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귀국선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꽃을

손로원·이재호·이인권

2021815, 민족의 기념일이다. 서글픈 환희의 날이기도 하다. 오늘로부터 꼭 76년 전 우리 민족,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로부터 해방광복을 맞이했다. 대한제국 건국 48,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26년 차이던 해, 일본 124대 히로히또 왕이 무조건항복을 선언한 1945815일은 우리나라 역사의 근대와 현대사의 분기령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부터 70년이 우리의 근대사이고, 이후 오늘까지의 현재진행형 나날을 현대사로 친다. 그해 통창(痛唱)된 노래 유행가가 <귀국선>이다. 우리나라 대중가요 100년사에서 1943~1947년 어간의 노래 자료는 희귀하다. 일본 군국주의의 패색이 짙어지고, 패망 전 우리와 관련된 자료들을 그들이 존안에 등한시(等閑視) 했기 때문이라는 풍설이 더 큰 아쉬움을 갖게 한다.

 

<귀국선>은 우리나라의 해방광복이 낳은 노래다. 그날은 음력 78, 수요일이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1910~1945년까지 해마다 우리나라 한반도에서 저항하던 우리 민족 26백여 명씩을 서대문형무소에 강제로 가두었고, 연인원은 10만여 명이 넘었다. 그들 중 10명 중 9명이 독립운동가였다. 뿐만아니라 해외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 유랑객은 또 얼마였던가.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사할린, 만주, 북간도, 상해, 일본 본토, 동남아, 카자흐스탄, 우즈벡 등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소련을 떠돌던 그들이 풀려나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상황을 묘사한 노래가 <귀국선>이고, 손로원과 이재호의 합작품을 이인권이 곡성탄가(哭聲歎歌)했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 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꽃을/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 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도 크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부모 형제 찾아서/ 몇 번을 울었던가 타국 살이에/ 몇 번을 불렀던가 고향 노래를/ 칠성 별아 빛나라 달빛도 흘러라/ 귀국선 고동 소리 건설은 크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백의 동포 찾아서/ 꿈마다 찾았던가 삼천리강산/ 꿈마다 빌었던가 우리 독립을/ 비바람아 그쳐라 구름아 날아라/ 귀국선 파도 위에 새날은 크다.(가사 전문)

 

1945815일 낮 12. 일본 히로히또(1901~1989)는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항복을 방송으로 선언한다. 그해 89일을 전후하여 일본은 사실상 항복을 결정했었다. 하지만 천황제 포함 여부가 항복의 조건 사항으로 내포되었던 것, 연합군사령관은 무조건항복을 요구했고, 일본 정부는 국가전쟁지도부 지하 벙커에서 숙의(熟議) 끝에 이를 수용한다. 86일 히로시마 원자폭탄(리틀보이, u-235 우랴늄탄) 투하와 89일 나가사키 원자폭탄(패트맨, p-239 플로토늄탄) 투하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항복을 받은 상대방은 연합군사령관을 겸한 미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 태평양전쟁의 일본 패망 종결이었다. 1937년부터 지속되어오던 중일전쟁도 일본의 패망으로 끝났다. 1931년 일으킨 만주사변을 근저로 일본이 국제연맹 규약을 어기고 불법 탄생시킨 만주국(수도. 신징 新京, 장춘)도 종지부를 찍는다. 우리 민족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34351일 만에 해방광복의 빛을 되찾았다. 우리 힘이 아닌 국제관계의 역학 구조 속에서. 불행 중 다행, 내 고향을 내 땅이라고 부르고 내 이름을 우리말로 쓰고 부를 수 있는 서글픈 감격이었다.

 

이때부터 귀국의 물결이 일렁거린다. 중국의 상하이와 대련, 소련의 블라디보스톡, 일본의 시모노세키, 동남아시아 등등의 항구에서.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강제 동원자·징집자·해외망명자·유학자·근로정신대·종군위안부 등등. 당시 고향땅을 그리며 눈물 지우던 동포들, 그 누가 여기에 예외일 수가 있었겠는가. 출항지는 제각각이었지만 귀항항(歸港港)은 부산항구 제일 부두. 인천항·원산항인들 예외였을까. 이 감격·서러움·희망이 교차 되는 질곡의 근대사와 현대사의 시간경계지대의 시대 서정을 손로원이 노랫말로 얽었다. 1절은 그리던 조국에 돌아오는 동포들의 감격을, 2절은 배 위에서의 들뜬 마음을, 3절은 새날에 대한 희망을 그렸다. 무궁화꽃과 태극 깃발이 노래의 모티브다. 멜로디는 4분의 2박자 트로트 리듬에 형식이 무시된 28마디의 곡이다. 노랫말은 손인호가 부산항 부두로 들어오는 귀국선의 모습을 직접 보고 만들었단다. 그 당시 고국 부산항을 향하려던 출항지 일본 항구의 아비규환(阿鼻叫喚) 상황은 영화 <덕혜옹주>가 대변하는 상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귀국선 노래 ▶ http://youtu.be/eeGhGgVnukU



<귀국선>. 망망대해 검은 물결 현해탄(玄海灘) 만경창파 위의 고국을 향한 배에 실었던 희망과 광복의 현실은 차갑고 따갑게 맞물린다. 미국과 소련의 정치적 합의 원한의 38, 남조선노동당 창당과 맞물린 좌우 이념 대립, 임시정부의 미온적 귀국, 찬탁과 반탁의 혼란, 이념의 극과 극의 대칭점 남북한 각각 정부수립, 동족상잔의 비극 6.25 전쟁 등등. 이 노래 끝자락에는 남인수의 <가거라 38> 노래가 매달린다. 서해안 옹진반도로부터 개성 송악산~강원 신남~강원 양양군 현북면 잔교리~동해안까지 이어지는 38선이 다 같은 고향 땅을 오고 가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이때부터 민족의 동질성(同質性)과 이념의 상극성(相剋性)을 극복하고, 자유민주주의로의 통일을 지향해야 하는 한반도가 품은 정치공학적인 방정식이 우리 민족에게 숙제로 놓인다. 38선이 6.25 전쟁을 치른 1950~1953년 이후에는 휴전선으로 획정되어 오늘에 이른다. 어쩌랴, 이 동질성과 상극성을 오늘날 정치꾼들 상당수는 그들 패거리의 권력과 정치놀음으로 이전투구(泥田鬪狗)와 아전인수(我田引水)를 하고 있으니. 자유민주주의로의 평화통일 깃발은 언제 펄럭거릴까. 무궁화꽃이 삼천리 금수강산에 만발할까.

 

<귀국선> 노래 발표 당시 35세이던 손로원은 1911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손희몽·불방각·손영감·나경숙·부부린·남북평 등의 예명을 사용하였으며, 우리나라 근현대사 속에서 대중가요계의 불세출의 작사거장(作詞巨匠)이라 할 만하다. <물방아 도는 내력>, <봄날은 간다>, <잘 있거라 부산항>, <홍콩아가씨>,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샌프란시스코> 등등이 그의 손끝에서 씌어 졌다. 그는 6.25 전쟁 당시 부산에서 단칸방 벽에 세계지도를 붙여 놓고 이국정서가 가득한 노랫말을 만들었단다. 특히 <샌프란시스코> 노래는 당시 우리나라를 돕기 위하여 부산항에 들어온 병원선에 타고 있는 간호사를 보고서 선물을 하려고 노래를 지었단다. 그의 성장기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정규교육을 받은 근거는 없으며, 독학으로 대중가요 작사를 익힌 것으로 본다. 그는 미술로 대중예술계와 인연을 맺으면서, 1930년대에 작사 활동을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 노래 <귀국선>이 도화선이다. 그는 반야월과 함께 19501960년대를 대표하는 작사가로 활동했으며, 두주불사(斗酒不辭) 주종물문(酒種不問)의 애주가로 유명했으나, 사적인 삶에 관한 자료나 증언은 거의 없는 편이며, 19731211일 향년 6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귀국선> 노래는 신세영(본명 정정수, 1926~2010. 동래 출생)이 녹음한 첫 음반이 실패한 이후 무대공연을 통해 알려졌다고 하며, 1945년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이인권이 1차 녹음을 하고, 19512년 무렵 이인권이 재 취입하여 흥행에 성공했단다. 당시의 혼란한 상황과 기록물의 부재, 자료 존안의 불가항력적 상황을 고려하면, 그 시기 대중가요에 대한 정밀연구도 우리 대중문화예술의 큰 과업으로 볼 수 있으리라. <귀국선> 노래에는 귀국선과 관련한 아픈 상흔도 남아 있다. 후키시마호 침몰 사건은 어찌 되새겨야 하나. 1945824, 패망한 일본은 해군 후키시마호에 한국인 강제 징용자들을 태우고 부산항을 향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이 배는 그날 일본 마이즈로 앞바다를 항행하다가 원인 미상으로 폭발하여 침몰한다. 일본 정부는 폭발 원인을 미군의 기뢰로 지목하고, 한국인 524명이 희생됐다고 발표했다. 76년의 세월 속에 묻혀 있는 우리 근대사의 미궁(迷宮)이다.

 

해방광복 76주년 기념일인 오늘, 카자흐스탄에서 홍범도(1868~1943, 평양 출생) 장군 유해를 대한민국 전용 비행기로 모셔왔다. 객사타계(客死他界) 78년 만이다. 우리 민족의 해방광복 8년 전이던 1937년 연해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우리 독립운동가와 한민족을 소련 당국(스탈린)9,288km의 시베리아 대륙횡단 열차에 강제로 탑승시켜 중앙아시아지역으로 분산 시킨 마지막 지역에 이주 된 분이 홍범도 장군이다. 가장 열열한 민족주의자이면서, 일본군을 대파한 봉오동전투(1920.6.6.~7)의 주역으로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이었기에 가장 먼 곳, 가장 마지막 역에 내리게 했단다. 우리 민족이 1870년대부터 연해주 거주를 시작한 곳은 블라디보스톡 개척리, 신한촌 지역이다. 그 당시 러시아 사람들은 이곳을 카레이스카 야슬라보드카(한인촌)로 불렀다. 대중가요 유행가는 민족의 보물이다, 유행가에 얽힌 사연을 해부하면 민족의 역사가 도사리고 있다. 이 도사림 속에는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 아버지의 아버지들 삶이 살아 숨 쉬고 있다.


 

2021년 아직도 사할린과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한 연해주, 중국 동북 3,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등), 일본 등지에는 귀국을 앙망하는 우리 민족의 후예들이 많고 많다. 타국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유해들도 많다. 1910326일 만주국 뤼순(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신 안중근 장군(1879. 황해 해주 출생)의 유해는 언제 어디서 찾아서 모셔올꼬. 그분들을 귀국선 배로, 귀국 항공기로 온전하게 모셔올 날을 손 모아 기원드린다. ~ 무궁화꽃 하나로 필 자유대한민국이여.



[유차영]

시인

수필가

문화예술교육사

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유차영 519444@hanmail.net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8.15 16:48 수정 2021.08.15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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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