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탈종교 코스미안의 신곡神曲 아닌 인곡人曲, 아니 우곡宇曲 (속續)

이태상

 

2021년 9월 22일자 미주 뉴욕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논단] 칼럼 '가장 위대한 시인의 유산' 필자 민경훈 논설위원은 "700 주기를 맞아 '시인의 정점' '이탈리아의 아버지'로 불리는 단테의 대작(신곡)을 읽어보는 것이야말로 경의를 표하는 가장 좋은 방편일듯 싶다"고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 생의 한 가운데/ 나는 어두운 숲속에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바른 길은 사라지고 없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학 작품의 하나로 평가받는 단테의 ‘신곡’은 이렇게 시작된다. 단테가 ‘신곡’을 쓰기 시작한 것은 그가 43살 때인 1308년이었다. 이 때 그는 고향 피렌체에서 쫓겨나 동가숙 서가식하며 “남의 빵이 얼마나 쓰고 짠가”(신곡, 천국 17장)를 절실히 느끼고 있던 중이었다.

단테의 처지가 항상 이렇게 비참했던 것은 아니다. 피렌체 명문가 출신인 그는30대 약관에 최고 행정 책임자인 집정관 자리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은 교황을 지지하는 구엘프파와 황제를 지지하는 기벨린파로 나뉘어 극심한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었고 구엘프파는 또 교황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흑 구엘프와 도시 국가의 독립을 지키자는 백 구엘프로 갈라져 있었다. 피렌체는 구엘프파가 기벨린을 몰아내는데는 성공했으나 그 후 흑파가 백파를 쫓아내고 권력을 독점한다. 이 와중에 백파였던 단테는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몇번의 복권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문학을 통해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희망과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찾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 열매가 바로 ‘신곡’이다. 신곡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두운 숲속에서 방황하던 단테가 겨우 이를 빠져 나오려는데 사자와 표범, 암늑대가 나타난다. 이 세 동물은 인간을 죄에 빠뜨리는 폭력과 탐욕, 질투를 상징한다. 이들에 밀려 다시 숲속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평소 단테가 가장 존경하던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영혼이 나타나 구원을 얻고 싶으면 자신을 따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신의 은총으로 구원받은 인간들이 영생을 누리고 있는 천국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죄를 지은 인간이 영원히 고통 속에서 벌받는 지옥과 죄를 지었지만 회개한 인간이 고통 속에 죄를 씻으며 천국에 갈 날을 기다리는 연옥을 먼저 보아야 한다며 그를 지옥으로 인도한다.

단테의 지옥은 전지옥이 시작인데 여기에는 악마의 편에도 신의 편에도 서지 않은 중립적인 사람들이 벌과 파리에 쏘이며 이리저리 방황하는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그 다음에는 예수 이전에 태어나 세례를 받지 못했지만 유덕한 삶을 산 그리스의 시인과 철학자들이 살고 있는 림보가 나오는데 베르길리우스도 여기 출신으로 단테의 첫사랑 베아트리체의 요청으로 단테를 도와주러 온 것이다.

림보 아래로 펼쳐지는 본격적인 지옥은 크게 3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탐욕 지옥, 폭력 지옥, 사기 지옥이 그것이다. 단테는 사기를 불륜이나 살인보다 더 큰 죄로 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인간 고유이자 최고의 능력인 이성을 악용한 죄이기 때문이다. 지옥 맨 밑바닥에는 창조주이자 구세주인 예수를 배신한 유다 등을 사탄이 씹어 먹고 있다.

지옥 여행이 끝난 후에는 연옥 여행이 시작된다. 연옥도 지옥과 마찬가지로 전연옥이 있는데 여기에는 평생 죄를 짓다 죽기 바로 직전 회개를 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회개하지 않은 기간의 30배까지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 그 위에는 본 연옥이 펼쳐진다. 연옥은 죄의 종류에 따라 7층으로 이뤄져 있는데 가장 중죄가 교만으로 맨 밑바닥, 그 위가 질투, 폭력, 게으름, 탐욕, 식탐, 욕정 순으로 돼 있다. 이 단계를 다 거치면 꼭대기에는 ‘지상 낙원’이 있고 여기서 죄를 씻은 참회자는 천국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베르길리우스가 인도할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다. 천국은 그가 상징하는 이성만으로는 출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부터는 신의 은총을 상징하는 베아트리체가 안내를 맡는다. 단테는 9개의 천국을 지나며 마지막으로 성모 마리아를 찬미하는 성 버나드에 이끌려 신의 보좌가 있는 엠피리언에서 모든 빛의 근원과 삼위일체의 진실을 목격한다. “태양과 다른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이라는 구절과 함께 ‘신곡’은 끝난다.

‘신곡’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서는 물론,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다 13세기 유럽 역사에 대한 지식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런 노력을 기울인 사람만이 지옥에서 천국까지 길고도 험한 여정을 웅혼하고 섬세한 필치로 묘사한 단테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올 9월은 단테가 숨을 거둔지 700년이 되는 해다. 한 때 그를 추방한 피렌체는 그의 시신이 묻혀 있는 라벤나에 이장을 요구하고 있지만 라벤나가 거절, 피렌체에는 “가장 높은 시인에 경의를 표하라”(지옥 4장)는 글이 적힌 빈 무덤만이 남아 있다.

20세기 최대 시인으로 손꼽히는 T S 엘리옷은 “단테와 셰익스피어는 세계를 양분한다. 세번째는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700주기를 맞아 ‘시인의 정점’ ‘이탈리아어의 아버지’로 불리는 단테의 대작을 읽어보는 것이야말로 경의를 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듯 싶다. 

<민경훈 논설위원>

오늘 아침 지인으로부터 나는 이메일로 이런 글을 전달받았다.

성공한 사람들은 모든 상황을 기회로 본다. 
  
심지어 문제점과 불평불만 조차도 기회로 본다.

문제가 크면 클수록 기회 또한 커진다.

성공한 사람들에게 문제들이란 굶주린
사람들에게 음식과 같은 것이다.

- 그랜트 가돈, ‘10배의 법칙’에서 – 
 
"대부분의 사람들은 곤란한 상황에서 손을 놓게 됩니다.  따라서 어려움이 클수록 성공의 열매도 커집니다.  문제를 기회로 보는 소수의 사람들이 성공의 과실을 독점합니다."

이는 우리가 '실낙원失樂園'에서 '복낙원復樂園' 할 수 있다는 말이어라.

지난해 2020년 11월 11일 자연과인문에서 출간된 우생의 졸저 <우린 모두, 성신, 코스미안이다>에 실린 글 '이설異說 실낙원失樂園' 옮겨보리라.

모든 예술의 세계명작들은 저 하늘의 별들과 같다 한다.  그런데 이런 명작들도 보고 읽는 사람들에 따라 그 내용들이 달리 보이고 읽히며 달리 해석되는 것이리라.

대우주 가운데 먼짓가루 하나보다 작은 이 지구라는 별의 억만 분의 한 쪼가리도 못 되는 서울 북한산을 오르다 보면 동물 모습을 한 바위들을 만난다고 한다.  보는 각도와 느낌에 따라 곰으로 보이기도 하고 돼지나 물고기 또는 새로 보이기도 하듯이 말이다.  

미술이나 조각품은 제쳐놓고라도 문학 작품들 가운데서 명작 중의 명작이라는 것들도 시대와 사람에 따라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읽히는 것이리라.

존 밀톤 John Milton(1608-1674)의 '실낙원 Paradise Lost (1667)'을 그 한 예로 들어보리라.  밀톤은 그의 시 첫 연聯에서 저자의 의도를 밝히고 있다.

"이 거창한 논거를 통해 인간에 대한 신神의 영원한 섭리를 정당화시켜보리라. That to do the height of this great argument./ And justify the ways of God to men."  

이 '실낙원'은 한 세기 반 동안 신의 정의를 입증하는 것으로 읽혔다.  인간의 타락이란 성서적 드라마가 예수의 희생을 통해 인류의 구원으로 끝나고, 아담의 모든 수난도 최선의 결말을 위해 신의 예정에 따른 것이라고.  

"오, 무궁무진한 선이요, 악이 선으로 변하는 이 선악과善惡果!  O goodness infinite, goodness immense!/ That all this good of evil produce/ And evil turn to good!"

그러다 18세기 후반부터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1757-1827)나 퍼시비쉬 셸리Percy Bysshe Shelley
(1792-1822) 같은 독자들이 '실낙원'의 주인공 영웅은 아담도 예수도 신도 아니고 실제로 악의 화신 사탄으로 보게 되었다.  사탄 말고 '실낙원'에 등장하는 다른 모든 인물들은 대담성도 용기도 자존감도 없이 (허깨비) 신의 계획과 섭리에 무조건 복종할 뿐인데 유일하게 (귀신) 신에게 맞선 사탄은 지옥에 떨어져서도 웅변적으로 선언한다:

"다 잃은 거 아니다.  결코 정복당하지 않는 의지, 불멸의 증오와 복수심, 그리고 절대로 굴종하지 않는 용기는 살아있다.  All is not lost; the unconquerable will, / And study of revenge, immortal hate,/ And courage never to submit or yield."

그래서 셸리에게는 "정신적으로 도덕적인 존재로서 밀톤의 악마는 그의 신보다 비교가 안 되게 훨씬 더 훌륭하다.  Milton's Devil as a mortal being is far superior to his God."

또 한 예를 들어보리라.

서양의 선과 악이란 독선독단적인 개념과 흑과 백이라는 이분법적 탁상공론卓上空論을 떠나서 동양적 자연관自然觀에서 볼 때 인간도 새와 같지 않을까.  

프랑시스 퐁주의 「새」감상 / 장석주
 
 새
 
  - 프랑시스 퐁주(1899~1988)
 
가는 화살 또는 짧고 굵은 투창,
지붕 모서리를 에둘러가는 대신,
우리는 하늘의 쥐, 고깃덩이 번개, 수뢰,
깃털로 된 배, 식물의 이,
때로 높은 가지 위에 자리잡고,
나는 그곳을 엿본다, 어리석고, 불평처럼 찌부러져서 ……
 
공중을 활강하는 새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뛴다. 상승 기류를 타고 포릉포릉 나는 새들에 늘 경탄한다. 이 경이로운 존재들, 이 사랑스럽고 하염없는 자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새들이 뼛속이 텅 빈 골다공증 환자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새들은 씩씩하게 공중을 주름잡는다. 푸른 궁륭의 자식들, 가장 작은 분뇨제조기, 작은 혈액보관함, 좌우 날개를 가진 무소유의 실천자, 바람이 띄우는 작은 연들, 발끝을 딛고 춤추는 공중의 발레리나들, 은행 잔액이나 국민연금 따위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통 큰 백수들! 한편으로 새들은 “하늘의 쥐, 고깃덩이 번개, 수뢰, 깃털로 된 배”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  장석주(시인)

아, 그래서 우리말로 꿈보다 해몽이라 했던가.  

어떻든 우리는 모두 하나같이 우리의 영원한 고향 코스모스 하늘로 날아가는 새
코스미안이리.

이어서 2020년 4월 4일자와 2021년 6월 1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칼럼도 옮겨보리라.

[이태상의 항간세설] ‘그냥’의 미스터리(III)

장 자크 루소(Jean-Jacque Rousseau, 1712-1778)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라고 했다. 이 말을 나는 그냥 ‘자연주의자(naturist)’ 곧 ‘우주주의자(cosmist),’ 다시 말해 ‘코스미안(Cosmian)이 되자’ 이렇게 표현해 보리라.
 
영어로 ‘코스미즘(Cosmism)’이라 하면 우주와 인류의 기원과 진화 및 미래를 탐구하는 역사와 철학과 종교적 광범위한 이론을 지칭한다.
 
세계적인 온라인 예술정보 플랫폼 ‘e-flux’ 창립자이자 영화감독인 안톤 비도클(Anton Vidokle 1965 - )의 2015년 ‘러시아 우주론(Russian Cosmism)’ 영상시리즈 3부작이 국립현대 미술관 서울관 6전시실에서 지난해(2019년) 4월 27일 부터 7월 21일까지 소개되었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제작한 작품으로 ‘안톤 비도클: 모두를 위한 불멸’을 타이틀로 달았다.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인 ‘공산주의 혁명은 태양에 의해 일어났다(2015)’는 2016년 광주비엔날레에 출품되어 ‘눈(Noon) 예술상’을 수상하면서 영상미와 사운드, 우주론에 관한 작가의 실험정신을 인정받은 바 있다. (NEWSIS 2019. 04.25 박현주 미술전문 기사 참조)
 
‘러시아 우주론(Russian Cosmism)’ 은 19세기 말 러시아의 철학자 니콜라이 페도로프(Nikolia Fedorov 1829-1903)를 필두로 러시아 우주론자들에 의해 개진되었는데 이들은 인간과 우주가 불가분임을 강조하며 인간이 우주와 함께 진화해 죽음을 극복하고 불멸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봤다.
 
미국의 철학자 존 피스크(John Fiske 1842-1901)는 그의 주요 저서 ‘우주철학개요(Outlines of Cosmic Philosophy: Based on Doctrine of Evolution, with Criticisms on the Positive Philosophy, 1874)’에서 일종의 우주진화론을 제시했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이론물리학자(Theoretical Physicist) 위고 드 가리(Hugo de Garis 1947 - )는 물리학적 세계와 시스템에 대한 수학적 모형을 수립하여 자연현상을 이해하고, 이를 예측하는 물리학에서 ‘진화가능한 하드웨어(evolvable hardware)'로 알려진 인공지능(AI-artificial intelligence) 분야에서 ‘유전 알고리즘(genetic algorithm)' 연구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상과 같은 난해한 ‘우주론’은 구름잡이 ‘장님 코끼리 만지기’로 제쳐 놓고 우리 모두 누구나 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자연주의 (naturism)’를 우리 판소리 형식으로 한 가락 뽑아보리라.
 
1970년대 초 파독간호사 부인 따라 독일로 간 옛 코리아타임스 동료 기자 친구가 나체촌에 갔었다는 이야기를 (당시는 이메일이 없던 시절이라) 손편지로 듣고 나는 놀라면서도 신기해 했었다. 한국에는 아직 없겠지만 유럽과 미국에는 곳곳에 누드 비치와 휴양지가 있다. 흔히 옷이 날개라 하지만 맨몸의 일탈(逸脫)과 파격(破格)이 주는 해방감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나체주의자들은 말한다.
 
알몸으로 숲속을 걷다 보면 에덴동산을 거니는 듯 황홀한 기분이 들기도 한단다. 벌거벗은 몸은 주변의 나무나 돌처럼 그냥 그저 자연의 일부일 뿐이란다. 벌거벗고 산책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치한(癡漢)이 아니라 선인장의 길고 뾰족한 가시라고 한다. 미국에는 알몸 예찬론자들이 제정한 ‘전국 나체 날(National Nude Day)’이 있다.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사회적인 거리 두기로 좀 곤란하겠지만 이날은 해마다 ‘누드 휴양주간 (Nude Recreation Week)’에 뒤이어 찾아온다. ‘누드 휴양주간’ 은 미국 독립 기념일 다음의 첫 번째 주이고 ‘누드 데이’는 ‘누드 휴양주간’이 끝난 뒤 첫 번째 월요일이다. 나체족들은 클럽 단위로 모여 매년 ‘누드 데이’ 기념식을 갖는다. 미국 나체주의자 들의 단체인 ‘전미휴양산업협회’는 250여 개 클럽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체 회원 수는 3만 2천여 명을 헤아린다.
 
대형 휴양지가 주도하는 활발한 홍보 활동과 회원들의 입소문을 통해 나체주의의 관한 관심이 커지면서 대중문화도 수용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우선 케이블 TV가 옷을 벗은 사람들을 다루는 프로그램 제작에 나섰고 디스커버리(Discovery) 채널은 나체주의자들을 출연시킨 리얼리티쇼(Reality Show) ‘네이키드 앤드 어프레이드 (Naked and Afraid)’를 내놓으며 뉴 프론티어 (New Frontier) 개척에 나섰다. 내가 이 프로그램 제작자라면 이 시리즈 명칭을 ‘네이키드 언어프레이드(Naked Unafraid)’라고 했으리라. 벌거숭이 서바이벌 게임을 펼치는 디스커버리 프로그램에 뒤이어 케이블 방송사인 VH1이 ‘알몸으로 하는 데이트(Dating Naked)’ 첫 에피소드를 2014년 7월 17일 선보였다.
 
적극적인 홍보 효과 때문인지 처음으로 누드 랜치를 찾는 ‘초참’들 의 수도 점차로 늘어나고 있다. 아내와 함께 애리조나주(州) 투산 외곽의 호화 나체족 휴양지 미라 비스타(Mira Vista Resort)를 방문했던 한 남성은 이곳의 공식 웹사이트에 자신의 경험담을 올려놓았다.
 
입촌 후 방을 배정받은 다음 이 남성은 일단 옷은 벗었지만, 도무지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고 한다. 어쩐지 어색하고 쑥스러워 아내와 함께 침대에 걸터앉아 맥주를 마시며 한동안 창밖의 광경을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일단 방 밖으로 나가자 느낌과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단다. 불과 몇 분 사이에 그는 물론 아내도 자신이 벌거숭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더란다. 초반의 낯섦은 옷이라는 상징적인 매개물을 통해 몸과 마음을 구속해 온 사회적 속박에서 풀려났다는 해방감으로 대체됐다. 이 남성의 경험담은 옷을 벗으면 누구나 그냥 그저 똑같은 인간일 뿐이라는 깨달음으로 끝난다.
 
애리조나주(州)에는 특급 리조트인 샹리 라 랜치(Shangri La Ranch)와 미라 비스타 외에 캠프 버디 비치(Birdie Beach)와 토노파(Tonopah)의 엘 도라도 온천(El Dorado Hot Springs) 등 나체족들이 몰리는 명소가 몰려 있다. 누드 커뮤니티에는 구성원 모두에게 적용되는 철칙이 있다. 절대 주변 사람들을 응시하지 말고 상대를 존중하며 보편적인 예의를 지키라는 것이 이들이 준수해야 할 불문율(不文律)이다. 휴양지 관계자들은 또 피부보호와 위생상의 목적을 위해 선크림을 듬뿍 바르고 타월 등 깔 것을 가지고 다니라고 조언한다.
 
이와 같은 현상과 나체주의자들의 증언은 당연지사(當然之事) 아니랴. 우리 모두 이 세상에 알몸으로 태어나지 않았는가. 그래서 영어에서도 알몸을 우리의 ‘생일정장(Birthday Suit)’이라 부르나 보다. 

어렸을 때 덴마크 작가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1875)의 ‘황제의 새 옷(The Emperor’s New Clothes)’을 읽고, 그때부터 나는 사람이 옷을 입고 산다는 게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엄목포작(掩目捕雀)의 위선(僞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2015년 7월 10일 중앙일보 일간스포츠지에 ‘10만 원 입금 시 나체 성관계 영상 보여줄 게’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강원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클럽 아우디녀’ 로 알려진 이모(당시 27세) 씨를 공연 음란죄와 음란물 유포 등의 혐의로 수사 중이라고 7월 8일 밝혔다.
 
이 씨는 텀블러와 인스타그램 등 SNS계정에 자기 자신의 나체 사진과 성관계 동영상의 일부분을 올려 수만 명의 팔로워를 확보했다. 그녀는 사진 밑에 ‘풀(full)’ 영상을 보려면 DM (당사자끼리만 볼 수 있는 메시지)을 보내 달라는 글을 올렸고, 이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메시지가 오면 자신의 계좌번호를 알려 준 뒤 월 10만 원을 입금하면 노출 영상과 성관계 영상 등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이 씨는 자신이 마치 사회운동가인 것처럼 행세를 해 논란을 키웠다. 그녀는 영상을 통해 얻은 수익금은 ‘채식주의를 위한 모임’에 쓰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6월 24일자 인스타그램에 ‘남친과 성관계한 영상 팔아서 돈 벌고, 비건 쇼핑몰 확장 시키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앞서 이 씨는 클럽에서 나체로 춤추는 영상이나 청계천, 신촌, 강남역 등 시민들이 많이 오가는 도심에서 ‘동물보호’나 ‘양성평등(兩性平等)’ 등을 부르짖는 피켓을 들고 반라(半裸) 시위를 벌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외제차 브랜드 아우디의 딜러였다고 밝혀 온라인상에 ‘클럽 아우디녀’로 불리게 되었다. 경찰은 이 씨의 음란물 유포 혐의가 사실로 밝혀질 경우 처벌할 계획이라고 했다.
 
한편 몹시 안타깝고 가엾게도 같은 지면에 다른 짤막한 기사가 하나 더 있었다. 성정체성의 혼란으로 ‘스스로 성기 자른 40대 미혼 의사’ 이야기였다.
 
7월 8일 경남경찰청에 따르면 7월 2일 경남의 한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 A(당시 40세) 씨가 자신의 집에서 스스로 성기를 잘랐다. 경찰은 나흘 뒤 병원 측으로부터 의사가 며칠째 출근을 하지 않았다는 신고를 받고 A씨 집으로 찾아가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A씨는 집에서 2-3km 떨어진 한 공원을 배회 하던 중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 조사에서 A씨는 성정체성에 혼란을 느껴 이 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명문대를 나온 뒤 미혼인 A씨가 스스로 성기를 절단한 뒤 응급치료를 한 것으로 파악하고 경찰은 A씨를 상대로 정확한 경위를 조사 중이라는 보도였다.
 
이야말로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인위적으로 강요된 정체성의 혼란으로 빚어진 희비극(喜悲劇)이 아니었을까.
 
최근에 한 친구가 이메일로 아주 희한한 동영상을 내게 보내왔다. 일본의 어느 한 일반단체 여성들 수백 명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섹스하는 비디오다. 젊은 남녀 한 쌍이 풀코스로 성관계를 갖는 것을 지켜보면서 여성 관객들이 계속 환호성을 질러 대는 것이었다. 나도 흥미진진(興味津津)하게 이 장면들을 보면서 잠시 상상해봤다.
 
서로 살인적으로 때리고 맞으며 메어치는 복싱이나 레슬링 같은 난폭잔인무쌍(亂暴殘忍無雙)한, 결코 ‘스포츠’라 할 수 없는, 천하만행(天下蠻行) 대신, 이런 사랑놀이가 그 얼마나 더 관람해볼 만 운동이며 예술인가. 간절히 빌고 바라건대 어서 올림픽의 대표적인 종목으로도 채택되고 세계 방방곡곡에서 열광적인 인기리에 공연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하고. 존 레논(John Lennon 1940-1980)과 오노 요코(Yoko Ono 1933 - )가 ‘전쟁놀이 대신 사랑놀이 하자(Make Love, Not War)’ 고 몸소 시범(示範)울 보였듯이 말이어라.
 
우리 모두
하나 같이
어서 어서
그저 그냥
그냥 그저
자연인으로
우주인으로
살아보리라
코스미안으로
 
[이태상 칼럼] 우리 모두 본연本然의 코스미안으로 복낙원復樂園 하리 Cosmian's Original Paradise To Be Regained

가정의 달, 아니 5월 5일 어린이날이 있는 5월 말에 동심童心을 동경 憧憬한다. 

라틴어로 ‘Finis Origine Pendet’란 말이 있다. 영어로는 ‘The beginning foretells the end.’ 우리말로는 ‘시작이 끝을 말해 준다’로 ‘시작이 반이 아니라 전부다’란 뜻이 되리라.
 
2021년 5월 30일자 뉴욕타임스 일요판 오피니언 섹션 Sunday Review에 기고한 글 ‘우리가 애독하는 이야기들이 우리를 만든다. The Stories We Love Make Us Who We Are’란 제목의 글에서 필자인 인도계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Salman Rushdie는 이렇게 글을 맺는다.
 
“이 많은 모험담冒險談/탐험담探險談에서 영웅이 되는 건 어린아이들이다. 흔히 어른들을 위험에서 구조/구출/구제해 구하는 건 아이들이다. 우리 모두 어렸을 때의 우리 자신들, 어른이 된 지금도 우리 안에 있는 어린이들, 경이로운 세계를 이해하고 이 이야기들 스토리의 진실을 아는 아이들이 이 진실들을 잊어버린 어른들을 구원하는 아이들 말이다. And in many of these adventures, it is children who grow into heroes, often to rescue the adult world; the children we were, the children who are still within us, the children who understand wonderland, who know the truth about stories, save the adults, who have forgotten those truths.”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는 해마다 바뀌고 여러 정책이 늘 제시되지만 정작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다. 우리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진정으로 건강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이들이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러 동서양의 고전을 통해 지식을 살찌우고 지혜롭고 창의적인 사고를 하며 건강한 가치관을 정립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올재’를 설립했다.”
 
‘올재’의 홍정욱 대표의 말처럼 이 출판사는 저작권 문제가 없는 동양과 서양의 고전을 최대한 읽기 쉬운 한글 번역본과 누구나 갖고 싶은 멋스러운 디자인으로 출판하여, 대기업에서 후원을 받아 한 권당 2,000원에서 3,000원 대의 가격으로 대중에게 판매하고, 전체 발간 도서의 20%를 저소득층과 사회 소수계층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는 일종의 소셜 비즈니스 회사라고 한다.
 
1970년과 2012년 영화로도 만들어진 ‘나의 달콤한 오렌지나무 My Sweet Orange Tree’ By Jose Mauro de Vasconcelos (1920-1984) 가 있다. 1968년 출간되어 브라질 초등학교 강독 교재로 사용됐고, 미국, 유럽 등에서도 널리 번역 소개되었으며, 전 세계 수십 개 국어로 출판되었다.
 
한국에서는 1978년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로 첫선을 보인 후 50여 곳 이상의 출판사에서 중복 출판되어 400만 부 이상이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로, 2003년 ‘MBC 느낌표’에 선정되었고, 지금도 꾸준히 사랑 받고 있는 성장 소설의 고전이다.
 
저자 바스콘셀로스는 1920년 리우데자네이로의 방구시에서 포르투갈계 아버지와 인디언계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권투선수, 바나나 농장 인부, 야간 업소 웨이터 등 고된 직업을 전전하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이 모든 고생이 그가 작가가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모든 나라에서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모든 어린이들에게 바치는 ‘헌사獻詞/獻辭’라고 할 만한 이 저자의 자전적 소설에서 독자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극심한 가난과 무관심 속에서도 순수한 영혼과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여덟 살짜리 소년 제제Zeze가 티 없이 짜릿 풋풋한 눈물과 웃음을 선사한다. 장난꾸러기 제제가 동물과 식물 등 세상의 모든 사물과 자연 만물과 소통하면서 천사와 하나님이 따로 없음을 실감케 해 준다.
 
바스콘셀로스는 이 작품을 단 12일 만에 썼지만 20여 년 동안 구상하면서 철저하게 체험을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한 권의 소설을 한 줄로 쓰는 것이 시라면, 마찬가지로 한 권의 자서전을 한 편의 단문으로 쓰는 게 에세이나 수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화가나 작가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어떤 색안경을 쓰고, 그리고 쓰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판이해지듯 그림을 보고 글을 읽는 사람도 어떤 시각과 관점으로 보고 읽느냐에 따라 보고 읽는 내용이 전혀 달라지는 것이리라.
 
그러니 동심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게 꽃 천지요 별세계다. 돌도 나무도, 벌레도 새도, 다 내 친구요 만물이 다 나이며, 모든 것이 하나이고, 어디나 다 놀이터 낙원이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 요술쟁이 어린이로 태어나지 않았는가. 

일찍이 중국 명나라 때 진보적 사상가였든 이탁오李卓吾, 영어로는 Li Zhi (1527-1602)는 그의 대표적 저술로 시와 산문 등을 모아 놓은 문집 ‘분서焚書’에서 말한다.
 
“어린아이는 사람의 근본이며 동심은 마음의 근본이다. 동심은 순수한 진실이며 최초의 한 가지 본심이다. 만약 동심을 잃는다면 진심을 잃게 되며, 진심을 잃으면 참된 사람이 되는 것을 잃는 것이다.”
 
‘시야 놀자’의 서문에서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이렇게 말한다.
 
“동심은 시의 마음입니다. 동심을 잃어버린 세상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시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 속에서 가장 기본적인 정신이기 때문에 동심을 잃어버리지 않은 어른들이 시를 씁니다. 동심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세상에 대한 궁금증을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 윤동주의 동시 세 편을 읊어 보자.
 
나무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이 자오
 
 
반딧불
 
가자가자 숲으로 가자
달 조각 주우러 숲으로 가자
그믐달 반딧불은
부서진 달 조각
가자가자 숲으로 가자
달 조각 주우려
 
 
내일은 없다
 
내일 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깨어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동무여!
내일은 없나니
 
 
소년 시절 나는 함석헌(1901-1989) 선생님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너무도 감명 깊게 읽고 분통이 터졌었다. 한국 역사의 흐름이 크게 잘못되기 시작한 것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威化島 回軍’이라 본 것이다.
 
고려말 1388년 (우왕 14년) 명나라 홍무제 주원장이 철령鐵領 이북의 영토는 원나라 영토였다는 이유로 반환하라는 요구에 맞서 최영 장군은 팔도 도통사,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로 삼은 요동정벌군이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까지 이르렀을 때 이성계가 개경開京으로 회군한 사건 말이다.
 
2015년 ‘글씨에서 찾은 한국인의 DNA’란 책의 부제가 붙은 <어린아이 한국인>이 나왔다. 2009년 항일운동가와 친일파의 필적을 비교 분석한 책 <필적은 말한다>를 펴냈던 저자 구본진이 비석과 목간-방패-사리함 등 유물에 남아 있는 글씨체에서 우리 민족성의 본질을 찾아내는 <어린아이 한국인>을 출간한 것이다.
 
“지금 한국인의 발목에는 격식과 체면과 겉치레라는 쇠사슬이 잘가당거리지만 이는 오랜 중국화의 역사적 산물일 뿐, 원래 한민족은 인류 역사상 가장 네오토닉neotenic(유아기의 특징이 성년까지 남아 있는 현상을 말함)한 민족이었다”며 우리 민족은 자유분방自由奔放하고 활력이 넘치면서 장난기가 가득한 ‘어린이 기질’을 갖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우리 민족의 이런 ‘어린이스러움’은 고려시대 이후 중국의 영향으로 경직되었으나 19세기 이후 중국의 위상이 떨어지면서 부드럽고 자유로운 한민족 고유의 품성과 글씨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저자는 향후 연구 과제도 제시한다. 중국 만리장성 외곽에서 발견된 ‘홍산문화’가 우리 민족과 관련된 문화일지 모른다는 주장인데, 그 근거 역시 글씨체다. 황하문명보다 1,000년 이상 앞선 홍산문화 유물에 남아 있는 글씨체가 고대 한민족의 글씨체와 유사하다면, 이야말로 세계역사를 바꿔놓을 단서임이 틀림없다.
 
어떻든 이 ‘아이스러움’이란 우리 한민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계 인류 모든 인종과 민족에게 공통된 특성이 아닐까. 이 순수 하고 경이롭고 신비로운 ‘동심’을 갖고 우리 모두 태어나지만 타락한 어른들의 잘못된 세뇌교육과 악습으로 ‘아동낙원兒童 樂園’을 잃는 ‘실낙원失樂園’의 비극悲劇이 시작되었어라.
 
아, 그래서 나의 선친 이원규 李源圭(1890-1942)도 일제강점기에 손수 지으신 동요, 동시, 아동극본을 엮어 <아동낙원兒童 樂園>이란 책을 500부 자비로 출판하셨는데 집에 남아 있던 단 한 권마저 6·25동란 때 분실되고 말았다.
 
아, 또 그래서 나도 딸 셋의 이름을 해아海兒(첫 아이로 ‘쌍둥이를 보고, 한 아이는 태양 ‘해’ 그리고 또 한 아이는 바다 ‘해海’로 작명했으나 조산아早産兒들이라 한 아이는 난 지 하루 만에 세상 떠나고), 수아秀兒, 그리고 성아星兒라 이름 지었다. 평생토록 젊음과 동심을 갖고 살아주기를 빌고 바라는 뜻에서다. 간절히 빌고 바라건대 바다의 낭만과 하늘의 슬기와 별들의 꿈을 먹고 살라고. 이와 같은 기원과 염원에서 아이 ‘아兒’ 자字 돌림으로 한 것이다.
 
정녕코 복福이야 명命이야, 우리 모든 어른들도 어서 잃어버린 동심童心을 되찾아 우리 본연本然의 코스미안으로 ‘복낙원 復樂園’ 하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9.25 10:51 수정 2021.09.25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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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