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가출인 동시에 출가이어라

이태상

 

2021년 9월 8일자 미주판 오피니언 [잠망경] 칼럼 '즘생' 필자 서량 시인 정신과 의사는 "싯다르타의 출가나, 처녀의 출가나, 비행 청소년의 가출이나, 다 집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모험적인 행동이다.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가정인 국가를 버리고 이곳 미국에 이민 온 당신도 나도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그의 칼럼 글을 맺고 있다.  

쌍말을 잘하는 환자의 차트를 정리한다. 그의 말 습관을 어떻게 표현할까 하고 잠시 망설인다. ‘foul-mouthed, 입버릇이 더러운?’ 말이 깨끗한지 더러운지 하는 판단을 누가 내리나. 내가 과연 언어의 청결과 불결을 판가름하는 사회적 규범의 척도라는 말인가.

환자가 욕설, 저주라는 뜻으로 ‘swear word’를 자주 쓴다고 할까. 화가 나서 ‘내뱉듯이 하는 욕설’이라는 의미의 격식 있는 표현, ‘expletive’는 어떨까. 더 위엄이 넘치는 ‘profane(신성 모독적인, 불경스러운, 욕설적인)’이라는 단어는?

‘profane’은 원래 라틴어에서 ‘out of temple, 사원 밖’이라는 의미였다. 즉, 사원 안에서 쓰는 말은 성스러운 말이면서 사원 밖의 말은 욕설이라는 뜻이 된다. 엘리트주의, ‘elitism’, 이른바 ‘선민의식’으로 도배를 한 말이다.

선민의식은 우리말에서도 눈에 띈다. 문외한(門外漢)은 ‘어떤 일에 전문적 지식이나 조예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 서구적 의식구조의 ‘사원 밖’이나 우리 사고방식의 ‘문밖’이나 똑같이 옥외(屋外, outdoors, 야인)라는 뜻을 지닌다. 자고로 지체가 높은 사람은 실내에 있고, 낮은 사람들은 밭이나 들에서 일하나니.

희랍시대의 엘리트주의는 또 이렇다. 바보, 멍청이, 천치라는 뜻의 ‘idiot’은 본래 ‘평민’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귀족에 반하여 평민은 교육을 받지 못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평민=바보천치‘라는 등식이 말속에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같은 말뿌리로 ‘idiom’은 관용어라는 뜻이니까 즉, 일상어는 멍청이들이 쓰는 말이다.

우리말에서도 한문(漢文)은 유식한 선비들의 전용물! 언문(諺文)은 속된 사람들이 쓰는 품격 없고 저속한 말이다. 사대부 자손들은 한문을 썼지만, 세종대왕의 한글, 즉 상인(常人, 일상인, ordinary people, 상놈, 쌍놈)들이 쉽게 깨우쳐 쓰는 글은 언문이라 불렀다. 나는 체질적으로 한자어보다 순수한 우리말을 좋아한다. 한자어는 어딘지 위선적이고 위압적인 데가 있다.

사람은 식물이나 광물이 아닌 동물계에 속한다. 그중에서도 포유류, 젖먹이동물. 다른 네발짐승과 조금도 다름없이 어린애 때 엉금엉금 기어 다닌다. 기타 다른 동물적 특징이 합쳐져서 호모사피엔스라는 종족(種族)을 번식시키는 것이다.

불교 용어 중생(衆生)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리고 ‘짐승’이라는 말이 중생에서 유래했다는 국립국어원의 어원해설을 곱씹는다. 15세기부터 한자어인 ‘중생’을 그대로 표기하면서 처음에는 ‘생물’이라는 뜻이었다가 나중에 네발 달린 동물을 가리켰다는 설명이다. 내 어린 시절 할머니는 짐승을 ‘즘생’이라 하셨다.

불교에서는 수행자와 중생으로 사람을 구분한다. 나도 당신도 중생에 속한다. 어원학 차원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짐승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생의 중(衆)을 한자 사전은 ‘무리 중’이라 풀이한다. 출중(出衆)하다는 말은 여러 사람 가운데서 특별히 두드러지다는 뜻. 출중한 사람은 무리를 벗어난 사람이다.

출가(出家)는 세속의 인연을 버리고 성자(聖者)의 수행 생활에 들어간다는 의미다. 처녀가 시집가는 것도 출가라고 하지. 가출(家出)은 가정을 버리고 집을 나가는 행동이다. 싯다르타의 출가나, 처녀의 출가나, 비행 청소년의 가출이나, 다 집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모험적인 행동이다.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가정인 국가를 버리고 이곳 미국에 이민 온 당신도 나도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 

아, 이 '참 대단한 사람들이' 어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 뿐이랴.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 살고 있든 이 지구별에 존재하는 만물이 다 우리 모두의 큰 집 '우주'에서 '가출(家出)'한 동시에 '聖者(성자)'가 아닌 '성신(星神/星身)'의 구도(求道)/수도(修道)의 길, 곧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의 길에 오른 게 아닌가. 

지난해 2020년 4월 10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항간세설 아래와 같이 옮겨보리라.

[이태상의 항간세설] 개구리의 춤사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세계경제의 질서가 ‘코로나19 전과 후로 영원히 바뀔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핸리 키신저(Henry Kissinger, 1923 - ) 전(前) 미국 국무장관은 2020년 4월 3일 (현지 시간) 월스트리트 저널(WST)지에 “자유질서 가고 성곽도시(walled city)’가 다시 도래할 수 있다”고 전망(展望)했다. ‘세계화 시대의 종말’을 경고(警告)한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세계화’란 서구 자본주의 물질문명으로 지구촌 자연환경을 오염시키고 파괴하면서 인간 본연의 인성(人性ㅡ humanity)을 타락시켜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제 드디어 바야흐로 인류가 ‘세계화(世界化)’를 졸업하고 ‘우주화(宇宙化)’로 진화(進化) 승화(昇化)할 때가 되었어라. 지구인(地球人)이 우주인(宇宙人) ‘코스미안(Cosmian)’으로 거듭나 괄목상대(刮目相對)할 ‘코스미안시대(Cosmian Age)’가 열리고 있는 것이리라.
 
세상은 정말 별일 천지(天地)임에 틀림없어라. 1970년대 직장 일로 우리 가족이 런던 교외에 살 때였다. 하루는 지붕에 올라가 비가 오면 빗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기왓고랑을 깨끗이 청소하다 뜻밖에 내가 발견한 것이 있었다. 식물(植物)인지 광물(鑛物)인지 알 수 없는 딱딱하고 아주 작은 별 모양의 물체가 고랑에 낀 흙 위에 자라고 있는 것을 보았다. 너무도 신기하고 신비스러워 곱게 뜯어 아이들에게 주면서 학교에 갖고 가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보여주라고 했다.
 
밤낮으로 하늘을 우러러 별들을 바라보며 속삭이고 노래하다 보니 별들을 닮아 별모양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을 나는 했다. 어렸을 때 내가 읽은 동화책 속에 나오는 페르시아의 꼽추 공주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꼽추가 아닌 자기 동상(銅像) 앞에 매일같이 서서 등허리를 똑바로 펴보다가 제 동상처럼 허리가 똑바로 펴진 몸이 되었다는 동화(童話) 속 이야기처럼…
 
이것은 하나의 깨달음이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육지공간(陸地空間)에서만 아니라 저 깊은 바닷물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해바라기 꽃이  해 모양을 하듯 바닷속에서 살며 별 모양을 한 극피동물(棘皮動物)의 하나인 불가사리 스타피쉬(star fish)를 보면 말이다.
 
또 어릴 때 듣고 자란 흥부와 놀부 이야기에서처럼 새가 사람에게 복(福)이나 화(禍)를 정말 갖다 줄 수 있는 것인지 몰라도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뿌리는 대로 거두게 되는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1980년대 어느 한 여름 우리 가족이 카리브해(海) Caribbean Seas에 있는 섬나라 바베이도스(Barbados)에 휴가 갔을 때 일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바닷가 산책하러 나갔다가 썰물에 밀려 나가지 못하고 팔딱거리고 있는 작은 열대어 한 마리를 두 손으로 받쳐 바닷물 속에 넣어줬다.
 
그 다음 날 아침 조금 더 일찍 일어나 같은 곳에 나가보았더니 그 전날 물 빠진 모래사장에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물고기를 발견했던 그 자리에 아주 크고 보기 좋은 왕소라가 하나 있었다. 그때 내가 딸들에게 말한 대로 아무리 두고두고 다시 생각해봐도 내가 살려준 그 열대어가 고맙다고 그 좋은 선물(膳物)을 갖다 준 것만 같았다. 어렸을 때 읽은 동화 속의 바닷속 나라 용왕(龍王)님께 그 물고기가 말씀드려 용왕님께서 그 소라를 보내 주셨는지 모를 일이었어라.
 
불현듯 생시(生時)인지 꿈에선지 어디에서 본 것만 같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自畵像)이 떠오른다.
 
개구리, 너는!
 
얼마나 놀라운 새냐,
개구리, 너는!
 
네가 일어설 때
너는 거의 앉지.
 
네가 뛸 때
너는 거의 날지.
 
너는 분별(分別)도 거의 없고
넌 꼬리 또한 거의 없지.
 
네가 앉을 때면
네가 거의 갖고 있지 않은 것 위에
너는 앉지.
 
What a wonderful bird
The frog are!
 
When he stand,
He sits almost.
 
When he hops,
He fly almost.
 
He ain’t got no sense hardly,
He ain’t got no tail hardly,
Either.
 
When he sits,
He sit on what he ain’t got,
Almost.
 
인간사(人間事)에서 무엇이고 확실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보의 특권이리라. 세상에 확실(確實)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밖에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떤 출발점에서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발전하는가를 결정해준 것은 제 선택이 아니라 하늘의 섭리일 것이다. 독수리가 저는 독수리로 태어났다고 달팽이로 태어난 달팽이를 보고 너도 나처럼 하늘 높이 빨리 좀 날아보지 못하고 어찌 그리 느리게 땅바닥에서만 가까스로 기어 움직이느냐고 비웃을 수 있으랴. 또 누가 독수리의 삶이 달팽이의 삶보다 낫다 할 수 있나.
 
어쩌면 너무도 독수리처럼 되고 싶었던 달팽이가 오랜 세월 죽도록 날아보려다 개구리로 진화(進化)한 것인지 모를 일이어라. 마치 신(神)이 되려던 동물(動物)이 인간(人間)으로 발전한 것 같이. 그렇다면 지구인(地球人) 인류(人類)의 다음 단계인 우주인(宇宙人) 코스미안으로 승화(昇華)할 일만 남았어라.
 
나는 습관처럼 시(詩)를 지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엔 별(別)일 천지(天地)다.
그 가운데 별(星)일 중(中)에 별별(別星) 일이
네가 있고 내가 있다는 이 기(氣)막힐 일이고
너무너무 신비(神秘)롭고 경이(驚異)로운 사실이
네 가슴 내 가슴 우리 가슴 뛰는 것이 아니랴.
 
그래서 일찍이 영국의 자연파 계관시인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1770-1850)도 독백(獨白)하듯 읊었으리.
 
내 가슴 뛰놀다
 
하늘에 무지개 볼 때
내 가슴 뛰노나니
어려서 그랬고
어른 된 지금 그렇고
늙어서도 그러리라.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어버리리라.
어린애는 어른의 아버지
내 삶의 하루하루가
이 가슴 설레임으로 이어지리
 
My Heart Leaps Up (also known as The Rainbow)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I was a Child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지금까지 인류가 무지개를 바라보기만 해왔었다면
이제는 ‘사랑의 무지개를 올라탄 우주인 코스미안
(Cosmian Arainbow of Love)’이 되어 훠어이 훠어이
우리 어서 코스모스 바다와 하늘로 비상(飛上/翔)해보리라.
 
모름지기 이러한 비상(非常)한 단초 실마리 첫머리를 재미동포 한 사람이 선두주자(先頭走者)로 제공했으리라. 지난 2015년 7월 16일자 미주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페이지에 그 당시 연재 중이던 ‘미대륙횡단 마라톤 일기’ 22회분 칼럼 ‘달린다’ [이를 내가 의역(意譯)컨대 '날아오른다'는 의미(意味)]에서 강명구(당시 57세) 씨는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마치 우리 한민족 수난(受難)의 역사(歷史)를 생생(生生)하고 여실(如實)히 기록하듯이.
 
“나의 얼굴은 밤하늘이었고 눈동자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두 개의 별처럼 초롱초롱 빛났다. 얼굴이 뜨거운 사막이나 대평원의 비바람을 견뎌온 흔적이라면 눈동자는 두려움, 온갖 어려움과 외로움을 극복해 낸 의지(意志)의 광채였다. 내 몸에 빛과 어둠이 동시에 존재했다. 극도의 고통과 쾌감이 함께 어우러져 춤을 추었다. 고통과 쾌감은 한 쌍의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처럼 때론 손을 잡고 때론 멀리 떨어져 멋진 연기를 하곤 했었다.
 
육신이 가장 활기차게 움직일 때 의식은 한없이 고조되어 우주의 한가운데서 용해되어 자아를 뛰어넘어 삼라만상(森羅萬像)으로 퍼져 나가는 새로운 자아를 경험했다. 내 몸의 모든 세포와 기관이 가장 활발하고 완벽하게 움직일 때 도달하는 특별한 기쁨과 평화로움을 달리면서 느꼈다. 나에게 있어 대륙횡단 마라톤은 그 특별한 기쁨과 평화의 정체를 찾아서 떠났던 마라톤 명상(冥想) 여행이었다. 한겨울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마른 육신이 나의 뜀박질을 소리가 되게 하였다.
 
내가 달려온 길에 뿌려진 땀이 통일의 노래를 움트게 하였고, 소리가 되어 평화로운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고, 소리가 되어 희망을 잃은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달리기는 가장 원시적인 몸동작이다. 그 단순한 몸짓으로 대서사시(大敍事詩) 시(詩)를 썼다. 그 처절한 몸짓으로 지상 최대 규모의 무대를 만들어 열연(熱演/悅然)을 했다. 그 몸짓은 나의 간절한 염원(念願)이 담긴 제사(祭祀)의 춤사위였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TIME) 2020년 10월 5일/10월 12일자 합본(Double Issue)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THE 100 MOST INFLUENTIAL PEOPLE)’ 특집은 최근 타계한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PADER GINSUBURG 1933-2020)를 표지 인물로, 정은경 대한민국의 초대 질병관리청장을 문재인 대통령의 소개의 글과 함께 실었다.
 
그리고 미국의 댄서, 가수, 배우, 유튜버 조조 시와 (joelle Joanie”JoJo” Siwa, 2003 - )도 ‘진짜 낙천주의자(Genuine Optimist)’로 미국의 셀러브리티 방송인 킴 카다시언 웨스트(Kim Kardashian West)가 소개하는 글과 함께 100인 중에 포함됐다.
 
가령 나에게 기회가 주어졌었더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앞서간 코스모폴리탄, 아니 우주 순례자 코스미안 한 사람을 추천, 선별, 소개했으리라. 마땅히 모름지기 우리 모든 사람 속에 살아 있을 어린애 코스미안을 옛 소련의 천재 소녀 시인 니카 투르비나(Nika Turbina 1974-2002)가 이렇게 대변하였으리라.
 
날 무섭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무관심이에요.
우리의 냉담한 무관심이
세상을 삼킬 것만 같아요.
작은 이 지구를.
우주 한가운데서 뛰는
코스모스 이 작은 심장을.
 
또 이 심장의 대변아(代辯兒)는 ‘점치기(Telling Fortunes)’라는 시에서 이렇게 탄식한다.
 
내가 점장이라면
그 얼마나 좋을까
난 꽃으로 점치고
무지개로 세상의
모든 상처들을 다
아물게 할 텐데
 
What a shame that
I’m not a fortune teller.
I would tell fortunes
only with flowers
and I would heal
the earth’s wounds
with a rainbow.
 
더 좀 소개할 지면이 허락된다면 2020년 9월 14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실린 우생의 칼럼 <항간세설> ‘꽃과 무지개를 비춰주는 게 이슬방울인데’도 첨부하였으리라.

[항간세설] 꽃과 무지개를 비춰주는 게 이슬방울인데
 
“이슬로 와서 이슬로 사라지는 몸이여, 오사카의 화려했던 일도 꿈속의 꿈이런가!”
 
이 시는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가 죽으면서 남긴 시라고 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이나 같은 말로 악은 결코 악을 제거할 수 없다. 누군가가 그대에게 악을 행하거든 그에게 선을 행하여 선으로 악을 제거하자는 어느 수도자의 말을 상기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 일상에서 당면하는 과제가 아닌가.
 
몇 년 전 이슬람국가(IS)에 의해 참수당한 일본인 인질 고토 겐지의 어머니인 이시도 준코는 자신의 슬픔이 증오의 사슬을 만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2015년 2월 19일 자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페이지에 기고한 글에서 뉴욕대학교 의과대학 정신신경학과 교수이며 ‘깨우침(Awakenings, 1973)’ 등 여러 권의 저서 저자인 영국 출생의 신경과학자요 자연주의자며 과학사학자였던 올리버 삭스(Oliver Sacks 1933-2015)는 한 달 전만 해도 건강한 몸이었었는데 지금은 (이 글을 쓸 당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태라며 그가 81세까지 살아온 것만으로도 더할 수 없는 행운이라고 했다.
 
‘이제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 그가 직면한 과제인데 자기가 좋아하는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이 65세 때 그 또한 시한부 선고를 받고 1976년 4월 어느 날 단 하루 사이에 쓴 그의 짧은 자서전 ‘나 자신의 삶(My Own Life)’에서 큰 영감과 용기를 얻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흄보다 15년이나 더 인생을 살 수 있었다고 다행스러워하면서 흄의 말을 되새겼다.
 
“나는 여전히 내 연구심과 열정 그리고 사람들과의 유쾌한 친분을 유지한다. (I possess the same ardour as ever in study, and the gaiety in company.)” 그리고 “열린 생각과 마음으로 사람들과 경쾌한 유머를 나누면서 애착심과 애정을 느끼지만 그 아무에게도 적개심을 품지 않는다. (I was, I say, a man of mild disposition, of command of temper, of an open, social, and cheerful humor, capable of attachment, but, little susceptible of enmity, and of great moderation in all my passions.)”
 
이상과 같은 흄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나는 내 열정이 지나치지 않도록 내 성질을 통제하는 온화한 성정의 사람이었다. (I was... a man of mild disposition, of command of temper, and of great moderation in all my passions.)” 이렇게 자신도 흄처럼 말할 수 없노라고 삭스 교수는 말한다. 자신도 사랑과 우정을 나눴고 그 아무도 진짜 원수로 대하지는 않았어도 자신을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라고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 정반대로 자신은 극도로 무절제하고 광적인 정열이 치열하기 때문에 지금 죽음을 직면하고 있다 해서 자신의 삶이 끝난 것은 결코 아니라고 했다. 아무리 “현재보다 삶을 더 초탈하기 어렵다 (It is difficult to be more detached from life than I am at present.)”는 흄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그리고 그는 아래와 같이 그의 글을 끝맺었다.
 
“그렇다고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가 현재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감정은 감사한 마음뿐이다. 사랑을 했고, 사랑을 받았으며 많은 것을 받아 누렸고 뭔가를 되돌려 주었으며 많이 읽고 여행하고 생각하며 글을 썼다. 그간 나는 세상과 관계하고 특히 작가들과 독자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 왔다. 나는 감성이 있는 존재로서, 그리고 생각하는 동물로서, 이 아름다운 지구라는 별에 느끼고 생각하는 존재로서.” 

이를 내가 ‘코스미안(Cosmian)’ 이라고 말을 좀 바꿔 표현해도 무방하리라. 잠시나마 머물 수 있었다는 이 엄청난 특혜와 모험이라는 축복에 감사할 뿐이다고.
 
“I cannot pretend I am without fear. But my predominant feeling is one of gratitude. I have loved and been loved; I have been given much and I have given something in return; I have read and traveled and thought and written. I have had an intercourse with the world, the special intercourse of writers and readers. Above all, I have been a sentient being, a thinking animal, on this beautiful planet, and in itself has been an enormous privilege and adventure.”
 
아, 진정코 우리 모두 하나같이 잠시 맺혔다가 스러지는 이슬 같은 존재라면, 진실로 꿈속에서 꿈꾸듯 하는 일장춘몽이 인생이라면, 우리 각자 대로 지상에 피는 모든 꽃들과 하늘에 서는 무지개를 반사해 비춰보리라.
 
정녕,
있을 이
이슬 맺혀
이슬이던가?
삶과 사랑의
이슬이리.
 
아니,
기쁨과 슬픔의
저슬이리.
이승의 이슬이
저승의 저슬로
숨넘어가는
 
Was the grass wet
with early morning dew
to pay your dues of life and love?
 
Were they dewdrops of
life-giving and love-making,
or rather teardrops of joy and sorrow?
 
Was that for breathing in
this magic world to the full,
and breathing it out to the last,
before transforming back,
into the mystical essence
of the Cosmos?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9.09 10:38 수정 2021.09.09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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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