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구십육 년이라는 긴 페이지의 세상 기록부를 마지막으로 덮으시고 세상을 떠나셨다. 생전에 받으셨던 신체검사에서 티끌만큼의 건강 이상이 없으신 몸으로 반세기를 배후자 없는 세상에서 홀로 사신 것이 전부이다.
가시던 날 하늘빛도 태평양 바다 빛도 아버지의 재를 뿌려드린 그 날을 위해 있어 준 아름답고 고마운 날이다. 나는 이날을 잊지 못한다. 사람들이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원하는 인생 최대의 소원인 무병장수의 복을 누리시고 떠나셨다. 아무 복도 없으셨다는 말은 틀렸다. 아무도 선택할 수 없는 생명을 그것도 아프지 않고 산다는 것은 그보다 더한 복이 또 있으랴.
너무 연로하시다 보니 혹시 오래 앓아누우시는 일이 생길까 봐 나는 좌불안석 된 마음으로 늘 머리끝이 쭈뼛 서 있었다. 어찌할 수 없는 그런 현실을 살아야만 하는 내게 아무 염려 말라는 당부를 하시듯 감기 기운을 보이시고 누우신 지 일주일 만에 폐렴이라는 간결한 사인을 사망 신고 난에 남기시고 주무시는 듯 가셨다.
아프지 않고 잠자듯 떠나게 해달라는 세상 소원을 모두 누리시고 떠나셨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명언처럼 아버지는 나를 효자 자식으로 만들어 주셨다. 병석에 누워 오래 사는 불편한 진실을 씁쓸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아프고 싶은 사람이 어디 한 사람인 들 있을까. 아프지 않은 젊은이들의 삶처럼 사신 나의 아버지는 그 연세에도 젊은이처럼 사셨으니 전혀 불편하지 않은 떳떳하신 진실이셨다.
아버지가 떠나가신 그날에는 바다와 하늘이 서로 맞닿을 약속이라도 한 듯 푸른 하늘과 푸른 빛의 바닷길을 열어 주었다. 바다를 온통 꽃으로 장식하고 싶던 롱비치항에서 뱃고동 소리 들으시며 카탈리나섬에 도착하시어 마지막 뱃길 위로 따라오는 갈매기 떼들의 안내를 받으시며 떠나가셨다.
당신께서는 복이 많으셨다는 말씀을 바람결에 실어 내게 보내 주셨다. 사람의 목숨을 두고 단명한다 장수한다는 말은 이제 터무니가 없어졌다. 생명공학의 발달로 모두 천수 이상을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 해도 얼마를 살게 될지 인간 생명의 기록부는 아무도 펼쳐 볼 수가 없다.
아직까지는 정해진 맥박수를 세는 초시계에 의지하는 게 전부이다. 아무리 고달픈 시간들이라도 그 순간순간을 모두 채우고 떠나야 한다. 우리가 호의호식 장수하며 사는 오늘에도 열대우림에서 태양과 바람을 맞으며 맨발로 산다는 아사이족들은 오래 앓아눕는 일이 없다고 한다. 우리와 유전자가 거의 흡사하다는 그들은 자연과 같은 마음으로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껑충껑충 뛰며 사는 것이 우리와 다른 생명체인가 보다.
고목나무 껍질 같은 피부로 살아도 욕심이나 아집의 집착을 모르는 것도 우리에게 없는 유전자인가 보다. 오래 앓아누울 자리도 없는 그들이야말로 반듯하고 정갈한 몸과 정신으로 아무에게도 짐이 되지 않는 축복받는 생을 마치는 게 아닐까. 과학적인 식생활의 발달로 생명이 길어져 가는 것은 틀림이 없다. 누구나 자신만큼은 기원대로 오래 살고 싶어한다. 아무리 원치 않는다 해도 병든 몸으로 무작정 오래 살기만 기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래 살지 말고 가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어느 법조인은 법으로 만들려는가 보다. 오래 산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라고 말을 한 그 사람에게 전할 답은 하나이다. 방법은 자신이 겪는 병석에서 아무리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누워있는 자신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바로 그것이 무서워 아무 말을 못 하고 사는 것을 그는 참으로 대담한 법조인답게 말했다.
쇠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는 말을 믿고 있을 그의 부모에게 불편할 때까지 살지 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를 낳아주신 부모에게 추하게 오래 살지 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운명에 대한 겸손함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볼 수 없는 사람이다. 어떤 운명이 내게 찾아올지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 어떻게 세상이 자신이 배운 수학책 속 숫자처럼 지켜질 수 있을까.
연로하신 부모님을 남겨두고 만만치 않은 나이의 자식들이 먼저 세상을 앞서 떠나는 일로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떠나는 길을 선택할 수 없는 인생의 결론은 뻔하다. 그것과는 상관없이 100세를 넘기고도 원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어느 명예교수에게 오래 사는 것은 불편한 일이라고 말한 그 사람은 우주에 단 한 점도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다. 벌써 죽었어야 했다는 충격을 직접 받은 명예교수는 자신에 대하여 얼마나 힘들게 생각했을까.
오랜 세월까지 아니더라도 산다는 것은 불편할 수 있는 일이 너무도 많다. 제일 먼저 자신 하나도 비우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일부터 불편하다. 말로만 버티어 내려는 세상은 온통 불편한 진실뿐이다. 마음대로 끊어 낼 수 없는 삶이라는 생각보다 사회를 위해 아직도 활동을 할 수 있는 노인들의 자존감을 이제 어디에 숨겨야 하나.
추한 모습이라고 불편한 소리 듣지 않으시고 가신 나의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이 자꾸 든다. 걸으시는 발걸음마다 먼지를 일으키실 만큼 가벼우신 발걸음으로 사시다 떠나신 아버지의 유전자를 받은 내가 기적을 생각해 본다. 그렇게 세상에는 분명 부끄러운 진실도 따라 굴러갈 테니 나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문경구]
화가
수필가
코스미안뉴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