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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2021년 9월 17일자) 미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칼럼 '왜 지금 말하지 않는가' 필자 권정희 논설위원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지금뿐이야 It's Now Or Never'라고 노래했듯이 '지금'의 소중함을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에게 희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일까. 눈으로 보고 싶고, 손으로 잡고 싶고, 따뜻하게 보듬고 싶은 욕망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에게 가서 닿고 싶은 마음, 연결되고 싶은 본능이라는 생각이다. 물리적으로 가서 닿을 수 없을 때, 우리는 말로써 연결을 추구한다.
20년 전 9월 11일 테러범들에게 납치된 비행기 안에서 탑승객들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한 일은 사랑하는 이에게 음성메시지를 남긴 것이었다. 테러 당한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 건물 안 대혼란 속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마지막’을 감지한 그들은 본능적으로 아내/남편에게, 어머니/아버지에게 혹은 연인에게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남겼다. ‘사랑 한다' 고, ‘보고 싶다’고.
그렇게 그들은 떠나고 ‘연결’에의 욕망은 산 자들의 몫으로 남았다. 9.11 테러 20주년을 맞아 많은 미디어들이 희생자 유가족들을 인터뷰했다. 중년이었던 부모는 노인이 되고, 젊었던 아내/남편은 중년이 되며, 어린아이였던 자녀는 청년이 되었지만, 그렇게 세월이 흐르도록 많은 유가족들은 상실의 아픔을 넘어서지 못했다. 홀로 키운 아들이, 딸이 잘 자라서 졸업/취직/결혼을 하는 특별한 순간들, 아니면 그저 평범한 어느 아침, 상실의 통증은 날카롭게 되살아난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는 더 이상 여기에 없지만 커다란 공백으로, 부재하는 존재로, 가족들은 여전히 ‘그’와 함께 살고 있었다.
9.11 추모행사를 앞둔 몇 주 전 공영라디오방송 NPR은 뉴욕의 브루클린 브리지 공원에 구식 공중전화 부스를 설치했다. 강 건너에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이 우뚝 서있던 곳, 지금은 새 빌딩이 건너다보이는 곳이다. 20년 전 거짓말처럼 사라진 ‘그’에게 못 다한 말,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말들을 음성메시지로 남기라고 NPR은 유가족들을 초대했다. 그리고 사전 허락을 거쳐 6명의 메시지를 동영상으로 공개했다.
어린 두 아들을 남기고 떠난 남편에게 아내는 아들들이 “정말 멋지게 잘 자랐다, 당신을 꼭 빼닮았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는 “서두를 생각은 없지만 당신을 다시 만날 날을 고대 한다”고 했다. 11살 때 아빠를 잃은 딸은 곧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하며 “부상당한 아빠가 다 나으면 돌아올 줄로 알았다”며 흐느꼈다. “하이, 아빠”로 말문을 연 아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그때 “아빠가 (큰 고통 없이) 빨리 갔기를 빌었다”고 했다. 누이를 잃은 한 남성은 “그 자리에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우리가 찾지 못해서,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하나같이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고, ‘너무나 보고 싶다’ ‘우리와 여기 같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 함께 하자’는 말들을 했다. 시리도록 투명한 슬픔, 가슴 저리게 아름다운 아픔의 메시지들이었다.
NPR의 공중전화 부스는 일본의 ‘바람의 전화’를 본뜬 것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함께 유명해진 전화 부스이다. 이와테 현의 작은 해안마을 오쓰치에 사는 조경전문가 사사키 이타루는 2010년 연말 사촌형을 암으로 잃었다. 당시 60대 중반이던 사사키는 애도의 장치로 공중전화 부스를 구해 정원에 세웠다. 고인이 써놓은 시 ‘바람의 전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바람의 전화는/ 가슴에 말을 하네/ 바람에 속삭이라/ 내가 들으리니” - 수신기능 없는 전화기를 들고 바람에 이야기하노라면 사촌형과 연결된 느낌에 그는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는 몇 달 후 대지진과 해일로 그 지역은 폐허가 되었다. 그 작은 마을에서만 1,300명이 목숨을 잃었다. 마을 전체가 비탄에 빠지자 사사키는 전화 부스를 공개했다.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충격과 상실감, 후회 분노 자책으로 괴로운 가족들, 그리움으로 하루하루가 고문인 가족들, 못 다한 말들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방문객들은 선 잘린 검정색 구식 전화기에 대고 이야기를 하고, 복받치는 감정을 옆에 놓인 노트북에 쏟아냈다. 사랑과 추억과 후회 그리고 잔잔한 기쁨에 관한 글들이었고 사사키는 이를 묶어 책으로 냈다. 해안가 바람 부는 언덕 위의 전화 부스를 찾은 사람은 이제까지 수만 명, 그들의 사연은 여러 영화와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비슷한 부스는 세계 곳곳에 등장했다. 지난 3월에는 콜로라도 아스펜 산중에도 생겼다. 코비드-19으로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 한 아티스트가 마련한 치유의 전화이다.
삶의 고단함에 치여서, 삶의 번잡함에 정신 팔려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삶에서 모든 것은 한시적이라는 사실, 우리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상실/사별은 예정되어 있고 그 때가 언제일지는 예측불허라는 사실이다.
삶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이다. 삶이 당장 내일 끝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후회 없는 삶이 가능하다. 이 생에서 가장 소중한 그/그들과 확실하게 함께 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뿐. ‘사랑 한다’는 말을 왜 지금 하지 않는가. 이 순간을 왜 즐기지 않는가.
<권정희 논설위원>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기 마련이고, 제행무상諸行無常,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고 삼라만상은 무상하고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우주의 법칙이 아닌가.
<생(生)>과 <사(死)>는 <르완다어 shengura (to overwhelm) + 세소토어 shwa (to die)>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모체에 고통을 주며 태어나서, 또다른 생명체의 먹잇감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지 않나.
좋은 일과 궂은 일이 영속永續되지 않고 다 지나가는 찰나라면 우리가 그 무엇 또는 그 누구에게 연연戀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독일의 신비주의神秘主義 철학자 야코프 뵈메(1575-1624)가 믿었듯이, 우리도 이런 확신을 가져볼거나.
"영원이란 우리 각자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 그 자체가 되는 그 일순간이리."
Nevertheless, as the German mystic Jakob Boehme (1575-1624) believed, may it be:
"Eternity consisted of a lightning-like moment when we became the very object of our love."
지난 4월 19일자 코스미안뉴스에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이태상 칼럼] '4.19 61주년을 맞아
우리 모두에게 바치는 송가頌歌 송시頌詩'
4.19 61주년을 맞아 4.19 혁명에 목숨 바친 영령英靈들과 그 후손後孫들께 삼가 이 송가頌歌 송시頌詩를 바치면서 일월 성신日月星辰과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새삼 다짐해 빌어 본다.
“철학적哲學的으로 사색思索한다는 건 죽음을 배우는 거다. To Philosophize Is to Learn to Die”
“나는 내가 아는 것에 관해 쓰지 않는다 : 내가 뭘 아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쓴다. I don’t write about what I know: I write in order to find out what I know.”
“인생이란 하나의 여정旅程이다. 하나의 허망虛妄한 상투적常套的 표현表現인 클리셰이다. 하지만 삶의 탓이 아니다. 클리세란 완전完全히 받아들인 모든 진리眞理와 진실 眞實의 숙명宿命이다. 예를 들자면, 별들은 다이아몬드 금강석金剛石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별들이 다이아몬드라고) 말할 수는 없다. Life is a journey. A hopeless cliché. But not its fault. Cliché is the fate of every fully absorbed truth. The stars, for example, do look like diamonds. You just can’t say so.
- Patricia Hampl, The Art of the Wasted Day
이상 세 마디는 미국의 교육자이자 작가 패트리시아 햄플Patricia Hampl (born in 1946)이 그녀의 저서著書 ‘써버린 날의 예술 The Art of the Wasted Day(2018)’에서 하는 말이다.
그녀는 또 다른 저서 ‘하나의 낭만적 교육 A Romantic Education(1981)’에서 이렇게 말한다.
“글 쓰는 사람이 나는 되고 싶었다. 누군들 안 그러랴. 글을 쓰면서도 의사나 교사나 미생물학자나 수녀 또는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밖에도 영화배우, 해양학자, 수목樹木 관리인 등의 직업이 내겐 매력 있어 보였다. 또 한편으로는 별로 매혹적이 아니었으나 그저 나는 글을 썼을 뿐이다. 그 보상報償으로 돋보이던 다른 모든 일들이 근처에 접근조차 못 할 만치 생생生生한 현실감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직업의 유혹도 결국 글 쓰는 일로 귀착歸着되었다. 글 쓴다는 것이 얼마나 모든 일에 나 자신을 몰입沒入시켜 내 본질을 시험하고 실험하는가를, 다시 말해 대양 大洋과 현미경, 선생님과 식탁 등 세상 모든 것을 내포하는 것임을 내가 직감直感했기 때문이다. 글쓴다는 것이 모든 것의 핵심요체核心要諦로 모든 사물事物의 그 심혼心魂이요,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은 하나의 개성 있는 생명,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임을.”
아, 그래서 그녀는 또 이렇게 말했으리라.
“글 단어들이란 부분적으로는 思想이고 思惟이지만 대부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샘 솟듯 울림을 주는 음악이다. 따라서 생각한다는 자체가 어쩌면 오케스트라와 같아 우리 마음과 정신과 혼이 세계를 지휘하는 것이고, 그건 곧 세상을 건설해 만들어내는 것이리라. Words are partly thoughts, but mostly they’re music, deep down. Thinking itself is, perhaps, orchestral, the mind conducting the world. Conducting it, constructing it.”
- Patricia Hampl, The Art of the Wasted Day
아, 지당至當하신, 천지당千至當 만지당萬至當 아니 천지당天地當 우지당宇至當하신 코스미안의 말씀이렷다.
글 쓰는 사람 따로 없이 우리 모두 다 글 쓰는 사람이다. 손으로만 쓰지 않고 눈, 귀, 입, 코, 머리와 가슴은 물론 팔다리, 발바닥으로도.
사람이 정말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보고 그 신비로움에 경탄하며 축복 된 삶의 기쁨을 순간순간 만끽滿喫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주입식 암기식 응시요령의 앵무새 학교 공부 많이 하는 것보다 차라리 전국 방방곡곡 여러 곳으로, 또 가능하면 세계 각국으로 여행 많이 하면서 많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세상 공부 인생 공부 많이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으랴.
직장 때문에 우리 가족이 영국에 가 살면서 애들 학교 친구들이 툭하면 부모 따라 학교 수업을 빼먹으면서 여행 다니는 것을 나는 처음엔 이상하게 여겼었다. 한번은 신문에서 영국의 어느 한 가족이 가산家産을 다 정리해서 배 한 척을 구입, 몇 년을 세계 각지로 항해할 여장을 갖추고 나이 어린 세 자녀가 읽을 책만도 수천 권을 싣고 영국을 떠났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그 용단勇斷에 나는 크게 놀랐었다.
그러다가 1978년 여름 우리 가족이 영국을 떠나 하와이로 이주, 6개월 동안 미국 각지와 한국으로 여행한 후 애들 음악 교육 때문에 영국으로 되돌아가 애들이 먼저 다니던 학교에 복학했을 때 애들 학업 성적이 전보다 떨어지기는커녕 더 나아졌었다. 몽땅 빼먹은 지난가을 한 학기 수업을 따라가려고 분발해서였는지, 아니면 여러 곳으로 여행하면서 정신적 그리고 정서적으로 많은 자극을 받고 애들의 잠재능력이 더 많이 개발되었던 것인지 모를 일이다.
그 후로 언젠가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Nesweek에서 미국의 어느 한 여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부모로부터 대학 4년 다닐 학자금을 받아 그 돈으로 대학 다니는 대신 세일링 보트Sailing Boat를 사서 세계 일주를 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보고 이 얼마나 멋진 진학코스인가 나는 크게 감탄했다.
진실眞實로 인생살이가 망망대해茫茫大海에 떠도는 일엽편주一葉片舟 같다면 우리 각자 자기 나름의 방향감각方向感覺을 갖고 자기가 향해 해보고 싶은 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별 따라 살아보는 것 이상 없지 않겠는가 하며.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진정한 ‘글’이란 ‘그리움’의 준말로, ‘인생 이란 종이나 화폭에다 삶이라는 펜이나 붓으로 사랑의 피와 땀과 눈물방울을 잉크나 물감으로 쓰고 그리는 것’이라 생각해 왔다.
올해 제3회 ‘코스미안상’ 공모에 많은 코스미아뉴스 독자 여러분께서 응모해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우리 모두에게 바치는 이 송가 頌歌 송시頌詩 An Ode to Us All’를 이렇게 영문으로 적어본다.
An Ode to Us All
Dear All,
Candidates for The Third (2021) Annual Cosmian Prize of Nonfiction Narrative are being cordially invited to represent “Cosmian” as the Spirit of this Age (Zeitgeist).
Faced with the dire climate change and the current Corona pandemic, resulting in the pollution of what we breathe, drink and eat, all caused by our capitalist materialism and industrial technology, we have to change our perspective and vision completely, if we are to survive as a species.
First of all, we have to realize our cosmic true identity as brief sojourners on this most beautiful and wonderful planet earth, a tiny starlet, like a leaf-boat floating in the sea of cosmos.
As such, we have to appreciate everything, including ourselves, with love and respect, believing in the oneness of us all, not only human beings and our fellow creatures but also all things in nature.
In order to come to this realization, we must get rid of all the arbitrary and self-righteous dogmatism of ideology, nationalism, racism, sexism, and what not; in other words, the false dichotomy between black and white, right and wrong, us and them, etc.
If I were to put 85 years of my lifelong credo in a nut-shell, it could be this:
Writing is not to be written but to be lived; words are not to be spoken but to be acted upon; no matter how great works of arts and literature are, they are at best mere images and shadows of life and nature; no love, philosophy, religion, thought, truth or way, can be caged, like the cloud, light, water and wind or stars.
Hence, the global online newspaper Cosmian News was launched in July 2018 to share our real-life narrative as described in the inaugural address:
All of us, born on this star called the planet earth to leave after a short stay, each living with whatever kind of love, in whatever style of life, in whatever color, shape and form, in one’s own way, each can say something special for one sentence, as different from each other. And yet if we were to find one common denominator, could it not be that “we all are Cosmians born Arainbow of Love?”
So on this proposition that “we all are Cosmians born Arainbow of Love” I am inviting each and every one of you to share that sentence of yours. Each will be the song of a pearl-like life, or rather of a rainbow-like love.
I’d like to dedicate the poem, Praise Be, written by the American poet-publisher of my book Cosmos Cantata (2013), as the common motto for us all.
Praise be to those
Praise be to those
who in their waning years
make others happy
Praise be to those
who find light in the darkness
and share it with others
Praise be to those
who can spread joy
through trust and tolerance
Praise be to those
who look far beyond themselves
to their place in the cosmos
For Lee Tae-Sang
November 15, 2013
Doris R. Wenzel
I sincerely trust that all of you will kindly accept this invitation.
Gratefully yours,
April, 19, 2021
Lee Tae-Sang
Founder of Cosmian News
이어서 2020년 4월 6일자와 9월 14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항간세설도 옮겨보리라.
[이태상의 항간세설] '씨앗은 바람을 타고, 우린 매일 죽는다'
한국에선 5월 8일이 어버이날이지만 미국에서는 어머니날은 5월, 아버지날은 6월 한 주 일요일에 지켜진다. 지난 2015년 ‘아버지날’ 선물로 딸들로부터 받은 티셔츠가 아주 내 맘에 꼭 드는 특이한 것이었다. 초록색 바탕에 새겨진 앞가슴 문구가 ‘KEEP CALM AND COSMOS ON’이었다. 수많은 표어가 새겨진 티셔츠 중에서 어떻게 이처럼 무지개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온 코스미안의 준말로 붙여진 내 에세이집 제목 ‘무지코’(2014년 자연과인문 출간)에 딱 걸맞은 것이 있었는지 놀랍기 짝이 없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온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올해에는 ‘KEEP CALM AND WE CAN SURVIVE THIS PANDEMIC CORNONA VIRUS’란 티셔츠가 곧 출시될 법도 하지만, 이 ‘KEEP CALM AND GANGNAM STYLE,’ ‘KEEP CALM AND BTS,’ ‘KEEP CALM AND PARASITE,’ ‘KEEP CALM AND HARRY POTTER,’ ‘KEEP CALM AND IMAGINE,’ ‘KEEP CALM AND EAT A BANANA,’ ‘KEEP CALM AND TOKYO OLYMPICS,’ 등등 수도 없이 많이 있을 ‘keep calm and’ 시리즈의 효시(嚆矢)는 1939년 9월 1일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진 이후 영국 런던이 독일 공군의 공습으로 쑥대밭이 되면서 영국 국민의 사기(士氣)를 북돋기 위한 대표적인 국민 표어 ‘지금 우리가 많이 힘들지만 평정심(平靜心)을 되찾아 이겨내자’란 뜻의 ‘KEEP CALM AND CARRY ON’이라고 한다.
캐나다 태생의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빗 브룩스(David Brooks 1961 - )가 그의 칼럼 애독자들에게 그들 각자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며 어떻게 찾았는지를 에세이로 응모해달라고 공개 요청하자 수천 명의 독자로부터 보내온 글 내용의 일부와 그 공통점을 2015년 5월 29일자와 6월 19일자 칼럼에 기술했다.
놀랍게도 그의 예상과는 달리 그들 삶의 목적은 야심을 갖고 큰 꿈을 꾼다거나 세상을 개혁해 바꾼다는 식의 학교 졸업식 축사 같은 내용이 아니고, 그 정반대로 극히 작고 소박한 것들이란다. 그 공통된 메시지는 ‘우리 모두 찬란히 빛날 필요는 없다. (We do not have to shine.)’는 것이고, 난 언제나 이웃에게 자연스럽게 친절하고 너그러운 사람이기를 원했고 내 아이들도 그렇게 되도록 애썼다. (I have always wanted to be effortlessly kind. I wanted to raise children who were kind, to be generous and kind.)는 것이다.
테런스 제이 톨락슨(Terence J. Tollaksen)이라는 독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본주의’ 원리에 입각해 소기업을 40 년째 해오고 있단다. 또 다른 독자 한스 핏쉬(Hans Pitsch)는 그의 에세이에서 “나이 85세에 이르러 내 삶의 의미란 문제는 절실하다. 아직 살아있다는 데 감사한다. 나 자신과 내 주위 사람들에 대한 내 책임이 하루하루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나는 나의 가족과 점점 숫자가 줄어드는 옛 친구들을 더 할 수 없이 소중히 여긴다. 한 가지 내가 집중하는 게 있다면 그 건 내 정원을 정성껏 가꾸는 것이다. (I am thankful to be alive. I have a responsibility to myself and those around me to give meaning to my life from day to day. I enjoy my family and the shrinking number of old friends. If there is one thing that keeps me focused, it’s the garden.)”
또 한 독자 스콧 애딩튼(Scott Addington)은 그의 에세이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흔히 그렇듯이 찾기를 멈추게 되자 내 삶의 목적이 분명해졌다. 1995년 10월 11일 내 딸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내 삶의 목적과 의미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추호의 의문도 갖지 않게 되었다. 아빠가 된다는 사실이야말로 한 남자로서 경혐해 볼 수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의미 있고 보람찬 일이다. (As is often the case, my purpose became clearly evident after I had stopped looking for it. On October 11, 1995, my daughter was born. Beginning with that moment, there has never been the slightest doubt regarding the purpose and source of meaning in my life. Being a father is the most meaningful and rewarding pursuit a man could ever hope to experience.)”
이와 같은 경험은 비단 부모의 역할뿐만 아니라 학교 교사 선생님의 경우에서도 공유되고 있음이 여러 독자의 반응에서 밝혀지고 있다. 한편 삶의 목적은 자주 상실감에서 생기고 있음이 관찰된다.
그 한 예로 뇌종양으로 21년을 같이 살아온 부인을 상처한 호주 브리스번시(市)에 사는 그렉 산터(Greg Sunter)는 미국의 교육자 파커 파머(Parker Palmer 1939 - )의 저서 ‘숨겨진 일체감(A Hidden Wholeness: The Journey Toward An Undivided Life, 2004)’에 언급된 두 가지 가슴의 상처를 이렇게 적고 있다.
“그의 저서 ‘숨겨진 일체감’에서 (저자) 파커 파머는 두 가지 가슴의 상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하나는 우리 가슴이 박살나 산산이 흩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가슴이 찢어져 열리면서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고통과 기쁨, 절망과 희망을 포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가슴이 찢어져 열림으로써 내 처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온 우주를 품는 것이 내 삶의 목적이 되었다. (In his book ‘A Hidden Wholeness,’ Parker Palmer writes about the two ways in which our hearts can be broken: the first imagining the heart shattered and scattered; the second imagining the heart broken open into new capacity, holding more of both our own and the world’s suffering and joy, despair and hope. The image of the heart broken open has become the driving force of my life in the years since my wife’s death. It has become the purpose to my life.)”
이렇게 수많은 독자들의 반응에서 도출되는 사실은 삶의 목적은 단순히 삶을 충만하게 살아본다는 것이다. 굳이 신(神)을 향한 것이거나 잡다한 삶의 목표들과는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을 되도록 많이 도우면서 삶을 만끽해본다는 것이다. (But, for many people, the purpose of life is simply to live it fully. Many people don’t necessarily see their lives as pointing toward God or as defined by some mission statement. They seek to drink in life at full volume, to experience and help others richly.)
내가 이를 간단히 줄이자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삶의 목적이 더 좀 충만하게 살아본다는 것이다. 내세(來世)라든가 종교적인 신조(信條)나 정치적인 이념(理念)에 복종하고 추종하든 과거와는 판이하게 우리의 마음을 활짝 개방하고 우리 고향인 우주와 혼연일체(渾然一體), 혼연천성(渾然天成)이 되는 것이리라. 문화평론가 김봉석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처럼 결국은 ‘태도가 결정한다. 인생도, 가치도’ 말이어라.
이것이 바로 2015년 6월 20일자 한국일보에 흑백사진과 함께 실린 배우한 기자의 ‘씨앗은 바람을 타고’가 너무도 시적(詩的)으로 상징하는 메시지였으리라.
“숲속의 요정 같은 민들레 씨앗이 바람에 몸을 실어 멀리 떠나고 있다. 또 다른 삶을 향한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다. 민들레는 생태적으로 잎이 땅에 붙어 있어 앉은뱅이란 별명을 가졌다. 가녀린 씨앗이 바람에 날려 새 삶을 찾는 모습이 어쩌면 자유를 꿈꾸는 사람과 닮았다.”
라틴어로 ‘cotidie morimur’는 영어로는 ‘We die everyday (All men must die, I miss you everyday)’라는 뜻으로 우리말로 하면 ‘우린 매일 죽는다’가 되리라.
네로황제 (Roman Emperor Nero AD37-AD68) 시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c. 4BC-AD65)가 했다는 말이다. 세네카는 또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자기 자신의 황제가 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최고의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The greatest empire is to be emperor of oneself.)”
이는 하루를 더 살면 우리가 살 날이 하루 줄어들어 하루 더 죽음에 가까이 가고 있으니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말이고, 각자는 제 삶이라는 제국의 황제로 살라는 뜻이리라.
은하계에는 약 1,000억 개의 빛을 발하는 항성이 존재하는데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별들은 고작 6,000개뿐이고, 수명이 다한 별들은 별똥으로 마지막 빛을 발하면서 소멸해 지구상으로도 떨어지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고 한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존 키츠(John Keats 1795-1821)는 ‘들리는 멜로디가 감미로우나 들리지 않는 멜로디는 그 더욱 감미롭다 . (Heard melodies are sweet, but those unheard are sweeter) 라고 했다.
강소천(1915-63)이 스물 한 살에 발표한 동요시로 탄생 100년을 맞아 2015년 복간된 시집 ‘호박꽃 초롱’에 수록되어 있는 ‘닭’이 있다.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또
한 모금
입에 물고
구름
한 번
쳐다보고
이 동요시를 본 떠 우리도 이렇게 읊어보리라.
모두
순간순간
죽어가고 있지만
우리도
한 모금
한 모금
우주의
생명수
입에 물고
하늘도
한 번
쳐다 보고
별도 한 번
쳐다 보며
살리라.
[이태상의 항간세설] '인류의 거듭남이어라'
예부터 말이나 어떤상(形象)으로 표현되는 순간 그 내용은 증발(蒸發)해 버리듯 사라진다고 했던가.
촛불이나 모닥불처럼, 산불의 불꽃 또는 연기처럼, 이슬방울이나 폭포수,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泡沫) 그리고 물안개처럼 아무 흔적(痕跡)도 없이....
이는 거품문명이니, 거품경제니, 옷이 날개라는 식의 포장이나, 소리만 요란하다는 빈 수레와는 달리 속이 익고 찬 문화나 사람은 겉치장이나 겉치레로 눈가림이나 입에 발린 빈말 ‘립서버스(lip service)’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일 게다.
예수와 석가모니는 물론이고, 구약성서에 나오는 ‘골리앗 장수와 다윗소년(David and Goliath)’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과 전태일 열사, 그리고 모조품 같은 픽션이 아니라 진품의 실화 같은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 같이, 말과 글 대신 그들의 행동과 삶과 그리고 죽음 자체로 인류의 사표(師表)가 된 수많은 경우에서 그 실례(實例)를 찾아볼 수 있으리라.
그건 그렇다 치고, 요즘 한국에서 미성년자 성착취물을 만들어 텔레그램에 유포한 혐의를 받는 ‘박사’ 조주빈의 ‘n번방 사건’을 계기로 최대(最大)가 아닌 최소(最小)로 축소(縮小)해서, 말하자면 일종의 ‘미니멀리스트(minimalist)’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자.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고차원(高次元)의 영적(靈的)이고 정신적인 ‘사랑’은 차치물론(且置勿論)하기로 하고, 형이하학적 (形而下學的)으로 최저선(最底線 bottom line)인 육체적 욕정(慾情)의 대상으로서의 ‘제 눈에 안경’이란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 같지 않은 말도 좀 해보리라.
몇 년 전부터 중국에선 평평한 절벽 가슴으로 고민했던 여성들이 중국판 웨이보에서 ‘평면가슴 대회’를 열어 화제가 되었다. 그 후로 중국 여성들이 저마다 웨이보에 ‘평면가슴대회’라는 태그를 걸고 자신의 평평한 가슴을 찍은 인증샷 사진을 게재하고 있다고 중국 포털 왕이 뉴스가 전했다.
이 대회는 지난 2014년부터 중국 인터넷에서 진행되었는데 우승자를 뽑는 것이 목적이 아닌 ‘인증대회’라고 한다. 남성이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성임을 증명할 수 있는 목선이나 입술을 함께 공개하는 규정이 있다.
많은 여성 네티즌들이 자신만 가슴이 작은 게 아니라는 점에 위로를 받았다거나 부모가 준 몸매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중국에선 여성의 외모에 대한 기준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색적(異色的)인 ‘겨드랑이털 사진 콘테스트’를 개최해 또 화재가 되기도 했다. 이 행사를 주도한 중국의 여성운동가는 ‘우리는 몸에 나는 털을 밀지 안 밀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주장했고 수많은 여성들이 동참했다고 한다.
이와는 반대라 할까 아니면 대조적이라 할까. 얼마 전 뉴욕 브루클린에선 ‘작은 남성 성기(性器) 대회’가 열린 가운데 한 남성이 우승했다. 이곳 킹스카운티 살롱 식당에서 제3차 ‘작은 성기 대회’ 결선이 진행되었는데 위스콘신주(州)에서 온 테일러 캠벨(24)이란 청년이 수백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상금과 함께 우승 토로피를 받았다. 그는 매력적인 여친도 있는 매력남이었다.
이 대회는 세계 어느 나라 남자도 참가가 가능하고, 작은 성기를 보여주는 비디오만 제출하면 된다. 이 대회 주최자로 알려진 제시 레빗은 이 대회는 단순히 사이즈(size) 작은 페니스 (penis)를 비교해 가릴 뿐만 아니라 참가자의 자신감과 용기도 평가한다고 주장했다는데 모름지기 마땅히 ‘고추’의 매운맛 강도(强度)와 밀도(密度) 내지 밀도(蜜度)와 당도(糖度)의 지구력(持久力)이 크기 사이즈나 뭣보다 중요하다는 의미(意味)였으리라.
청소년 시절 내가 사춘기(思春期) 때, 조숙(早熟)했었는지 조로(早老)했었는지 몰라도, 일찍 맞은 사추기(思秋期)에 서울 동대문 밖 보문동과 창신동 사이에 있던 채석장 돌산에 올라 백운택이란 경복고등학교 친구랑 밤이 깊도록 부르던 가곡 ‘이별의 노래’ (박목월 시 김성태 곡) 후렴 가사 그대로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인데 문득 이우걸 시인의 ‘기러기1’이 떠오른다.
죽은 아이의 옷을 태우는
저녁
머리칼 뜯으며 울던
어머니가 날아간다.
비워서 비워서 시린
저 하늘 한복판으로
이 시를 장석주 시인은 다음과 같이 표주(標註)한다.
“소멸은 물물(物物) 세계에서 필연이니, 먼저 죽고 나중에 죽는 것이 대단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자식 앞세운 부모는 숨이 붙어 있다고 산 게 아니다. 이 부모의 아픔을 ‘참척’이라고 하는데, 그 고통과 비통함이 얼마만 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는 짐작조차 어렵다. 죽은 아이의 옷을 태우는 저녁은 흘러가 버린 지 오래다. 제 머리칼 뜯으며 울던 어미도 떠난 지 오래다. 온 것은 기어코 가는 것이다. 가는 것을 붙잡을 수는 없다. 지금 있는 것은 비워서 비워서 시린 하늘과 그 한가운데를 떠가는 기러기 떼다. 인생 허허롭다.”
여행기는 여행자가 아니고 여행자에 대한 것(A traveler’s writings say more about the traveler than about the place traveled)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글이나 그림도 그렇다고 할 수 있으리라. 글이고 그림이고 읽어 줄 독자나 봐 줄 사람을 위해 쓰고 그리는 것 같지만 실은 단 한 사람,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에 틀림없어라.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으랴. 설혹 많은 사람이 같은 글이나 그림을 읽고 본다고 해도 각기 다른 글을 읽고 다른 그림을 보게 마련이다. 그들 자신이 각자의 그리움을 각자의 글과 그림으로 쓰고 그리듯이 말이다.
그러니 글을 쓰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고독한 작업이고 외로운 순례의 길이리라. 우리 모두 이 세상에 혼자 왔다가 혼자 떠난다.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고 각자는 각자의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살다 우리 모두의 본향(本鄕)으로 돌아가는 여정(旅程)이리. 그것도 시간과 공간과 현상(現象)을 초월한 여정이리. 그러기 위해서 우리도 알껍데기를 깨고 허물을 벗어 새나 매미 또는 나비처럼 비상(飛翔)하는 것이리라.
그 한 예로 수명(壽命)이 인간과 비슷하다는 솔개의 삶을 좀 살펴보리라. 솔개는 새 중 수명이 길어 70~80년을 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힘든 과정이 있다.
솔개가 40년 정도 살게 되면 부리는 구부러지고 발톱은 닳아서 무뎌지고 날개는 무거워져 날기도 힘들어진다. 이 시기에 솔개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렇게 지내다가 죽느냐? 아니면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새롭게 살 것이냐?
고통을 선택한 솔개는 바위산으로 날아가 먼저 자신의 부리로 바위를 마구 쪼아댄다. 쪼고 쪼아서 낡고 구부러진 부리가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러면 닳아 없어진 부리 자리에서 새 부리가 자란다. 그리고 새로 나온 부리로 자신의 발톱을 하나씩 뽑기 시작한다. 그렇게 낡은 발톱을 다 뽑아버려야 새 발톱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선 새 깃털이 나도록 무거워진 낡은 깃털을 하나씩 전부 다 뽑아버린다.
이렇게 고통스런 시련(試鍊/試練)을 극복하며 130여 일이 지나야 솔개는 새로운 40년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천지신명(天地神明)께
간절히 빌고 또 비나이다.
현재 코로나바이러스로
시련을 겪고 있는 인류도
고차원적(高次元的)으로
승화(昇華) 환골탈태(換骨奪胎),
새로운 인류 ‘코스미안’으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기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