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센터에서 일을 마치고 나서려는데 갑자기 한 중동계로 보이는 뚱보 여자가 심하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왜 쳐다보는 거야"라고 있는 힘을 다해 나에게 소리쳤다. 나는 물론 옆 테이블에 앉아 핸드폰을 보던 사람이 놀라 멈추고 지나가던 사람들 얼굴들을 모두 모이게 하면서, 아이스크림을 먹던 숟가락을 입에 물고 선 사람의 놀란 모습도 눈에 띄었다.
더욱 놀란 당사자인 나는 끓어 오르는 속을 수습하기 위해 속으로 하나, 둘 숫자를 세고 난 뒤, "왜 내가 너를 쳐다봐야 하는데" 하고 물어보았다. 그 말에 순간 무안한 듯 얼굴을 살짝 돌리다 성급히 가방에서 무언가 꺼내는 척을 해가면서 서둘러 경솔하게 만든 자신의 얼굴을 가방 속에 쳐넣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표현 중에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란 말이 떠올랐다. 순간 무언가에 생각에 젖어있던 나의 얼굴이 그녀에게는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변태적인 속내로 쳐다보는 줄 알았는가 보다. 미안할 것도 없이 내가 쳐다봐야 할 사람이 왜 하필이면 너냐고 말했다. 아무리 뜯고 다시 맞춰 놓아 보아도 그 얼굴은 절대 쳐다볼 얼굴이 아니었다.
나는 온통 근육들이 멋대로 몰려다니는 귀신같은 형색이 그 자리에 있었는지도 몰랐다. 내 뜻은 너를 무엇이 부족해서 쳐다보느냐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풍년드는 해에는 풀떼기만큼 넘쳐나는 것이 없다고 들었듯 그 풀떼기처럼 요즘 세상 넘쳐나는 자유는 엄청난 오해도 불러올 수 있다. 그때 오해가 또 다른 오해로 뒤집힐 수 있다.
내가 자기를 성적인 눈을 갖고 찝쩍대었다고 경찰을 불러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라도 친다면 나는 한순간에 성범죄자로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 한다. 자유가 넘치다 못해 범벅이 되어버린 정도이다. ‘미투’라 하여 고소를 당한 남자 쪽이 확실한 "임금을 모시는 늙은 내시"로 신분이 밝혀져 무혐의가 된다 해도 긴 과정은 지옥이 다른 곳에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 과정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감당하기 힘들 만큼 심적 고통에 시달려야 하고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오해로 시달려야 한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낼 수 있고 상처를 주는 것도 식은 죽 먹기가 모두 절제를 모르는 자유 때문인 것 같다. 그런 오해들로 목숨을 끊고 세상을 버린 모 대학교수는 물론 배우, 예술가, 금융계의 재벌 등 각계각층에서부터 평온하기만 한 시골마을 사람들까지 미투라는 험악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바로 그것을 겪어내야 하는 또 하나의 어처구니가 없는 미투 희생자가 바로 내가 될 수도 있다. 내가 그렇게 쉬운 남자로 보인 나머지 꽃뱀이 작심하고 난동 한 번 피우고 적당한 합의금을 뜯어내는 것은 아닌지 항상 의심하고 경계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혹시라도 우연히 마주친 그 얼굴이 그리운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막 눌러 댄 매주 같은 그런 얼굴을 보는 것조차 자존감까지 눌러 참아야 했다. 나는 나의 어머님의 말씀이 예술이라고 기억한다. 아무리 신여성 머리가 편해도 바람이 불 때마다 뒷머리가 온통 들려 올라가는 품위 없는 머리가 싫으시어 평생을 한 번도 자르신 일이 없다고 하셨다. 언제나 가지런하게 참빗으로 빗어 내리시고 동백기름으로 마무리를 하신 뒤 비녀를 꽂으셨다고 하셨다.
감히 나의 어머님 같은 분으로부터 태어난 나를 귀신 같은 얼굴의 중동인 여자의 입에 오르게되다니 재수가 없던 날은 바로 이런 날을 말하는가 보다. 나의 어머님은 여자가 아침에 남의 집을 찾는 일은 금기로 여기던 세상에 사셨다. 마치 조선시대 여인이 관가에서 명하는 법만 따르시는 분 같았다. 남의 집이란 일가친척을 말한다. 일가친척의 어른을 찾아뵐 일이 있어도 절대로 문안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으시고 문밖에서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리셨다. 여자가 아침에 집안으로 발을 디뎌 놓으면 어르신들이 노여워하셨다고 한다.
어른들이 사주간택만 따져 보고 얼굴도 보지 못한 남녀들이 결혼하는 날에야 비로소 보게 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와 견주어도 특별히 다른 것도 없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간결하고 질서가 있는 나의 어머니 세월이 전설만 같아도 그 속에 참다운 의미를 지닌 모습들이 가득 담겨 있다.
요즘 세상은 미투라하여 젊은 남녀들은 물론 노인까지 성 문제에 대하여 혼란스럽다. 웬만하면 가까이 앉기도 불안하다. 그 부분을 놓고 보면 나의 어머니 세월에 남녀가 일곱 살만 되어도 함께 자리할 수 없던 제도가 오히려 맑은 세상일 수 있다. 남녀라고 하는 동물은 일곱 살만 되어도 그렇게 선을 그어 놓은 데는 필시 있었던 이유가 바로 오늘날 미투를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원치 않는 사람으로부터 성적인 불쾌감은 치유가 힘든 경우까지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조선시대가 훨씬 앞서갔었던 것 같다. 할 수만 있다면 역사 속 세월에 바래져 버린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그 풍속을 고스란히 되돌려 와 가장 민감하게 커가는 학생들의 도덕, 윤리 과목으로 정해 놓으면 좋을 것 같다. 그럼 미투의 오해는 말끔히 정화될 것이다.
그 후에 발생하는 일에 대해서는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 쓴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던가. 그런 푸닥거리 같은 신앙도 복고풍 유행으로 돌려 쓸만하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쪽진 머리를 고집하시던 어머니의 자식인 나에게 그 중동인 여자가 내뱉은 언사는 정신과 병동으로 돌려보낼 사람 수준이다. 그 여자의 처사는 병동실에서 허접한 소리를 지껄여대는 환자 중에서도 그 질이 가장 나쁜 환자일 것이다.
용서하고 싶지 않지만, 나의 어머니께서 그 광경을 보시고 당신의 아들인 나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어머니의 옛날 세상으로 데려가셔서 그 죄인을 형틀에 매어놓고 곤장을 치는 형벌을 관가에 간청하셨을 것이다. 돌팔매질 사형법을 면할 수 없을 중동여자는 자업자득으로 알고 자신 앞으로 던져진 돌맹이 숫자를 세고 있을지 모른다.
[문경구]
화가
수필가
코스미안뉴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