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구 칼럼] 외출하는 하루살이

문경구

 

나는 사상가 또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불 번지듯 퍼져나가게 하려면 배우가 나서서 하는 게 가장 빠르고 쉽다. 천천히 생각하기, 잠깐 멈추기 운동법이란 것이다. 지치지 않고 오래 할 수 있어 걷는 동안에 어제 했던 후회도 잠시 생각해 보고 다시 내일로 걸으면 무시무시한 생각 같은 것은 뒤에 따라올 틈이 없는 그런 운동법이다. 그럼 사람 목숨을 갖고 춘향이 널뛰듯 하지 않을 테니 힘 안 들이고 좋아지는 세상을 만들자는 법이다.

 

그래도 못 알아듣겠다면 함부로 자살을 청하여 생명줄을 끊어내지 말라는 운동이다. 입에 담기도, 그렇다고 내뱉기도 고통스런 말을 감히 하려는 것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누워있는 병실에서 꺼져가는 한 생명을 살려내기 위한 간절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잠시 뒤 차디찬 영안실로 보내진 주검의 환영과 평생을 가는 고통의 길이는 어떻게 잴 수 있단 말인가. 예전 세상에서는 몰랐던, 누군가의 임의로 생을 마감했다는 뉴스가 처음엔 소름의 바늘이 되어 몸 안에 깊숙이 박히곤 했다.

 

그 후 조금 지나니 또 다른 이가 또 어떻다는 이유를 대고 끊어댄다. 그 옛날 박하분값 만큼도 되지 않는 생명값이다. 어릴 적 재미있게 들었던 방물장수가 가져오는 박하분 이야기가 씁쓸하게 내버려졌다. 이젠 박하분이고 뭐고 다 소용이 없다. 손으로 잔디를 한 움큼 뜯어내듯 목숨도 그냥 뜯어내면 되는 세상으로 변해간다.

 

새로운 이천 년 역사 속으로 찾아 들 신비로움만 생각해도 정신이 없는데 그 신비의 하루가 열리려고 하면 곧장 어젯밤을 고하고 떠난 망령들의 뉴스가 냉혹한 냉수 한 대접이 되어 온다. 생을 아무렇게나 마무리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름 깨나 있다는 사람들의 끔찍한 아침이 되기가 일쑤이다. 숙명의 껌딱지 같은 외로움을 감당 못 하겠다는 말 한마디와 우울증이라는 변명만 남기고 떠나버리기 일쑤다.

 

외롭기로 치면 오십보백보가 아닐까. 그만큼의 외로운 눈으로 보면 여기저기 깔린 외로움만큼 흔한 것도 없다. 뛰노는 산징승도 외롭게 보일 테고 삐리리 노랫소리로 하늘을 나는 새들의 속을 들었다면 그 속이 제대로 된 속이 아님을 알 수도 있을 텐데 풀잎마저 외로워하는 떨림을 왜 보지 못하고 왜 그들만 남겨두고 떠나는가. 손에서 내치지 못하고 무섭게 꽉 쥔 외로움의 병을 물리치려면 머물 수 없게 손을 펴야 한다.

 

그 어떤 편작도 고칠 수 없는 병을 집착적으로 껴안으려 하면 도리가 없다. 하기야 한 나라의 주인이라는 화상이 대놓고 세상 못마땅하면 언제든지 가는 것이라고 무슨 약 광고 같은 이미지를 국민에게 전하고 떠났으니 목숨줄도 직위를 막론하는가 보다. 그것도 독한 감기약으로 잠자듯 떠난 것도 아니다. 추악한 흔적으로 몸을 날려 가지 않겠다는 목숨을 끌로 파내듯이 끌고 떠났다.

 

그 화상이 대표였던 재단이 있었다는 소릴 들은 것 같은데 그럼 혹시 동반자살 재단이란 말인가. 어제는 저 의원이 오늘은 또 다른 의원이 선출되어 떠나는 위원회라는 말인가. 생각조차 끔찍하다. 까까머리 학생 때 교복에 이름표를 단다. "나는 몇 학년 누구"이다. 라고 알리는 이름표처럼 이제는 ", 우울해요, 외로워요 나, 살고 싶지 않아요"라는 문구의 푯말을 가슴에 써 붙이고 다니는 것이다. 서로의 가슴에 달린 외로움의 크기를 보면서 나의 외로움은 새 발의 피였음으로 손쉽게 치유를 받게 될 것이다. 비로소 내가 지니고 살아온 외로움은 고작 문고리 하나 크기였음을 알게 되고 서로가 서로를 열어주는 문고리가 될 것이다.

 

우리가 지닌 백의민족이라는 얼처럼 또 다른 민족의 문고리 얼이 있다는 역사를 세우는 것이다. 내가 창립한 문고리 얼이다. 태어나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나야 하는 하루살이에게도 해 뜬 하루, 눅눅한 하루, 모진 바람으로 날아 보지도 못한 하루를 마감하는 운명도 있다.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떠났다는 말을 하루살이가 들었다면 자신들에게는 없는 내일이라는 절망을 준 인간을 얼마나 원망할까. 그래도 하루살이는 외출을 나갈 것이다. 다시 돌아올 수 없어도 외출을 하는 것이다.

 

신조차도 감히 주저하는 목숨을 억지로 끊어 놓는 인간에게 당한 굴욕을 결코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다. 내일 약속하는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부러워도 하루 동안에 숙제를 마치기 위한 외출을 하루살이는 한다. 세상이란 살만하면 살고 괜찮지 못하다 싶으면 언제든지 끊어낼 수 있는 재주를 지닌 인간을 다음 세상에서 만나면 뭐라고 할까. 아마도 하루라는 시간조차도 아깝다고 말할 것 같다.

 

문득 더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아주 간단한 방법이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어떻게 혼자의 몸이신 분이 무슨 수로 자살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하나씩 찾아다니며 구원하실 수 있으시랴. 그래서 당신의 아들을 대신 보내셨고, 그 아들을 언제든지 만나볼 수 있게 곳곳에 교회를 세워 놓았으니 그곳에 찾아가 배운 가르침으로 내가 스스로 나를 개척하며 사는 법을 배우게 하셨다. 그렇다면 세상은 더욱 바쁘게 돌아가고 너무 바빠서 자살이란 생각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방법만이 하루살이한테 책잡히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수억대의 경쟁자를 뚫고 나라는 한 인간이 태어났다. 수억 마리의 정자와 싸워 태어난 내가 단 일 분의 우울함과 외로움과의 싸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택하여 떠난다면 그 다음은 어찌할 것인가. 그다음 길은 천년 억겁의 세월이 흘러야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겠다.

 


[문경구]

화가

수필가

코스미안뉴스 칼럼니스트

문경구 kimurgin@hotmail.com

 

전명희 기자
작성 2021.11.23 11:21 수정 2021.11.23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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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