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우사宇事 Cosmic Affair: 모두 다 부머랭이다 Everything has a Boomerang Effect

이태상

 

2021년 9월 27일자 민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만파식적] 칼럼 '로알드 달' 필자 문성진 서울경제 논설위원은 영국 작가 로알드 달의 삶과 작품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으로 유명한 동화 작가 로알드 달(1916~1990)은 사망 직전 “초콜릿·연필·와인을 함께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다르다는 얘기가 있다. 그가 임종 직전 유언을 남기려는 찰나 간호사가 갑자기 주삿바늘을 꽂는 바람에 “아, ××”이라는 욕설을 내뱉고 숨을 거뒀다는 것이다. 생전엔 유대인 비하 발언으로 곤욕을 치렀다. 언론 인터뷰에서 “유대인의 성격에는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특성이 있다”고 말한 게 화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 공군 파일럿으로 참전해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전공을 세운 그였지만 유대인들의 뭇매를 피할 수는 없었다.

노르웨이계 영국 태생인 달은 어릴 적 어머니가 들려준 노르웨이 전설과 북유럽 신화 속 괴물 트롤 이야기 등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곤 했다. 일찍 사망한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때 일어난 사건들을 일기로 써 아들에게 남겼다. 달은 그 영향으로 8세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어머니에게도 편지를 자주 썼다. 달의 작품은 달달한 동화가 아니다. 처녀작 ‘그렘린’과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 ‘마틸다’ 등 대부분이 어딘지 모르게 음침한 분위기에 강한 반전이 담긴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넷플릭스가 달의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는 ‘로알드 달 스토리 컴퍼니(RDSC)’ 를 인수해 달의 작품을 콘텐츠 제작에 쓸 수 있게 됐다. 이번 인수는 디즈니플러스 등의 출범으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장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나온 넷플릭스의 승부수다. 전 세계적으로 63개 언어로 번역돼 3억만 부 이상이 팔린 달의 작품이 지닌 잠재적 가치에 베팅 한 것이다. 계약 내용은 비밀이지만 3년 전 넷플릭스와 RDSC의 파트너십 계약 규모가 최대 10억 달러인 점에 비춰 막대한 금액을 쏟아 부었을 가능성이 크다. 빅테크가 살 길은 오직 혁신뿐이라는 교훈을 다시금 절감케 하는 사례다. 우리 빅테크 기업들도 손쉬운 ‘문어발 확장’에 기웃대지 말고 뼈를 깎는 고통이 따르더라도 혁신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문성진 서울경제 논설위원>

극심한 기후 변화와 코로나 역병 팬데믹이 현재 당장 우리 눈과 코 앞에 닥친 상황에서 개인적으로든 국가와 민족적으로든, 더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이 지구촌 온 인류가 뿌린대로 거두고 있지 않은가.  입이 닳도록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자업자득'이니 'What Goes Around ... Comes Around'이란 구두선口頭禪을 더 이상 뇌까릴 것도 없이 말이어라. 

지난해 2020년 11월 28일자와 9월 13일자 그리고 9월 8일자에 올린 우생의 칼럼 글 세 편 우리 다시 한 번 반추해보자.

[이태상 칼럼] '나눔과 베풂의 마술 같은 기적(The Magic-like Miracle of Giving)'

매년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다음 첫 화요일(올해는 12월 1일)은 나눔과 베풂의 의미를 상기시키고 이를 실천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자는 취지로 지난 2012년 미국에서 처음 제정된 날로 지금은 전 세계적인 나눔운동으로 발전 확산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실시되어온 다양한 연구조사 결과, 밝혀진 사실은 돈뿐이 아니라 자원봉사 활동 등 자기가 나누고 베풀 수 있는 시간과 재능을 기부할 때 수혜자(受惠者)보다 우선 기부자(寄附者) 자신의 행복에 지대(至大)한 혜택(惠澤)을 준다는 것이다.
 
이 효과는 단지 시혜자(施惠者)의 건강과 장수(長壽)에만 국한되지 않고 개인적인 인맥(人脈)과 신망(信望) 구축에 크게 기여해 사회적으로나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고 한다.
 
광고에서도 개별적인 상품광고보다 기업광고가 훨씬 더 큰 효과가 있어 한 기업의 공신력에 따라 그 기업의 상품판매량이 좌우되듯이, 한 인간의 인격과 품격에 따라 그가 하는 모든 일의 성패가 결정되는 것이리라.
 
‘주고받기(Give and Take)’라고 먼저 씨를 뿌리고 가꿔야 수확을 할 수 있듯이, 종자씨를 까먹다 보면 수확은 불가능하고 그래서 한자(漢字)로 소탐대실(小貪大失)이란 사자성어(四字成語)가 있는가 하면 영어로는 한 푼 아끼다 백냥 잃는다는 뜻으로 ‘penny wise and pound foolish’란 관용구가 있지 않나.
 
따라서 늘 제 잇속만을 잘 챙기는 ‘똑똑한’ 자(者)가 실은 헛똑똑이로 바보 천치인가 하면 늘 손해만 보는 듯 한 사람이 진짜로 현명(賢明)하지 않든가.
 
얼마 전 보게 된 기사에 따르면 한 해에 미국에서 수백만 명 이상이 심장마비로 죽거나 다행히 죽지 않고 목숨을 건져도 알츠하이머라는 노인성(老人星) 치매증(癡呆症) 환자로 폐인(廢人)이 된다는 거였다.
 
뉴욕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의과대학에서 75세부터 85세 사이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10년을 두고 연구 조사해본 결과 심장마비 환자는 다른 환자보다 다섯 배나 더 많이 이 알츠하이머 병을 앓게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늙어서 노망기(老妄氣)가 생겨 망령(亡靈/妄靈)을 부리게 되는, 노망(老妄)이라 불려온 이 병을 지금까지 서양에서도 나이 탓으로만 여겨왔는데 이제는 심장마비를 예방함으로써 노망 또한 예방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머리 돌아가는 것’도 ‘가슴 뛰는 대로 따라가는 것’ 아니랴!
 
최근에 또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소서릴토(Sausalito) 시(市)에 있는 예방의학연구소에서 여러 해를 두고 많은 사람을 상대로 연구 조사해 본 결과 심장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최선의 방법이 수술이나 약물치료가 아니고 극히 상식적이고 비용도 별로 안 드는 일상생활 태도와 습성을 잘 갖는 것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무엇보다 먼저 금연하고 매일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며 요가나 묵상 또는 참선(參禪)을 통해 근심과 걱정을 덜고 긴장을 풀어 마음의 여유와 평화를 얻는 것이라고 한다.
 
하와이나 카리브해(海)에 있는 섬나라들에 가보면 기념품으로 파는 티셔츠에 ‘걱정하지 말고 행복하라(DON’T WORRY AND BE HAPPY)’ 또는 ‘아무 문제 없어(NO PROBLEM)’이란 문구가 새겨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물질적으로는 몹시 가난해도, 즐겁고 행복하며 건강하게 낙천적으로 사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앞에 언급한 예방의학연구소(Preventive Medicine Research Institute in Sausalito, California)의 창설자며 연구소장인 딘 오니쉬 박사(Dr. Dean Ornish, 1953 - )의 말같이 ‘자기 자신에 대해 기분 좋게 생각하고 행복하게 삶을 즐길 수 있을 때,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동 대신 자신과 이웃의 삶을 동시에 모두 다 증진(增進) 강화(强化) 고양(高揚)시키는 것’이라면 이를 다시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우리 마음가짐이 몸가짐을 좌우하고 세상만사를 지배하는 것’이리라.
 
자, 이제 오니쉬 박사의 말 좀 인용해 보리라.

그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변명해준다거나 그의 행동을 용납한다는 게 아니고 당신이 더이상 고통받지 않도록 과거지사로 돌려버리고 잊어버리는 것을 말하는 거다. “When I talk about forgiveness, I mean letting go, not excusing the other person or reconciling with them or condoning the behavior. Just letting go of your own suffering.”

미국민의 20%가 굶주리고 세계 인구의 반이 영양실조인 상태에서 식물성 곡식을 더 섭취하고 동물성 지방질을 덜 섭취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를 위해서도 나은 일이다. “At a time when 20% of people in the US go to bed hungry each night and almost 50% of the world's population is malnourished, choosing to eat more plant-based foods and less red meat is better for all of us-ourselves, our loved ones, and our planet.”

진정한 힘은 우리에게 주어졌거나 아니면 우리가 창조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우리의 내적 평화와 가치와 행복을 깨달을 때 생기는 것이다. “Real power is not given to us or even created; real power is realized. It comes from realizing an inner sense of peace, self-worth, and happiness.”
건강이 나빠지는 건 당신이 갖고 있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니고 당신이 이미 갖고 있는 걸 남용하고 악용하는데서 촉발되는 거다. 건강이란 당신이 얻어야 하는 게 아니고 당신이 이미 갖고 있는 걸 해치지 않는 일이다. “Poor health is not caused by something you don't have; it's caused by disturbing something that you already have. Health is not something you need to get, it's something you have already if you don't disturb it.”

우리 안에는 우리의 내적 스승, 안내인의 낮으나 분명한 목소리가 있지만 일상생활의 잡다한 잡음 때문에 우리가 듣지를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정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귀기울이면 무엇이 우리 자신을 위해 최선인지를 깨닫게 된다. “We all have an inner teacher, an inner guide, an inner voice that speaks very clearly but usually not very loudly. That information can be drowned out by the chatter of the mind and the pressure of day-to-day events. But if we quiet down the mind, we can begin to hear what we're not paying attention to. We can find out what's right for us.”
우린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죽는다는 걸. 그렇지만 그 누가 이 죽는다는 일을 생각하고 싶겠는가? 우리가 늘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 (삶의) 기쁨과 즐거움과 자유일 뿐이다. “We all know we're going to die one day, but who wants to think about it? What's sustainable is joy, pleasure and freedom.”

사랑과 친밀감이 우리를 병들게도 낫게도 한다. 약이나 섭생에 있어 금연한다거나 운동 부족이거나가 아니고 이 (사랑과 친밀감)보다 더 큰 영향을 주는 게 있다는 걸 난 알지 못한다. “Love and intimacy are at the root of what makes us sick and what makes us well...I am not aware of any other factor in medicine-not diet, not smoking, not exercise-that has a greater impact.”

사랑과 친밀감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필요 요건이다. 음식과 물과 공기처럼 말이다. “The need for love and intimacy is a fundamental human need, as primal as the need for food, water, and air.”

사람들은 변화를 싫어하는 게 아니고 변화되는 걸 싫어할 뿐이다.“People don't dislike change, they dislike being changed.”
 
내가 영성(靈性)을 말할 때 나는 종교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든, 소아(小我/小宇宙)인 나를 대아(大我/大宇宙)인 나, 곧 온우주와 연관 지어 주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When I use the word spirituality, I don't necessarily mean religion; I mean whatever it is that helps you feel connected to something that is larger than yourself.”

일반적으로 나에게는 (뭔가를) 발견하는 과정 (이를 내가 우리말로 바꿔보자면, 도(道) 닦는 과정)이, 그 어떤 해답보다 훨씬 더 흥미롭다. “I usually find that the process of discovery is more interesting than the answers.”

삶의 기쁨은 지속가능하지만 죽음의 공포는 그렇지 않다. “Joy of living is sustainable; fear of dying is not.”
의미는 순응성(順應性)이 있다. 이 의미를 제거하면 남는 건 허무주의(虛無主義)와 절망(絶望)뿐이다. 하지만 의미를 되찾게 되면 (이를 내가 우리말로 달리 풀이해 코스미안으로서 우리 자신의) 그 어떤 특별한 성신성(聖身性/星神性)을 얻게 된다. “Meaning is malleable: take it out, you get nihilism and despair. Put it in, you get sacredness and something most special.”

[이태상의 항간세설] '코스미안시대가 도래하고 있어라' (3)

그리스 신화에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하는 힘을 부여받았던 프리지아(Phrygia)의 왕 미다스(Midas)의 이야기가 있다. 손을 대는 것마다 다 황금으로 변해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황금이 좋다지만 사람이 황금을 먹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서양에서는 유대인들을 꺼리듯 한국에서는 개성사람들을 멀리해 온 것 같다. 그 이유는 이들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에 등장하는 냉혹한 고리대금업자 샤일록(Shylock)이나, 챨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A Christmas Carol)’에 나오는 수전노 스크루지(Scrooge) 같이 인색하기로 소문났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물론 선입견과 편견이 많이 작용했으리라.
 
좀 과장되긴 했겠지만 개성사람들이 얼마나 경제적이고 절약하는지를 말해주는 얘기들이 있다. 개성사람 집 밥상에는 밥 한 그릇뿐이고 소금에 절인 짠 조기 한 마리가 천정으로부터 밥상 위로 매달려 있어 밥 한술 입에 떠 넣고는 그 짠 조기를 한번 반찬으로 쳐다본단다. 또 어느 누가 개성사람 집 뜰 안으로 짠 조기 한 마리를 던졌더니 그 집 주인 어른이 이 웬 ‘밥도둑이냐'고 펄쩍 뛰면서 집안 식구들이 이 짠 조기 때문에 밥을 많이 먹게 될까 봐 이 조기를 얼른 집어 울타리 밖으로 되 던져 버리더란다.
 
내가 아는 사람의 아버님께서는 옛날 개성에 사실 때 볼 일 보러 집 떠나 먼길 가실 때면 주머니에 떡을 몇 개씩 넣고 가셨는데 아무리 배가 고파도 떡이 쉴 때까지 참고 기다리셨다고 한다. 쉰 떡을 잡숴야 소화가 안 돼 배고픈 줄 모르고 오래 버티실 수 있었던 까닭에서였단다. 그래서였는지 그분께서는 오래 못 사시고 일찍 돌아가셨다고.
 
남 말은 그만두고 내 얘기도 좀 해보리라. 내가 20년 살다 헤어진 첫 번째 아내 친정이 개성 출신이어서였는지 나도 모르게 그 전통에 물이 들어서였을까, 결혼 후 영국으로 이주해 직장 일로 매주 영국 각지로 출장을 다니면서 주말마다 집에 오면 아내가 싸주는, 하루 세끼 먹을 샌드위치 5~6일분을 한 박스 차 트렁크에 싣고 떠났었다. 호텔에선 보온병에 더운물만 얻어 차를 타 마시면서 회사에서 받는 출장비 중 식대는 한 푼도 쓰지 않고 다 모아 음악 공부하는 세딸들 뒷바라지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차에 싣고 다니느라 겨울에는 꽁꽁 얼고 여름에는 곰팡냄새가 나는 샌드위치를 날이면 날마다 먹었던 기억이 아련하기만 하다.
 
우리말로는 ‘작은 것을 탐하다 큰 것을 잃는다’고 소탐대실(小貪大失)이란 뜻으로, 영어에도 ‘한 푼 아끼려다 천 냥 만 냥 잃는다’고 ‘penny-wise and pound-foolish’란 말이 있지만 이기적이고 인색한 것이 개성사람이나 유태인만은 아니리라. 영국 작가로 ‘기상천외의 이야기들(Tales of the Unexpected, 1979)’등의 저자인 로알드 달(Roald Dahl 1916-1990)이 생전에 인터뷰에서 한 다음과 같은 말은 우리 모두가 귀담아 되새겨 봐야 하지 않으랴.
 
“유대인 기질 또는 근성에는 사람들의 반감을 사고 적개심까지 불러일으키게 하는 특징이 있다. 아마 이것은 비유대인에 대한 그들의 도량이 좁고 관대함이 부족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내 말은 언제 어디서나 그 무엇을 또는 그 누구를 반대하는 주의가 생기고 운동이 일어날 때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심지어 히틀러같이 고약한 독재자도 아무 이유나 까닭 없이 유대인을 괴롭힌 것은 아닐 테니까. There is a trait in the Jewish character that does provoke animosity, maybe it’s a kind of lack of generosity towards non-Jews. I mean, there’s always a reason why anti-anything crops up anywhere; even a stinker like Hitler didn’t just pick on them for no reason."

그가 생전에 유태인에 대해 한 말 가운데 대표적인 다섯 마디는 이렇다.

1)“There is a trait in the Jewish character that does provoke animosity, maybe it’s a kind of lack of generosity towards non-Jews. I mean, there’s always a reason why anti-anything crops up anywhere; even a stinker like Hitler didn’t just pick on them for no reason. I mean, if you and I were in a line moving towards what we knew were gas chambers, I’d rather have a go at taking one of the guards with me; but they [the Jews] were always submissive.”

2) “I am certainly anti-Israel, and I have become anti-Semitic.”

3) In book review written by Dahl in the periodical “Literary Review,” he referred to “those powerful American Jewish bankers” and accused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of being “utterly dominated by the great Jewish financial institutions over there.”

4) The Israeli military activity in Lebanon, he said, “was very much hushed up in the newspapers because they are primarily Jewish-owned … there aren’t any non-Jewish publishers anywhere.”

5) When further discussing the Lebanon War, he wrote: “makes one wonder in the end what sort of people these Israelis are. It is like the good old Hitler and Himmler times all over again.”
 
언제부터인가 벌써 오래전부터 미국 LA 지방에서는 한국사람들을 동양의 유대인이라고 한다지 않나. 서양사람 특히 영국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에 ‘찻잔 속의 폭풍(storm in a teacup)’이 있다. 1992년 4월 29일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을 집단 구타한 로스앤젤레스 백인 경찰관들에 대한 재판에서 배심원들이 무죄 평결을 내리는데 반발한 흑인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날벼락을 맞은 한국교포들의 신세는 ‘폭풍 속에 박살 난 샴페인잔(champagne flute shattered in a storm)’이라 해야 할 것 같다.
 
뿌리 깊은 흑백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말려든 우리 한국교포가 ‘희생양’이 되었다고, 날벼락 맞은 격이라고만 할 수 없지 않을까. 한국인이 근면하여 돈을 많이 벌기 때문에 흑인들이 시기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한국인이 노골적으로 그들을 멸시한 데에도 문제는 있었으리라. 백인도 흑인도 아닌 황인종으로서 흑백 사이에서 중화(中和)를 지키지 못하고 검은 인종을 야만시하여 자기네가 세계의 중앙에 위치한 가장 문명한 나라라며 거들먹거리는 중화(中華)를 모방하다 못해 백인우월주의 흉내까지 내며 스스로를 백인으로 착각한 데 있지 않았을까. 흑인촌에서 돈 벌어 백인촌에 살면서 말이다.
 
언젠가 한국의 TV드라마 ‘당신의 축배’에 재미교포 세탁업자를 멸시하는 대사가 쓰였다고 미국의 전 한인세탁업자는 물론 재미교포들 모두 분개하며 한인회가 한국정부와 방송사에 항의하는 소동이 일어났었다. 이것이야말로 찻잔 속의 폭풍이 아니었을까. 일찍이 그 누군가가 말했다는 것처럼 너 자신의 동의 없이는 그 누구도 너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 없으리라. 예로 ‘병신같은 놈' 또는 '거지 같은 년’이라고 누가 욕을 해도 나 자신이 진짜 병신이나 거지가 아니면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사람 보고 개 같은 것이라고 ‘개새끼’라 할 때 평소에 정말 개같이 살아온 사람일수록 길길이 날뛰지 않던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 할 때 당나귀 귀를 가진 임금이나 펄쩍 뛸 일이고 그것도 자기가 당나귀 귀를 갖고 있는 사실을 숨겨 온 경우에만 그럴 것이다. 임금님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벌거벗은 채 거리를 활보할 때 어린애로부터 ‘임금님 벌거벗었네’라고 손가락질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현대판 임금님의 경우도 매한가지 아닐까. 야채, 과일, 꽃, 생선, 옷, 신발, 가발, 세탁, 수선업 등 가지가지 힘들고 고생스런 품 팔아 검은 손때 묻은 돈으로 임금(賃金)님 된 대부분의 재미교포들 말이다.
 
돌이켜보면 한국동란 때 그리고 그 후로 그 어떤 비상한 수단과 방법으로 외국 특히 지상의 천국처럼 선전된 미국에 이주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유럽의 옛 동화 속의 여주인공 신데렐라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다같이 몸을 파는 여자라도 서양사람 미군을 상대하면 ‘양공주님’이 되고 동족인 한국 남자를 상대하면 ‘똥갈보’라 불리지 않았나.
 
그 뒤로 좀 악취미 같은 농반진반의 이야기가 나돌기까지 했다. 용케 혼자만 전쟁터 한국을 떠난 사람들은 한국에 전쟁이 다시 나기를 내심 바라고,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혼자만 더 잘 살겠다고 고향과 조국을 떠난 사람들이 해외에서 돈 많이 벌고 크게 성공하기를 빌어주기보다는 교통사고나 강도의 총에 비명횡사라도 하기를 은근히 바랐다고.
 
흔히 친척이나 동족이 남만도 못하다고 한다. 모르는 남이 잘살면 부러워하고 못 살면 동정하는데 형제나 동족이 잘되면 속상해하고 잘못되면 깔보면서 멀리 한다고. 미국의 교포사회에서 흔히 듣는 말로 길에서 같은 한국 사람을 만나면 반갑기보다 경계하게 된다고 한다. 제 상점 앞에 한국 사람이 기웃거리기라도 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단다. 바로 옆에 같은 업종의 상점을 차려 덤핑하듯 도매가격보다 싸게 물건을 팔아 제 손님 다 뺏어갈까 봐.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를 버리고 떠나시는 임은 심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느니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 하는 것이 우리 민족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젊은이가 늙은이 대할 때나 건강한 사람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자를 방문할 때나 의식주 걱정 없는 사람이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볼 때 상대적으로 자신의 젊음과 건강과 유복함을 다행스러워한다. 그래서 동정이나 자선조차도 이기적인 일종의 자위책이라고 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신경질적으로 비교하는 데서 쓸데없이 그야말로 백해무익한 우월감 아니면 열등감을 느껴 어깨를 제치기도 하고 축 늘어뜨리기도 하는데 있는 것 같다.
 
1972년 초 직장 때문에 우리 가족이 영국에 가 살 때 당시 주영대사관 공보관으로 부임한 나의 옛 동료 기자 친구 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담소하는 가운데 친구 부인이 자기는 길에서 흑인을 보면 우월감을 느낀다는 실토에 나는 한편 그 ‘천진난만함(?)'을 높이 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친구 부인은 대학교육까지 받고 결혼 전에 여성잡지 기자 생활을 한 지식인 여성이었는데.
 
하기는 그 친구 부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한없이 복합적인 인간사회에 살면서도 너무나 피상적이고 단순하고 획일적인 가치척도로 서로를 견주고 재는 것 같다. 따라서 피부 색깔이니, 직업의 귀천이니, 관존민비, 남존여비, 재산유무, 학식유무를 따져 인무식(人無識)이 되는 게 아닐까.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고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처지를 바꿔 생각하는 것이 대도(大道)라면 이런 큰마음 해심(海心)을 갖고 출렁이는 인생바다에 무슨 문이 있으리오. 이런 마음가짐으로 보면 나보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나보다 잘사는 사람도 못사는 사람도 없고, 나보다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으며, 모두가 다 나의 분신임을 깨닫게 되어, 더이상 치졸무쌍한 우월감도 열등감도 느낄 필요 없게 되리라. 그러면 그 누가 되었든 이웃의 기쁨이 내 기쁨이요, 이웃의 슬픔과 아픔이 내 슬픔과 아픔인 것을 알게 되리. 나 자신이 여러 형태로 여러 가지 삶을 살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하는 것임을.
 
어찌 안그러랴!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모든 삶을 다 이해하고 존중하며 사랑할 수 있으리라. 어떤 삶도 모른 체할 수 없는, 무시할 수 없는, 버릴 수 없는, 너무도 애달프도록 가엾고 덧없는 것 아니더냐. 그래서 윤동주도 그의 ‘서시’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읊었으리라. 이럴 때 비로소 남이 아니고 모두가 다 나 자신의 다른 모습임을 알게 되리. 당신의 축배가 내 축배요, 우리 모두의 축배인 것을.
 
그리고 축배는 혼자 들 수 없고 다 같이 함께 드는데 그 뜻과 의의가 있다는 것을, 또 그리고 축배 가운데 사랑의 축배, 곧 동고동락, 숨과 꿈을 나누는, 삶의 축배 이상이 없음을 알게 되리.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의 고향 '코스모스바다의 마음,' 곧 우심(宇心)이어라.

[이태상 칼럼] '선물은 자신에게 주는 것'

2020년 8월 23일자 뉴욕타임스 일요판 스타일스(Styles) 섹션 '사회적인 문답 칼럼 (Social Q's : PHILIP GALANES)에 <단순히 '고마워'면 족하리>(A Simple 'Thank You' Would Suffice)이란 제하(題下)에 다음과 같은글이 실렸다.

"매년 나는 장성(長成)한 딸에게 딸 생일과 크리스마스 때면 수표를 보냈다. 딸이 선물보다 돈으로 달라고 해서였다. 그러나 딸은 단 한 번도 수표를 잘 받았다는 말이 없다. 이렇기가 벌써 여러 해째이다. 딸이 돈을 받은 사실을 나는 내 은행 계좌에서 내가 끊은 수표 금액이 빠져나간 것을 보고서야 확인하게 된다. 나는 몇 년 전에 딸에게 수표 받으면 받았다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라고 했더니 그 후로 얼마 동안은 그러더니 그쳤다. 내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데도 수표를 보내는 것은 나의 희생인데. 딸의 묵묵부답 침묵이 내 마음을 상하게 한다. 딸이 수표를 잘 받았다는 감사의 말 한마디 할 성의조차 없다면 더 이상 수표를 보내지 말아야 할까요? 아니면 수표 대신 카드 한 장 보내고 말까요? 딸의 감정을 건드리고 싶지 않지만, 내가 이보다는 나은 딸로 키웠는데요."
 
(응답자 주: 여러 해를 두고 매주 적어도 하나의 변조(變調)된 이같은 내용의 질문을 받아왔다.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의 요점에 몇 차례 답한 바와 같이,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는 사랑하는 마음에서 선물을 주는 것이다. 넌지시 귀띔해 보고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 섭섭하거든 더 이상 선물을 보내지 말라. 하지만 이 문제의 근본이랄까 근원에 지금껏 나는 접근 하지 못했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내가 새로 갖게 된 이론은 이렇다:
      
받는 사람에게서 받았다는 연락이 없는데도 부모(또는 삼촌 아니면 할머니)가 해마다 선물을 보낸다면 어쩌면 수령자는 이를 '선물'로 여기지 않고, 당신의 딸이나 다른 사람들도 이를 선물이 아닌 마치 주식 배당금이나 사회보장 연금수표처럼 당연시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계속해서 선물이 배달된다는 사실이 그들이 이런 믿음을 갖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딸에게 다시 얘기해서 당신이 보내는 수표는 '자동적'이 아니고 '자발적'인 것임을 분명히 하시라. (당신이 딸을 잘못 키웠다는 자책감은 느끼지 마시라.) 당신의 살림이 빠듯해도 당신이 딸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수표를 보내는 것이라고 딸에게 말씀하시라. 그래도 딸의 고맙다는 말이 없어 기분이 상하시거든 딸에게 좀 더 배려심을 가지라고 말씀해 보시고, 그래도 소용없거든 수표 대신 카드만 보내시라."
 
이상과 같은 기사를 보면서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사회에서나 반복되는 현상이구나,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지난 2015년 한 주말 영화 '국제시장'을 웃다 울다 하며 본 기억이 되살아났다.
      
'흥남철수', 베트남 전쟁', '파독', '이산가족 찾기' 등 중장년층 그들의 이야기였다. 나 같은 노년층에게는 이 영화에서 직접 다루지 않은 일본 강점기와 8.15 해방과 그 후 겪은 갈등과 혼란상이 그 배경으로 중복되어 겹쳐지는 영화였다. 나 자신에게 재삼 재사 다짐하는 뜻에서 몇 자 적어 보리라.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진다'는 맥아더 장군의 말이나 옛날 어느 가수의 노랫말 '떠날 때는 말없이'를 상기하게 된다. 나 또한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듣고 보아 온 어르신들의 '내가 (또는 우리가) 너희들을 위해 얼마나 고생하고 어찌 키웠는데'란 공치사의 말씀을 지겨워했었다. 노년층은 물론 중장년층에게도 좀 심한 말이 되겠지만,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이 본능적으로 제 새끼를 위해 제 목숨 아끼지 않고 모든 희생을 감수하지 않던가.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의 독백처럼 "내는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기 참 다행이다"
 
이는 우리 모두를 대변하는 말 아닌가. 미국 가수 척 윌리스(Chuck Willis 1926-1958)가 부른 노래 '내가 (누구를) 위해 사는데(What Am I Living For, 1958)’의 노랫말처럼 말이다. 사랑이든 선물이든 도움이든 받을 때보다 줄 때 그 기쁨이 비교도 할 수 없이 훨씬 더 크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 상처와 피해를 주느니 차라리 내가 받는 편이 덜 괴롭지 않던가. 그래서 영어에도 ‘Virtue is its own reward’란 말이 있으리라.
 
“저는 계획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이에요. 천년 만년 사는 게 아니 잖아요.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죠. 오늘을 사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2014년 8월부터 6개월 동안 방영된 KBS2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가 종영된 후 탤런트 김현주가 한 말이다. 이 주말 연속극 제목 자체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한 마디로 축약해 표현하고 있다. 우리 남-북한 동족끼리, 지구촌 한 인간 가족끼리 정말 왜 이래라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드라마였다.
 
1977년생인 김현주가 1996년 뮤직비디오 ‘인생을,’ 그리고 1997년 MBC 미니시리즈 ‘내가 사는 이유’로 데뷔한 이후, 그녀가 출연한 드라마와 영화 및 뮤직비디오 제목들만으로도 우리 삶에 무엇이 중요한지,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를 말해주고 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밖엔 난 몰라’, ‘햇빛 속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등 말이다.
 
특히 2000년 SBS창사 10주년 특별기획 대하드라마 ‘덕이’에서 정귀덕 역으로 나온 김현주는 사람이 어려서부터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건지를 너무도 실감나게 여실히 보여주었다.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그 어떤 모진 세상 풍파라도 착하고 씩씩한 마음 하나로 다 극복하는 찬란한 인간승리의 찐한 감동을 시청자들에게 전해주었다.
 
킴벌리 커버거(Kimberly Kirberger, 1953 - )의 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If I Knew Then What I Know Now…)’이 있지만, 이런 때 늦은 넋두리가 무슨 소용 있으랴. 

김현주의 말처럼 오늘 당장 지금 잘 사는 게 중요하지. 단 한 번밖에 없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순간을 놓쳐버리고 ‘만일에 어쨌더라면’이란 잠꼬대 같은 소리로 단 한숨이라도 낭비하고 허비하지 말 일이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not to waste your breath’가 되겠다. 그 한 예로 이런 영어 속담이 있다. ‘아줌마에게 불알이 있었다면 아저씨가 됐을 텐데. (If auntie had the balls she would have been uncle.) 우리말로는 ‘죽은 자식 자지 만진다’라고 하던가.
 
‘당신은 나의 옛 모습이고 또 나의 모습이 되리라.’ 한 무덤의 비석에 새겨진 비문(碑文)이다. 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내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어떤 선물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자문해본다. 선물이란 남에게 주는 게 아니고 나 자신에게 주는 게 아닐까. 뿌리는 대로 거둔다고 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리라. 

사랑을 주면 사랑이 돌아오고, 미움을 주면 미움이 돌아오며, 선물은 씨앗처럼 가슴에 떨어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리라. 내가 죽어 땅속에 묻혀 흙이 되거나 불에 타 재가 되어 하늘로 증발해 나의 아니 우리 모두의 영원한 고향인 우주의 자궁 속으로 돌아간 다음에라도 말이어라.
 
우리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의 ‘예언자(The Prophet, 1923)가 베푼다는 것에 대해 하는 말 좀 들어보리라.
 
당신이 가진 것을 줄 때
이를 준다고 할 수 없고
당신 자신을 줄 때라야
참으로 주는 것이리오.
 
오늘 많이 모아 놓는 것
다 내일을 위해서라지만
아무런 자취도 남지 않는
세월이란 모래밭 속에다
재산이란 뼈를 묻어둔들
어디에 쓸 데 있으리오.
 
뭐가 모자랄까 걱정함이
다름 아닌 그 모자람이오.
우물에 샘이 넘치는데도
혹 목마를까 걱정이라면
그런 갈증 어찌 가시리오.
 
많은 것 갖고 있으면서도
남에게 주는 일 거의 없고
더러 좀 베푼다고 하더라도
생색을 내기 위해서라면
그 선심조차 욕될 것이오.
 
가진 것 별로 없어도
그래도 다 주는 사람
따뜻한 가슴 속에는
삶의 샘 넘쳐 흐르리.
 
기쁜 마음으로 주는 이
즐거움의 열매 거두지만
싫은 마음으로 주는 이
괴로운 가시넝쿨 뿐이리.
 
준다는 기쁨도 즐거움도
모르고 그저 베푸는 이
산골짜기에 피는 꽃들이
그 향기로운 숨 내쉬듯
그렇게 자연스러움이리.
 
참으로 너그러운 이에겐
받아 줄 사람 찾는 것이
더할 수 없는 기쁨이리.
 
세상에 아낄 것 무엇이오.
당신이 가진 것 모두 다
싫든 좋든 그 언젠가는
다 남겨 놓고 떠나는데
당신이 살아 주고 받는
삶의 기쁨 나눌 일이오.
 
당신이 세상 떠난 다음
벌어질 당신 유산 싸움
불씨 남겨 놓지 말리오.
 
때때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줄 만한 사람에게만 주고
받을 만한 사람만 받으리.
 
사람 봐 베풀라고 하지만
과수원에 있는 나무들과
풀밭의 젖소들과 양들은
그런 말 절대 안 하지요.
 
과일이고 우유고 털이고
가진 것 다 남에게 줘야
제가 사는 줄 잘 알지오.
끝내 지니고만 있다가는
썩어 없어지게 될 것을.
 
살아 숨 쉬면서 제 목숨
받아 누리는 사람이면
그 누구라도 그 뭣이든
떳떳이 받을 수 있으리.
저 큰 강물과 바닷물이
시냇물 다 받아들이듯.
 
우리가 주고 받는 것이
참으로는 우리 숨일 뿐.
날숨인가 하면 들숨이고
들숨인가 하면 날숨이리.
 
우리 모두 누구나가 다
사랑의 이슬 맺힌 삶을
받아 누리는 물방울들로
모든 것 다 내주는 땅과
끝도 한도 모르는 하늘
그 사이에서 낳은 자식
우리의 넉넉함 나누리오.
 
You give but little when you give of your possessions.

It is when you give of yourself that you truly give.

For what are your possessions but things you keep and guard for fear you may need them tomorrow?

And tomorrow, what shall tomorrow bring to the over- prudent dog burying bones in the trackless and as he follows the pilgrims to the holy city?

And what is fear of need but need itself?
Is not dread of thirst when your well is full, the thirst that is unquenchable?
 
There are those who give little of the much which they have ㅡand they give it for recognition and their hidden desire makes their gifts unwholesome.
 
And there are those who have little and give it all.

These are the believers in life and the bounty of life, and their coffer is never empty.

These are those who give with joy, and that joy is their reward.

And there are those who give with pain, and that pain is their baptism.

And there are those who give and know not pain in giving, nor do they seek joy, nor give with mindfulness of virtue;

They give as in yonder valley the myrtle breathes its fragrance into space.

Through the hands of such as these God speaks, and from behind their eyes He smiles upon the earth.
 
It is well to give when asked, but it is better to give unasked, through understanding;

And to the open-handed the search for one who shall receive is joy greater than giving.

And is there aught you would withhold?

All you have shall some day be given;

Therefore give now, that the season of giving may be yours and not your inheritors.
 
You often say, “I would give, but only to the deserving.”

The trees in your orchard say not so, nor the flocks in your pasture.

They give that they may live, for to withhold is to perish.

Surely he who is worthy to receive his days and his nights, is worthy of all else from you.

And he who has deserved to drink from the ocean of life deserves to fill his cup from your little stream.

And what desert greater shall there be, than that which lies in the courage and the confidence, nay the charity, or receiving?

And who are you that men should rend their bosom and unveil their pride, that you may see their worth naked and their pride unabashed?
 
See first that you yourself deserve to be a giver, and an instrument of giving.

For in truth it is life that gives unto lifeㅡwhile you, who deem yourself a giver, are but a witness.
 
And you receiversㅡand you are all receiversㅡassume no weight of gratitude, lest you lay a yoke upon yourself and upon him who gives.

Rather rise together with the giver on his gifts as on wings;

For to be over-mindful of your debt, is to doubt his generosity who has the free-hearted earth for mother, and God for Father.
 
아, 그래서 영국의 시인 존 던(John Donne 1592-1631)도 사람은 아무도 따로 떨어진 섬이 아니라고, 우리 모두 한 몸과 한 마음이라고, 서로 서로의 분신(分身)이자 분심(分心)이라고, 네 삶과 네 죽음이 내 삶과 내 죽음이라고 다음과 같이 읊었으리라.
 
'No Man is an Island'
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every man is a pi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
if a clod be washed away by the sea,
Europe is the less, as well as
if a promontory were,
as well as any manner of thy friends
or of thine own were;
any man's death dim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아, 또 그래서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인디언들도 이런 주문(呪文)을 외었으리.
 
“The rivers don’t drink their own water;
the trees don’t eat their own fruits.
 
The sun doesn’t shine for itself;
the flowers don’t give their fragrance to themselves.
 
To live for others is nature’s way….
 
Life is good when you are happy;
but life is much better when others are happy because of you!
 
Who doesn’t live to serve,
doesn’t deserve to live.

Our nature is service.”
 
중세 페르시아의 시성(詩聖) 루미(Rumi 1207-1273)의 이 시구 우리 함께 읊어보리라.
 
“Come to the orchard in Spring.
There is light and wine, and sweethearts in the pomegranate flowers.
 
If you do not come, these do not matter.

If you do come, these do not matter."
 
어떻든 세상만사 부머랭 같은 우사宇事임에 틀림없어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

전명희 기자
작성 2021.09.30 10:13 수정 2021.09.30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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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