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021년 7월 13일자) 미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전문가 에세이] '신비 속의 잠과 꿈'에서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는 이렇게 칼럼을 시작한다.
“간밤에 꿈은 꾼 것 같은데 기억이 오락가락하네요. 여자도 같고, 고양이 같기도 한 것을 물속에서 건져주었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 감이 안 잡혀요. 내 꿈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불안증세를 가진 한 젊은 환자가 들려주는 꿈 내용이다.
성(Sex)과 더불어 잠과 꿈만큼 인간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주제는 별로 없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과학자, 의학자, 철학자들이 숱한 이론을 내놓았지만 극히 제한적인 지식에 불과하다. 아직도 잠과 꿈은 신비 속에 싸여있다.
그러면서 그는 꿈을 정신의학적으로 분석한 후 다음과 같이 글을 맺고 있다.
꿈은 왜 꾸는 걸까? 꿈을 과학적으로 처음 분석하기 시작한 사람은 20세기 초 프로이드 선생이다. 프로이드는 무의식 속에 억압된 욕망과 갈등이 꿈을 통해 표현되어지는 것이라 주장했다. 칼 융은 억압된 욕망, 감정뿐 아니라 깨어있을 때 하고 싶었던 일상의 모든 게 꿈을 통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일종의 보상심리 과정이다.
반면 신경뇌과학자들은 꿈이란 단지 뇌간(Brain stem), 해마, 대뇌피질로 이어지는 의식회로와 기억회로 사이에서 생기는 뇌 활동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즉 예전에 형성된 기억들이 의식상태에선 서로 연관이 안 되어 탐색이 어려웠으나 뇌조직의 전기 화학적 영향으로 발생한 꿈을 통해 처리하고 강화되는 과정에서 연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꿈은 무작위로 일어나고 이해하기 힘든 뇌 활동이지만 낮 동안 경험한 여러 사건이나 상황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모든 학자들이 동의한다. 꿈의 의미에 대한 다양한 설명들이 있다. 신체적, 정신적 휴식을 위한 것, 몸의 노폐물과 뇌 속에 쓸데없이 남아있는 찌꺼기 기억을 걸러내는 과정,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는 인간의 무한한 창의성을 끌어내기 위한 목적,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불행한 사태를 미리 암시해주는 점쟁이 역할 등이다.
또렷하고 앞뒤 연결이 잘 되어 줄거리가 있는 내용의 꿈은 무의식이 일을 많이 한 징표다. 윤리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욕망, 공격성으로 고통에 처해있는 무의식은 어떤 방법으로든 그것들을 의식 밖으로 내보내려고 한다. 그런데 의식의 저항이 너무 심해 의식의 입맛에 맞게 재단할 수밖에 없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전환, 승화 같은 방어기제의 형성이다.
앞의 젊은 환자의 꿈은 어설프고, 이상하며 별 의미도 없고 앞뒤가 잘 연결이 안 되어있다. 시쳇말로 개꿈이다. 개꿈은 오히려 환자에게 편안한 꿈일지도 모른다. 마음속의 문제들이 심하지 않아 잠자는 동안 무의식이 크게 신경 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좋은 꿈인데요. 불안증세가 좋아지고 있다는 꿈입니다.” 환자에게 웃음을 보이며 꿈에 대해 간단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의 지성知性과 이성理性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우리는 때때로 경험하게 된다. 말하자면 어떤 계시나 예고처럼 우리가 밤에 자다 꿈꾼 대로 같은 일이 생시에 일어날 때 말이다.
가족 형제나 친구 중 그 누가 꿈에 나타나면 그 사람의 별세 소식을 듣게 된 일이 있었고, 딸 셋이 영국 만체스타에 있는 음악기숙학교에 다닐 때 나는 미국 뉴욕에 있었는데 꿈에 애들을 본 다음 날 애들 편지를 받곤 했었다.
또 하나 비근한 예를 들자면 1984년 겨울에 있었던 일이다. 자동차 타이어를 눈이 와도 잘 미끄러지지 않는 'all-season' 타이어로 바꿔 끼운지 며칠 안 돼 그해 처음으로 눈이 많이 왔다.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자동차의 속도가 나지 않아 눈 때문이려니 생각하고 계속 차를 몰았다. 한동안 가다가 차가 몹시 덜컹거리기 시작하길래 나는 길옆에 차를 세우고 보니 오른쪽 뒷바퀴가 공기압이 모자란 채로 굴러온 탓에 타이어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그래서 임시로 스페어타이어로 바꿔 끼우고 타이어를 산 씨어즈 백화점 자동차 부품 파는 데로 가서 새것으로 교환했다. 그 전날 밤 꿈에 내가 며칠 전 새로 사 신은 구두 오른쪽만 갑자기 다 닳아 해어져서 신발을 산 구둣방에 갖고 가 새것으로 오른쪽만 바꿨었다.
이와 같은 일은 수많은 사람들이 옛날부터 체험해왔겠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무도 신비롭고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꿈을 꾼 적도 있다.
1986년 말 나는 굉장히 높은 산 까마득한 절벽을 타고 산꼭대기 정상까지 기어오르는 꿈을 꾸었다. 밑에서 받쳐주고 밀어주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그리고 이 등산 등정登山 登頂 코스 내내 아주 작고 예쁜 허밍버드Humminbird 벌새 한 마리가 내 얼굴을 마주 보고 미소 짓듯 노래하며 마치 꿀을 먹고 꽃가루를 매개하는 꿀벌처럼 윙윙 내 눈앞에서 제자리걸음 아닌 제자리 비행으로 나를 인도해 주는 꿈이었다.
이 꿈은 지금도 내 기억에 너무나 생생하다. 공교롭게도 이 꿈은 내가 내 큰 딸 해아海兒가 만 18세가 되는 1986년 11월 27일 쓰기 시작해서 내가 만 50세 되는 1986년 12월 30일 장문의 편지를 끝맺은 날 밤에 꾼 것이었다.
나는 첫 아이로 쌍둥이 딸을 보았었다. 쌍둥이여서인지 체중 미달로 낳자마자 조산아 보육기 인큐베이터에 들어갔고, 태어난 지 하루 만에 한 아이는 숨지고 한 아이만 살아남았다. 애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나는 두 딸 애들 이름부터 지어놓았었다. 한 아이는 태양처럼 언제나 빛나고 만물을 육성하며 희망을 주는 아이가 되라고 태양 ‘해’ 자字, 아이 ‘아兒’ 자字 ‘해아,’ 또 한 아이는 바다처럼 무궁무진한 삶의 낭만이 넘치는 아이가 되라고 바다 ‘해海’ 자, 아이 ‘아兒’ 자字 ‘해아海兒’로.
아마도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숨진 ‘해아’가 내 꿈에 벌새로 나타났었는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래서였을까, 이 벌새 꿈을 꾼 다음, 내 첫 저서 ‘해아야, 코스모스바다로 가자’를 비롯해 전혀 생각하지도 꿈도 꾸지 않았던 책을 20여 권 내게 되었으리라.
자연 만물 중에 벌새야말로 시詩같은 존재가 아닐까. 그리고 우리 모든 사람에게 이 시詩같은 ‘벌새’가 존재하리라.
아, 그래서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도 “삶의 어느 한 분자分子도 그 속에 시詩를 품지 않은 것은 없다. There is not a particle of life which does not bear poetry within it.”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는 또 이런 말도 남겼다고 한다.
“글을 쓴다는 건 네가 믿는 걸 발견하는 예술이다. The art of writing is the art of discovering what you believe.”
독일의 시성詩聖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1882)는 말했다.
“날마다 늘 새롭게 선택하는 자만이 삶과 자유를 누릴 자격 있다. Of freedom and of life he only is deserving who every day must conquer them anew.”
현대 과학에서 최면에 대한 연구조사 끝에 발견한 사실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 두뇌 컴퓨터에 입력되어 우리가 다 기억할 수 있으나 우리가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고. 다시 말해 우리가 우리의 기억을 편집한다는 것이다.
공포심, 반감, 투쟁심, 또는 사태의 압박감, 불안, 초조함 때문에 많은 기억들을 우리 의식에서 지워버린다는 거다. 그래서 기억이라는 과정을 거친 것은 죄다 일종의 픽션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역사와 문학이 같은 것이 되지 않을까.
예부터 덧없는 인생의 무상無常함을 가리켜 인생은 일장춘몽이라 했다. 젊어서는 앞날에 대한 무지갯빛 꿈으로 부풀고 나이 들면 주마간산走馬看山이듯 홱홱 지나쳐버린 일들이 정말 꿈결만 같다.
그렇다면 젊어서는 꿈 많은 사람이, 나이 들어서는 추억 많은 사람이 진짜 부자가 아닐까. 또 그렇다면 종자씨 까먹기나 참외 서리보다 봄에 씨 많이 뿌려 무르익은 오곡백과 가을걷이가 훨씬 더 푸짐 느긋하게 신나고 보람이 있으리라.
우리가 밤에 자면서 꿈꾸는 동안은 꿈인 줄 미처 모르다가 잠에서 깨어날 때에라야 꿈이었음을 알게 되듯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삶이 또한 꿈이었음을 알게 될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면서 꿈꾸는 동안에도 더러 어렴풋이나마 모든 것이 한갓 꿈속의 일인 줄 알게되는 수가 있는 것처럼 이 세상 삶이 어떻든 간에 또한 꿈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가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가 살아 숨 쉬며 잠 깨어 꿈꾸는 꿈이야말로 우리가 꿈속에서 꿈꾸는 꿈이리라. 또 누구든 자기가 꾸고 싶은 꿈만 꾸고, 꾸기 싫은 꿈은 안 꿀 수 없을까. 문제는 우리가 어떤 꿈을 꿀 것이며, 꾸는 꿈을 우리가 어떻게 풀이하는가 하는 일 것이다.
흔히 우리가 꿈속에서 경험하는 일들을 꿈 전문가들은 어떻게 해석하는지 알아보자. 개미 또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죽어라 하고, 어떤 괴인이나 괴물로부터 도망치려 해도 손과 발이 말을 안 듣고, 몸이 조금도 앞으로 나가주지 않는 꿈은 직장이나 결혼이나 친우 관계 등에 얽매어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함정 또는 궁지에 빠져있는 느낌 때문이라고.
높은 절벽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꿈은 자신의 체면 손상이나 사회적인 지위 상실을 걱정하는 까닭이고, 공중을 나는 꿈은 비약적인 성공이나 생활 향상을 희망하거나 세상의 온갖 근심과 걱정 다 떨쳐버리고 세속적인 일들로부터 초탈해보고 싶은 염원에서 비롯한다고 한다.
이따금 벌거벗은 꿈을 꾸게 되는 것은 우리의 거짓되고 위선적인 면이 드러나 우리의 적나라한 진상이 세상에 폭로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시험 문제를 앞에 놓고 그 가운데 가장 쉬운 문제 해답조차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낑낑거리는 꿈은 일상생활에서 하찮은 일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는 자신 결핍을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버스나 기차 혹은 배나 비행기를 놓치는 꿈은 절호의 찬스를 놓칠까 봐 걱정하는 것이거나 갈 길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고 착각하는 데서 발생한단다.
이러한 꿈 전문가들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꿈보다 해몽이 좋아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익히 들어오지 않았나. 어디 그뿐인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 어머니나 다른 분들이 태몽을 꾸셨다고 하면서 여러 가지 태몽에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시지 않았는가.
좀 더 생각해보면 이 태몽이란 것도 태몽에서 시작해서 태몽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태생 전 태교胎敎 태 교육으로부터 출발해서 태생 후 탯줄 아닌 탯줄로 이어지는 작명 철학으로 정신적 세뇌작업 또는 심리적 승화작용을 통해 꿈꾸듯 하는 삶의 꿈이 연면히 계속되는 것이리라. 그런즉 우리 모두 서리서리 꿈서리하렷다.
‘시련은 인생을 아름답게 한다’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왕위를 이어받게 된 영국의 왕 조지 5세. 그에게 왕의 자리는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 조지 5세는 막중한 책임감과 긴장감에서 오는 불안으로 날마다 힘들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도자기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작은 도시에 있는 한 도자기 전시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모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도자기 작품을 관람하면서 도자기의 아름다움에 크게 감탄하던 조지 5세는 두 개의 꽃병만 특별하게 전시된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두 개의 꽃병은 같은 재료를 사용하였고, 무늬까지 똑같은 꽃병이었지만 하나는 윤기가 흐르고 생동감이 넘쳤는데 다른 하나는 전체적으로 투박하고 볼품없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조지 5세는 관리인에게 물었다.
“어째서 같은 듯 같지 않은 두 개의 꽃병을 나란히 진열해 놓은 것인가?”
그러자 관리인이 대답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는 불에 구워졌고, 다른 하나는 구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아서 고난과 시련은 우리 인생을 윤기 있게 하고 생동감 있게 하며 무엇보다 아름답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특별히 함께 전시해놓은 것입니다.”
내 세 딸이 어렸을 때 밤이면 애들 잠들 때까지 내가 읽어주던 동화 중에 ‘쪼끄만 까만 수탉’ 이야기가 있다. ‘꼭끼독 꼬끼오’ 하고 쪼끄만 수탉 한 마리가 아침이면 닭장 위에 올라서서 울었다. 때로는 ‘꼬꺄독 꼭꾜’ 하기도 했지. 제 목청이 얼마나 좋은가 뽐내면서. 그렇지만 이 쪼끄만 수탉은 제가 살고 있는 닭장이 구질구질하고 지겨워졌다.
그는 제 몸이 새까만 대신 번쩍번쩍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빛이었으면 했고 좁은 닭장을 떠나 넓은 세상 구경하고 싶었다. ‘꼭고댁 꼭꼭’ 하고 울기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하루는 큰맘 먹고 닭장을 떠나 세상 구경하러 나섰다. 얼마만큼 가다 보니 상점들이 많은 어느 마을이 나왔다. 한 상점을 들여다보니 눈부시게 번쩍거리는 물건들이 상점 안에 가득차 있었다. 그는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뒤편에 있는 커다란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주인아저씨를 보자 그는 말했다.
“아저씨, 저는 쪼끄만 수탉 신세가 싫어요. 저도 아주 근사하게 황금빛이 되어 세상을 두루 보고 싶어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아저씨.”
“네가 정 그렇다면 내가 널 도와줄 수 있지. 암, 있고말고. 너 이 마룻바닥에 금가루 보이지. 자, 그럼, 이 바닥에 네 몸을 뒹굴리거라. 그러면 네 몸이 햇빛처럼 황금빛이 될 테니.”
주인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그는 신이 나서 금가루 속에 막 뒹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정말 황금빛이 될 때까지.
이때 마침 이 마을 성당 신부님이 성당의 성탑 꼭대기에 세울 바람개비를 주문하러 상점에 들리셨다.
“신부님이 원하시는 물건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가게 주인아저씨는 이 쪼끄만 수탉을 가리켰다. ‘꼭끼어 댁 꼬끼오’ 하고 그는 좋아서 목청껏 울었다. 곧 이 수탉은 성당의 성탑 꼭대기에 왕자처럼 올라앉아 세상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런데 좀 있으니까 그는 혼자서 외로워졌다. 이것이 황금빛으로 근사하게 높이 올라앉아 세상을 내려다보는 대가였다.
여기서 우리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의 우화집 선구자先驅者 The Forerunner (1920)’에 나오는 ‘바람개비The Weathercock’를 감상해 보자.
바람개비
바람개비가 바람 보고 말했다.
“넌 왜 늘 한 방향으로만
내 얼굴을 향해 불어오지.
단조롭고 지겹게도 말이야.
너 좀 제발 다른 방향으로
반대쪽으로 불어 볼 수 없겠니?
난 너 때문에 내가 타고 난
천성 천품 내 평정심平靜心을 잃고 있어.”
바람은 아무 대답하지 않고
허공 보고 웃을 뿐이었다.
The Weathercock
Said the weathercock to the wind.
“How tedious and monotonous you are!
Can you not blow any other way but in my face?
You disturb my God-given stability.”
And the wind did not answer.
It only laughed in space.
아, 그래서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1809-1849)도 이런 말을 했으리라.
“시련이 없다는 것은 축복받은 일이 없다는 거다. Never to suffer would never to have been blessed.”
“우리가 보거나 보이는 모든 건 꿈속의 꿈일 뿐이다. All that we see or seem is but a dream within a dream.”
“우리는 사랑 이상의 사랑으로 사랑했노라. We loved with a love that was more than love.”
아, 그래서 영국의 미술 평론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도 또 이렇게 말했으리라.
“세상에 삶 이상의 부富와 재산이 없다. (누군가를 사모하고 또는 무언가에 경탄하며 찬미하는)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한 삶 말이다. There is no wealth but life, including all its power of love, of joy, and admiration.”
그렇다면 사랑 이상의 삶이 없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정녕코 그렇다면 사랑 이상의 종교도 철학도 예술도 진실도 없지 않으랴.
어려서부터 내가 불러온 사랑의 주문呪文 ’사슴의 노래' 읊어 보리라.
살의 주문呪文: 사슴의 노래
별들의
만나고
헤어짐이
그 어느
누구의
뜻과
섭리에서인지
알 수 없어도
너와 내가
마주쳤다
떨어짐도
저 별들의
반짝임처럼
우리의
눈 한 번
깜짝함이리.
봄 여름
가을 겨울
눈비 바람
오가는 것이
그 어떤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어도
너와 내가
이 세상에
왔다
가는
것도
저 풀잎에
맺히는
밤 이슬과 서리
아침 햇볕에
녹아 스러지듯
우리의
숨 한 번
맺혔다 지는
것이리.
하늘처럼
사람도
바람만
마시고
구름 똥
쌀 수 없어
우리 서로
잡아먹고
살 수밖에
없지만
우리 비록
꿈속에서나마
여우나 늑대
되기보다는
저 아득히
멀고 먼 옛날
옛적으로부터
솟구쳐
샘솟는
뜨거운
우리
그리움의
눈물이
그 어느
땅 끝까지
우리 서로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을
파고드는
저 깊은
산골짜기
시냇가에서
뛰노는
사슴이
되어 보리.
꿈이어라
꿈이어라
우리 삶은
꿈이어라
꿈속에서
꿈꾸는
우리 삶은
꿈이어라.
우리 삶이
꿈이라면
우리 서로
사랑하는
가슴에
수놓는
사슴의
꿈이어라.
우리 삶은
꿈이기에
꿈인 대로
좋으리라.
우리 삶이
꿈 아니라면
그 어찌
사나운
짐승한테
갈가리
찢기는
사슴의
슬픔과
아픔을
참아
견딜 수
있으리.
숨이어라
숨이어라
우리 삶은
숨이어라
숨 속에서
숨쉬는
우리 삶은
숨이어라.
우리 삶이
숨이라면
우리 모두
하늘
우러러
숨 쉬는
사슴의
숨이어라.
우리 삶은
숨이기에
숨인 대로
좋으리라.
우리 삶이
숨 아니라면
그 어찌
천둥 번개
무릅쓰고
뛰노는
사슴의
기쁨과
즐거움을
마냥
맛볼 수
있으리.
우리 서로
사랑하는
가슴이
준 말
사슴이
되어라.
인생이 소일거리가 아니라면 사랑 또한 탕진할 욕정이 아니고 성취할 자아완성이리. 사랑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모르지만, 사랑의 이슬방울 방울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비춰 주고, 그 속에 삶의 모든 열정과 힘이 들어 있으리.
소녀, 소년, 여자, 남자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가 다 누구나 하나같이 사랑과 삶을 나누는 사랑과 삶의 물방울들로 흘러흘러 코스모스바다로 가고 있으리. 봄에는 아지랑이로, 여름에는 소나기로, 가을에는 서리로, 겨울에는 눈꽃과 고드름으로 우리 모양새가 바뀌지만…
영어 격언 가운데 ‘고향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You can’t go home again.’란 말이 있듯이, 나는 나의 고향, 엄마의子宮 속으로도 모국母國 한국의 수도 서울로도 돌아갈 수 없겠지만, 그래도 노스탈지아Nostalgia 鄕愁의 구름바다 물결을 타고 날아온 나의 시간여행은 열다섯 시간의 비행 끝에 인천 공항에 내린다는 기내 방송으로 중단되었다.
갑자기 스페인 가수 훌리오 호세 이글레시아스Julio Jose Iglesias의 노래 ‘갈리시아에 바치는 노래/ Un canto a Galicia/ A song to Galicia와 패티김이 부른 ‘서울의 찬가’ 가사가 귓속에 아니 가슴 속에 메아리쳤다.
이제 우리 열다섯 형제자매 중 나 혼자 남아 내 부모의 나라 고향 땅을, 그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 코스모스 피는 가을철에 밟게 된다는 벅찬 감격에 나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사랑의 이슬방울’ ‘삶의 물방울’ 인생 아니 우주 나그넷길 길손 ‘코스미안’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나는 집 떠나 가출 소년이 되었고, 한국에 살면서도 ‘타향살이’ 하듯 했으며, 일찍부터 가을바람이 났었나 보다. 그래서였을까,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나는 언제나 가을살이를 해오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춘기思春期 때 지은 다음과 같은 사추기思추期 ‘가을 노래’ 부르며…
어느덧 내 나이 85세로 인생 80 고개 중반이니 인생 4계 절로 치자면 내 몸은 겨울철 끝자락에 매달려 있음이 분명하지만 내 마음은 아직도 가을철에 머물러 있나 보다.
낙엽이 진다
타향살이
나그네 가슴 속에
낙엽이 진다.
그리움에 사무쳐
시퍼렇게 멍든
내 가슴 속에
노랗게 빨갛게
단풍 든 생각들이
하염없이 우수수
흩날려 떨어지고 있다.
임금도 거지도
공주도 갈보도
내 부모 형제
그리운 벗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나둘 모두
삶의 나무에서
숨지어 떨어져
낙엽이 되고 있다.
머지않아 나도
이 세상천지에서
내 마지막 숨을
쉬고 거두겠지.
그러기 전에
내 마음의 고향
내 영원한 고향
내 님 코스모스
품에 안기리라.
엄마 품에 안겨
고이 잠드는
아기같이.
잠자던 꿈에서
깨어날 때
잠에서 깨어나듯
꿈꾸던 삶에서
깨어날 때
삶의 꿈에서도
또한 깨어나
삶이 정말
또 하나의
꿈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아
알게 되겠지.
그렇다면
살아 숨 쉬며
꿈꾸는 동안
새처럼
노래 불러
산천초목의
춤바람이라도
일으켜 볼까?
정녕 그렇다면
자나 깨나
꿈꾸는 동안
개구리처럼 울어
세상에 보기 싫고
더러운 것들 다
하늘의 눈물로
깨끗이 씻어 볼까?
정녕코 그렇다면
숨 쉬듯 꿈꾸며
도道 닦는 동안
달팽이처럼
한 치 두 치
하늘의 높이와
땅의 크기를
헤아려 재볼까?
아니면
소라처럼
삶이 출렁이는
바닷소리에
귀 기울여 볼까?
아니야
그도 저도 말고
차라리 벌처럼
갖가지 아름다운
꽃들 찾아다니며
‘사랑의 꿀’을
모으리라.
그러면서
꿀같이 단꿈을
꾸어 보리라.
(I composed this poem in my adolescence.)
Autumn leaves are falling
I’ve been traveling
Far away from home.
Autumn leaves tinted
In yellow and red
Are falling in my pining heart
Bruised black and blue.
Prince and pauper,
Princess and harlot,
Father and mother,
Brothers and sisters,
Friends and neighbors,
All are falling, one by one,
From the tree branches of life.
Soon it’ll be my turn to fall.
Before then I’ve got to go home
To fall fast asleep like a baby
Deep in peace in the bosom of the Cosmos
As I realize that
It was only a dream
When I wake up
In the morning,
I’ll be realizing that
Life too was but a dream,
When I wake up from this life-dream,
Dreaming.
If so, while breathing and dreaming,
Shall I sing like a bird to raise a wind
To dance with trees and grasses of
The mountains and streams of the valleys?
If so, while breathing and dreaming,
Shall I croak like a frog for rain
To cleanse the earth of
All the dirty and ugly things
With the teardrops of the heaven?
If so, while breathing and dreaming,
Shall I stretch out stalks like a snail
To measure up, inch by inch,
The height of the sky
And the size of the earth?
If so, while breathing and dreaming
Shall I listen to the song
Of the waves
Like a conch shell?
Nah, like a bee,
I’d rather call
On beautiful flowers
And dream sweet dreams,
Collecting the honey of love.
저 유명한 ‘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1726)’를 쓴 아일랜드의 풍자 작가 조너슨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1745)가 그의 ‘여러 가지에 대한 생각들Thoughts on Various Subjects’이란 에세이에서 통탄했듯이,
“우리는 서로 미워할 만큼의 종교만 갖고 있을 뿐, 서로 사랑할 만큼의 종교를 갖고 있지 못하다. We have just enough religion to make us hate, but not enough to make us love one another.”
여기서 궤변 같은 나의 ‘장타령’ 아니 아플 ‘아(ㅅ)’ 자字, 아릴 ‘리(ㅅ)’ 자, 사랑 ‘랑’ 자 ‘아리랑’ 타령, 아니 미칠 ‘미(ㅅ)’ 자, 아 서라 ‘아(ㅅ)’ 자, 차라리 ‘리(ㅅ)’ 자, ‘미아리’ 타령 한 곡 뽑아 보리라.
삶의 다른 한쪽
죽음을 의식하고
사는 것 이상의
종교도
죽음을 안고
사는 삶을
더할 수 없이
잘살아보는 것
이상의 예술도
사랑으로 숨 쉬고
사는 사랑 이상의
삶도 없으련만…
정녕 삶의 본질이
사랑이 아니더냐?
삶의 숨결이 사랑이요.
삶의 날개가 사랑이요.
꿈꾸는 삶이 사랑이요.
삶의 완성이 사랑이요.
삶의 시작도 끝도
사랑이 아니더냐!
사랑을 모른 채로
사는 억만년보다
사랑하는 한순간
얼마나 한없이 더
보람되고 복되랴!
취할 바에는
삶에 취하고
사랑에 취하리라.
미칠 바에는
삶에 미치고
사랑에 미치리라.
정말
취하도록
미치도록
죽도록
Wasn’t love
The essence
Of life, indeed?!
Breaths of life were love.
Wings of life were love.
Dreams of life were love.
Completion of life was love.
Wasn’t the beginning
And the ending of
Life
Love?!
I’d rather live
For a moment
In love
Than
For million years
Out of love.
Yes, this would be
Infinitely more blissful!
Were I to be drunk,
I’d get drunk in life.
Were I to be drunk,
I’d get drunk in love.
Were I to be mad,
I’d get mad in living.
Were I to be mad,
I’d get mad in loving.
Really,
Drunkenly,
Madly,
To death!
정녕코 사랑 이상의 종교도, 철학도, 예술도, 진실도 없다면, 사랑 없는 삶은 그야말로 오아시스 없는 사막, 꿈 없는 잠, 숨 끊긴 목, 곧 꺼진 불이라고 해야 하리라.
If a dewdrop is evanescent,
So is life.
Must it be as evanescent
As the bloom of flowers and
The fragrance they exhale!
Must it be a dream,
Must it be a dream,
Life must be a dream,
Must it be dreaming in a dream.
If life is a dream,
Let it be a dream of
Engraving our loving hearts.
Let life be a dream.
If it’s not a dream,
How could one bear
The pain and sorrow of
Deer being torn by beasts?
Must it be a breath,
Must it be a breath,
Life must be a breath,
Must it be breathing in a breath.
If life is a breath,
Let it be a breath of
A deer breathing in the sky.
Let life be a breath.
If it’s not a breath,
How could one have
All the fun and pleasure of
A deer frolicking,
Braving lightning and thunder?
Let us be deer/dear
The symbol of
Our loving hearts.
옳거니, 그 말이 맞구나!
고통을 당할 바에는
사랑 때문에
넘치는 사랑 때문에
받는 고통 이상
또 무엇이 있으랴.
사랑이 가능만 하다면
사랑이 절로
샘솟기만 한다면
어떤 슬픔이나 아픔도
감미롭기 때문이지.
이 세상에 그 어느 누구에게도
너무 많이 줄 수 없는 것이
세상에 사랑밖에 또 있으랴.
아무리 쏟고 또 쏟아도
탕진되지 않고
고갈되지 않는 것이
세상에 사랑 말고
또 있으랴.
아무리 주고 또 줘도
그 더욱 주고 싶고
아무리 받고 또 받아도
그 더욱 받고 싶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아니 태평양 바닷물과
히말라야산맥 에베레스트산이
마르고 다 닳도록
결코 주는데 지치지 않고
받는데 싫증 나지 않는 것
세상에 오로지 사랑뿐이리.
미국의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1807-1882)의 말처럼
사랑은 흐르는 샘물같이
비록 목마른 이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하는 때에라도
흘러흘러 바다로 흐르다가
날씨가 가물기라도 하면은
홀연히 온 데 간 데 흔적 없이
없어져 자취를 감춰버리지.
그래도 증발해버린 샘물은
결코, 없어진 것이 아니고
저 푸른 하늘 위로 떠도는
한 조각 구름이 되었다가
빗물로 쏟아져 내려와서
넘치도록 샘을 채워주지.
Talk not of wasted affection,
Affection never was wasted;
If it enrich not the heart of another,
Its waters, returning
Back to their springs,
Like the rain,
Shall fill them
Full of refreshment;
That which the fountain sends forth
Returns again to the fountain.
Henry Wadsworth Longfellow
Although I can’t return to my Mom’s womb nor to S(e)oul, the capital city of my Motherland, as the English proverb goes, “You can’t go home again” my nostalgic time travel was interrupted by the announcement that the airplane will be landing at the Incheon Airport of Seoul after 15-hour flight.
Suddenly, the ‘Hymn of S(e)oul’ sung by Patti Kim and Julio Iglesias’ ‘A song to Galicia’ (1972 whden I left Seoul) filled my heart.
Now that all my siblings are gone, I’m the only one left out of 15, still treading this father/motherland of ours, and I could hardly breathe at this intensely nostalgic moment.
Now it’s my favorite season autumn here in Korea. Wherever you go, you are greeted by cosmos flowers all along the country roads.
I came here on earth uninvited and lived as my heart beat, always drunk on love. Every breath I breathed was a miracle, believing that one human moment is much more worthwhile than the divine eternity meaningless to mortals. Life is not so serious, and yet full of mystery and wonder. I was so happy with a whiff of wind, a ray of sunshine, a child’s laughter, and everything of the world as anything was better than nothing.
I came to meet the ladies, the Avatars of Cosmos, but I don’t know where they are. If you ask me if they exist, I cannot say they do. If you ask me if they don’t exist, I cannot say they don’t. They are here and they are not here. They are the whole as one. You know that silence is the sound of time passing. Don’t you? They may be passing in silence, in and out of time. So please don’t ask me about the ladies. They are Cosmians born Arainbow of Love. For all of you, living here and now, are the very Cosmians, the very Avatars of Cosmos.
Thus as such a Cosmian myself, my cosmic journey is open-ended.
사랑으로 숨쉬듯 사는 삶은 순간 순간 완성되는 것이리.
살지 않고 쓰는 글은 헛소리일 뿐이리.
빌건대 이 글이 그런 글이 아니기를.
Life is fulfilled every moment when it is lived in love.
Life is totally wasted when it’s written about without living it.
This is not my case, I pray.
우리 모든 코스미안은 우주꿈 여행 중이다.
We all Cosmians are on our cosmic dream journey.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