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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2021년 10월 7일자) 미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칼럼 [김형철의 철학경영] '삶의 의미가 먼저다'를 옮겨본다.
엄청나게 더운 여름날이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세 명의 인부가 일을 하고 있다. 첫 번째 인부에게 물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보면 모르시오. 지금 벽돌 나르느라 바빠 죽겠소. 도와주지 못할 바에는 방해나 하지 마시오.”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온다. 두 번째 인부에게도 똑같이 물었다. 그랬더니 이런 답이 돌아온다. “나는 처자식 여덟 명을 먹여 살려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입에 풀칠하려고 이렇게 벽돌을 나르고 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지요.” 세 번째 인부의 답은 좀 달랐다. “저는 사람의 영혼을 구제하는 위대한 성전을 짓는 중이랍니다. 그 위대한 일을 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여한이 없습니다.”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연히 세 번째 인부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가 가장 행복한 이유는 자신이 그 일을 하는 의미를 스스로 찾았기 때문이다.
수녀원의 수녀들은 자신의 재산 증식에 여념이 없고 권력을 향한 탐욕에 찌든 삶을 사는 속세와는 판이한 삶을 매일매일 살아간다. 수녀들이 하루 종일 하는 일은 대개 비슷하다. 먹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씨 뿌리고 밭을 가는 육체적 노동을 신성시한다.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고 기도와 명상으로 영혼을 고양시킨다. 한 수녀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곳에는 두 종류의 수녀들이 있었다. 한 부류는 좀 일찍 죽었고 또 다른 부류는 평균 10년 정도를 더 살았다. 도대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비슷한 집단에서 왜 이렇게 유의미한 차이가 나는 것일까. 비밀은 일기장에 쓰여 있었다. 수명이 더 길었던 수녀들이 젊은 시절부터 쭉 써온 일기장에는 공통점 하나가 발견된다. 하나같이 자신의 삶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똑같이 힘들게 일하고 기도하면서도 감사하는 것과 그저 묵묵히 견뎌내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자기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은 오늘이 있음 그 자체에 감사해한다. 감사하면 즐거워진다.
2차 세계 대전 동안 가장 수난을 겪은 사람들은 단연 유태인들이다. 600만 명이 수용소에 갇혀 비참하게 죽었다. 매일매일 사람들이 가스실로 끌려가서 죽는다. 가스실로 끌고 가는 사람들 중에는 놀랍게도 같은 유태인들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을 가두고 가스실 단추를 누르는 사람들도 같은 유태인들이었다. 나치에 의해 부역자로 지명되면 임무를 수행하면서 좀 더 나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그만큼 생명이 연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역할을 지목받으면 차라리 자살을 선택하는 유태인들도 여럿 있었다. 동족을 배신하면서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것이다. 어차피 동족을 다 죽이고 나면 자신도 마지막으로 가스실에 들어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토사구팽이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좀 특이한 행동을 하는 유태인이 한 명 있었다. 틈만 나면 유리조각 같은 것을 찾는다. 면도를 하기 위해서다. 수용소에 갇힌 유태인들은 기약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처지인데 그는 왜 매일 면도에 열중했을까. 그 유태인은 나치가 건강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먼저 골라 가스실로 보낸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깨끗하고 건강해 보이면 생명을 연장할 기회가 생긴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종전 후 그는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을 인터뷰해 책을 한 권 냈는데 인터뷰 과정 중 이 사람들에게서 놀라운 공통점 하나를 발견했다. 그들은 자신이 반드시 살아서 수용소를 나갈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매일매일 ‘나가서 제일 먼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들이 너무나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가 저서 ‘죽음의 수용소를 넘어서’를 쓴 빅터 프랭클이다.
“자신이 사는 의미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떠한 고통도 참을 수 있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한 말이다. 나는 오늘도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왜 이 삶을 살고 있는가.” 삶의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다. 의미를 찾으면 감사한 마음으로 삶을 즐길 수 있다.
<김형철 전 연세대 교수>
만 사람이면 만 사람이 다 제 각기 찾는 자신만의 '삶의 의미 The Meaning of Life'가 있겠지만 '참고사항'으로 몇 사람의 말을 인용해보리라.
“삶의 의미를 네가 무엇에 두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살아있음이 그 의미가 아닌가. The meaning of life is whatever you ascribe it to be. Being alive is the meaning.”
―Joseph Campbell
“우리가 무엇이든, 무엇이 되든, 궁극적으로 그게 전부라는 것이 삶의 의미가 되렷다. Whatever we are, whatever we make of ourselves, is all we will ever have—and that, in its profound simplicity, is the meaning of life.”
―Philip Appleman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주된 목적은 다른 사람(과 자연 만물)을 돕는 거다. (이롭게) 도울 수 없다면 적어도 해치지는 말 일이다. Our prime purpose in this life is to help others. And if you can’t help them, at least don’t hurt them.”
―The Dalai Lama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우주적 하나의 큰 의미란 없고, 단지 우리 각자가 우리 삶에 부여할 개별적인 의미, (말하자면)각자를 위한 소설 책 같은 하나의 플롯 구성이 있을 따름이다. There is not one big cosmic meaning for all; there is only the meaning we each give to our life, an individual meaning, an individual plot, like an individual novel, a book for each person.”
―Anais Nin
“삶의 진정한 의미란 그 그늘 아래 네가 앉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나무를 심는 거다. The true meaning of life is to plant trees, under whose shade you do not expect to sit.”
―Nelson Henderson
“삶의 의미란 단순히 생존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전진하고 위로 비상하며 (그 무엇이든) 성취하고 (그 어떤 난관도) 극복하는 거다. The meaning of life is not simply to exist, to survive, but to move ahead, to go up, to achieve, to conquer.”
―Arnold Schwarzenegger
“우리가 (지금) 여기 존재하는 이유가 있으렷다. 내가 믿건대, 그 이유의 일부분은 어둠 속에서 사람들을 인도할 작은 횃불이 되는 거다. We’re here for a reason. I believe a bit of the reason is to throw little torches out to lead people through the dark.”
―Whoopi Goldberg
“삶은 재미있고 기쁘게 충만히 살기 위한 거다. 빌건대, 모든 삶이 그렇게 살아지이다. Life is meant to be fun, and joyous and fulfilling. May each of yours be that.”
―Jim Henson, It’s Not Easy Green: And Other Things to Consider
“인간정신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진리/진실에 근접하는 거다. The ultimate aim of the human mind, in all its efforts, is to become acquainted with truth.”
―Eliza Farnham
“내 의견으로는, 나의 삶은 사는 동안 내 삶의 공동체 지역사회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는 특전을 누리는 거다. I am of the opinion that my life belongs to the community, and as long as I live, it is my privilege to do for it whatever I can.”
―George Bernard Shaw
“나는
배려심을 갖는 것이 삶에 가장 뜻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는 느낌이다. I feel the capacity to care is the thing which gives life its deepest significance.”
―Pablo Casals
“써야 할 재능을 타고 난 사람이라면 이 재능을 (십분) 발휘할 때 가장 행복하리라. The man who is born with a talent which he is meant to use, finds his greatest happiness in using it.”
―Johann Wolfgang von Goethe
"(내가 너가 되고 네가 나가 되는) 우리가 서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존중해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It is not our purpose to become each other; it is to recognize each other, to learn to see the other and honor him for what he is.”
―Hermann Hesse
“지금 당장 살기 시작해 하루 하루의 삶을 별개의 것으로 (순간 순간) 만끽하도록 하라. Begin at once to live, and count each day as a separate life.”
―Seneca
“매순간마다의 네 삶은 무한히 창조적이고 우주는 한없이 끝없이 너그럽고 풍성하다. 그러니 네가 바라고 원하는 걸 분명하게 요청하면 네 소원이 다 이루어질 것이어라. Every moment of your life is infinitely creative and the universe is endlessly bountiful. Just put forth a clear enough request, and everything your heart desires must come to you.”
―Mahatma Gandhi
자, 이제, 지난해 2020년 4월 10일자와 4월 22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항간세설 우리 되새겨보자.
[이태상의 항간세설] '개구리의 춤사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세계경제질서가 ‘코로나19 전과 후로 영원히 바뀔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관측이 나오고 있다.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1923 - ) 전(前) 미국 국무장관은 2020년 4월 3일 (현지 시간) 월스트리트 저널(WST)지에 “자유질서 가고 성곽도시(walled city)’가 다시 도래할 수 있다”고 전망(展望)했다. ‘세계화 시대의 종말’을 경고(警告)한 것이다.
그동안 ‘세계화’란 서구 자본주의 물질문명으로 지구촌 자연환경을 오염시키고 파괴하면서 인간 본연의 인성(人性ㅡ humanity)을 타락시켜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제 드디어 바야흐로 인류가 ‘세계화(世界化)’를 졸업하고 ‘우주화(宇宙化)’로 진화(進化) 승화(昇化)할 때가 되었어라. 지구인(地球人)이 우주인(宇宙人) ‘코스미안(Cosmian)’으로 거듭나 괄목상대(刮目相對)할 ‘코스미안시대(Cosmian Age)’가 열리고 있는 것이리라.
세상은 정말 별일 천지(天地)임에 틀림없어라. 1970년대 직장 일로 우리 가족이 런던 교외에 살 때였다. 하루는 지붕에 올라가 비가 오면 빗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기왓고랑을 깨끗이 청소하다 뜻밖에 내가 발견한 것이 있었다.
식물(植物)인지 광물(鑛物)인지 알 수 없는 딱딱하고 아주 작은 별 모형의 물체가 고랑에 낀 흙 위에 자라고 있는 것을 보았다. 너무도 신기하고 신비스러워 곱게 뜯어 아이들에게 주면서 학교에 갖고 가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보여주라고 했다.
밤낮으로 하늘을 우러러 별들을 바라보며 속삭이고 노래하다 보니 별들을 닮아 별모양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을 나는 했다. 어렸을 때 내가 읽은 동화책 속에 나오는 페르시아의 꼽추 공주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꼽추가 아닌 자기 동상(銅像) 앞에 매일같이 서서 등허리를 똑바로 펴보다가 제 동상처럼 허리가 똑바로 펴진 몸이 되었다는 동화(童話) 속 이야기처럼…
이것은 하나의 깨달음이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육지공간(陸地空間)에서만 아니라 저 깊은 바닷물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해바라기꽃이 해 모양을 하듯 바닷속에서 살며 별 모양을 한 극피동물(棘皮動物)의 하나인 불가사리 스타피쉬(starfish)를 보면 말이다.
또 어릴 때 듣고 자란 흥부와 놀부 이야기에서처럼 새가 사람에게 복(福)이나 화(禍)를 정말 갖다 줄 수 있는 것인지 몰라도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뿌리는 대로 거두게 되는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
1980년대 어느 한 여름 우리 가족이 카리브해(海) Caribbean Seas에 있는 섬나라 바베이도스(Barbados)에 휴가 갔을 때 일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바닷가 산책하러 나갔다가 썰물에 밀려 나가지 못하고 팔딱거리고 있는 작은 열대어 한 마리를 두 손으로 받쳐 바닷물 속에 넣어줬다.
그 다음 날 아침 조금 더 일찍 일어나 같은 곳에 나가보았더니 그 전날 물 빠진 모래사장에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물고기를 발견했던 그 자리에 아주 크고 보기 좋은 왕소라가 하나 있었다. 그때 내가 딸들에게 말한 대로 아무리 두고두고 다시 생각해봐도 내가 살려준 그 열대어가 고맙다고 그 좋은 선물(膳物)을 갖다 준 것만 같았다. 어렸을 때 읽은 동화 속의 바닷속 나라 용왕(龍王)님께 그 물고기가 말씀드려 용왕님께서 그 소라를 보내 주셨는지 모를 일이었어라.
불현듯 생시(生時)인지 꿈에선지 어디에서 본 것만 같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自畵像)이 떠오른다.
개구리, 너는!
얼마나 놀라운 새냐,
개구리, 너는!
네가 일어설 때
너는 거의 앉지.
네가 뛸 때
너는 거의 날지.
너는 분별(分別)도 거의 없고
넌 꼬리 또한 거의 없지.
네가 앉을 때면
네가 거의 갖고 있지 않은 것 위에
너는 앉지.
What a wonderful bird
The frog are!
When he stand,
He sits almost.
When he hops,
He fly almost.
He ain’t got no sense hardly,
He ain’t got no tail hardly,
Either.
When he sits,
He sit on what he ain’t got,
Almost.
인간사(人間事)에서 무엇이고 확실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보의 특권이리라. 세상에 확실(確實)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밖에 우리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떤 출발점에서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발전하는가를 결정해준 것은 제 선택이 아니라 하늘의 섭리일 것이다. 독수리가 저는 독수리로 태어났다고 달팽이로 태어난 달팽이를 보고 너도 나처럼 하늘 높이 빨리 좀 날아보지 못하고 어찌 그리 느리게 땅바닥에서만 가까스로 기어 움직이느냐고 비웃을 수 있으랴. 또 누가 독수리의 삶이 달팽이의 삶보다 낫다 할 수 있나.
어쩌면 너무도 독수리처럼 되고 싶었던 달팽이가 오랜 세월 죽도록 날아보려다 개구리로 진화(進化)한 것인지 모를 일이어라. 마치 신(神)이 되려던 동물(動物)이 인간(人間)으로 발전한 것 같이.
그렇다면 지구인(地球人) 인류(人類)의 다음 단계인 우주인(宇宙人) 코스미안으로 승화(昇華)할 일만 남았어라.
나는 습관처럼 시(詩)를 지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엔 별(別)일 천지(天地)다. 그 가운데 별(星)일 중(中)에 별별(別星) 일이 네가 있고 내가 있다는 이 기(氣)막힐 일이고 너무너무 신비(神秘)롭고 경이(驚異)로운 사실이 네 가슴 내 가슴 우리 가슴 뛰는 것이 아니랴.
그래서 일찍이 영국의 자연파 계관시인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1770-1850)도 독백(獨白)하듯 읊었으리.
내 가슴 뛰놀다
하늘에 무지개 볼 때
내 가슴 뛰노나니
어려서 그랬고
어른 된 지금 그렇고
늙어서도 그러리라.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어버리리라.
어린애는 어른의 아버지
내 삶의 하루하루가
이 가슴 설레임으로 이어지리
My Heart Leaps Up (also known as The Rainbow)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I was a Child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지금까지 인류가 무지개를 바라보기만 해왔었다면 이제는 ‘사랑의 무지개를 올라탄 우주인 코스미안 (Cosmian Arainbow of Love)’이 되어 훠어이 훠어이 우리 어서 코스모스 바다와 하늘로 비상(飛上/翔)해보리라.
"Truth to tell, Arainbow, I wasn't satisfied with this English poem, just looking up to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I created you to be right on The Rainbow, 'upgressing,' or rather ascending on top of the rainbow. Hence, Arainbow, you were born of me!"
[Excerpted from my book 'Cosmian' published by AUSTIN MACAULEY PUBLISHERS, London-Cambridge-New York-Sharjah in 2019]
모름지기 이러한 비상(非常)한 단초 실마리 첫머리를 재미동포 한 사람이 선두주자(先頭走者)로 제공했으리라.
지난 2015년 7월 16일자 미주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페이지에 그 당시 연재 중이던 ‘미대륙횡단 마라톤 일기’ 22회분 칼럼 ‘달린다’ - 이를 내가 의역(意譯)컨대 날아오른다는 의미(意味)’ - 에서 강명구(당시 57세)씨는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마치 우리 한민족 수난(受難)의 역사(歷史)를 생생(生生)하고 여실(如實)히 기록하듯이.
“나의 얼굴은 밤하늘이었고 눈동자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두 개의 별처럼 초롱초롱 빛났다. 얼굴이 뜨거운 사막이나 대평원의 비바람을 견뎌온 흔적이라면 눈동자는 두려움, 온갖 어려움과 외로움을 극복해 낸 의지(意志)의 광채였다. 내 몸에 빛과 어둠이 동시에 존재했다. 극도의 고통과 쾌감이 함께 어우러져 춤을 추었다. 고통과 쾌감은 한 쌍의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처럼 때론 손을 잡고 때론 멀리 떨어져 멋진 연기를 하곤 했었다.
육신이 가장 활기차게 움직일 때 의식은 한없이 고조되어 우주의 한가운데서 용해되어 자아를 뛰어넘어 삼라만상(森羅萬像)으로 퍼져 나가는 새로운 자아를 경험했다. 내 몸의 모든 세포와 기관이 가장 활발하고 완벽하게 움직일 때 도달하는 특별한 기쁨과 평화로움을 달리면서 느꼈다. 나에게 있어 대륙횡단 마라톤은 그 특별한 기쁨과 평화의 정체를 찾아서 떠났던 마라톤 명상(冥想) 여행이었다. 한겨울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마른 육신이 나의 뜀박질을 소리가 되게 하였다.
내가 달려온 길에 뿌려진 땀이 통일의 노래를 움트게 하였고, 소리가 되어 평화로운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고, 소리가 되어 희망을 잃은 사람들을 위로하였다. 달리기는 가장 원시적인 몸동작이다. 그 단순한 몸짓으로 대서사시(大敍事詩) 시(詩)를 썼다. 그 처절한 몸짓으로 지상 최대 규모의 무대를 만들어 열연(熱演/悅然)을 했다. 그 몸짓은 나의 간절한 염원(念願)이 담긴 제사(祭祀)의 춤사위였다.”
[이태상의 항간세설] '이자성어(二字成語) 감사의 축사'
“감사(感謝)는 사유(思惟)의 지고지순(至高至純)한 경지(境地)이고, 감사하는 마음은 경이(驚異)로움으로 배가(倍加)된 행복(幸福) 이다. (Thanks are the highest form of thought, and gratitude is happiness doubled by wonder.)”
영국 언론인이자 작가 G. K. 체스터튼(Gilbert Keith Chesterton 1874-1936)의 말이다. ‘감사는 사유의 지고지순한 경지’란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은 경이로움으로 배가 된 행복’이란 말은 내 성에 차지 않는다. 나 같으면 행복감이 경이로움으로 ‘배(倍)’가 아니라 ‘억만배(億萬倍)’ 된다 해도 부족하다고 말하리라.
2020년 4월 15일자 한국일보 오피니언 페이지 ‘삶과 문화’ 칼럼 ‘베토벤, 지구의 회복을 북돋는 인간의 음악’ 필자 조은아 피아니스트 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이렇게 우리를 일깨워준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병상에 누워 있던 지구에게 다람쥐가 묻습니다. 지구는 가까스로 기운을 차려 몸을 일으킵니다. 바다 거북이와 북극곰도 침상 곁에 모여 지구를 극진히 간호합니다. 병실 밖 하늘은 먼 산이 창문 안으로 성큼 들어올 만큼 맑디 맑습니다. 위태로웠던 지구의 건강을 이만큼이나마 회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지구가 맞고 있던 링거, 코로나 덕택이었습니다. 삶의 근거지 빙하의 파괴에 몸부림치던 북극곰, 해변을 빡빡이 점령한 휴양객들로 산란의 공간마저 빼앗겼던 바다 거북이가 누구보다 지구의 회복을 기뻐합니다.
코로나 위기에 다시 숨쉬기 시작한 자연, 며칠 전 접했던 한 신문의 만평은 이렇듯 뼈아픈 역설을 깨우치고 있었습니다. 인간이어서 죄책감을 느꼈고 인간으로 소외되어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돌연 이 장면에 음악을 입히고 싶어집니다. 지구의 회복을 기원하는 음악, 자연의 목소리를 번역해 증폭시켜 주는 음악 말입니다. 다행히 한 얼굴이 금세 떠오릅니다. 자연의 영혼에 혼신을 다해 귀 기울였던 음악가, 올해로 탄생 250주년을 맞이했지만 어쩌면 스스로 성대한 생일잔치를 마다한 채 지구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을 음악가, 그의 이름은 베토벤입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의 애송시로도 잘 알려진 조선 후기 문인 임연(臨淵) 이양연(李亮淵 1771-1853)의 문집 ‘야설(野雪)’에 수록된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이와 대비시켜 미국 굴지의 사업체 아마존(Amazon)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Jeff Bezos, 1964 - )의 ‘아마존 식(The Amazon Way)’으로 불리는 생활신조와 지침을 우리 다 함께 생각해 보리라.
조만간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더라도 세상은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란 게 중론이다. 경제의 구조적 변화는 물론 실물보다 사이버 공간의 중요성을 사람들은 절감했다. 소매상과 쇼핑몰이 문을 닫은 상태에서도 아마존은 크게 번창했다.
이 ‘아마존 식’이란 다른 사람이 이미 걸은 길이 아닌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독창적으로 개척한다는 것이다. ‘난 별난 사람(I’m peculiar)’이라는 자긍심이요 자부심이다. 이는 ‘실제로 실용적인 필요를 충당할 때 느낄 수 있는 미래지향적이고 마술적인 성취감(We’re solving a really practical need in this way that feels really futuristic and magical)’이란 뜻이다.
‘하늘의 별을 따겠다고 할 때 이는 참으로 도전적인 모험이 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When you’re shooting for the moon, the nature of the work is really challenging. For some people it doesn’t work.)’는 말이다.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아마존 직원들에게 범용(凡庸)하고 열등(劣等)한 용렬(庸劣)함을 기피하라는 근무작업 수칙(守則)을 세웠다. (Founder Jeff Bezos established guidelines as instructions for employees, and to stave off mediocrity.)
따라서 많은 직원들이 마음을 크게 먹고 아직 그들이 가능성의 표면조차 건드리지 못한 상태임을 절실히 느끼는 일이다. 이를 한 마디로 줄인다면 우리말로는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고 영어로는 ‘모험 없이 아무것도 얻을 수없다 (Nothing ventured, nothing gained)’가 되리라. 참으로 인생은 모험이고, 사랑은 모험 중의 모험이어라.
그러니 ‘코로나’를 포함해서 세상에 우리 모두가 깊이깊이 감사하지 않을 일이 어디 있을까. 우리 개개인마다 각자의 시원(始原)부터 생각해 보리라.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생일, 그것도 엄마 혼자 산고를 치른 날을 축하하지만, 그 이전 엄마 아빠가 함께 사랑을 나누며 즐거워하다가, 다시 말해, 생명의 음악(音樂/淫樂)을 통해, 엄마 몸속에 잉태된 ‘임신일(Conception Day)’을 축하할 일 아닌가.
우리 모두 각자가 하나같이 하늘의 별처럼 많은 정자 중에서 선택받은 황태자 정자가 난자와 결합해서 탄생한 새 별들이 아닌가. 그 이후로 우리가 숨 쉬고 살아온 순간순간이 더할 수 없이 기적 같은 축복의 연속이 아니었나.
또 그러니 우리 각자가 언제나 감사할 일이, 경이로움을 느낄 일이 어디 한둘인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하늘의 별보다 많지 않은가. 우리가 삶을 살면서 흔히 느끼는 실망 또는 절망이란 것이 우리 기대에 못 미쳤거나 미칠 가능성이 없어 보일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이고 이런 실망감 또는 절망감으로 인해 불행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실망감이나 절망감을 미리 예방하는 것이야말로 묘책 중의 묘책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 기대치(期待値)를 낮춤으로써, 더 바람직하기는 더이상 내려갈 곳 없는 맨밑바닥 부터 출발하는 것이리라. 그러면 항상 기대보다 웃도는 결과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언제나 어떻든 매사가 놀랍고 감사할 일뿐 아니랴.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라지만 우리 모두 삶이라는 산을 한 발짝 한 발짝씩 오르는 흥분과 자극, 스릴과 쾌감, 그리고 가슴 뿌듯한 성취감까지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햇빛이 나면 나는 대로, 별빛이 반짝이면 반짝이는 대로, 산천초목과 더불어 춤추고 기뻐할 일 아닌가. 천둥과 번개마저도 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황홀지경이 아니겠는가. 무엇이고 없을 무(無)보다는 있다는 존재(存在) 자체가 기적 이상이 아닌가 말이어라.
어디 그뿐이랴. 일체개공(一切皆空)을 주장하는 공사상(空思想)은 불교를 일관하는 교의 또는 사상을 말하는데, ‘공(空)’은 산스크리트어 ‘순야타 (Sunyata)’ 비어있음을 번역한 것으로,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일체의 존재를 상의상대 (相依相待) 서로 의존하는 연기(緣起)의 입장에서 파악, 일체의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배격한 무애자재(無礙自在), 곧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即是色)이고,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이며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라고 중생의 미견(迷見)으로 보면 미망(迷忘)의 주체인 번뇌와 각오(覺悟)의 주체인 보데가 딴판이지만 깨달은 눈으로 보면 두 가지가 하나이고 차별이 없으며 열반에도 열반의 모양이 없어서 온전히 하나라고 하지 않는가.
몇 년 전 미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페이지 ‘환경과 삶’ 칼럼 ‘내 마음의 명왕성’이란 글에서 수필가 환경 엔지니어 김희봉 씨는 이렇게 우주의 섭리를 이해한다.
“태양계의 끝, 햇빛은 스러지고 별들만 숨 쉬는 곳, 불 꺼진 변방의 간이역처럼 홀로 떠 있는 우주의 섬, 그 외로운 명왕성에서 기척이 왔다. 지난주 미국의 우주 탐사선 뉴호라이즌스호가 근 10년을 날아 근접한 명왕성에서 사진을 보내온 것이다. 2006 년 태양을 등지고 날아간 무인선이 보내온 첫 영상엔 놀랍게도 커다란 하트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달 표면의 계수나무처럼 명왕성엔 하트가 선명했다. 명왕성이 보낸 연서(戀書)였다.
알다시피 우주의 가장 큰 법칙은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다. 우주의 별들이 수없이 명멸하고 원자의 수가 증감해도 총량 에너지양은 변하지 않는다. 또 있다. 빛의 속도나 만유인력 상수(常數), 전자의 전하 등도 변하지 않는다. 우주의 법칙은 작은 눈으로 보면 모든 게 변하나 큰 눈으로 보면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조물주의 섭리도 그럴 것이다. 그 섭리를 이해하고 탐험선의 운행에 운용하는 것이 과학이요. 그 섭리를 인간관계에 적용하는 것이 사랑일 것이다.”
옳거니, 그렇고 말고, 여부가 있으랴! 우주처럼 시작도 끝도 한도 모를 무궁무진한 사랑으로 태어나 사랑으로 숨 쉬다 사랑으로 돌아갈 삶에서 이 사랑이란 경이로움의 극치에 우리는 무궁무진 감사할 일 뿐이어라. 이 사랑의 불꽃을 고두현 시인은 ‘만리포 가다가’ 발견한다.
만리포 사랑
당신 너무 보고 싶어
만리포 가다가
서해대교 위
홍시 속살 같은
저 노을
천리포
백리포
십리포
바알갛게 젖 물리고
옷 벗는 것
보았습니다.
장석주 시인은 이 사랑의 불꽃 때문에 ‘세상은 살 만한 것이다’라고 한다.
“사는 게 진절머리난다면 천리포 만리포 가다가 서해대교 위에 멈춰 서서 홍시 속살 같은 타는 노을을 보라! 저 노을이 만물에게 바알갛게 젖 물리는 모습을 보라. 자연은 젖을 물려 만물을 길러낸다. 해는 아침에 뜨고 저녁엔 서쪽으로 지는데, 이 해의 은총 속에서 식물들은 꽃을 피우고 사람은 사랑을 하며 아기들을 낳고 산다. 괴테는 태양 속에 존재하는 신(神)의 빛과 생산 능력을 숭배한다고 말했다. 여전히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는 이들이 있고, 도라지밭에서는 도라지꽃이 피고 감자밭에서는 감자알들이 커간다. 세상은 살만한 것이다.”
2015년 미국에서 출간된 책 두 권이 오늘의 우리 시대상을 잘 관찰하고 진단한다. 그 하나는 ‘과소평가되고 있는 인간: 놀라운 기계들이 결코 알지 못할 것을 아는 우등생 인간들(Humans Are Underrated: What High Achievers Know That Brilliant Machines Never Will)’로 저자 조프리 콜빈(Geoffrey Colvin, 1953 - )은 현재 컴퓨터가 인간이 해오던 일들을 인간보다 더 신속 정확하게 훨씬 더 능률적으로 수행하게 되어 인간을 도태시키고 있지만 절망할 일이 아니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된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지성 아닌 감성으로 서로를 돌보고 보살피는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란다. 기술적인 면은 기계에 맡기고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하는 일에 치중하면 된다는 얘기다.
또 하나는 ‘자신과 영혼: 이상옹호론(Self and Soul: A Defense of Ideals)’인데 저자 마크 애드믄슨(Mark Edmundson, 1952)은 이렇게 관찰하고 진단한다.
“서구 문화는 점진적으로 더욱 실용적이고 물질적이며 회의적으로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석가모니나 예수 같은) 성인 성자들은 의미 있는 자비심 충만한 삶을 추구한다. 재화를 획득하고 부(富)를 축적하노라면 인간의 참된 도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성스러운 삶이란 욕망 이상의 인류를 위한 희망이다. 이것이 일찍부터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만족감이다. (Culture in the West has become progressively more practical, materially oriented, and skeptical,…(like Buddha or Jesus) The saint seeks a life full of meaningful compassion. The acquisition of goods, the piling up of wealth, only serves to draw force from his proper pursuit. The saint lives or tries to live beyond desire. Even early on, as they enter the first phase of their lives as thinkers, they’ll have one of the greatest satisfactions a human being can have.)”
이 두 권의 책 내용을 내가 한 마디로 줄여보자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건 ‘사랑’이란 말이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으랴. 자연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게 곧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나 자신을 사랑할 때 내가 진정 행복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영어의 사자성어(四字成語) ‘love’는 우리말의 이자성어(二字成語) ‘사람’과 ‘사랑’이라는 동음동의어(同音同意語)가 돼야 하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