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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20일자 미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단상] '파도에 쓸린 작은 둥근 돌' 필자 리처드 김 할리웃배우조합 회원은 바닷가 산책 중에 파도에 쓸려 작아진 둥근 돌들을 보며 "아 인생은 저렇게 둥근 작은 돌처럼 마쳐야 하는 것이구나" 하는 깊은 깨달음이 있었다며 이렇게 적고 있다.
얼마전 지인들과 2박3일로 멕시코 산토 토마스 여행을 다녀왔다. 이번 여행에서 바닷가 산책 중에 파도에 쓸려 작아진 둥근 돌들을 보며 깊은 깨달음이 있었다.
“아 인생은 저렇게 둥근 작은 돌처럼 마쳐야하는 것이구나”
사람들은 인생의 거친 고난의 파도에 쓸리면 인생이 고달프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그럴까?” 인생의 파도가 거칠면 거칠수록 둥글게 다듬어진다. 먼저 모난 부분들이 돌과 돌이 부딪히며 자신의 모양을 찾아간다. 모양을 찾아간 둥근 돌들은 시련의 고통을 알았기에 그 돌을 밟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다. 돌이 파도에 쓸리면 쓸릴수록 둥글어진 작은 돌들은 큰 둥근 돌들보다 뒤로 밀려난다. 이렇듯 인생은 둥근 작은 돌들처럼 세월의 파도에 밀려 조용히 뒤로 사라지는 것이다.
진정한 인생의 깨달음은 강한 파도에 쓸린 작은 둥근 돌과 같이 되는 것이다. 인생의 파도는 항상 밀려오고 있다.
그 파도는 피할 수는 없다. 단지 그 파도를 받아들이며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자신을 다듬어 가는 길밖에 없다. 그런 거친 파도는 자신을 성장시키며 성숙한 인생의 길로 인도한다. 자연은 우리들에게 인생의 깨달음을 준다. 자연만큼 위대한 스승은 없다.
<리처드 김 / 할리웃배우조합 회원>
인생이 사랑의 역정歷程이라 한다면 실패한 사랑의 기록인 <연애론 On Love>으로도 유명한 스탕달 Stendhal(본명Marie-Henri Beyle's pen name 1783-1842)의 말 좀 인용해보리라.
“좋은 책은 내 인생의 하나의 사건이다. A good book is an event in my life.”
― Stendhal, The Red and the Black
“고독에서 모든 걸 얻을 수 있다. 인격 말고는. One can acquire everything in solitude except character.”
― Stendhal, Five Short Novels of Stendhal
“행복의 비전이 여럿이듯이 아름다움의 양식 스타일도 여러 가지다. There are as many styles of beauty as there are visions of happiness.”
― Stendhal, Love
“난 그녀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지만 그녀의 생각을 두려워한다. I love her beauty, but I fear her mind.”
― Stendhal
“그대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난 우리 두 사람을 위해 사랑할 수 있으니까. If you don't love me, it does not matter, anyway I can love for both of us”
― Stendhal
“우리의 진짜 정열은 이기적이지. Our true passions are selfish.”
― Stendhal, The Red and the Black
“유일한 신神의 변명은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다. God's only excuse is that he does not exist”
― Stendhal
“모든 종교는 어리석은 많은 사람 우중愚衆의 공포와 소수의 영리한 계략計略에 근거, 기초한 것이다. All religions are founded on the fear of the many and the cleverness of the few.”
― Stendhal
“아름다움이란 행복을 약속해주는 것일 뿐이다. Beauty is nothing other than the promise of happiness.”
― Stendhal
“즐거움은 표현함으로써 김이 샌다. Pleasure is often spoiled by describing it.”
― Stendhal
“머리로 생각하는 사랑은 진짜 사랑보다 의심할 여지 없이 더 고매하고 일시적인 열정이다. 그 생각 자체를 쉬지 않고 비판하면서도 그 생각을 떨쳐버리기는커녕 하나의 사고의 구조위에 세워지는 건축물이다. Love born in the brain is more spirited, doubtless, than true love, but it has only flashes of enthusiasm; it knows itself too well, it criticizes itself incessantly; so far from banishing thought, it is itself reared only upon a structure of thought.”
― Stendhal, The Red and the Black
“아주 작은 희망만으로도 사랑은 탄생한다. A very small degree of hope is sufficient to cause the birth of love.”
― Stendhal
“도덕적인 음독飮毒 후엔 육체적인 교정과 치료 그리고 샴페인 술 한 병이 필요하다. After moral poisoning, one requires physical remedies and a bottle of Champagne
― Stendhal, The Red and the Black
“신앙. 난 그런 (걸 가질 만큼) 바보 천치가 아니다. 인생이라 일컫는 이기심의 사막에서 각자도생各自圖生 할 일이다. Faith, I am no such fool; everyone for himself in this desert of selfishness which is called life.”
― Stendhal, The Red and the Black
“폭군들이 가장 써먹기 좋은 아이디어 개념과 단어는 신神이라는 말이다. The idea which tyrants find most useful is the idea of God.”
― Stendhal, The Red and the Black
“(사람을) 감동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가슴에 상처를 주는 거다. The only way of touching a heart is to wound it”
― Stendhal, The Red and the Black
어젯밤에 나는 앞뒤의 연관관계가 없이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는' 꿈을 꾸었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 어떤 미지未知의 여성이 꼭 7일 동안 밤과 낮을 같이 지내보고 결정하자는 제의를 하는 거였다.
불교에서는 5백 번 윤회를 거친 후에라야 부부의 인연이 맺어진다 했던가. 현재 부부로 같이 살고 있는 커플 중에 더할 수 없이 애틋하고 다정하게 행복한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고, '진짜 짝'이라고 느끼면서 다음 생에서도 같은 사람과 살겠노라고 할 사람이 또 얼마나 되는지 모를 일이지만, 지난 85년 가까이 살아 온 내 삶을 돌이켜 회상해보리라.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열 세 살 때 집을 나와 나는 길을 떠났다.
어쩌면 타고난 태곳적 향수에 젖어 떠돌아 방황하던 시절, 이미 어린 나이에 사랑의 순례자가 된 나는 독선과 아집으로 화석이 되어버린 어른들의 카오스적 세계가 보기 싫어 순수한 사랑으로 코스모스 속에 새로 태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었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한 나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었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한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걸 먼 훗날에야 나는 비로서 깨닫게 되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가는 곳마다 길가에 깨끗하고 고운 코스모스가 하늘하늘 피어 길 가는 사람의 눈길을 붙잡는다. 이때면 누구나 가슴앓이를 하게 되는 것이리라. 아물어 가던 가슴 속 깊은 상처가 도져 다시 한 번 코스모스 상사병을 앓게 되는 것이다. 세월은 흘렀고 어느 덧 나는 청년이 되었다.
"세계의 모든 종교들 가운데 기독교만 참 종교이고 나머지는 다 미신입니다."
주임교수 강의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란 초인간적인 창조주/조물주 신을 숭배하고 신앙하여 선악을 권계하고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일이 아니던가. 그러할진대 기독교만이 참종교고 나머지는 모두 미신이라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말이 아닌가.
나는 대학에 진학할 때 전공과목을 무엇으로 택할까 고민했다. 대학과정이란 하나의 교양과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일생을 살아가는데 학문적인 기반, 경제적인 기반, 사회적인 기반 등이 다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정신적인 기반을 닦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인생이 망망대해에 떠도는 일엽편주一葉片舟 같다지만 그런대로 내 나름의 방향감각을 갖고 내 뜻대로 항해해 보기 위해서는 인생관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내가 선택한 대학과 전공이 서울문리대 종교철학이었다.
"기독교도 다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여러 신교 교파중에서도 감리교만이 진짜고 나머지는 모두 이단입니다. 기독교인도 다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천 명이면 구백 구십 구 명은 다 가짜 신자입니다."
참다 못해 나는 벌떡 일어나 말했다.
"내가 믿는 종교가 소중하면 다른 사람이 믿는 종교도 소중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그게 무슨 말인가?"
종교학과 주임교수는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내친 김에 나는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 기독교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교세가 가장 큰 데 기독교인들은 사실 그 차이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기독교만이 참 종교이고, 그 중에서 감리교만이 진짜라고 하시니 결코 공정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기독교가 없었다면 십자군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주임교수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더니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이 된 나는 뭐라 대꾸를 하려다가 그만두고 강의실을 박차고 나왔다. 나는 교수의 독선 독단적인 강의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교회에 다닐 때는 극장 문 앞에만 가도 당장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떨어지는 줄로만 알고 수도사적인 생활을 했었다.
크게 실망한 끝에 교회를 '졸업'하게 된 나는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발견하고 무한한 호기심을 품은 채 '인생탐험'에 나섰다.
그동안 안 읽던 소설책들을 밤새워 탐독하고 안 보던 영화를 하루에도 여러 편씩 관람했다. 영화나 소설을 보고 읽는데 만족하지 않고 영화나 소설 속의 인물들처럼 그렇게 실제로 살아보리라 다짐했다. 뿐만 아니라 영화나 소설에 없는 스토리까지 독창적으로 만들어 가면서 살아보리라 나는 결심했다.
그러면서 나는 나의 '짝'을 찾아 나섰다. 온실의 화초같이 고이 자란 여자를 만나 더욱 곱고 아름답게 가꿔주는 것도 좋겠지만 그보다는 불우하게 자란 여성을 만나 전보다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게 더 보람 있지 않겠나 생각에서 심지어 창녀촌까지 찾아다니며 창녀의 몸값에 해당하는 빚도 갚아준 적이 있을 정도로 내 순정을 바쳤다.
하지만 인연이 없었는지 수많은 여자들한테서 실연만 당하고 내 가슴은 민신창이滿身瘡痍가 되어갔다. 번번이 헛짚고 헛수고일 뿐이었다.
몸과 마음이 지쳐갈 무렵, 대학의 교양과목 시간에 읽은 단편소설 하나가 있다.
1943년 출간된 그 영문 소설의 제목은 '만날 약속 Appointment With Love by S.I.Kishor'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한 젊은 전투기 조종사 미육군 중위가 부대 도서실에서 미국 시민들이 해외 전장에 나가있는 장병들을 위해 기증한 도서들 가운데 영국 작가 섬머셋 모음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의 자전적 장편소설 '인간의 굴레 Of Human Bondage(1915)를 읽다가 행간에 미지의 여인이 써놓은 낙서를 보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책 뒷장에 적힌 여인의 이름으로 낙서의 필자를 끈질기게 추적해 펜팔로 1년 이상 사귀게 된다.
사진 한 장 보내달라는 남자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여자는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아름답다고 가정해서, 당신이 내가 미인일 거라는 기대를 갖고 나와 이렇게 편지를 주고 받는 사이라면 그런 사랑엔 난 심한 거부감을 느껴요. 반면에 내가 못 생겼다고 가정해서, 당신이 그냥 외롭고 심심한데다 다른 아무도 없어서 나와 이렇게 펜팔 교신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어요. Suppose I am beautiful. I’d always be haunted that you had been taking a chance on just that, and that kind of love would disgust me. Suppose that I’m plain, then I’d always fear that you were only going on writing because you were lonely and had no one else."
종전이 되어 귀국하면서 그는 여인을 맞나기로 한 어느 기차역 프랫폼에 도착한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라 남자는 '인간의 굴레'를, 여자는 꽃 한 송이를 들고 나오기로 했다.
자나 깨나 그리던 여인의 모습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남자의 눈에 꽃 한 송이 든 할머니가 나타났다. 순간 남자는 자못 실망했으나 피하지 않고 할머니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를 한다. 그러자 할머니는 남자와 만나기로 한 젊고 아리따운 처녀가 기차역 앞 어느 레스토랑에서 지금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가보라고 한다.
이 영문 소설을 떠올린 나는 가슴 속에 꿈을 하나 키우게 된다. 나의 가장 이상적인 배우자를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찾아보리라.
내가 선택한 방법은 다름 아닌 펜팔 교제였다. 서로 얼굴도 모르면서 편지로 사귀다 보면 상대방의 용모라던가 학벌, 신분, 직업, 재산 등 외적 조건과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나누면서 좀 더 진실한 내적 인간관계가 성립될 수 있을 것으로 나는 판단했다.
대학의 강의실에서 뛰쳐나온 이후로 나는 신과 내세 중심의 종교를 포기했다.
그 대신 짝을 찾는 일에 전념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그때 그때 최선을 다 하노라면 최선의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리라.
앞에 인용한 글에서처럼 "인생의 파도가 거칠면 거칠수록 둥글게 다듬어진다"고 성공도 수많은 실패를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것이리라.
그뿐더러 '인생의 그림'은 내가 그리는 것 같아도 큰 그림은 그려지는 것이리라.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일이다. 젊은 날 취중 '사고'로 결혼하게 된 세 딸들 엄마와 20 년 후 두 번 째 (첫 번째는 결혼한 2 년 뒤) 이혼한 직후 옛날 군복무 시절 펜팔로 6 개월 사귀다 제대 후 딱 세 번 만나고 (여자 어머님의 반대로) 헤어졌던 여인을 25 년만에 뉴욕에서 재회, 우리 두 사람 다 재혼했으나 10개월 후 다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짝'을 찾는 일을 포기할 수 없어 진인사대천명하는 비장한 각오와 절박한 자세로 궁여지책窮餘之策을 써봤다. 뉴욕에서 발행되는 미주판 한국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세계일보에 6개월에 걸쳐 다음과 같은 구혼광고를 냈었다.
'인생의 가을철을 같이 즐길 코스모스 같은 가을여인을 찾습니다. 정력왕성하고 낭만적인 50대 남성 연애지상주의자가 지적 대화 가능한 미심美心 미혼美 魂의 비기독교신자를 찾습니다.'
그랬더니 미국 각지에서 수백 명의 여성으로부터 전화가 있었고 그 중에서 수십 명을 만나봤다.
교회도 안 다니는 사람이 왜 미국에 사느냐, 덤벼들어 물고 늘어지는 여자를 비롯해 장난삼아 전화하는 사람, 돈이 얼마나 있느냐, 집이 있느냐, 어떤 자동차를 모느냐, 직업은 뭐고 어느 고향 어떤 학교 출신이냐, 미국 시민권자냐 영주권자냐, 애들이 몇이나 있느냐, 전前부인과는 왜 어떻게 헤어졌느냐, 키는 얼마나 크며 몸무게는 얼마나 나가느냐,혈액형은 무엇이냐, 묻는 야자가 많았다.
그밖에도 그냥 전화로 말벗이나 하자는 유부녀와 처녀들도 있었고, 남자 망신 그만 시키라며 노발대발 하시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자기도 광고를 내 볼까 하는데 광고 내면 그 반응이 어느 정도냐고 물어오는 남자도 있었다.
흔히 '네가 막는 것이 너다. You are what you eat.'라고 한다. 이게 어디 먹는 것뿐이랴.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 상상하는 것, 꿈꾸는 것, 믿는 것, 모두 그렇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각자 제가 보고 싶은 대로 제가 찾는 것만 발견하게 되지 않는가. 극찬을 하는 서평도 악평을 하는 것도 있어 같은 책이 전혀 다른 책이 된다. 무엇을 말하는가는 듣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로 그 내용이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1871-1922)도 "독자가 읽는 것은 독자 자신이다. Every reader, as he reads, is actually the reader of himself."라고 했으리라.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얼마 전 인터넷에 이런 '구혼' 광고가 났다.
'검은 살갗의 빛깔 살빛에 미모의 미혼여성이 남성 반려자를 찾습니다. 어떤 인종이든 다 괜찮습니다. 나는 놀기 좋아하는 아주 새파랗게 젊은 여성으로 산책하기, 당신의 픽업트럭 타고 달리기, 야영하며 사냥하고 낚시하기, 그리고 겨울밤엔 불가에 포근히 눕는 거를 즐긴답니다. 촛불 켜고 당신의 손에서 받아먹는 저녁식사도 좋습니다. 당신이 직장에서 돌아 올 때면 문 앞에서 당신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데이지를 찾아주셔요."
놀라지 마시라. 이 광고를 보고 자그마치 만 오천 명 이상의 남자가 전화했는데 전화가 걸려 온 곳은 미국 조지아 주 아틀란타 시에 있는 애완동물 보호소이고 데이지는 태어난 지 8주 된 라브라도종 암사냥개의 이름이다.
우리말에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고, 이야말로 순수한 마음으로 보면 예술이지만 음심淫心을 품고 보면 외설猥褻이 되겠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아무도 그 누굴 흉보고 욕할 자격 없다는 거다.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고 했다는 예수의 말처럼 '유리 집에 사는 사람은 남의 집에 돌을 던질 수 없다'는 서양 속담 대로 세상의 그 누구도 완벽할 수 없고, 설혹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그가 완전무결하다는 것이 그의 단점이 될 수 있는 한 아무도 그 누굴 나무랄 수 없으리라. 세상 사람들이 다 다르고 그들이 각자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믿고 행동하는 것이 다 다를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나와 같지 않다고 맞다 틀렸다 할 수 있을까.
그렇다 해도 우리는 모두가
네 숨은 네가 내 숨은 내가
네 삶은 네가 내 삶은 내가
네 사랑 네가 내 사랑 내가
쉬고 살고 뛰고 오를 수밖에
사랑이 모험 중에 모험이라면
용기와 신념만 있으면 족하리.
사랑이 다가오는 순간은 미세한 떨림에서 시작된다. 첫 떨림의 순간이 파장을 일으켜 첫 만남으로 이어지고 우리는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 사랑하니까. 그리고 또 사랑하니까. 영원이 되는 것이다.
용혜원의 시 '사랑하니까' 중에도 사랑이라는 정의가 나온다.
'사랑하니까'
/용혜원
"사랑이란
함께 걷는 것이다
멀리 달아나지 않고
뒤에 머물러 있지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같이 걷는 것이다
서로의 높이를
같이하고 마음의
넓이를 같이하고
시련의 고통을 이겨내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까지
둘이 닮아 가는 것이다"
칼릴 지브란 Kahlil Gibran(1883-1931)이 '예언자의 뜰 The Garden of the Prophet(1933)'에서 말하듯
"영겁을 두고 떨어져 있는 연인들 사이를 맺어주는 영원한 순간이 있나 하면,
그리워하는 생각 다함이 이별이란 망각
There are moments that hold aeons of separation. Yet parting is naught but an exhaustion of the mind."이라면 지금의 내 입장은 어떤 것일까.
사랑은 스스로 길을 찾는다 했던가.
"사랑이 나를 끌고 갈 때, 내 침묵에 파문이 일어나고 말에도 결이 생겼습니다. 그 파문이, 물결처럼, 바람처럼, 숨결처럼 누군가의 마음 속에 스몄으면 합니다.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내 몫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독자여, 읽는 내내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으로 읽으시라."
그동안 실존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한계와 고독을 성찰해 온 천양희 시인이 환갑을 맞아 '내 목숨에 대한 반성문이며 시로 쓴 영혼의 자서전'이라고 고백한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는가>를 2003년 펴내며 주문한 말이다.
정녕,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순수성과 영원성 그리고 운명성을 맛보는 것이 아닐까.
한 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그 제목은 '영원한 사랑 Love Eternal'이다. 중국의 한 가극 오페라를 멜로드라마로 각색해 만들어져 1960년대 중국 특히 대만에서 굉장한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이 영화를 처음 본 이후로 오늘날까지 매번 볼 때마다 눈물을 쏟는다"며 자기가 만드는 영화들은 하나같이 이 '영원한 사랑'이 주는 영원한 감동의 진수를 되살려 보려는 것뿐이라고 '와호장룡臥虎藏龍 영어: Crouching Tiger, Hidden Dragon'의 감독 리안 Ang Lee 이 언젠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이 '영원한 사랑'은 이런 이야기다.
어느 조그만 마을 부유한 집에 태어난 리디는 총명하고 호기심 많아 공부를 하고 싶어도 남자애들처럼 학교에 갈 수 없다. 남자들만 학교를 갔으니까. 궁리 끝에 남자 아이로 변장을 하고 학교에 가겠다고 부모님을 졸라 설득한다. 남자 아이들만 있는 기숙 학교로 가는 길에 개울가 석탑에서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는 링포를 만나 금세 친해진다. 그러면서 리디는 링포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둘은 맺어지지 못하고 리디가 다른 사람과 정혼하게 되어 그 사실을 알게 된 링포는 그 소식에 절망해 열병을 앓다 죽는다.
이 비보를 들은 리디는 시집가는 날 링포의 무덤 앞을 지나다가 신부복을 벗어버리고 속에 입고 있던 상복 차림으로 죽은 애인을 그리워하며 애절한 사랑 노래를 부른다. 그러자 링포의 무덤이 갈라지고 리디가 그 무덤 속으로 뛰어들면서 합장되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1987년 첫 출간된 고故 김윤희(1947-2007) 작가의 장편체험소설 '잃어버린 너'라기 보다 우리 모두 '되찾을 나'가 아닐까.
노향림의 시 '파브르의 곤충기1' 가 생각난다.
"잃어버린 짝을 찾아
눈 가리고도 수천 수만리를
단독 비행해 온다는
벌 이야기가 떠올랐다.
먼 옛날로부터
사람은 날개 터는 벌이
ㅡㅡ아니었을까.
마주치는 얼굴마다
온종일 붕붕거리기만 한다."
지난 달 2021년 9월 20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칼럼 옮겨보리라.
[이태상 칼럼] <한가위에 ‘달무리’ 아니 ‘우주무리’가 되어보리>
너도 나도
집을 향한 그리움으로
둥근 달이 되는 한가위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빛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우리의 삶이
욕심의 어둠을 걷어내
좀 더 환해지기를
모난 미움과 편견을 버리고
좀 더 둥글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려니
하늘보다 내 마음에
고운 달이 먼저 뜹니다
한가위 달을 마음에 걸어두고
당신도 내내 행복하세요. 둥글게!
- 이해인 시 ‘달빛기도 – 한가위에’
설혹 우리가 달이 되지 못하더라도 달무리는 될 수 있지 않으랴.
어렸을 때 읽은 동화가 평생토록 잊혀지지 않는다. 벌이 나비를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나비는 벌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꽃밭으로 아름다운 꽃들만 찾아다녔다. 그러다 어느 날 밤하늘에 두둥실 떠오르는 보름달이 나비로 보여 벌은 하늘로 높이높이 날아올랐다. 그리움에 사무친 벌의 숨이 차다 못해 달무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지난해 2020년 7월 14일자 코스미안뉴스에 나는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이태상 칼럼] '미지의 피해자 고소인께 드리는 글'
고(故) 박원순 시장이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한 사실이 알려진 직후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피해자인 고소인의 신상을 캐내거나 피해자를 향한 비판을 쏟아내는 등 심각한 2차 가해가 확산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고 엊그제 박 시장님 영전에 바치는 글을 쓴 사람으로 조금이라도 위로의 뜻을 전하고 싶어 이렇게 다시 몇 자 적습니다.
나 자신이 남성이지만 다섯 딸의 아빠이고 너무도 사랑스런 다섯 살짜리 외손녀를 두었을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여성을 여신처럼 숭배하고 흠모해온 사람으로 '가해자'의 극단적인 선택으로 설상 가상의 그 얼마나 더 큰 충격을 받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을지 나도 가슴이 많이 아픕니다.
언행일치를 영어로는 'Walk it like you talk'를 줄여 'Walk the Talk'라 하지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도 남도 속일 수 없고, 사소한 몸짓 하나가 그 사람의 전부를 나타내며, 그 일부를 통해 나머지를 다 알 수 있다는 의미로 추일사가지(推一事可知)라 하지요. 이를 내가 좀 풀이해보 자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진실되고 성실히 대하는 것이 곧 만인에게 그러는 것이고, 한순간 한순간을 열심히 사는 것이 곧 영원을 그렇게 사는 것이며,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것 이상으로 순수하고 진실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 자신부터 좋은 걸 싫다고 할 수 없듯이 싫은 걸 좋다고 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리고 좋고 싫은 건 내가 마음 먹는다고 될 일이 결코 아니고 절로 좋든가 싫든가 자연의 순리를 따를 수 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런데도 억지로라도 나를 좋아해달라고 할 일이 절대로 아닌데 사회적인 지위나 권력 또는 금력으로 강요할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고로 위인은 작은 소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의 큰 사람됨을 나타내는 법이고 약자를 괴롭히는 자는 너무도 찌질하고 비겁한 인간이지요.
짝사랑과 스토킹의 차이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볼까요. 짝사랑은 누군가를 혼자 좋아하는 것이지만 스토킹은 상대를 괴롭히는 게 아닙니까.
3대 독자에다 유복자로 태어나 자식을 열 다섯이나 보신 선친 이원규께서 자식들은 물론 모든 어린이를 극진히 사랑하는 마음에서 손수 지으신 동요와 동시 그리고 아동극본들을 모아 경술국치 후 일제 강점기 초기에 우리말로 '아동낙원'이란 책을 자비로 500부 출간 하셨는데, 단 한 권 집에 남아있던 것마저 6.25동란 때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글을 처음 배우면서 읽은 '아동낙원' 속의 '금붕어'란 동시 한 편의 글귀는 정확히 기억을 못해도 그 내용만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느 비 오는 날, 어항 속 금붕어를 들여다보면서 어린아이가 혼잣 말 하는 내용입니다.
'금붕어'
헤엄치고 늘 잘 놀던 금붕어 네가
웬일인지 오늘은 꼼짝 않고 가만있으니너의 엄마 아빠 형제들 그리고 친구들
모두 보고 싶고 그리워 슬퍼하나 보다.
저 물나라 네 고향 생각에 젖어
밖에 내리는 빗소리 들으며...
난 네가 한없이 좋고
날마다 널 보면서
이렇게 너와 같이
언제나 언제까지나
한집에 같이 살고 싶지만
난 너를 잃고 싶지 않고
너와 헤어지기 싫지만
난 너와 떨어지기가
너무 너무나 슬프지만
정말 정말로 아깝지만
난 너를 놓아주어야겠다.
너의 고향 물나라
저 한강 물에
'Goldfish'
Always happy at play swimming
Around and around
Gaily and merrily
You were,
My dear goldfish.
Why then are you so still today,
Not in motion at all?
What's the matter with you?
Maybe you're homesick
Missing your Mom and Dad
Your sisters and brothers,
All your dear friends,
Soaked with memories and thoughts of
Your home in the waterland,
Far away. over yonder of yore.
I do like you so very much.
I do want to live with you
Forever and ever in this house.
I don't want to lose you.
I don't want to part company from you.
I'll be very sad to be separated from you.
I'll be missing you so very much.
And yet I'll have to set you free.
I must let you go home,
Yes, my dearest goldfish,
In the Han River.
It breaks my heart to see you
Looking so sad.
It hurts so very much
To keep you away
From your folks.
I can't be happy
If you are not happy.
I just want you to be happy.
That's all I wish.
그토록 어린 나이에 받은 깊은 인상과 감상 때문이었을까. 이때 부터 나는 '금붕어 철학'을 갖고 80여 년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어려서 벗들과 놀때도 언제고 어떤 친구가 조금이라도 싫다 하면 아무리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어도 그 당장 그만두곤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잃어버린 기회, 놓쳐버린 아가씨들이 부지기수였습 니다. 흔히 여자가 No 하면 Maybe로, Maybe 하면 Yes로 새겨 들으라지만 나는 고지식하게 상대방의 말을 곧이곧대로, 액면 그 대로, 받아들여 거듭 낭패만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저 '어린 왕자'의 저자 생텍쥐페리의 말처럼 정녕 삶이란 있을 법하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세상에 어떤 기쁨도 참된 인간관계 밖에서는 맛볼 가망조차 없으리라고 생각 합니다.
미국의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가 말한 것처럼 흐르는 샘물처럼 비록 목마른 이의 타는 목을 적셔 주지 못하는 때에도 냇물로 흐르면서 바다로 향하다가 가뭄이라도 만나면 온데간데 없이 말라 없어진 것 같지만 증발된 그대 사랑의 샘물은 결코 없어진 것 아니 고, 저 푸른 하늘 떠도는 구름 되었다가 빗물로 쏟아져 내려 그대 가슴의 샘을 그 더욱 넘치게 채워주리오.
Talk not of wasted affection, affection never was wasted,
If it enrich not the heart of another, its waters returning
Back to their springs, like the rain shall fill them full of refreshment;
That which the fountain sends forth returns again to the fountain.
- 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 - 1882)
어떠한 경우에도 생각보다는 느낌 대로, 가슴 뛰는 대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은 바꿀 수 있지만 우리 마음과 혼은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머리 돌아가는 대로 행동하지 않을 경우에는 하루 이틀 후회하게 되지만 가슴이 뛰는 대로 살지 않고 엇가다 보면 평생을 후회하게 되는 까닭에서이지요.
부디 어서 악몽에서 깨어나 새롭게 아름다운 꿈을 꾸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이어서 2020년 5월 4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칼럼도 옮겨보리라.
[이태상의 항간세설] '컨택트(Contact)와 언택트(Untact)'
코로나19가 앞으로 세상을 많이 바꿔놓을 거란 전망이다. 코로나 19 이전이 대면(對面)의 컨택트(Contact) 시대였었다면, 비,대면으로 이뤄지는 ‘언택트(Untact)’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조짐 (兆朕)이다. 일종의 만인과 만물과의 ‘블라인드 데이트(Blind Date)’가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리라.
흔히 삶은 불공평하다(Life is unfair)고 말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영어로 ‘죽음은 모든 사람을 평준화한다.(Death levels all men.)’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 세상에 태어나는 건 그렇지 않아 보인다. 얼마 전부터 한국에선 금수저니 은수저니 동수저니 흙수저니 하는 수저론이 있다지만 우리 좀 살펴보자.
사람이 쓴맛을 본 연후에라야 단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듯이 수고 없이 주어진 건 제대로 누릴 수 없지 않던가. 우리 모두 빈손 으로 왔으니 뭘 얻고 갖게 되든 다 남는 장사하다가 다 놓고 떠나게 되지 않던가. 여름 휴가철 아이들이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모래성 쌓고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듯 말이어라
어디 그뿐이던가. 세상 사는 이치가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이 있고,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동안에도 언제나 평준화가 이뤄지고 있다.
숨을 내쉬어야 들이쉬게 되고, 배설을 해야 음식물을 섭취할 수 있으며, 시장기가 최고의 반찬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 한 예로 사람들의 선호대상인 건강하고 잘생긴 미남미녀의 잣대를 살펴 보자. 몸은 건강해도 마음이 불구이거나 외모는 아름다워도 심보가 고약한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Victor Hugo1802-1885)의 1831년 출간된 장편소설 ‘파리의 노틀담(Notre-Dame de Paris, 영어명은 The Hunchback of Notre-Dame)’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것이다. 1939년 처음으로 아일랜드계 미국 여배우 모린 오하라 (Maureen O’Hara 1920-2015)와 영국 남배우 찰스 로튼 (Charles Laughton 1899-1962)주연으로 영화화되었다가 1956년 이탈리아 여배우 지나 롤로브리지다(Gina Lollobrigida 1927- )와 멕시코계 미국 남배우 앤소니 퀸(Anthony Quinn 1915-2001) 주연으로 다시 만들어진 영화에선 앤소니 퀸이 맡은 ‘콰지모도’ 역은 겉이 추해도 속이 아름다움이 진정한 아름다움이 라는 화두를 던진다. 픽션에선 그렇다 하더라도 실제로도 그런 예를 하나 들어보리라.
26살의 리지 벨리스케스는 한때 세상에서 가장 추한 여자로 불렸 다. 키 157센티미터, 몸무게 26kg에다 지방이 별로 없어 뼈만 앙상한 데다 한쪽 눈까지 멀었고, 조로증과 아무리 음식을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거미손 증후군을 앓고 있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2015년 10월 28일 미 의회 상-하원 의원들을 상대로 연방 차원의 학교 왕따 방지법 입법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든 그녀의 부모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이로 자라다 유치원에 간 첫날부터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했고, 17세 되던 해 유튜브에 뜬 자신의 영상을 보고 ‘괴물이다’, ‘불에 타 죽어버리라’는 등의 악성 댓글을 대하며 많이 괴로웠지만 극복했다. 텍사스 주립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그녀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만들고 자신의 이야기를 다룬 ‘용감한 사람’이란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9개 영화제에서 호평을 얻었다. 이 영화를 만든 사라 보르도 감독은 “리지의 이야기는 독특하다”며 “괴롭힘을 당하는 감정, 다른 사람의 비열한 행위의 희생자가 되는 감정은 모든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2013년 2월 공개됐던 그녀의 ‘기술, 오락, 구상 회의(TED Talk-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 연설은 큰 화제를 모으며 아름다움의 새 기준을 제시했다. 자신과 다르다고, 상품화된 마네킹 같지 않다고, 남의 진가를 못 알아보는 사람들이야말로 눈 뜬 장님들이 아니랴. 아니, 그보다도 자신의 추하고 못난 모습을 세상이라는 거울에 비쳐 보는 것이리라. 예부터 겉이 화려하면 속이 빈약하다고 외화내빈(外華內貧)이라 하지 않나. 약방의 감초 같은 이야기를 하나 해보리라.
내가 젊었을 때 바람둥이 친구가 하나 있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이 친구야말로 일찌감치 도통한 입신지경에 도달하지 않았었나 싶다. 이 친구는 얼굴이 못생겼거나 몸맵시가 없어 남자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여자들만 상대하는 것이었다. 이 친구 말로는 못생긴 여자일수록 속궁합은 훨씬 더 좋더란다.
어쩜 그래서 자고로 미인은 흔히 불행하거나 병약하여 요절하는 일이 많다고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 하고, 재인부덕 (才人 不德)하다고 하는 것이리라. 재주고 재산이고, 명예고 권력이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에 상당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영어로는 You get what you pay for라고 한다. 남 보기에 좋다고 또는 나쁘다고 반드시 그렇지가 않다는 얘기다. 그러기에 삶은 공평(公平)한 것임이 틀림없어라.
슬픔을 동반한 우울한 정조(情調)나 의학적으로 우울증(憂鬱症)을 가리키는 멜랑콜리(melancholy)는 그리스어 ‘melancholia’에서 유래한 말로 검은색을 뜻하는 멜란(melan)과 담즙(膽汁)을 의미하는 콜레(chole)의 합성어인데 마치 달무리 같은 덧없는 아름다움이 배어있다.
고대 그리스에선 인간의 체액(體液)을 네 가지로 분류해 그중 한 가지인 흑답즙(黑潭汁)이 과도하게 분비되면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병이 발생한다고 믿었다 한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 (John Keats 1795-1821)는 탄식한다.
'멜랑콜리송(頌)'
불현듯 하늘에서 눈물 흘리는 구름처럼
발작같이 멜랑콜리 증상이 일어나면
아름다움으로 머물지만 사라지는 아름다움일 뿐
'Ode on Melancholy'
But when the melancholy fit shall fall
Sudden from heaven like a weeping cloud
She dwells with Beauty – Beauty that must die
영어로 ‘depression’이라는 병적으로 의기소침한 우울증과는 달리 멜랑콜리라 할 때는 어떤 낙담스러운 현실과는 상관없이 삶의 실존적 애잔한 슬픔이 애절할 뿐이다. 그 덧없음이 입김 어린 안개 같고 달빛처럼 몽환적이다.
“성(性)노동은 단지 일이다. 나한테는 정직한 일이었다. 난 젊었을 때 성노동자였다. 힘든 일이었지만 보수가 좋았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Sex work is simply work. For me it was honest work. I was a sex worker when I was young. It was hard but well paid. There’s no shame in it.”
이렇게 몇 년 전 한국계 미국 코미디언 마가렛 조(Margaret Cho, 1968 - )가 인터넷에서 밝히자 많은 논란을 빚었지만, 수많은 전(前)현직(現職) 성노동자들의 성원이 있었다. 세계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언제 어디에서나 항상 남녀의 인연을 잠시 나마 맺어 준다는 월하(月下) 노인이 지닌 주머니의 붉은 끈 월로승(月老繩)에 묶인 달 속의 궁전 월궁(月宮)이 있어오지 않았나.
요즘 영어로는 바이폴라(bipolar)라는 정신의 억울과 조양(躁揚) 상태가 번갈아 또는 한쪽만이 나타나는 정신병 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영어로 실성한 사람을 ‘달빛을 쏘였다’고 ‘moonstruck’이라 하는데, 특히 사랑에 빠져 약간 미쳤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뿐더러 성숙한 여성의 자궁에서 정기적으로 며칠 계속하여 출혈하는 현상 ‘멘스’를 우리말로 월경(月經)이니 월사(月事)라 하고, 바다의 조수(潮水)와 한가지로 달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지 않는 가.
불교에서는 열둘의 대서원을 발하여 중생의 질병을 구제하고, 법약을 준다는 약사여래의 오른쪽에 모시는 ‘일광보살’과 함께 상수에 있는 보살을 ‘월광보살’이라고 한다. 그리고 절세의 미인을 가리키는 말로 월궁(月宮)에 산다는 선녀를 ‘월궁항아(月宮姮娥)’라 한다.
조선 후기의 관료이자 화가로서 산수화와 풍속화를 잘 그린 호( 號)가 혜원(蕙園)인 신윤복(申潤福 1758-1814)의 은밀한 남녀의 만남을 그린 작품 ‘달빛 연인’(제작연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서 여인은 한결 다소곳한 모습이다. 한밤중의 어슴푸레한 달빛 속에 밀회를 나누는 표정이 생생하다. 한쪽 손으로 장옷을 여미고 있지만 여인은 남정네의 시선을 의식한 듯 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었다.
푸른 옥색 치마는 허리춤에서 질끈 동여매고 치마 아래로 역시 백설같이 눈부신 속곳 가래가 달빛에 비친다. 고개를 숙이고 다소곳이 장옷을 잡은 여인의 저고리 붉은 소매 깃은 사내의 심상치 않은 시선을 이끌고 있다. 이와 같이 혜원의 여인들은 한결같이 속곳을 드러내고 있는 ‘끼’있는 여인네들로 표현되지만, ‘미인도’는 당대의 젊은 여인의 자태가 가장 아름다운 여성미로 완벽하게 표현되어 압권을 이루는 작품이란다.
초승달 같이 가는 실눈썹과 단정하게 빗은 머리 위의 뽀얀 가리마, 윤기가 흐르는 크고 탐스러운 칠흑의 트레머리로 한껏 멋을 부렸다. 미소를 머금은 여인의 얼굴에선 아직도 앳된 모습이 역력하지 만 풍성한 치마 아래로 살짝 내비친 속곳 가래와 흰 버선에서 단정한 여인의 색정이 느껴진다.
아, 달빛이 없다면 햇빛이 무슨 소용이랴!
된장녀나 김치녀를 들먹이는 여성 혐오가 최근에 와서 한국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데, 이를 “한국의 저출산, 저성장에 대한 해법은 여성의 지위향상”이라고 스웨덴의 카로린스카 대학 (Karolinska Institute) 인구문제 석학 한스 로슬링 (Hans Rosling1948-2017) 교수도 지적했다지만, 어서 한국에서도 성(性)에 대한 고정관념이 사라져야 하리라.
마찬가지로 청년 실업자 문제에 있어서도 그 해법은 직업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리고 임시직의 구분이 없어지는 추세에 적응해가는 것이리라.
얼마 전부터 미국에서 ‘기그 경제(gig economy)’란 신조어가 유행이다. ‘기그(gig)’란 1920년대 미국의 재즈 공연장 즉석에서 수시로 임시 연주자를 구해 공연하게 된 데서 생긴 단어이다. ‘파트타임(part-time)’, ‘프리랜서(freelancer)’, ‘온 디맨드(on demand)’, ‘우버(uber)’ 등과 같은 임시 고용 방식을 말한다.
소위 하드웨어(hardware)로 일컫는 일자리는 인공지능 컴퓨터와 로봇, 드론과 3D 프린터 등 기계로 대체되어가는 마당에 고등 교육 조차도 더 이상 평생 직장을 보장해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표준형 인력을 양성하는 대신 창의성 있는 인재를 키워 각 분야에서 필요한 소프트웨어(software)를 제공하도록 해야 하리라.
그렇게 함으로써 각자는 각자의 재능과 자질을 살려 어떤 조직에도 구속되지 않은 채 사회에 공헌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게 되리라. 말하자면 우리 모두가 날품팔이 예술인, 과학자, 작가, 철인이 되어 봉이 김선달이나 방랑 김삿갓처럼 또는 황진이 같이 살아보리라.
김억(金億), 호는 안서(岸曙)로 호를 따라 김안서(1896-?) 작사, 김성태(金聖泰1910-2012) 작곡으로 ‘꿈’이라는 제목 으로 가곡으로도 만들어진 황진이(黃眞伊 1506-?)의 시조 ‘상사몽(相思夢)’ 을 우리 한 번 같이 읊어보리라.
상사상견지빙몽(相思相見只憑夢)
그리워라. 만날 길은 꿈길밖에 없는데
농방환시환방농(儂訪環時歡訪儂)
내가 임 찾아 떠났을 때 임은 나를 찾아왔네.
원사요요타야몽(願使遙遙他夜夢)
바라거니, 언제일까 다음날 밤 꿈에는
일시동작로중봉(一時同作路中逢)
같이 떠나 오가는 길에서 만나기를
“애초에 짜놓은 각본 드라마. 그 안에서의 난 그저 들러리일 뿐. 근데 누가 날 주인공으로 바꿔놨어? 바로 나였어.”
얼마 전 케이블 채널 Mnet이 방영하는 여자 래퍼 서바이벌 프로 그램 ‘언프리티 랩스타 시즌2’에 출연하는 피애스타라는 걸그룹 멤버 예지가 탈락의 위기에 놓인 순간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며 단숨에 우승 후보로 올라 무대에서 제작진을 향해 외친 말이었다.
예지의 이 말은 우리 모두에게 울림이 큰 경종이 아닐 수 없다. 사람마다 다 다른 환경과 조건에 태어나 다른 현실을 살아가지만, 남이 조종하고 시키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사느냐 아니면 제가 꿈 꾸고 희망하는 대로 자신의 독창적인 삶과 운명을 개척하느냐는 각자의 권리와 의무이며 선택사항이 아닌가.
똑같은 음식 재료를 갖고도 각자가 전혀 다른 요리를 할 수 있듯이, 똑같은 백지 종이에다 똑같은 크레용과 색색이 물감으로 각자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듯이, 똑같은 자연과 인물을 대상으로 한다 해도 전혀 다른 풍경 산수화와 인물 초상화가 그려지지 않던가. 똑같은 길을 간다 하더라도 사람마다 보고 듣는 느낌과 생각이 다 다를 수 있지 않은가. 각자는 각자 대로 자신의 인생드라마의 주인공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어찌 내키지 않는 공부를 할 수 있으며, 내키지 않는 직업을 갖고, 내키지 않는 결혼을 할 수 있으랴.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힘 든 줄도 모르고 일의 능률도 날 뿐만 아니라 우선 즐거워 본인이 행복하지 않은가. 따라서 주위 사람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다. 콩이면 콩 노릇 해야지 팥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원초적인 예로 태교(胎敎)를 생각해보자. 엄마의 만족이 태아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 않는가. 태어난 이후로도 요람에서 무덤까지 각자는 자신만의 성명철학을 갖고 태교를 이어가면서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을 만족시켜 나가야 하리라.
사랑스러운 아역스타 김윤정(16)이 훌쩍 자라 2015년 개봉한 영화 ‘비밀’의 주역을 맡고,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역에서 성인 연기자로 넘어가는데 대해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어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 아니라 흘러가는 대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에요. 어렸을 적부터 차근차근, 제 나이 때 할 수 있는 역할, 최대한 즐길 수 있는 역할을 하면서 지금까지 왔어요. 또 많이 할수록 배운다고 생각하고 처음 해 온 대로 잘 유지해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억지로 나를 바꿔놓으려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20살이 되면 또 그에 맞는 역할을 할 수 있겠죠.”
아, 이것이 우리 각자가 다 자기 삶의 주역으로 사는 ‘비밀’의 열쇠 가 아니랴! 억지로 자신을 바꾸려 하지 않고 각자는 각자 대로 자신의 삶을 살 때 무질서한 카오스가 아닌 조화롭고 아름다운 코스모스가 될 수 있으리라. 그럴 때 비로소 우리 모두 하나같이 날이면 날마다 아무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복면가왕’으로 새 역사를 쓰는 것이리라.
또 얼마 전 MBC ‘일밤-복면가왕’의 13, 14, 15, 16대에서 4연속으로 등극한 ‘소녀의 순정 코스모스’ 같이 말이다.매회 독보적인 가창 력을 선보이며 ‘갓스모스’라는 별명으로 사랑받았다는 ‘코스모스’처럼 우리 모두 각자가 다 온 우주 코스모스의 화신(化身)임을 깨달아야 할 일이어라.
자, 이제 우리 어떻게 컨택트(Contact)와 언택트(Untact)의 조합(組合/調合)을 이룰 수 있는지 13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루미(Rumi 1207-1278)가 남긴 말 한두 마디 음미해보리라.
“이별이란 눈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있는 법. 가슴과 혼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겐 없기 때문이지. Goodbyes are only for those who love with their eyes. Because for those who love with heart and soul there is no such thing as separation.”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사랑으로 숨 쉬라. Wherever you are, and whatever you do, be in love.”
이럴 때 우리 모두 비록 달은 못되더라도 달무리는 될 수 있으리라. 이것이 바로 우리 모든 우주나그네 코스미안이 ‘우주무리’가 되는 길이리.
이렇게 코스모스바다에 이는 카오스 같은 풍랑에 쓸려 모난 우리 모든 작은 별들도 잘 다듬어져 코스모스의 분신 아바타 작은 둥근 돌들이 되는 것이리.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