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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9일자 미주 뉴욕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살며 생각하며] 칼럼 '요한, 너는 좋으냐? 낙엽 쓰는 소리가' 필자 김학선 자유기고가는 자신이 겪은 '자업자득自業自得' 일화를 이렇게 적고 있다.
11월로 들어서면서 낙엽이 땅 위에 그득합니다. 이럴 때면 젊은 시절 외우고 다니던 구르몽이라는 프랑스 시인의 ‘낙엽’이라는 시가 기억나곤 합니다. “시몬, 나무 잎새 떨어진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요사이 조락의 계절에 이렇게 시작되는 시를 나직이 읊조리며, 낙엽 뒹구는 거리를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걷곤 했던 철없던 시절의 낭만에 젖어볼 듯도 하지만 그런 낭만은 이미 먼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낙엽이 바람에 뒹구는 소리는 이미 낭만이 아니라, 어느 신부님의 수상집 제목처럼 ‘낭만에 초치는’소리로 들립니다.
미국에 온 이후로 낙엽은 더는 낭만이 아니라 얼른 치워버려야 하는 쓰레기와 같은 뜻을 가진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낙엽은 짜증과 공포의 대상입니다. 뉴욕에서 비즈니스를 운영하면서 가장 두려운 존재 중 하나가 뉴욕시의 청소국 직원입니다. 업소 앞에 휴짓조각 하나라도 발견되면 가차 없이 벌금 티켓을 발부합니다. 아무튼 요즘 같은 불경기에 100달러나 하는 벌금 티켓을 내기 위해서는 양복을 열 벌도 더 세탁해야 하니 경제적인 손해도 손해거니와, 온종일 그 찝찝한 기분으로 지내야 하는 일이 경제적인 손실보다 결코 적지 않습니다.
작년 이맘때였습니다. 그날도 낙엽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바람까지 심하게 불어대니 얼굴에 뾰루지가 났을 때처럼 온 신경이 업소 앞에 있는 낙엽에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빗자루를 들고 낙엽을 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업소 앞에는 낙엽이 별로 없었고, 오른편에 있는 델리 가게 앞에는 수북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옆 가게 사람들은 낙엽 치울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가게 앞만 야무지게 치우고는 ‘너희들 오늘 좀 당해 봐라’ 하는 마음으로 낙엽 치우는 일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물론 옆 가게 사람들에게 낙엽을 치우라는 귀띔을 하지 않았음은 물론이지요.
그런데 낙엽을 치운 지 30분쯤 지났을까, 시 청소국 직원의 유니폼을 입은 사람이 우리 가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밖의 청소 상태가 불량해서 벌금 티켓을 발부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 항의를 하려고 밖을 내다보니, 비록 자빠지지는 않았어도 그 정도로 놀라고 당황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옆 가게에 움직이지 않고 고이 있어야 할 낙엽들이 우리 가게 앞에 다 모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30분 동안 낙엽들과 바람이 짜고는 반란을 일으켰던 겁니다. 100달러짜리 벌금 티겟과 함께 깨소금 맛이었던 마음이 한약 삼킨 쓴맛으로 변한 채로 내게 남아 있었습니다. 그 속상하고 억울한 마음은 창피해서 어디 호소할 데도 없었습니다.
다시 가게 앞의 낙엽을 치우는데 지나가는 바람이 귓전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입맛 쓰지? 그러길래 옆 가게까지 쓸었으면 이런 일 없었을 텐데…” 눈 질끈 감고 옆 가게 앞까지 쓸었더라면 이런 쓴맛을 보지 않았을 텐데, 속 좁고 옹졸한 마음 때문에 여러 가지로 손해를 보았습니다. 내 손과 또 손에 들린 빗자루는 내 앞만 아니라 주위도 쓸라고 주어졌음을 잊었습니다. 이웃사랑이라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아무런 조건 없이 눈 한 번 질끈 감고 옆집 마당까지 쓸어주는 일임을 그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낙엽을 쓸기 위해 빗자루를 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바람결에 이런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요한, 너는 좋으냐? 낙엽 쓰는 소리가.”
<김학선 / 자유기고가>
이는 우리 모두가 늘 겪는 일이 아니랴.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오늘날 총체적으로 우리 인류가 직면한 기후변화와 코로나 팬데믹이 다 자업자득이 아닌가.
이탈리아 출신의 프랑스 샹송 가수 겸 배우 이브 몽땅 Yves Montand (1921-1991)이 부른 '고엽枯葉 Les Feuilles Mortes'이 들려오는 이맘때면 만추가경晩秋佳景 늦가을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나무 잎마다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 Autumn is a second spring when every leaf is a flower."란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1913-1960)의 말에 나도 동감이다.
아, 그래서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Rabindranath Tagore(1861-1941)는 이렇게 읊었으리라.
"(우리) 삶은 여름꽃처럼 죽음은 낙엽 같이 아름다워라. Let life be beautiful like summer flowers and death like autumn leaves."
올해초 2021년 1월 8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칼럼 우리 반추해보자.
[이태상 칼럼] '우리 모든 코스미안 삶의 방정식(方程式)'
지난 2014년 중국계 프랑스인 중 어려서부터 2개 국어 언어를 듣고 자란 아이들과 태어나자마자 중국에서 입양돼 프랑스어만 듣고 자란 아이들에 대한 연구가 있었는데 이 두 그룹을 대상으로 중국어를 들려주었을 때의 뇌 반응을 촬영해본 결과가 동일했다고 한다. 엄마 뱃속에서나 들었을 까마득한 중국어의 기억이 성인(成人)이 되어서도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이 분야 전문가들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이야기나 말을 들을 때 활성화되는 우리 뇌의 가장 앞부분 전두엽(前頭葉, frontal lobe), 그중에서도 전전두엽연합영역(前前頭葉聯合領域, pre-frontal cortex)을 우리 뇌의 ‘CEO’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부위가 우리의 모든 사고, 추리, 계획, 문제해결, 인격, 통찰, 인지 같은 고등 정신 작용을 하는 곳이기 때문이란다.
따라서 이 전전두엽은 우리의 감정과 감성을 관장하는 변연계(邊聯界, 주’변’에 ‘연’결된 ‘계’란 뜻의 뇌간 brain/limbic system)과도 깊이 연결돼 있어 우리가 듣는 스토리가 우리에게 감동이 되고 교훈으로 받아들여질 때, 거기서 기쁨과 학습효과를 발생시키는 신경 전달물질인 도파민 호르몬(domamine hormone)이 나와서 우리는 그 스토리에 감정이입(感情移入, empathize)하게 되고, 미러링(mirroring)이나 뉴럴 커플링(neural coupling)을 통해 우리가 듣는 말들이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고 한다.
이를 서양에서도 유행하는 통속적(通俗的)인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네가 먹는 것이 너다 You are what you eat’라고 하듯이 ‘네가 듣는 것이 너 다 You are what you hear/listen’ 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것이 불교 <화엄경(華嚴經)>의 핵심 사상을 이루는 말로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라는 뜻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아니랴.
이는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믿어 내려온 태교(胎敎, 영어로는 prenatal care/education)와도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것이리라. 임산부의 행동이 태아에게 심리적, 정서적, 신체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근거로 임신 중에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 언행을 삼가며 태아가 자라나기 위한 준비를 보다 잘할 수 있도록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자 하는 대중교육 말이다. 한때 비과학적인 미신(迷信)이라고 치부되었으나 태내 환경이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과학적 연구결과에 의해 그 영향력이 증명되고 있지 않은가.
이와 관련해서 어린애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위의 조부모나 부모, 또는 가까운 친척 중에서 그 누가 그 아이의 태몽(胎夢)을 꿀 뿐만 아니라 태어나는 아이가 그 태몽대로 그 태몽 ‘값’을 하게 된다고 하지 않나. 어디 또 그뿐이랴. 작명(作名) 철학이란 것도 있어 태생후(胎生後)에도 평생토록 이어지는 태교육이 되지 않는가. 이것은 그동안 내가 마음속에 그려온 우리 모든 코스미안의 ‘자화상(自畵像)’이리라.
어렸을 적 나는 성미가 까다롭고 하찮은 일에도 신경을 너무 쓴다고 어른들로부터 꾸지람을 많이 들었다. 사내자식이 깨알처럼 좀스럽다고, 어린애가 ‘좁쌀영감’처럼 누나들한테 잔소리가 심하다고 핀잔을 많이 먹었다. 큰사람이 되려면 마음을 크게 먹고 대범(大汎)해지라고.
조숙(早熟)했던 탓인지 아니면 완벽주의자로 태어나기라도 한 것 같이 속 좁다는 말에 기분이 크게 상한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내 이름값을 해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했다. 내 이름이 한자(漢字)로 클 ‘태(泰)’ 자(字)에다 서로 ‘상(相)’ 자인데, 이 ‘相’ 자는 다 알다시피, 재상(宰相), 수상(首相) 할 때도 쓰이는가 하면 관상(觀相) 수상(手相)을 본다고 할 때도 쓰이는 나무 목(木) 변에 눈 목(目)을 합성한 것이다.
그런데도 큰 사람 큰 인물로 세상을 호령하기는커녕 나는 84여 년을 살도록 한결같이 소인(小人) 중에 소인으로 소학생(小學生) 소시민(小市民) 민초(民草)의 삶을 살아왔을 뿐이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언제나 바다를 꿈꾸면서 바다처럼 넓게 생각하고 바다처럼 깊게 느끼면서 바다의 마음을 닮아보려고, 아니 가져보려고, ‘해심(海心)’이란 자작(自作) 아호(雅號)까지 만들어 시건방지게 자칭해왔다.
이렇게 해서 지은 자작시 하나가 ‘바다’라는 제목으로 내가 어렸을 때 비롯된 다음과 같은 독백(獨白)이다.
바다
영원과 무한과 절대를 상징하는
신(神)의 자비로운 품에 뛰어든
인생이련만 어이 이다지도 고달플까.
애수(哀愁)에 찬 갈매기의 고향은
정녕 출렁이는 저 파도 속에 있으리라.
인간의 마음아 바다가 되어라.
내 마음 바다가 되어라.
태양의 정열과 창공의 희망을 지닌
바다의 마음이 무척 부럽다.
순진무구한 동심과 진정한 모성애 간직한
바다의 품이 마냥 그립다.
비록 한 방울의 물이로되
흘러 흘러 바다로 간다.
The Sea
Thou
Symbolizing
Eternity, infinity and the absolute
Art
God.
How
Agonizing
A spectacle is Life in blindness
Tumbled into Thy callous cart
To be such a dreamy sod!
A dreamland of the gull
Of sorrow and loneliness full
Where would it be?
Beyond the mortal reach would it be?
May humanity be
A sea of compassion!
My heart itself be
A sea of communion!
I envy Thy heart
Containing
Passions of the sun
And
Fantasies of the sky.
I long for Thy bosom
Nursing
Childlike enthusiasm
And
All-embracing mother nature.
Although a drop of water,
It trickles into the sea.
Absurd and wild though it might have been, this poem expressed my instinctive prayer. Undoubtedly, this call of the sea made me seem like a precocious child. But, alas, my desire remained childlike. Preoccupied with self-criticism, I was unable to be as natural or as divine as the sea.
Was this fanciful vision a trace of childhood innocence or a vestige of human divinity? I would never know, though I should know as I had suffered so much for it. The words I had used to address myself were now all charged with disparate meanings.
I could feel, welling up within myself, the scene evoking a long and enduring train of reminiscences. For me, I fancied, to love was to be born into the Cosmos. But alas, much too much to my chagrin, I couldn’t love myself.
Wasn’t I hopelessly misdirected in the early days of my life when I was going to enlarge my life by emptying all the small things I belittled but of which life was composed?
Perhaps, though, I did not fail in perseverance of striving to live up to my (pen) name ‘Hae-Sim,’ ‘해심’ (in Korean), and ‘海心’ (in Chinese characters), meaning the ‘Heart of the Sea.’
In this light, may it be, I could stop loathing myself and start loving myself for being a wanderer, as a wise old Korean saying notes, “to perceive the whole of the universe through a blade of grass.”
Perchance, then, my sufferings were not in vain after all. Unwittingly, I had come to discover my own unique identity I so anxiously longed to bring to light; not to find shame, but to cherish and to nourish; as a Cosmian born Arainbow of Love, like everyone and every-thing else.
From this fountainhead would spring my sense of decency and dignity I so despaired of ever feeling.
From this well-spring would begin a pilgrimage of a little drop, be it a dew-drop or a raindrop, trickling into the sea of cosmos, with a few grains of sand or stars serving as my companions on the journey.
이렇게 내가 나의 어머님 뱃속에서, 아니 어쩌면 태곳적 옛날 바다의 품속에서 받은 태교육을 이 세상에 태어난 다음에도 계속 받고 자란 탓인지 내 나이 열 살 때 쓴 이 주문(呪文)을 나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숨 쉬듯 아직도 외고 있다.
내 마음도 네 마음도
밀물 썰물 파도치듯
우리 가슴 뛰는 대로
돌아갈거나
우리 모든
코스미안의
영원한 고향 우주
코스모스바다로.
Your heart and
My heart alike
As our hearts beat
Like the ebb and flow
Of the waves,
We’re going home
Back to the Sea of Cosmos
We all Cosmians came from.
자, 이제, 또 한 새해를 맞아 우리 모두 각자는 각자대로 자기 세뇌(自己洗腦) 자기최면(自己催眠)의 축자가발전(祝自家發電/展) 7창(唱)을 함께 다 같이 불러보리라.
1. 너 자신이 생각에 너무 골몰해 있거든 생각은 그만하고 한 걸음부터 내디뎌라. When you catch yourself over-thinking things, challenge yourself to take a step forward instead.
2. 네가 선택할 수 있는 두 길이 있거든 어렵고 힘들어 보이는 길을 택하라. 네가 더 빨리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길이 될 터이니. When you have two good options, challenge yourself to go with the one that scared you, because it can help you grow faster.
3. 네가 어떤 새로운 일을 하게 되거든 네 모든 열정과 지극 정성(至極精誠)을 다하도록 하라. 지성감천(至誠感天)이고 지성여불(至誠如佛)이니. When you are going to do something new, challenge yourself to do it with enthusiasm and devotion.
4. 네가 실수를 하더라도 너 자신을 탓하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 실수를 통해 배우도록 하라. When mistakes are made, challenge yourself to learn from them rather than waste time on blaming yourself.
5. 네가 어떤 사태를 지나치게 제어, 통제, 조절, 조정해 다스리고 네 뜻대로 다루려고 하거든, 자연스러운 순리(順理)를 따라 억지 쓰지 말고 그 순간순간을 즐기도록 하라. When you find yourself trying to control too much, challenge yourself to let go and enjoy the moment.
6. 누가 너를 박대(薄待)하거든 너는 정반대로 그를 후대(厚待)하라. When someone treats you poorly, challenge yourself to treat them with kindness and respect.
7.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거든 네가 갖고 있는 자료로 더 맛있는 떡을 더 많이 만들어 남들에게도 나눠 주라. When you catch yourself thinking the grass is greener else-where, challenge yourself to water the grass you’re standing on.
- Lifehack
이상의 일곱 마디를 하나로 줄이자면 우리 각자는 각자 대로 누구든 뭣이든 사랑하는 만큼 사는 것이고, 매사가 자업자득(自業自得. 영어로는 What Goes Around Comes Around)으로 각자의 인생은 각자가 살기 나름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리. Life is what you make it to be; one lives as much as one loves someone or something; that is to say, loving oneself.
이것이 사랑의 무지개 타고 태어난 우리 모든 코스미안 삶의 방정식(方程式)이어라. This must be the equation for us all Cosmians born Arainbow of Love.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