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기자: 전명희 [기자에게 문의하기] /
2021년 10월 18일자 미주 뉴욕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권정희의 세상읽기] 칼럼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들' 필자는 "인생의 본질은 시간, 그 시간들에 마땅한 것들을 채우며 살았는가, 많이 나누고 많이 사랑하며 더불어 즐김으로써, 삶의 시간에 기쁨을 그득히 채워 놓으면 좋겠다. 내일 당장 생이 끝난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비결이다"라고 칼럼 글을 맺고 있다.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들'
“가을 … 한해의 마지막이자, 가장 사랑스러운 미소.” 19세기 미국시인 윌리엄 컬런 브라이언트의 가을 예찬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쓴 F. 스콧 피츠제럴드도 가을을 좋아했다. “가을이 되어 날이 상쾌해지면, 삶은 완전히 다시 시작 된다”고 이 계절을 반겼다.
완연한 가을이다. 팬데믹의 제약으로 늘 뭔가 미진함 속에 어물어물 하다 보니, 시간은 흘러 10월 중순이다. 눈 깜짝할 사이 11월이 되고 12월이 되며, 2021년은 저물 것이다. 이 생에서 허락된 우리의 시간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52년을 11일에’라는 제목의 뉴욕타임스 기사가 지난 주말 눈길을 끌었다. ‘아들,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를 찾다’라는 부제가 이어졌다. 생면부지의 아버지와 아들이 극적으로 만나 부자간 52년의 인연을 11일 동안 누렸다는 내용이다.
워싱턴 D.C.의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고위 공무원이었던 샘 앤소니(52)는 평생 친부모를 알지 못한 채 살았다. 태어나자마자 입양되어 신경외과 의사였던 양 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다 보니 딱히 친부모를 그리워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2000년 어머니가 루게릭 병으로 사망하고, 2016년 아버지가 심장수술 합병증으로 사망하면서 친부모에게 생각이 미쳤다. 10여년 암 투병하며 그가 죽음을 의식하며 사는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분들일까” - 구강암과 인후암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는 지난해 9월 친부모를 찾기로 했다. 마침 30년 지기 직장상사가 계보 전문가였다. DNA 매치, 센서스 자료 대조 등으로 생모는 바로 찾아졌다. 그가 생모에게 편지를 했고, 생모가 전화를 해와서 통화를 했다. 하지만 그뿐, 생모는 그와의 교류를 거부했다. 과거 미혼모였던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생모를 통해 생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이 큰 수확이었다.
곧이어 애리조나에 사는 78세의 생부, 크레이그 넬슨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는 선뜻 편지를 보내지 못했다. 또 다시 거부당할 까봐 두려웠다. 그렇게 여러 달이 지나고,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하자 그의 상사가 대신 편지를 부쳤다. 8월 9일 넬슨은 멀리 버지니아에서 온 낯선 편지를 읽으며 전율했다.
50여년 전 넬슨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군복무 중 한 여성을 사귀었다. 어떤 오해로 두 사람은 헤어지고 그는 제대 후 고향인 포틀랜드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얼마 후 옛 여자친구가 전화로 뜻밖의 사실을 알려왔다. 건강한 남자아이를 낳았고, 바로 입양 보냈다는 것이었다. 넬슨은 아이를 되찾기 위해 변호사들을 만나고 입양시설들에 문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영영 잃어버린 아들이 반세기 후 그의 앞에 편지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는 바로 짐을 챙겨서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났다. 4일 동안 근 2,300마일을 운전해 앤소니의 집에 도착한 것은 8월 14일. 앤소니의 아내와 딸의 안내를 받아 넬슨은 난생 처음 아들을 만났다. 부자는 잃어버린 52년의 시간을 벌충하듯 서로 사진들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미 아들의 말소리는 해득이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리고 8월 20일 아들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와 아들이 이 생에서 함께 한 날은 딱 11일이었다.
이들 부자의 시간은 특별히 짧았지만, 우리 모두의 시간 역시 길지는 않다. 새해를 맞은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10월이듯, 돌아보면 태어나서 살아온 수십년이 잠깐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 영구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찰나의 시간을 부여받을 뿐이다. 우리는 시간이 주어지는 동안에만 살아있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 이 생의 모든 만남과 관계도 한시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대체로 잊고 산다.
그래서 빚어지는 것은 가치의 전도. 돈/소유에 집착하느라 시간흐름의 엄중함을 망각한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좋은 예이다.
풍작으로 소출이 넘쳐나자 부자는 곡식 쌓아둘 공간을 걱정한다. 그리고는 곳간을 헐고 새로 지어 곡식을 잔뜩 쌓아놓고 두고두고 잘 먹고 잘 살 궁리를 한다. 그때 하느님이 이른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곳간을 새로 지을 게 아니라 곡식을 이웃과 나누면 될 일이었다. 더 갖고 싶어서 남의 것을 착취하고, 혼자만 갖고 싶어서 곳간을 늘리는 것이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다. 시간의 곳간을 재물이 아니라 나눔과 사랑으로 채우라고 성서는 가르친다.
인생은 짧고 인연도 짧다. 자식을 잃고 크게 상심한 어느 아버지에게 부처는 이런 위로를 했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으로 함께 사는 것은 한 여관에 머문 나그네들 같은 것. 나그네들이 전날 밤 같이 모였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각자 자기 갈 길로 뿔뿔이 흩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지금 함께 하는 모든 인연이 그러할 것이다. 이별/상실은 예비 되어 있다.
가을날, 지난 1년의 삶을 돌아보자. 인생의 본질은 시간, 그 시간들에 마땅한 것들을 채우며 살았는가, 많이 나누고 많이 사랑하며 더불어 즐김으로써, 삶의 시간에 기쁨을 그득히 채워 넣으면 좋겠다. 내일 당장 생이 끝난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비결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몇 년 전 미국 CBS 방송은 당시 49세의 구글의 컴퓨터 엔지니어 토드 화이트 허스트(Todd Whitehurst) 씨가 매사추세츠주(州) 케이프 코드(Cape Cod)에서 자신의 정자 기증으로 태어난 생면 부지 8명의 자녀들과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만난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자녀들을 번갈아 껴안은 후 매우 경이로운 순간이라며 “비록 내가 현재 이 아이들의 (법적이고 사회적인) 아버지는 아니지만 나 역시 앞으로 이 아이들의 삶에 대해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1998년 스탠퍼드대학과 대학원 재학 시절 ‘젊은 남성의 정자를 구한다’는 교내 광고를 접한 뒤 정자기증을 결심했다. 젊은 백인이자 명문대 재학 중인 학생의 정자는 특히 인기가 높았기에 그는 4년간 같은 클리닉을 통해 약 400회 정도 정자를 기증했다. 정자 기증은 철저히 익명으로 실시됐으며 그에게는 기증자 아이디(ID)가 주어졌다.
정자를 제공받는 여성 역시 기증자의 나이나 인종, 출생지 등 기본적인 정보만 제공받았다. 화이트허스트와 8명 자녀들의 만남은 그의 자녀 중 한 명인 사라(Sarah, 당시 20세)가 ‘정자기증 출생 형제자매 찾기(The Donor Sibling Registry)’를 통해 생물적인 아버지와 형제들을 찾으면서 추진되었다.
이 뉴스를 접하면서 나도 그럴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소년 시절부터 자위행위로 허무하고 헛되게 내쳐버린 수많은 내 정자들! 심히 후회스럽고 안타깝게 아쉽지만, 다시 좀 생각해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아닐 것 같다.
내 생리적인 씨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더 중요한 게 내 정신적 또는 내 영적(靈的)인 씨라면, 지난 85년간 살아오는 동안 사랑으로 내 쉰 숨 하나하나,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 내디딘 한 걸음 한 걸음, 써 재낀 글 한 줄 한 줄, 내 언행 하나하나가 모두 다 내가 뿌린 씨들이 아닌가.
좋은 씨도 나쁜 씨도, 잘 뿌린 씨도 잘못 뿌린 씨도, 비옥한 땅에 아니면 가시덤불 또는 모래밭이나 자갈밭에 떨어진 씨도 있었겠지만, 얼마만큼이라도 열매를 맺게 된다면 그 열매를 내가 직접 거두게 되든 아니든 더 할 수 없이 다행스럽고 감사할 일이다.
어떻든 사랑의 씨를 뿌리면 사랑의 열매가 맺힐 테고, 많이 뿌릴수록 수확도 커지리라. 따라서 생리적이든 아니든, 성적(性的)이든 아니든, 우리 모두 ‘사랑의 대자녀(godson/ goddaughter of love)’ 그리고 ‘사랑의 대부모(godfather/ godmother of love)’가 되어 보리.
우리 시간에 대해 한 몇 사람의 말을 음미해보자.
시간은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제일 잘못 쓰는 거다. Time is what we want most, but what we use worst.
- William Penn
치유는 시간 문제이지만, 때로는 기회 유무에 따른 거다. Healing is a matter of time, but it is sometimes also a matter of opportunity.
- Hippocrates
시간은 창조해 만드는 거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하기) 싫다"는 말이다. Time is a created thing. To say “I don’t have time” is to say “I don’t want to”.
- Lao Tzu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가장 귀중한 자원이 시간이란 건 실제로 명명백백하지 않은가. It’s really clear that the most precious resource we all have is time.
- Steve Jobs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모든 일이 당장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다. The only reason for time is so that everything doesn’t happen at once.
- Albert Einstein
세 시간 이른 것이 일 분 늦는 것보다 낫다. Better three hours too soon than one minute too late.
- William Shakespeare
세월은 사람들을 바꾸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그 사람들에 대한 인상 이미지를 바꾸지는 않는다. Time, which changes people, does not alter the image we have of them.
- Marcel Proust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Never leave ’till tomorrow which you can do today.
- Benjamin Franklin
과거를 다스리는 자는 미래를 다스리고, 현재를 다스리는 자는 과거를 다스린다. Who controls the past, controls the future: who controls the present controls the past.
- George Orwell
시간은 바람과 같아, 가벼운 건 들어 올려주고 무거운 건 내버려 둔다. Time is like the wind, it lifts the light and leaves the heavy.
- Domenico Cieri Estrada
문으로 (탈바꿈) 변할 걸 희망하면서 벽을 뚜드리느라 시간을 (낭비해) 쓰지 말라. Don’t spend time beating on a wall, hoping to transform it into a door.
- Coco Chanel
시간이란 팽창해 늘어났다가 수축해 줄어들기도 한다. 마음 속 거문고 심금心琴이라는 현악기의 음을 조율할 때처럼, 우리는 외부의 어떤 아름다움이 우리의 마음을 공명共鳴시킬 때처럼 말이다.
Time expands, then contracts, and in tune with the stirrings of the heart .
- Haruki Murakami
시간이 모든 걸 바꾼다고 사람들은 늘 말하지만 실은 너 자신이 바꿔야 한다. They always say time changes things, but you actually have to change them yourself.
- Andy Warhol
네가 하고 싶은 아무 일도 아닌 모든 (쓰잘데없는 없는) 일을 다 할 시간은 없다. There’s never enough time to do all the nothing you want.
- Bill Watterson
(네) 결정의 (몇) 순간에 (너의) 전全 미래未來가 좌우된다. In such seconds of decision entire futures are made.
- Dan Simmons
현재라는 이 시점時點은 시간이 영원과 접속되는 순간이리. For the present is the point at which time touches eternity.
- C.S. Lewis
시간이 부족한 게 아니고 우리가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거다. It’s not that we have little time, but more that we waste a good deal of it.
- Seneca
시간은 가장 현명하다. 모든 걸 밝혀준다. Time is the wisest of all things that are, for it brings everything to light.
- Thales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미래에서 찾아 온 관광객 투어리스트는 어디 있는가? If time travel is possible, where are the tourist from the future?
- Stephen Hawkings
한 시간을 낭비하려는 자는 삶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거다. A man who dares to waste one hour of time has not discovered the value of life.
- -Charles Darwin
자, 이제, 우생이 번역해 지난 2014년 자연과인문에서 출간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와 <예언자의 뜰> 합본에 '시간'에 대한 글을 뽑아 영문과 함께 옮겨보리라.
‘시간이란’
“시간이란 뭣이죠?”
한 천문학자가 묻자
알무스타파 대답하길
어림짐작할 수 없는
하늘 숨결 재려하고
시간이란 강가 앉아
강물을 보듯 하지만
처음도 끝도 없는
우리 삶이 그렇고
오늘 기억 어제고
오늘 꿈 내일이며
시간은 영원하리.
한 계절에 모든 계절
다 함께 같이 있듯이
한 날에 모든 날 있고
돌이켜 보는 추억과
기다리는 그리움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영원토록 오늘뿐인
이 순간에 있으리오.
On Time
- Kahlil Gibran(1883-1931)
And an astronomer said, Master, what of Time?
And he answered:
You would measure time the measureless and the immeasurable.
You would adjust your conduct and even direct the course of your spirit according to hours and seasons.
Of time you would make a stream upon whose bank you would sit and watch its flowing.
Yet the timeless in you is aware of life’s timelessness,
And knows that yesterday is but today’s memory and tomorrow is today’s dream.
And that that which sings and contemplates in you is still dwelling within the bounds of that first moment which scattered the stars into space.
Who among you does not feel that his power to love is boundless?
And yet who does not feel that very love, though boundless, encompassed within the centre of his being, and moving not from love thought to love thought, nor from love deeds to other love deeds?
And is not time even as love is, undivided and spaceless?
But if in your thought you must measure time into seasons, let each season encircle all the other seasons,
And let today embrace the past with remembrance and the future with longing.
- From The Prophet (Knopf, 1923). (This poem is in the public domain.)
이때 그의 옛날 어릴 적
소꿉동무 카리마가 그를
반겨 맞이하며 말하기를
열두 해 동안이나 그대는
우리로부터 떨어져 있었고
우리 그대를 그리워했어요.
이렇게 말하는 카리마를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며
알무스타파 말해 가로되
열두 해라 했나요 카리마
나는 내 그리움의 길이를
별들이 돌아가는 세월로
가늠하고 재지 않았어요.
사랑이 향수에 젖게 되면
시간의 눈금이 다 녹아서
자로 쓸 수 없게 되지요.
영겁을 두고 떨어져 있는
연인들 사이를 맺어주는
영원한 순간이 있나 하면
그리워하는 생각 다함이
이별이란 망각 아닌가요.
그러니 이런 뜻에서라면
우리는 헤어진 적 없지요.
Then Karima, she who had played with him, a child, in the Garden of his mother, spoke and said: “Twelve years have you hidden your face from us, and for twelve years have we hungered and thirsted for your voice.”
And he looked upon her with exceeding tenderness, for it was she who had closed the eyes of his mother when the white wings of death had gathered her.
And he answered and said: “Twelve years? Said you twelve years, Karima? I measured not my longing with the starry rod, nor did I sound the depth thereof. For love when love is homesick exhausts time’s measurements and time’s soundings.
“There are moments that hold aeons of separation. Yet parting is naught but an exhaustion of the mind. Perhaps we have not parted.”
선생님 시간이란 뭣이죠.
시간가는 것이 두려워요.
이렇게 한 제자가 묻자
알무스타타 대답하기를
흙 한 줌 집어 들어 보게
그 흙 속에 뭐가 있는지.
한 톨의 씨앗이 있다면
그 씨앗 숲이 될 것이오.
한 마리 벌레가 있다면
한 무리 천사가 되겠지.
그 씨앗 숲으로 만들고
그 벌레 천사로 바꾸는
세월이란 시간 모두가
바로 이 순간에 있겠지.
철마다 바뀌는 계절이란
우리의 생각이 바뀜일 뿐
우리 깨우침이 봄이라면
우리의 기쁨이 여름이고
우리의 추억이 가을이며
우리의 꿈은 겨울이겠지.
AND upon a day as they sat in the long shadows of the white poplars, one spoke saying:
“Master, I am afraid of time. It passes over us and robs us of our youth, and what does it give in return?”
And he answered and said:
“Take up now a handful of good earth. Do you find in it a seed, and perhaps a worm?
If your hand were spacious and enduring enough, the seed might become a forest, and the worm a flock of angels.
And forget not that the years which turn seeds to forests, and worms to angels, belong to this Now, all of the years, this very Now.
“And what are the seasons of the years save your own thoughts changing? Spring is an awakening in your breast, and summer but a recognition of your own fruitfulness. Is not autumn the ancient in you singing a lullaby to that which is still a child in your being? And what, I ask you, is winter save sleep big with the dreams of all the other seasons."
어느 하루 이른 아침나절
제자들과 뜰을 거닐다가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알무스타파 말해 가로되
저 반짝이는 이슬방울
저 태양만 못하지 않듯
가슴 속에 메아리치는
숨소리 삶 못지 않으리.
이슬방울 햇빛 비춰줌은
이슬이 햇빛인 때문이고
우리 모두 숨 쉬는 것은
우리가 숨인 까닭이리.
날이 저물고 밤이 되어
어둠이 주위로 깔리면
속으로 이렇게 말해보리.
이 어둠 밝아 올 새 날
한밤의 진통 겪더라도
저 언덕바지 계곡처럼
우리도 새벽을 맞으리.
밤에 지는 백합꽃잎 속에
몸 굴려 모으는 이슬방울
우주 대자연의 품속에서
혼과 넋을 찾아 모으는
우리 자신과 다름없으리.
천 년에 한번 나는 겨우
이슬방울일 뿐이라 하며
이슬이 크게 한숨짓거든
그에게 이렇게 물어보리.
영원무궁한 세월의 빛이
지금 네게서 빛나고 있는
이 기적 같은 신비로움을
너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AND on a morning when the sky was yet pale with dawn, they walked all together in the Garden and looked unto the East and were silent in the presence of the rising sun.
And after a while Almustafa pointed with his hand, and said:
“The image of the morning sun in a dewdrop is not less than the sun. The reflection of life in your soul is not less than life.
“The dewdrop mirrors the light because it is one with light, and you reflect life because you and life are one.
“When darkness is upon you, say:
‘This darkness is dawn not yet born; and though night’s travail be full upon me, yet shall dawn be born unto me even as unto the hills.’
“The dewdrop rounding its sphere in the dusk of the lily is not unlike yourself gathering your soul in the heart of God.
“Shall a dewdrop say:
‘But once in a thousand years I am a dewdrop,’
speak you and answer it saying:
‘Know you not that the light of all the years is shining in your circle?’”
- From The a Garden of The Prophet (Knopf, 1933)
(This poem is also in the public domain.)
2013년 개봉된 미국영화 ‘월터 미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에 나오는 노래 ‘스페이스 오디티 (Space Oddity)’와 1986년 개봉된 영화 ‘미숀(The Mission)’에 수록된 ‘스타맨(Starman)’을 ‘글램록(Glam rock)’의 전설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1947-2016)가 불렀다.
“수천 마일 떨어져 있는 사물들, 벽 넘어, 그리고 방안에 숨겨져 있는 사물들, 접근하기 위험한 사물들을 보고 놀라워하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다.”
“To see things thousands of miles away, things hidden behind walls and within rooms, things dangerous to come to…to draw closer…to see and be amazed…”
이 문구는 ‘월터 미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속 배경이 된 미국의 유명 잡지 라이프(LIFE)의 모토다. 월터 미티는 라이프 잡지에서 필름을 관리하는, 마흔이 넘도록 결혼은커녕 여자친구도 없지만 다른 부서에서 일하는 셰릴을 짝사랑하는 남자이다. 도무지 용기를 내지 못하는 그는 상상으로만 그녀에게 다가간다.
평생을 살면서 뭔가를 제대로 해본 적도 없고 어딘가를 가본 적도 없이 상상만 해오던 그에게 늘 그와 같이 작업하던 사진작가로부터 필름이 배달된다. 라이프는 오프라인 잡지를 폐간하고 온라 인 회사로 거듭나기 위해 구조조정에 들어가고, 경영진은 전설의 사진작가 숀 오코넬의 사진으로 마지막호의 표지 사진을 장식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숀이 필름 가운데 삶의 정수를 담고 있다는 필름은 어디에도 없다. 월터는 그 필름을 얻기 위해 숀을 찾아 나선다.
개봉 당시 이 영화의 홍보문구 ‘꿈꾸기를 멈추고 살기 시작하라 (Stop Dreaming, Start Living)’가 이 영화가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상상이 현실이 되게 하려면 행동의 삶 곧 모험을 감행하라는 뜻이리라.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존 오도노휴(John O’Donohue 1956-2008)의 2004년에 나온 책 ‘아름다움: 모든 걸 품는다 (Beauty: The Invisible Embrace)’에 ‘아름다움을 축복함(A Blessing for Beauty)’이란 기도문이 있다.
'아름다움을 축복함'
네 자연의 신성(神性)을 네가 볼 수 있도록,
네 삶의 아름다움이 네게 잘 보이기를.
지상의 모든 경이로움이
네 모든 작은 비밀의 감옥으로부터
너를 불러내 가능성의 초원으로 인도하기를
하루가 얼마나 큰 기적인지 볼 수 있도록
동트는 새벽빛이 네 눈을 뜨게 해주기를
황혼의 저녁 기도가
네 모든 두려움과 어둠을
편안함으로 감싸주기를
어려움을 겪을 때면
기억의 천사가 지난날의 수확을
뜻밖의 선물로 갖고 널 찾아주길
네 가슴속 희망의 촛불을
어떤 검은 구름이 꺼버리지 않기를
너 자신에게 너그럽고
네 삶을 하나의 큰 모험으로 여기기를
외부의 공포와 절망의 소리가
네 안에 메아리치지 않기를
절실한 네 정신의 지혜를
네가 언제나 따를 수 있기를
네가 한 모든 선행과 사랑 그리고
네가 겪은 모든 고통이 깨우침으로
네 삶을 천만 배로 축복해주기를
그리고 사랑이 네 문을 두드리거든
온 세상이 새벽을 반기듯
네가 그 찬란한 빛을 받아들이기를
네 영혼에 닿는 신(神)의 입김을 느끼면서
너를 영원토록 빚고 지켜주며 부르는 네 영원성의 기쁨을
네가 고요와 정적 속에서 찾을 수 있기를
혼란과 걱정과 공허함이 있다 해도
네 이름이 하늘에 적혀 있음을 알기를
네 삶이 네가 조용히 바치는 성찬으로
네 주위로 베풀어져 의심이 경외심으로
거북함과 긴장됨이 우아함과 고상함으로
좌절된 희망이 날개를 달고 고뇌가 마침내
평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기를
신성한 아름다움이 너를 축복해주리
'A Blessing for Beauty'
May the beauty of your life become more visible to you,
that you may glimpse your wild divinity.
May the wonders of the earth call you forth from all your small, secret prisons and set your feet free in the pastures of possibilities.
May the light of dawn anoint your eyes that you may behold what a miracle a day is.
May the liturgy of twilight shelter all your fears and darkness within the circle of ease.
May the angel of memory surprise you in bleak times with new gifts from the harvest of your vanished days.
May you allow no dark hand quench the candle of hope in your heart.
May you discover a new generosity towards yourself,
and encourage yourself to engage your life as a great adventure.
May the outside voices of fear and despair find no echo in you.
May you always trust the urgency and wisdom of your own spirit.
May the shelter and nourishment of all the good you have done, the love you have shown, the suffering you have carried, awaken around you to bless your life a thousand times.
And when love finds the path to your door may you open like the earth to the dawn, and trust your every hidden color towards its nourishment of light.
May you find enough stillness and silence to savor the kiss of God on your soul and delight in the eternity that shaped you, that holds you and calls you.
And may you know that despite confusion, anxiety and emptiness, your name is written in Heaven.
And may you come to see your life as a quiet sacrament of service, which awakens around you a rhythm where doubt gives way to the grace of wonder, where what is awkward and strained can find elegance, and where crippled hope can find wings, and torment enter at last unto the grace of serenity.
May Divine Beauty bless you.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인지 우리 생각 좀 해보리라.
아름다움이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이요.
아름다움이란 꾸밈없이 자연스러움이요.
아름다움이란 억지 없는 순조로움이요.
아름다움이란 오해 없는 이해심이요.
아름다움이란 조건 없는 베풂이요.
아름다움이란 악의 없는 선심이요.
아름다움이란 거짓 없는 진심이요.
이상의 일곱 마디를 한마디로 줄인다면 진(眞) 선(善) 미(美)는 셋이 아니라 같은 하나이며 셋중에 그 으뜸은 미(美)인데, 미(美)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이리라.
여성미, 남성미, 인간미, 자연미, 나체미, 의상미, 조형미, 통속미, 풍속미, 미숙미, 성숙미, 열정미, 노련미, 내성미, 외향미, 정물미, 동작미, 반전미(反轉美), 역전승패미(逆轉勝敗美)의 미(美) 등 부지기수(不知其數)이리라.
영원 속에 찰나 같은 순간,
우주 속에 티끌 같은 세상,
우리 모두의 덧없는 인생,
모든 게 더 할 수 없이
한없이 가슴 아프고
저리게 슬프도록
아름다움이어라.
김소월의 시 ‘못 잊어’의 셋째 구절
“그러나 또한긋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나지요?”
이 시의 첫구 ‘그러나 또한 긋이렇지요’를 빌려서 아름다움이란 보는 사람 눈 속에 있다(Beauty is in the eye of beholder)는 서양 속담처럼 ‘사랑이란 색안경’을 쓰고 보면 다 이뻐 보이지 않던가.
그렇다면 사랑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
2016년 미국에서 출간된 과학서적 ‘치유: 육체를 지배하는 정신 과학탐구(A Journey Into the Science of Mind Over Body)’의 저명한 영국의 언론인으로서 과학서적 저술가인 저자 조 마천트(Jo Marchant, 1973 - )는 서론에서 기존 서구 의학계의 상반되는 대표적인 두 가지 이론을 대치시켜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한쪽에는 육체가 기계와 같아 질병 치유에 사상이나 신앙이나 감정이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다는 것이고, 다른 쪽에는 모든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이며 통속적인 재래식 대체민간요법 등을 열거한다. 그러고 나서 유전학과 의료미생물학박사 학위 소지자인 저자는 최근에 와서 서양의 학계에서도 인정하게 된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를 예로 든다.
마취도 하지 않은 ‘모의외과수술(fake surgery)’이 시술되는가 하면, 아무런 약성분이 들어있지 않은 가짜약도 그 알약의 크기가 작은 거 보다 큰 게 더 효력이 있고, 먹는 약이 진짜가 아닌 플라시보임을 환자가 알고 있을때에도 그 효력이 발생하며, 심지어는 플라시보가 단순히 환자의 주관적인 심리상태를 반영해 주지 않고 인체 내 면역체계(immune system)에 영향을 주고 있음이 여러 실험을 통해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이것이 돌팔이 사기극이나 희망 사항 또는 모든 게 생각 나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약품의 효과와 같이 구체적인 물리적 효과라고 플라시보 효과의 생물학적 근거를 저자는 설명한다. 우리가 복용하는 어떤 알약이든 약이라기보다는 이 알약을 삼키면 내 병이 나을 거라는 하나의 믿음만으로도 우리가 실제로 약을 먹었을 때처럼 우리 몸속에서 자연적으로 엔도르핀 (endorphins)이나 도파민(dopamine) 같은 화학성분 물질이 분출된다는 얘기다.
이렇게 플라시보효과를 검토한 후, 저자는 사람들이 느끼는 만성 피로감이나 소화기능장애나, 신체적인 고통 등을 어떻게 정신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지를 최면 혹은 인지행위요법, 의식요법, 심리 요법, 아니면 가상현실 등 여러 분야의 연구조사 리서치를 통해 다루고 있다.
결론적으로 내가 이 책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몸 상태가 좋다 안 좋다의 차이는 내가 어디에다 신경을 쓰고 정신을 어디에 다 쏟느냐, 몸이 아니라 맘이라는 것이고, 아픈 사람에겐 사랑 이상의 약(藥)이 없다는 거다.
그렇다면 앞에 제기한 물음: ‘사랑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로 돌아가 보리라.
사랑은 몸에서 생기는 것일까. 아니면 맘에서 생기 는 것일까. 맘과 정신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영혼이 맘과 정신과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영혼이 있다면 몸 안에 아니면 몸 밖에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영혼이 몸 안에 존재한다면 몸 어디에 깃들어 있을까.
고대 이집트인들은 영혼이 가슴 심장 속에 있는 것으로 믿었고, 중세 유럽에서는 머릿속에 있다고 생각해 영혼을 찾겠다고 두뇌를 절개하기도 했다.
심장이식수술까지 하게 된 오늘날에 와서는 ‘세포기억설(Cellular Memory)’ 이란 것도 있는데, 장기세포에도 기억 능력이 있어 이식수술 시 기증자의 개성적인 특성이 따라간다는 이론이다. 세포기억설의 창시자 게리슈워츠(Gary Schwartz, 1944 - )박사는 지난 20여 년간 70여 건의 사례를 기록해 놓았다.
이탈리아의 신경외과전문의 세르조 카나베로(Sergio Canavero, 1964 – )는 미국의 신경과학회 콘퍼런스에 참석해 사람의 머리를 다른 사람의 몸에 이식하는 계획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렇게 머리 이식수술이 머지않아 현실화한다면 그야말로 몸과 머리가 뒤바뀌는 전설이나 신화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2014년 12월에 출간된 나의 역서(譯書)로 독일작가 토마스 만 (Thomas Mann 1875-1955)의 중편소설 ‘뒤바뀐 몸과 머리(The Transposed Heads, 1940)’에서처럼 말이다.
몸과 맘과 정신과 영혼이 같은 것이든 아니든, 어떻든 인간 그리고 더 나아가 우주의 본질은 사랑임이 틀림없어라.
[이태상의 항간세설] 물안개일 뿐이야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영화 한 편이 있다. 프랑스의 르네 클레망(Rene’ Cle’ment 1913-1996)이 감독한 ‘금지된 장난 (프랑스어로 Jeux Interdits, 영어로는 Forbidden Games, 1952)으로 프랑스 극작가 프랑솨 봐예(Francois Boyer 1920-2003)의 동명 소설을 영화한 것이다.
전화(戰禍) 속 어린아이들의 순수와 어른들의 미친 광기(狂氣)를 더할 수 없이 슬프고 아름답게 시적(詩的)으로 그린 흑백(黑白) 명작(名作)이다. 꾸밈없이 사실적(事實的)이면서도 거의 초현실적(超現實的)으로 강렬(强烈)하게 깊은 인상(印象)을 각인(刻印)시키는 반전(反戰)영화이다.
때는 1940년 6월, 나치의 프랑스 침공을 피해 파리로부터 남쪽으로 피난을 가던 5세 난 폴렛(Paulette, Brigitte Fossey 1946 - )과 애견(愛犬) 족크 그리고 부모가 나치 공군의 공습을 받아 폴렛만 살아남는다. 졸지에 고아가 된 폴렛은 피난민이 강에 집어 던진 족크를 찾으러 나셨다가 동네 농부 돌레의 11세난 막내아들 미셸(Michel, Georges Poujouly 1940-2000)을 만나 미셸의 집으로 간다. 미셸의 가족은 폴렛을 따뜻이 맞아 한 가족처럼 지낸다.
그리고 미셸과 폴렛은 다정한 친오빠와 동생처럼 친해진다. 미셸과 폴렛은 죽은 강아지 조크를 버려진 물방앗간 안에 묻으려는데, 조크가 외로울 것을 폴렛이 걱정하자, 미셸은 방앗간 안 둘만이 아는 무덤에 죽은 두더지와 곤충과 병아리와 쥐들을 같이 묻어주고, 무덤을 십자가와 꽃들로 장식해주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 미셸은 무덤에 꽂을 십자가들을 훔치기 시작하는데, 제일 먼저 말에 채여 죽은 자기 맏형 조르지의 관을 실은 영구 마차의 장식품 십자가를 비롯해 성당 제단에 있는 십자가까지 훔치다가 신부에게 들켜 혼이 난다.
그러다 미셸과 폴렛은 성당 옆 공동묘지에 있는 십자가들을 손수레에 싣고 자기들만의 묘지로 옮긴다. 신부로부터 십자가 도둑이 미셸이라는 말을 들은 돌레는 미셸을 마구 두들겨 패면서 십자가들의 행방을 추궁하나 미셸은 입을 굳게 다물고 밝히지 않는다. 이때 마침 경찰이 폴렛을 고아원에 보내기 위해 돌레 집을 찾아온다. 안가겠다고 우는 폴렛과 떨어지기 싫은 미셸은 아버지에게 십자가의 행방을 알려주는 대신 폴렛을 보내지 말라고 사정한다. 돌레가 그러겠다고 하자 미셸은 십자가가 어디에 있는지 말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약속을 어기고 폴렛을 경찰에 넘기자 미셸은 묘지로 달려가 십자가들을 죄다 망가뜨려 버린다. 인파로 붐비는 기차역, 불안과 두려움과 슬픔에 젖은 눈동자로 역사에 쪼그리고 앉아 폴렛은 자기를 수녀원의 고아원으로 데려갈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이때 누군가 “미셸”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에 폴렛은 벌떡 일어나 “미셸”하고 부르나 그 미셸은 다른 남자의 이름이었다. 폴렛이 계속해 미셸을 찾으면서 역 안의 인파 속으로 뛰어가는 마지막 장면이 보는 사람 가슴 미어지게 하고 눈시울을 뜨겁게 적셔준다.
베니스 영화제 대상과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이 영화는 어린이들의 순수한 사랑과 정직성에 대비시켜 어른들의 기만과 이기심, 인간의 잔인성과 어리석음, 그리고 전쟁의 광기와 참극을 규탄하고 통탄하는 최고의 걸작 명화인데, 기타로 연주되는 유일한 음악 나르시소 예페스(Narciso Yepes1927-1997)의 ‘로망스 (Romance Ano’nimo, 영어로는 Anonymous Romance)가 긴 여운(餘韻)으로 남는다.
아, 선각자(先覺者) 한 사람의 시(詩) 한 편이 떠오른다.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의 시집 ‘순수와 경험의 노래: 천지무구(天眞無垢)와 유구송(有垢誦) Songs of Innocence and Experience, 1789’ 말이다. 이 두 노래는 동요동시집(童謠童詩集)이다.
‘순수의 노래’가 어린이들의 ‘순수(純粹)한 천국’에 대한 찬가라면 ‘경험의 노래’는 어른들의 ‘미친 세상 지옥’에 대한 비창(悲愴 Pathetique)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 노래들은 21세기 오늘날에도 특히 요즘 코로나바이러스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인류에게 공전(空前)의 중차대(重且大)하고 엄중(嚴重)한 경각심(警覺心)을 불러일으키는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아직까지도 스스로 ‘명품(名品)’이 될 생각을 못하고 명품을 갖지 못해 애쓰는 세상이고, 환영(幻影) 이미지 아이콘(icon)에 집착(執着)하는 세태(世態)이지만 시조시인(時調詩人) 조운(曹雲 1900-?)의 ‘석류(石榴)’를 우리 음미해보리라.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툼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좋고 아름다운 것은 외부에서 오지 않고 내부에서 자라 영글면 넘쳐나는 것임을 깨우치게 하는 시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말이어라. 우리 각자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다 알 수 있는 사실 아닌가. 너무도 자명(自明)한 일이다. 밖을 보기 위해서는 안을 봐야 한다는 진리(眞理)일 것이다.
얼마 전 페이스북이 ‘좋아요’를 보완(補完)할 버튼을 만들고 있다고 밝히자 그 이름이 ‘안 좋아요’가 될지 ‘싫어요’가 될지 ‘슬퍼요’가 될지 ‘별로에요’가 될지 관심을 끌었었다.
몇 년 전 한국에서 가수 임재범(당시 53세)이 3년 만의 새 앨범 발표를 앞두고 선공개곡 이름을 2015년 10월 6일 음원사이트에 올렸는데 ‘바람처럼 들풀처럼 이름 없이 살고 싶었던 남자가 소중한 한 사람에게 만큼은 특별한 이름이고 싶다’는 주제라고 했다. 데뷔 30주년을 맞아 보컬리스트로서는 초심으로의 회귀, 음악적으로는 발전을 꾀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우주에서 가장 작으며 가장 가벼운 소립자인 중성미자의 존재가 근래에 와서 주목을 받고 있다. ‘작은 중성자’라는 뜻의 중성미자가 워낙 작고 전기적으로도 중성인 데다 무게도 있는지 없는지 불분명할 정도로 가벼워 존재 확인이 극히 어렵지만, 현재 확인된 중성미자의 무게는 양성자의 1/1836인 전자의 100만 분의 1에 불과하며 1광년 길이의 납을 통과하면서도 다른 어떤 소립자와 충돌하지 않을 정도로 작다고 한다.
이 중성미자는 태양에서 만들어져 날아온 것인데 관측된 수치가 이론적으로 예측된 수치의 1/3에 불과했던 것을 중성미자가 날아오는 동안 계속 ‘형태(flavor)’를 바꾼다는 사실을 알아낸 사람이 바로 일본의 물리학자 가지타 다카아키(梶田 隆章 1959 - )와 캐나다의 천체물리학자 아터 맥도날드(Arthur B. McDonald,1948 - )이다. 이 공로로 이 두 사람은 2015년 노벨 물리학상 공동수상자가 됐다.
이 중성미자의 변형은 우주 탄생의 비밀과 직결돼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138억 년 전 ‘빅뱅’과 함께 우주가 탄생했을 때 물질과 반물질의 비중은 거의 같아, 이 둘이 서로 만나면 폭발해 없어지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지금과 같은 우주가 생겼는지는 아직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왔는데, 중성미자의 변환 과정에서 물질이 반물질보다 조금 더 남았다는 설이 최근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천문학자나 과학자도 아닌 문외한(門外漢)인 내가 이를 감히 아주 쉽게 풀이해 보자면 이 ‘물질’이 ‘좋아요’이고 ‘안 좋아요’가 ‘반물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지만, 나머지는 다 우리 각자의 선택사항이 아닌가. 죽는 날까지 어떻게 사느냐 가, 일찍 삶을 포기하고 자살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우주 만물, 세계 만인 다 ‘좋아요’ 버튼만 누르고 또 누를 대상만도 부지기수(不知其數), 하늘의 별처럼 많은데, ‘좋아요’ 버튼만 누를 시간만도 너무너무 부족한데, 어찌 ‘안 좋아요’나 ‘싫어요’ 또는 ‘슬퍼요’나 ‘별로에요’로 너무도 소중하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수 있으랴.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누구든 그 무엇이든 좋아하고 사랑할 때 천국을, 싫어하고 미워할 때 지옥을 맛보게 되지 않던가. 그러니 ‘반물질’의 ‘안 좋아요’가 카오스(Chaos)를 불러온다면 ‘물질’의 ‘좋아요’는 ‘아브라카다브라(abracadabra, the Aramaic phrase avra kehdabra, meaning “I will create as I speak”) 주문(呪文)외듯 코스모스(Cosmos)를 피우리라. 온실의 화초를 옥(玉)이라 한다면 들의 잡초는 돌(石)이라 하겠지만 옥도 돌이 아닌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옥과 돌을 구별한다. 그래서 ‘돌을 차면 발만 아프다’ 하는 것이리라.
최근 하버드대 토론연합(HCDU)이 뉴욕 동부교도소 재소자들과의 토론 대회에서 패배했다. 하버드대 재학생들로 구성된 토론연합은 미 전역 및 세계챔피언 전에서 1위를 차지했던 일류 토론팀이다. 뉴욕 동부교도소 재소자들의 승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재소자들은 토론동아리를 만든 이후 2년 동안 미국 대학 토론팀들과 시합을 벌여왔으며, 미국의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 토론팀도 이겼다. 상아탑(象牙塔)의 최고 명문대 학생들이 그야말로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교도소 재소자들에게 진 것은 너무도 당연(當然)한 일 아닐까. 마치 폭풍우 속에서도 야생의 잡초들은 살아 남지만 온실의 화초들은 그럴 수 없듯이 말이어라.
탁상공론(卓上空論)의 지식과 (울어야 하는 상황에서 너무나 어이가 없어 울 수 없으니까 마지못하여 웃는다는 뜻으로) ‘울어난’ 삶의 지혜는 전혀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우리 칼릴 지브란 (Kahlil Gibran 1883-1931)의 ‘방랑자(The Wanderer: His Parables and His Sayings, 1932)’가 ‘모래사장에 적은 글[Upon the Sand]’을 우리 함께 심독(心讀)해 보리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래전 밀물 때 내 지팡이 끝으로 모래 위에 한 줄 적었는데 사람들이 아직도 멈쳐 서서는 유심히 그 글을 읽으면서 그 글이 지워지지 않게 조심한다네.”
Said one man to another,
“At the high tide of the sea, long ago, with the point of my staff I wrote a line upon the sand; and the people still pause to read it, and they are careful that naught shall erase it.”
그러자 그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썰물 때 나도 모래 위에 한 줄 적었지만 파도에 다 씻겨버렸다네. 그런데 참 그대는 뭐라고 썼는가?”
And the other man said,
“And I too wrote a line upon the sand, but it was at low tide, and the waves of the vast sea washed it away. But tell me, what did you write?”
첫 번째 사람이 대답해 말하기를,
“나는 이렇게 썼다네. ‘나는 있는 그 (사람)’이라고. 그럼 그대는 뭐라고 썼었나?”
And the first man answered and said,
“I wrote this: ‘I am he who is.” But what did you write?”
그러자 그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이렇게 나는 적었었네. ‘나는 이 대양(大洋)의 물 한 방울일 뿐이라’고.”
And the other man said,
“This I wrote: ‘I am but a drop of this ocean.’”
칼릴 지브란의 아포리즘 잠언집(箴言集) ‘모래와 파도의 물거품 포말(泡沫) Sand and Foam: A Book of Aphorism, 1926’에 나오는 어록(語錄) 한마디도 우리 깊이 음미(吟味)해보리라.
언젠가 한 번 나는 내 손 안에
안개를 가득 채웠지.
그리고 나서 내 손을 펴보니,
손안에 있든 안개가
벌레 한 마리로 변했어.
내가 손을 쥐었다가 다시 펴보니,
내 손 안에 있던 벌레가
새 한 마리로 변했어.
내가 손을 쥐었다가 또다시 펴보니,
내 손 안에 있던
새는 없어지고
어떤 한 사람이
슬픈 얼굴로 서서
날 쳐다보고 있었어.
그래서 내가 다시 한번 손을 쥐었다가 펴보니,
이번엔 내 손 안에 아무것도 없고 물안개뿐이었어.
하지만 한없이 감미(甘美/甘味)로운 노랫소리가 들렸어.
Once I filled my hand with mist.
Then I opened it and lo, the mist was a worm.
And I closed and opened my hand again, and behold there was a bird.
And again I closed and opened my hand, and in its hollow stood a man with a sad face, turned upward.
And again I closed my hand, and when I opened it there was naught but mist.
But I heard a song of exceeding sweetness.
아, 진정코, 우리 모든 우주의 축소본 코스미안의 시간은 영원의 축소본인 '지금뿐이야'라고 해야 하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