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전차가 곳곳을 돌아다닌다. 시대에 따라 시류에 따라, 욕망이라는 전차도 그 외양과 속성을 바꾸고 진화하면서 주변을 배회한다.
욕망과 전차라는 단어를 접하니 오래전에 읽었던 테네시 윌리엄스Tennessee Williams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떠올리게 된다. 급격히 변하는 현대의 삶에서, 작품의 여주인공 블랑시가 가슴에 간직했던 그런 ‘낭만’과 ‘낭만의 시대’는 영원히 손닿을 수 없는 하나의 꿈이 돼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 삶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무엇보다도 재화. ‘돈’이란 그 어감이 주는 무게와 속성이 예사롭지 않아서, 누구도 이를 초월하거나 무시하거나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단위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니, 돈이라는 것이 생경하게 느껴지고 돈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다.
최근 뉴스를 접하니, 서거한 국내 굴지의 기업 총수 유산이 26조 원이고, 이에 대한 세금이 무려 12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주식을 포함한 유무형의 자산을 모두 합하면 그의 유산 규모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우리가 달나라 가기를 꿈꾸듯이 그냥 상상할 수밖에 없다. 실감 나지 않는, 감이 잡히지 않는 ‘욕망의 덩어리’이기에.
과연 그는 행복했을까. 고인이 된 기업 총수에게 물어보고 싶어도 이미 땅속에 묻힌 그가 답해줄 리 만무다. 또 그렇게 많은 돈을 상속하게 된 유족들은 행복할까. 큰돈을 벌어놓고도 어느 날 갑자기 닥친 뇌졸중으로 인해 기업 총수는 몇 년을 최첨단 의술과 의료기기에 의존해 수명을 연장하고 이따금 매스컴에 얼굴을 비쳤을 뿐이다. 그의 장남 또한 비정한 정치의 표적이 되어 사면되느니 마느니 하는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가 타계하기 전 모아놓았던 2만 3천 점에 달하는 귀중한 미술품과 문화재를 국가에 기증한다고 한다. 이 또한 엄밀하게는 욕망의 덩어리였을 것. 이런저런 진귀한 물품을 소장하려는 인간의 욕심이 문화라는 가면을 쓰고 점잖은 표정을 지었을 뿐이다. 돈과 문화는 돌고 돌아야 한다. 물처럼 흘러야 썩지 않고 맑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정선,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피카소, 모네, 르누아르 등 거장들의 작품들을, 유족이 기증하기로 함으로써 대중의 눈이 호사하게 되었으니, 고마운 생각이 들면서도 마음 한편이 씁쓸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로 엄중한 시기에도 돈이라는 욕망의 전차는 심야의 야릇한 불빛 아래서, 지하 컴컴한 공간에서 살을 불린다. 피싱이라는 교묘한 전화사기를 통해 순박하고 지친 영혼들로부터 잔인하게 돈을 빼앗아간다. 부동산 투기라는 광풍으로 일상적 삶을 살아갈 존재들의 마음을 달뜨게 해서 전국 팔도를 누비게 만든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로또라는 숫자에 매몰되게 하고, 도박과 마약이라는 유혹으로 다가온다.
삶의 기본 전제이고 중요한 요소로서의 ‘돈’이, 욕망이라는 전차에 얹히면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둔갑하고, 상식을 뛰어넘어 철학과 윤리가 배제된 불가사리가 된다. 수많은 유산을 남긴 기업 총수의 최고 제일주의. 오늘날 한국을 넘어 세계에 우뚝 서게 한 도전정신과 세계적 비전을 높이 사지만, 사후세계로 떠날 때 만 원짜리 지폐 한 장 손에 쥐고 가지 못하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남겨진 그 큰돈은 누구의 것이며,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저승으로 가는 강을 건널 때 쓸 뱃삯으로서의 동전 한 닢을 요구한다. 영화에서도 종종 저승으로 배 저어가는 사공에게 동전을 건네는 장면이 나온다. 몸과 영혼이 단출하게 나룻배를 타고 이승과 저승에 놓인 다리(강)를 건너는 것을 생각할 때, 그 큰돈은 도저히 무거워 싣고 갈 수 없을 텐데,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가 살아생전에 자신의 의지로 좀 더 많은 나눔과 비움을 실천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드는 이유이다.
마을 공동체 단위의 친숙한 삶이 와해 되고, 요즘처럼 국가적, 전 지구적 재난이 도래하는 때일수록, 나눔의 윤리를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정책이 요구된다. 사유와 공유의 틈을 좁히고,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은 “돈은 흘러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라는 고금의 진리를 돌아보면서, 땅에 대한 소유의 개념도 정리해볼 필요가 있겠다. 아무리 개인 소유의 땅이라고 할지라도, 이웃이나 사회에 대한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이는 벽을 세울 수 없는 대기와 하늘에 대한 소유개념에도 같은 이치로 적용돼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에도 익히 알려진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의 ‘커먼즈(공공재)’의 개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적극적으로 고려해볼 만하다. 그는 자본이라는 개념을 ‘손으로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강력한 힘’으로 정의하지만, 자본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추상적 분석이 아닌 구체적 현실을 통해 명쾌하게 풀이해주는 한편, 자연적, 지리적 측면에서 더 나아가 문화적. 지적 커먼즈로서의 언어적, 사회적 관행과 양태를 언급한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그가 자본의 핵심을 ‘축적을 위한 축적’이라고 보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자본의 축적’이 아닌 ‘가치의 축적’으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점이다.
주위를 돌아보면 내 땅이라고 해서 토양을 마구 오염시키고, 심지어 빌린 남의 땅에 쓰레기를 산처럼 쌓아 놓고 사라지는 저질의 사기꾼도 있다. 내게 속한 하천이라 해서 오염수를 마구 쏟아내고, 심지어 방사능에 오염된 냉각수를 대양에 쏟아붓겠다는 이상한 인접 국가가 있으니, ‘그게 나라인가’라는 말을 해도 전혀 이상한 바 없다.
한 개인에 속하고, 한 나라에 속하더라도 그 땅과 바다와 하늘은 같은 지구 행성에 거하는 모든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 토지 오염, 수질 오염, 대기오염은 모두 같은 속성을 갖는다. 사익을 넘어 공익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공동체의 안위와 지속성을 고려해서 21세기 지구인들은 코로나 같은 팬더믹에 대한 대처로부터 기후 대응과 대기. 해양오염에 협력하고 공동으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욕망이라는 강력한 전차를 멈추기 위해서는 소통과 나눔이 전제돼야 한다. 지구촌 한구석에서 군부가 주도하는 학살의 참상, 또 다른 곳에서의 인종 학살, 빈곤과 차별, 인류 절멸의 핵무기 확산, 해빙과 폭우·폭서 등의 기상이변 등 인류 공동의 과제가 ‘욕망이라는 전차’를 타고 다가온다. 먹구름은 점점 짙어가고 우리는 머리 위로 서서히 다가오는 구름을 바라본다.
소통과 나눔, 그리고 협력. 이 간결하고 무겁지 않은 단어가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구름을 조금씩 걷어줄 수 있다면, 미래는 긍정적일 것이다. 하루 사이에 또 다른 거목, 정진석 추기경이 영면에 들었다. 그는 살아생전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을 나누겠다”는 말을 늘 해왔으며, 사후 장기기증으로 이 말을 실천했다고 한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빈 몸으로 온화하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떠났다고 한다.
놀람과 울림. 한 대부호가 천문학적인 재산과 상속세와 예술소장품을 남기고 떠났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놀라움이 여기저기에서 표출된다. 본인의 뜻인지 유족의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상당한 사회 환원으로 이어졌다. 내게 놀람은 있으나 이상하게도 울림은 없었다. 하루 뒤, 많은 사람이 한 소탈하고 검소한 종교지도자의 죽음을 애도한다. 내게 놀람은 없었으나 이상하게…. 울림은 컸다. 나름의 방식으로 사회 환원을 실천하며 떠난 두 거목…그리고 거리엔 다시 ’욕망이라는 전차‘가 일상을 배회한다.
놀람과 울림, 그리고 욕망이라는 전차,
거인들의 명복을 빈다!
[신연강]
인문학 작가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