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합포해전, 인터넷 카페의 문제점

이순신전략연구소장 이봉수

 

 

포털사이트 다음(DAUM)에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이배사)'이라는 인터넷 카페가 있다. 나는 그곳에 가입한 적도 없고 평소 거기 무슨 글이 올라오는지 모른다. 그런데 최근에 이 카페에 내가 쓴 '합포해전지 위치 비정(比定)에 관한 연구' 논문을 언급한 글이 올라왔다고 전해 들었다. 글을 올린 사람은 "아직도 합포해전지를 마산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논문을 심사한 사람 중에 해전 전문가가 없었을 것이다"라면서, "일제 강점기 직전 일본 해군이 작성한 해도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등의 주장을 하면서 카페 회원들에게 "현혹되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다음 카페에서 이런 글을 올린 분은 분명 합포해전지를 마산 합포(合浦)가 아닌 진해 학개(鶴浦)라고 주장하는 사람일 것이다.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학회지[문화역사지리 제33권 제2호(2021) 35-48]에 게재된 필자의 논문은 해당 분야에 학식과 덕망이 있는 심사위원 4명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게재 판정을 받았다. 이 논문을 쓰기 위하여 1년 이상 자료수집과 준비작업을 했다. 흔히 말하는 1등급 학회지에 게재된 논문은 일단 학술적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논문은 합포해전지가 창원시 진해 학개(鶴浦)가 아니고 마산 합포(合浦)임을 밝혀낸 것이다.


창원시 진해구 원포동 학개 마을 일대는 조선시대 웅천현 소속이다. 논문에서도 밝혔듯이 삼국사기,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 연려실기술, 경상도읍지, 웅천군읍지, 창원웅천읍지, 함주지 등 역사적 사료와 청구도, 팔도분도, 해동지도, 동여도, 대동여지도 등의 고지도를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조선시대 웅천현 관내에 합포(合浦)라는 지명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반면에 마산 일대는 조선시대 창원부 소속으로 신라 경덕왕 이래 일관되게 합포라는 지명이 있었다. 이처럼 문헌적 근거가 전혀 없는 진해 학개를 뜬금없이 합포해전지라고 우기는 사람들은 학문의 기본적인 연구방법 마저도 무시하고 있다.

동여도 / 한국학중앙연구원

진해 학개를 합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문헌기록상의 근거를 대라고 하면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한다. 다만 이순신 장군이 임진장초(壬辰狀草)에서  '웅천땅 합포(熊川地 合浦)'에서 해전이 있었다고 했으므로 창원땅이었던 마산 합포는 합포해전지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이순신 장군은 '웅천땅 합포'가 아닌  '웅천땅 합포 앞바다(熊川地 合浦前洋)'에서 해전이 있었다고 했다. 이 '전양(前洋)' 두 글자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현재의 마산만인 합포 앞바다는 해상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던 임진왜란 당시에는 경우에 따라 웅천땅이 될 수도 있고 창원땅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진해 학개(鶴浦)가 임진왜란 당시 웅천현에 존재한 지명이었다면 이순신 장군은 '웅천땅 학포(熊川地 鶴浦)'라고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학개(鶴浦)라는 지명 자체는 근자에 생긴 것이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웅천현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합포해전이 있었던 1592년 5월 7일(음력) 신시(오후 4시 경)에 거제도 영등포(현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에서 출동한 조선수군이 적선 5척을 추격하여 합포에서 불태워 없앴다고 이순신 장군이 임진장초에 엄연히 기록하고 있는데도, 진해 학개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단한 상상력으로 오후 6시는 되어야 출동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합포해전상황도

이순신 장군은 합포해전을 마치고 밤중에 노를 재촉하여(乘夜促櫓) 창원땅 남포(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난포리) 앞바다로 와서 밤을 새웠다고 했다. 논문에서도 밝혔듯이 필자는 경남시민문화네트워크와 함께 합포해전 당시와 일몰시간이 거의 같은 2020년 6월 16일과 7월 4일 요트를 타고 판옥선의 속도로 항행하연서 2차례에 걸친 현장실측 검증을 했다. 그 결과 진해 학개에서 해전이 있었다면 조선수군이 밤중에 노를 저을 이유가 전혀 없음을 밝혀냈다. 거제 영등포에서 2시간 40분 정도 걸리는 마산 합포일 경우에만 밤중에 노를 재촉했다는 시간대와 맞아 떨어진다.

 
사진: 2020년 6월 16일 제1차 현장 실측 검증
                               

이런 실측 검증 결과를 반박하기 위하여 반대론자들은 이순신 함대가 거제 영등포에서 출동한 시간을 자신들의 과거 주장을 번복하면서까지 신시(오후 4시 전후)가 아닌 유시(오후 6시 전후) 이후였을 것이라는 새로운 추측성 주장을 내놓고 있다. 진해 학개에서 해전을 치르고도 밤중에 노를 저어 남포로 갈 수 있다는 억지 논리를 만들기 위해 출동 시간까지 늦추어 잡는 아전인수식 주장이 분명하다. 이순신 장군의 기록 그 어디에 6시 이후에 출동했다는 내용이 있는지 묻고 싶다.

국문학적 상식으로 판단하거나 한자의 음차를 따져보아도 鶴浦(학포)=合浦(합포)라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순신 장군은 지명을 표기할 때 이두식 표기까지 사용하면서 신중을 기했다. 여수시 웅천동에 있는 곰내를 고음천(古音川)이라 표기한 것이나 통영시 산양읍 걸망개를 거을망포(巨乙望浦)로 표기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토록 세심한 이순신 장군이 합포와 학포를 구분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일제강점기 직전인 1904년에 일본 해군이 작성한 해도를 보면 진해 학개 위치에 합포말(合浦末)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영어로는 일본식 표기인 Hakke Kutsu(학개끝)이라고 병기되어 있다. 반대론자들은 이 지도가 마치 진해 학개가 임진왜란 당시 합포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사료라고 주장한다. 20세기 초에 일본 해군이 작성한 해도가 임진왜란 당시의 지명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해도는 일본 해군이 측량을 했던 시기 쯤에 학개라는 마을이 생겨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사료일 뿐이다.



지도: 1904년 일본 해군이 작성한 진해 학개 주변 해도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방대한 문헌적 근거와 현장 실측 검증을 통하여 합포해전지는 창원시 진해구 원포동 학개가 아니고 창원시 마산합포구, 마산회원구, 성산구 사이의 마산만 일대로 비정(比定)했다. 다만 왜군이 배를 버리고 상륙한 구체적인 지점이 어디인지는 추가적인 연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했다.

합포해전지 비정과 같은 연구는 정확한 사료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목소리 큰 사람이 주장한다고 거기에 부화뇌동하거나 다수결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특히 인터넷 카페에서 회원들이 담합하여 인민재판식으로 결론을 낼 일은 더욱 아니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반론을 펼치려면 권위 있는 학술지에 논문으로 게재하여 반박해 주실 것을 당부드린다. 그리고 필요시 끝장토론을 제안해 온다면 흔쾌히 응할 생각이다.


[이순신전략연구소장 이봉수 ogokdo@naver.com]

편집부 기자
작성 2021.10.05 11:45 수정 2021.10.05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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