때였다.

 

어느 날, 나는 나돌아다니지 말라는 어머니의 당부도 잊은 채 화마火魔에 휩싸인 서울의 거리로 나갔다. 멀쩡했던 건물이 쓰러져 있었고, 높은 담도 무너져 벽돌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거리를 걷다가 무너진 건물 옆에 풀이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 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굽혀 건물 옆으로 다가갔다. 풀 속에 자라고 있는 연보라색 꽃을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코스모스였다. 이 더운 여름에 코스모스라니.

 

태양빛이 위세를 떨치고 있는데 갑자기 우박이 쏟아졌다. 우박은 건물의 벽에도 박히고, 바닥에 먼지를 일으키며 사방으로 튀었다. 나도 모르게 몸을 더 낮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렇게 한참을 바닥에 엎드려 있다가 나는 고개를 들었다. 사방은 조용했다. 몸을 일으켰을 때 건물 벽에 그려져 있는 총탄 자국을 발견했다. 우박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쏘아대는 기총소사 機銃掃射였다. 나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만약에 코스모스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나는 기총소사 탄알에 맞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후로 나는 폐허가 된 도시를 다람쥐처럼 쏘다녔다. 친구들 말에 따르면 서울 근교의 과수원에는 사람들이 모두 피난을 가서 과일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고 했다. 나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과일을 찾으러 과수원으로 향했다. 과수원에는 과일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먹을 수 있는 과일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크게 상하지 않은 좋은 과일들을 따로 보따리에 챙겼고, 아쉬운 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우적우적 씹으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인민군들과 마주쳤다. 보따리에 담긴 과일을 모두 빼앗길까 봐 겁을 잔뜩 먹고 나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나를 본 인민군들은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치고 싶었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 중 한 병사가 다가와 물었다.

 

보따리에 든 것이 뭐냐?”

과일인데요.”

어디서 가져오는 거냐?”

, 할아버지가 주셨어요.”

 

솔직히 말할 수가 없었다. 텅 빈 과수원에서 가져왔어도 훔친 것은 분명했으니까.

 

과일이라고?”

 

그들 중 또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꼼짝없이 빼앗기게 생겼다고 생각한 나는 울상을 지었다.

 

그것 좀 우리에게 팔 수 없겠니? 아니면 이 쌀과 바꾸던가.”

 

그들 중 또 다른 한 명이 자루 속의 과일을 살펴본 뒤 쌀자루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나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

 

좋아요. 원하시면 찐빵도 갖다 드릴 수 있어요.”

 

어머니가 찐빵을 자주 만들어 주시던 생각이 나서 무심코 내뱉은 말인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쬐그만 녀석이 제법이네. 우리가 먹을 수 있을 만큼 찐빵을 가져오면 이 쌀을 배로 주마.”

 

나는 어머니께 찐빵을 만들어 달라고 해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찐빵을 들고 인민군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들은 나를 반겼다. 전보다 더 많은 쌀을 주었다. 거기에 머물지 않고 나는 이곳저곳으로 찐빵을 팔기 시작했다. 우리집에 쌀이 쌓였다. 그렇게 모은 쌀 덕분에 우리 가족은 전쟁통에도 굶지 않고 견딜 수 있었다.

 

인민군이 물러가고 국군과 미군이 서울로 들어왔다. 나의 장사는 계속되었고, 인민군과 국군과 미군 가릴 것 없었다. 군인들은 군대 야전식량으로 쓰이는 건빵이나 C-ration을 건네기도 했다. 그렇게 사는 동안 코스모스도 지고 겨울이 왔다.

 

인민군이 다시 쳐들어온다는구나. 이번에는 중공군도 함께 몰려온다니 어서 피난을 가야겠다.”

 

어머니는 짐을 꾸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나는 조금이라도 장사를 더 해야겠다 싶어서 어머니께 말했다.

 

저는 나중에 내려갈게요. 어머니 먼저 내려가 계세요.”

얘야, 무슨 소리냐. 다치면 어쩌려고?”

 

어머니는 놀라 나무라셨지만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대전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는 가족과 헤어졌다. 인민군과 중공군이 다시 서울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중공군은 헐벗었고, 쌀도 없었으며 내가 파는 물건을 사줄 형편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어 나는 대전으로 향했다.

 

걸어서 대전에 도착한 나는 간신히 가족을 만났다. 사람들은 누구나 먹을 것이 없어 궁핍했고, 우리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장사를 다시 하러 길거리로 나섰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는 김밥을 들고 대전역 근처로 나갔다. 허기진 사람들에게 쉽게 팔 수 있었다. 그리고 김밥을 판 돈으로 대전 시외에 있는 신도안이라는 곳에서 받아온 엿을 팔기 시작했다.

 

역 앞과 대합실에서만 엿을 팔자니 직성이 풀리지 않아 나는 몰래 울타리를 넘어가 플랫폼에서도 엿을 팔았다. 수입은 더 좋아졌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열차에 올라가서 엿을 팔기 시작했다. 당연히 수입이 늘 수밖에 없었다.

 

누가 열차 안에서 엿을 팔래. , 일루와.”

 

어느 날, 열차 승무원이 고함을 질렀다. 붙잡히면 엿은 물론이고, 목판까지 빼앗길 것이 분명했다. 후다닥 뛰기 시작했다. 승무원은 뒤에서 소리를 지르며 쫓아오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움직이기 시작한 기차의 바퀴 사이로 뛰어들었다. 아슬아슬하게 반대편으로 몸을 날렸다. 다행히 다치지 않았고, 가속이 붙기 시작한 열차가 가로막았기 때문에 승무원은 나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중이라 입을 옷도 별로 없었지만 나는 중학교 교복을 입고 다녔다. 전쟁 나기 전에 경복중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모자에는 중학교 모표가 붙어 있었다. 그러다 길을 가던 군인 한 명이 내 앞에 멈춰 섰다. 군인은 국군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그 장교가 내게 물었다.

 

, 경복중학교에 다녔니?”

, 그런데요.”

너 혹시 김기주라는 아이를 아니?”

, 기주요, 저랑 같은 반이었는데요.”

, 그래, 기주는 내 동생이란다.”

, 정말이세요

반갑구나, 이렇게 만나다니.”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장교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그 엿을 모두 싸줄 수 있겠니?”

이 많은 엿을 전부요?”

그래, 전부다.”

 

장교는 엿을 모두 싸들고 셈을 치른 다음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떠났다. 나는 장교가 떠나간 곳을 바라보며 친구 기주의 안부를 미쳐 묻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전쟁통을 바람같이 누비며 엿을 팔던 어느 날 길을 가던 간호장교 한 명이 내 앞에 멈춰 섰다.

 

너 고생하는구나.”

 

나는 간호장교의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간호장교를 흘끔흘끔 쳐다볼 정도로 간호장교는 예뻤다. 나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할 때 간호장교가 불쑥 돈을 내밀었다. 대충 보아도 큰돈이었다. 본능적으로 나는 몸을 틀어 돌렸다.

 

괜찮아, 받아도 되는 돈이야.”

 

간호장교는 막무가내로 내 주머니에 돈을 밀어 넣었다. 나는 목판에 있는 모든 물건을 싸서 간호장교에게 내밀었다. 간호장교는 손을 내저었다.

그건 네가 팔아서 쓰렴. 그럼 안녕!”

 

막을 사이도 없이 간호장교는 멀어져 갔다. 한참이나 멍하니 서서 나는 간호장교가 떠나간 곳으로 하염없이 눈길을 주었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쌀을 여러 가마니 샀다. 남쪽에 가서 팔면 큰 이문을 남길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어머니와 나는 그 쌀을 화물열차에 싣고 쌀가마니 위에 앉아 추위에 떨며 며칠 밤을 새워 경상도 구포역에 도착했다.

 

구포역에서는 소달구지를 구해 쌀을 싣고 그 주변에서 제일 크다는 싸전을 찾아갔다. 여인과 소년이 무거운 쌀을 싣고 찾아온 것을 본 싸전주인 할아버지는 혀부터 끌끌 차시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 참 착하고 용하구나. 가져온 쌀은 값을 잘 쳐줄 테니 전부 놓고 가시게.”

 

싸전 주인 할아버지의 배려로 한꺼번에 쌀을 모두 팔아 상당한 이문이 남았다. 그렇게 전쟁 속에서도 꽃은 피었다. 과일과 찐빵을 팔아주던 인민군, 아낌없이 건방을 내밀던 국군, C-ration을 아낌없이 주던 미군, 목판에 가득한 엿을 한꺼번에 다 팔아준 친구의 형, 고생한다며 많은 돈을 준 간호장교, 쌀 여러 가마니를 다 비싼 값에 팔아주신 싸전 주인 할아버지, 모두 내 마음속에 피는 아름다운 인정의 꽃이었다.

 

Cosmos in Chaos

 

That day, I was a thirteen-year-old boy. I was fully engaged in the fun-filled plays of children of that age, enjoying the early summer time.

 

All of a sudden, the grown-ups were in a panic, anxious to leave the capital city of Seoul in a hurry. Suddenly, all things seemed to have stopped. People didn’t know what to do.

 

“War broke out!” My two-year-older sister Tae-Soon told me, nonchalantly. That day was June 25, 1950. I didn’t quite understand what it meant, and yet the word ‘war’ was familiar to me, as I had been playing war games with my friends. War was a catastrophe for everybody. But to me, it was exciting and thrilling. Truth to tell, for those who would bear it all, all could be blessings.

 

Early in the summer of the year when I was a seventh grader, the war broke out. Within three days Seoul fell. Like almost everyone else living in Seoul, my family couldn’t flee the capital city because all the bridges over the Han River were destroyed.

 

One day, despite my mother’s urging that I should not go out, I left home to see the city streets engulfed in flames, following heavy artillery fire and bombings. Debris were everywhere. Walking along the streets, I stopped at the side of a collapsed building. In the middle of an untended garden overgrown with weeds, I discovered some flowers. They were cosmos in pink and red. I gasped with surprise at the cosmos blooming in the hot summer weather. I was used to seeing the cosmos in the fall.

 

And then, out of the blue, there was a hailstorm. The hail ricocheted off a nearby wall, raising a cloud of dust on the ground. I instinctively crouched down. I soon realized the hail was machine-gun bullets from fighter jets flying low just above the buildings. Moments later I raised my head. When I stood up, I saw bullet holes on the wall and looked at the pink cosmos in the grass. Had I not lain flat on the ground, I would have been hit by bullets.

 

I scoured the razed city streets, scampering around like a squirrel. According to my friends, the orchards on the outskirts of the city were covered with fruits, and I found some, put them in a bag, and dashed home.

 

When I was near home, I encountered North Korean soldiers. Fear made me freeze and I stopped dead in my tracks. One of them beckoned me over with a wave. I wanted to run away but my legs wouldn’t move.

 

“What’s in the bag?” One of the soldiers asked.

“Ffruits

“Where did you get them?”

“GGGrandpa gave me.”

 

I felt my death was sure, and the fruits would be taken away for certain. I was on the verge of tears.

 

“Can you sell the fruits or exchange them for rice?” The soldier lifted a bag of rice to show to me.

 

“Allalright! I can bring the home-baked bread if you like,” I said, much relieved. My mother often baked bread.

 

“This little comrade is a fine figure of a boy! Okay, if you bring enough bread for all of us, I’ll give you two bagsful of rice.”

 

The soldier smiled at me and I smiled back. When I returned with bread, I was welcomed by the soldiers and rewarded with more rice. I befriended the troops and acquired provisions for my family to tide over the hard times.

 

Eventually, the North Korean forces retreated from Seoul, and South Korean and American forces re-entered the capital city. I continued my business of hawking whatever I could find to sell. Meanwhile, winter withered all the cosmos.

 

“The North Koreans are coming back, they say, and the Red Chinese Army too. We have to leave.”

 

My words were uttered in gasps while my mother was busy packing.

 

“Mother, you go ahead of me. I’ll follow you.”

“What are you talking about? You could be hurt.”

 

Nevertheless, I persisted and stayed behind. The North Korean and Red Chinese forces came. This time, they couldn’t afford to buy anything from me. I walked all the way to the city of Daejon, nearly 100 miles away from Seoul in the central part of the country and joined my family. Everybody was without food, and my family was no better off.

 

I went hawking in the streets crowded with refugees. I started selling kimpab (sushi) my mother made. It wasn’t anything special, but I had no problem feeding the hungry refugees. I then sold rice-candies in the waiting area and plaza of the railway station.

 

Becoming a bit more venturesome, I jumped over the fence and sold candies at the platform and in the train cars. A steward spotted me and chased after me, shouting, “How you dare come on the train

 

When I jumped off the train, the steward raced after me. The train started moving slowly. I had no choice but to scurry between moving wheels, throwing myself across the rail. Luckily, I didn’t get hurt and I managed to lose my pursuer.

 

Because of the chaos that followed, I didn’t have spare clothes and wore my school uniform and cap with my school badge. A man in the military uniform stopped to ask me,

 

“Do you go to Kyungbock Middle School?” He was a second lieutenant of the South Korean Army.

 

“Yes,” I replied.

“Do you know Kim Ki-Joo?”

“Oh, Ki-Joo, you mean? He’s a classmate of mine.”

“Really, Ki-Joo is my younger brother.”

“Is that right? My name is Tae-Sang.”

“I’m glad to meet you, my little friend.”

 

The officer paused for a moment, and then said,

 

“Can you wrap up everything?”

“Do you mean al of these rice-candies?”

“Yes, all of them, please.”

 

After paying me, the second lieutenant bade farewell, patting me on the head. Another time, a female military nursing officer walked towards me and then halted.

 

“You’re having a hard time, aren’t you? She said.

 

I blushed with embarrassment. People kept making eyes at this attractive lady in uniform.

 

She was beautiful, I just smile vaguely. Then she handed me a large sum of money to me. My initial reaction was to decline to accept the money.

 

“It’s all right. You can keep the money.”

 

She put the money in my pocket. In return for her generous gift of money, I wrapped up everything I had and gave it to her. But my offer was waved aside.

 

“Now, take care and goodbye!”

 

The nursing office hurried away before I could do anything. Stunned, I stared blankly into space with a faraway look, not knowing whither she was gone.

 

It was in the middle of that winter of 1950 when my mother and I bought many sacks of rice and climbed aboard a freight train. We had heard the price of rice was much higher in the south, where it was swarming with refugees. The freight train moved slowly. Though frozen and tired, we endured the weeklong ordeal perched on a mound of rice sacks, braving the elements.

 

We got off at the southern town of Gupo, in the South Kyungsang Province, and loaded an ox-cart. When we called on a rice merchant, he complimented me on my enterprise and paid a good price for the load. We made a handsome profit.

 

We were relieved. Even in the midst of a war, flowers were blooming. The North Korean soldiers who bought my wares, the South Korean and the American soldiers who gave me part of their daily field rations, the brother of my classmate who paid for all of my rice-candies, the military nursing officer who handed me a good amount of money and the grandfatherly owner of a grain-store who took over the ox-cartload of rice from us, their humanity blossomed in my heart.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4.26 10:03 수정 2021.04.26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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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