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누구를 위한 추수감사절인가? (속續) Thanksgiving Day for Whom? (Continued)

이태상

 

2021년 11월 22일자 미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옥세철의 인사이드] 칼럼 '무엇을 감사해야 할까' 필자는 "터키가 다 구워졌다. 윤이 나는 아늑한 갈색의 터키를 중심으로 빨강, 초록 등 색깔이 겹쳐진 성대한 식탁이 차려졌다. 온 가족이 함께 모인 추수감사절 디너. 얼마나 고대해왔던가. 순간 웃고 떠들던 아이들도 조용해졌다. 감사의 기도시간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무엇을 먼저 감사해야 할까. 무엇을…."이라고 이렇게 묻고 있다.

[옥세철의 인사이드] '무엇을 감사해야 할까'

황금빛의 풍요로움도 사라졌다. 너른 호수를 둘러싼 사시나무들. 이제는 나목이 되어 앙상한 가지만 드러내고 있다. 물과 산이 온통 잿빛이다.

아직도 여름의 합창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그런데 가을도 깊어 벌써 입동도 지났다.

‘Thanksgiving Day’- 캘린더의 빨간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또 다시 감사절인가. 매년 맞는 감사절이다. 올해의 경우 그 감회가 새롭다.  

코비드 팬데믹에 박제화 됐던 일상들. 그 지난날들이 유독 길고 상실감으로 느껴져서일까. 아니, 그보다도 아주 당연시 되어오던 것들, 그리운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웃음꽃을 피우는 평범한 일상의 그 소중함을 새삼 되돌아보게 되어서인지 모른다.

추수감사절에서 크리스마스, 연말로 이어지는 이 시즌이면 해마다 들려오던 소리가 있었다. 문화전쟁(culture war)의 포성이다. 크리스마스 트리 같은 특정종교를 상징하는 장식물을 공공장소에 세워서는 안 된다 등의 시비와 함께. 코비드 팬데믹 탓인지 그 소리도 뜸해 졌다.

지구촌 반대로 눈을 돌리면 상황은 여전히 살벌하다. 깊은 신음에, 고통의 절규에, 피에 젖은 비명이 어지러이 들려온다. 공적 공간은 말할 것도 없다. 밀실에서도 신앙의 자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국가권력이 한 개인의 영혼까지 관리하려 든다.

그 과정에서 온갖 반인륜 범죄가 저질러진다. 구금에, 고문에, 강간에, 목이 잘리는 처형에 이르기까지.

“이는 전 세계 기독교인 중 8명의 1명꼴로, 그러니까 3억4,000여만의 기독교인들이 매일같이 당하고 있는 참상이다.” 오픈도어선교회가 세계 기독교 박해 순위인 월드워치리스트(World Watch List) 2021년 보고서를 통해 발표한 내용이다.

특히 혹독한 기독교 탄압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은 과격 이슬라미스트 지배세계와 공산권이다.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리비아, 파키스탄, 예멘. 그리고 북한, 중국 등이 그 나라들이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미군철수와 함께 기독교인을 타깃으로 한 피의 처형은 이제 막 시작됐다는 처참한 보도가 잇달고 있다.

기독교가 그 뿌리인 자유민주주의 가치관을 부족주의 이슬라미스트 세력과 공산 전체주의세력이 완강히 부정하는 양상으로 전 지구적인 문화전쟁이 전개되고 있다고 할까. 

올해에도 최악의 기독교탄압 국가로 뽑힌 나라는 북한이다. “북한체제의 목적은 북한 내 기독교인 멸절로 그 김정은 체제는 국가안보에 위협이 될 뿐 아니라 세계 최악의 인권유린 세력이다.” 내셔널 인터레스트지의 지적이다.

단지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체포된다. 그리고 본인은 물론 2살짜리 아기에서 노부모에 이르기까지 3대가 정치수용소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가혹한 체벌에, 굶주림에 고문이다. 그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인체실험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공개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도 한다.

40만으로 추정되는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수령유일주의 신정체제 도전세력으로 간주돼 특히 가혹한 박해를 받고 있는 것으로 오픈도어선교회는 밝히고 있다.

북한의 기독교인 탄압은 최근 들어 더 치밀하고 포악해 지고 있다. 중국이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셔널 인터레스트에 따르면 베이징당국은 중국내 탈북자 색출작업에 박차를 가하면서 선교사와 접촉한 탈북자들을 따로 구별, 기독교인으로 분류해 강제 신병송환과 함께 그 보고서를 북한 측에 통보해주고 있다. 과거 나치가 ‘다윗의 노란별’을 유대인에게 부착시켜 조직적 박해와 학살을 한 그 수법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고문과, 사형이 기다리고 있는 북한으로 탈북자들을 강제 송환하고 있는 중국, 그 중국 땅에서도 기독교인 박해는 날로 심화되고 있다.

십자가가 강제 철거된 교회가 900개가 넘는다. 성경압수가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고 불도저를 동원해 아예 교회건물 자체를 깔아뭉개는 일도 다반사다. 가정교회는 물론이고 국가운영의 교회를 공안이 습격하는 상황도 자주 목격된다. 이른바 시진핑의 ‘기독교의 중국화’정책에 따라 성경이 중국공산당 버전으로 개조된다.

거기에다가 안면인식 소프트에어에서 DNA 확인, 전화추적, 소셜 크레딧 카드시스템 원용 등 신장성의 위구르인 탄압에 사용했던 AI기술을 기독교인 탄압에도 도입, 촘촘히 색출 망을 조여 오고 있다는 것이 어메리칸 컨서버티브지 보도다.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보이콧 할 수 있다’- 워싱턴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위구르인에 대한 인권탄압에 대한 강력한 경고음이다. 그 가운데 희미한 외침이 들리는 것 같다.

‘위구르 사태도 사태지만 고문당하고, 맞아죽고, 심지어 목이 잘려나가는 우리에게도 관심을 가져달라’- 북한, 중국, 아프가니스탄 등 세계 곳곳에서 탄압받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소리 없는 절규 말이다. ‘제발이지 같은 기독교 교회, 교인들이라도.’

터키가 다 구워졌다. 윤이 나는 아늑한 갈색의 터키를 중심으로 빨강, 초록 등 색깔이 겹쳐진 성대한 식탁이 차려졌다. 온 가족이 함께 모인 추수감사절 디너. 얼마나 고대해왔던가. 순간 웃고 떠들던 아이들도 조용해졌다. 감사의 기도시간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먼저 감사해야 할까. 무엇을…. 

<옥세철 논설위원>

이 '무엇을 감사해야 할까'란 인간 그것도 '기독교 교인'뿐만 아니라 우리 동양의 '피아일체'와 '물아일체' 그리고 우리 단군의 '홍익인간/홍익만물'과 천도교의 '인내천' 곧 '코스미안 사상'에서 보자면 식탁에 오른 제물 터키는 물론 서구 백인 기독교인들에게 땅과 인권 모든 걸 빼앗기고 거의 멸종되다시피한 미대륙과 호주 및 뉴질랜드 원주민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사냥당하듯 노예로 끌려와 혹사당해온 흑인들과 서구 열강 제국주의와 동양의 군국주의 일본과 중화주의 중국에게 착취당해온 세계 각처 식민지 백성, 나아가 이 경이롭고 아름다운 지구별 생태계에 존재하는 만물에게 물어볼 일 아닌가. 

최근 2021년 10월 2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칼럼 글 우리 되새겨보자.

[이태상 칼럼] 온 인류의 '코스미안 영가靈歌 Cosmian Spiritual Saudade for S(e)oul'

2021년 9월 30일자 미주 뉴욕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칼럼 [정숙희의 시선]  <'블루 바유' 푸른 늪의 심연>을 옮겨본다.

“기분이 좋지 않아 마음은 근심스럽고/ 언제나 너무 외로워/ 블루 바유에 애인을 남겨두고 떠나온 이후/ 한푼 두푼 아껴 모으고/ 해질 때까지 일하며/ 블루 바유에서 행복하게 지낼 날만을 고대하고 있지// 언젠간 돌아갈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블루 바유에/ 좋은 사람들이 있고/ 온 세상이 내 것 같은 블루 바유에…”

‘블루 바유’(Blue Bayou)는 로이 올비슨의 노래를 린다 론스타트가 리메이크한 히트송, 애절한 곡조가 우리 귀에도 익숙한 노래다. ‘바유’는 루이지애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심 얕은 호수를 말하는데, 노래에서는 향수병 걸린 마음을 표현한다. 떠나온 고향은 누구에게나 얼마큼씩 아프고 아련한 기억, 그 깊은 곳에 늘 어머니가 있다.

한인 2세 감독 저스틴 전(Justin Chon)이 극본을 쓰고 감독, 제작, 주연한 영화 ‘블루 바유’(Blue Bayou)는 세살 때 미국으로 입양돼 거칠게 살아온 안토니오 르블랑의 이야기다. 백인 양부의 폭력에 시달리다 포스터 홈을 전전하며 성장한 안토니오가 때때로 상처를 달래러 찾아가는 곳이 블루 바유. 푸른 늪 위로 피어오르는 안개와 때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한복 입은 여인이 호수위로 다가왔다 사라지는 어렴풋한 기억 한 조각, 귀에 박힌 엄마의 자장가 소리가 들려오는 곳이다.     

뉴올리언스의 문신시술사 안토니오는 사랑하는 아내 캐시(알리샤 비칸더)와 그녀의 딸 제시, 그리고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 제대로 된 직장을 얻으려 동분서주하지만 젊은 시절 범죄전과 때문에 받아주는 곳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마켓에서 싸움이 벌어져 경찰에 체포된 후 졸지에 강제추방 위기에 처한다. 입양됐을 때 양부모가 시민권 신청을 해주지 않아 합법신분이 없는 탓이다.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입양인의 현실을 통렬하게 그린 ‘블루 바유’에 영화계의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 17일 개봉된 이 영화는 얼마 전 칸영화제에서도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됐을 만큼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다. 극본이 탄탄하고 연기가 모두 뛰어나 (알리샤 비칸더는 2015년 영화 ‘대니쉬 걸’로 오스카 여우조연상 수상) 몰입감이 높은 한편, 끝까지 보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내용이 암울하다. 하지만 여운이 길게 남는 파워풀한 수작이라 해야겠다.

1945년부터 2018년까지 미국 가정에 입양된 아이들은 무려 50만명에 달한다. 방문비자로 들어온 이 아이들은 18세 이전에 미국에서 법적 신분을 확보해야하는데 많은 경우 양부모의 무관심이나 이혼 등으로 귀화절차를 마치지 않은 채 시기를 놓쳤다. 나중에 학생보조금을 신청하면서, 또는 사법당국에 체포됐을 때 불법체류 신분을 알게 된 입양인은 현재 4만여 명, 이 중 한국계가 절반에 달하는 1만9,429명이나 된다.(한국 보건복지부 자료) 마치 선천적 복수국적법에 걸린 2세들이나, 어릴 때 부모 따라 미국에 와서 불체신분이 된 드리머들처럼 자신도 알지 못했던 신분문제가 발목을 잡는 것이다.

이들은 사소한 경범죄만 지어도 태어난 나라로 추방될 위기에 놓인다. 이제껏 미국인으로 살아왔는데 하루아침에 이방인이 돼버리는 것이다. 과거를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고 미래 또한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 연고도 없고 말도 안 통하는 생소한 나라로 추방된 사람 중에는 적응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다. 입양인의 추방을 ‘사형선고’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처럼 비인도적인 사법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입양인에게 시민권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면서 미 의회는 2000년 ‘아동시민권법’(Child Citizenship Act)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 법은 제정일 기준 만 18세 미만의 입양아들에게만 적용되어 1983년 이전 출생자 수만명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수정법안이 수차례 제출됐으나 한 번도 통과되지 못했다. 그리고 지난 4월 애덤 스미스 의원(민주)과 로이 블런트 의원(공화)이 예외조항을 없애고 이미 추방된 사람까지 귀화할 수 있도록 하는 ‘입양인 시민권법’(Adoptee Citizenship Act)을 공동발의했다. 이번에는 많은 입양인 권익운동 단체가 로비를 벌이고 있어 통과 전망이 밝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저스틴 전은 미국 독립영화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배우 겸 감독이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 배우로 활동하며 얼굴을 알린 그는 최근 한인 이민자들을 주인공으로 미국사회의 이면을 들여다본 작품을 잇달아 내왔다. 4.29 LA폭동을 그린 ‘국’(Gook, 2017)은 선댄스 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했고, 코리아타운 노래방에서 도우미로 일하며 병든 아버지를 부양하는 여성과 남동생을 다룬 ‘미스 퍼플’(2018)은 달라스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미주한인들의 삶을 스크린에 소개했다는 점에선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에 앞선다.

‘블루 바유’에 대해 전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가까운 친구 중에도 입양아가 많다. 미국에서 평생을 살고도 시민권을 얻지 못해 강제 추방되는 입양인의 현실이 너무 마음 아파 4년 전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면서 “어떻게든 미국 입양인들의 삶을 알려서 관련 정책과 법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잘 알지 못하는 미국사회의 제도적 허점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을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입양아는 한 가정의 가족이 되어 미국에 오는 것이다. 입양절차가 마무리될 때 합법적 신분도 주어져야 마땅하다. 

<정숙희 논설위원>

흑인영가黑人靈歌(negro spirituals)라 하면 유럽 백인들에게 사냥당하는 동물같이 강제로 납치를 당해 미국으로 팔려온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의 구슬픈 노래를 일컫는다.

우리말로 '사우다지'라고 발음하는 포르투갈 단어 'Saudade'가 있다. 구글로 찾아 (Google search) 보면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사우다지(Saudade)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우리가 느끼는, 비어 있는 공허함이자 그리움이다. 우리 안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을, 마음의 화염이다."

지난 2018년 1월 30일자 한국일보 [기억할 오늘] 기사 '사우다지(1.30)'를 최윤필 기자는 이렇게 소개, 설명하고 있다.

"1월 30일은 브라질의 공식 기념일 '사우다지의 날', 진한 그리움의 날이다. 

브라질 포르투갈어 ‘사우다지(데) Saudade’는 ‘진한 그리움’ 쯤으로 옮길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저 설명은 온전하지도 않거니와 모국어 사용자라면 경박한 번역이라고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용례들이 있지만 그들로도 포괄할 수 없는 뉘앙스가 있어, 저 단어의 의미를 전달하려는 아주 장황한, 한 말 또 하고 또 한다 싶은 설명 글들이 허다하다.

어설프게나마 옮기자면 사우다지는, 사랑했던 무엇 혹은 누군가의 부재에 대한 깊고 침울한 감정, 그리움이다. 그리움의 대상을 결코 되찾지 못할 것이라는 억눌린 자각 - 명백한 자각이 아니다 -이 그 그리움의 바닥에 있다. 사우다지는, 근황을 알지 못하고 또 알 수도 없는 이별한 연인이나 가족을 향한 감정이기도 하다. 실종됐거나 이사를 갔거나 사별한 누군가일 수도 있다.

떠난 이가 남긴 사랑도 사우다지일 수 있다. 그 때의 사우다지는 한 순간의 느낌, 경험, 장소, 사건 등을 통해 매개되면서 문득 되살아난 흥분과 기쁨, 심지어 행복의 감정일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이 착란으로 나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공허함이나 상실감, 부재의 깊은 아픔을 감당해야 한다. 되찾음의 행복과 착란으로의 비약이 만나는 희미한 사이의 공간 안에서 어슴푸레 배어 나오는 감정, 그것도 사우다지다.

저 단어의 유래를 두고도 13세기 포르투갈의 한 시인이 처음 썼다는 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썼다는 설, 대항해 시대에 실종되거나 전투 중 전사하거나 낯선 개척지에 정착해 되돌아오지 않은 군인ㆍ항해사들을 향한 남겨진 이들의 마음을 담은 말이라는 설 등이 있다. 저 다양한 마음들이 긴 세월, 진주알처럼 겹겹이 맺혀 단단해졌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저 단어를 설명하는 자료들 중에는 장황한 설명 끝에, 다른 문화권 언어로는 온전히 옮기지 못한다고 실토하곤, 흑인 ‘블루스’ 같은 음악으로 우회해버리곤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음악 파두(Fado)를 이야기한다. 라틴어 파툼(fatum, 숙명)에서 파생됐다는 구슬픈 가락의 민속음악. 거기서 감지되는 강렬한 향수와 한으로 사우다지의 맛이나마 보라는 것이다.

포르투갈의 오랜 식민지였던 브라질의 오늘 1월 30일이, 사우다지의 날, 진한 그리움의 날이다."

<최윤필 기자>

자, 이제, 지지난해 2019년 가을 영국과 미국에서 영문으로 동시 출간된 우생의 졸저 '코스미안 Cosmian'의 마지막 Chapter XII: Saudade for S(e)oul 을 관심있는 독자를 위해 옮겨보리라.

Chapter XII: Saudade for S(e)oul

​My nostalgic time travel was interrupted by the announcement that the airplane will be landing at the Incheon Airport of Seoul after 15-hour flight.  Suddenly, Julio Iglesias’ A song to Galicia (1972 when I left Seoul) filled my heart.

​Now that all my 11 siblings are gone, I’m the only one left treading this father/motherland of ours. Now it’s my favorite season autumn here in Korea wherever you go, you are greeted by cosmos flowers all along the country roads.

I began to recite this poem I composed in my adolescence:

​Autumn leaves are falling

​I’ve been traveling far away from home.
​Autumn leaves tinted in yellow and red
​Are falling in my pining heart bruised black and blue.

​Prince and pauper,
​Princess and harlot
​Father and mother
​Brothers and sisters
​Friends and neighbors
​All are falling one by one
​From the tree branches of life.
​Soon it’ll be my turn to fall.
​Before then I’ve got to go home
​To fall fast asleep like a baby
​Deep in peace in the bosom of Mother Earth.

​As I realize it was only a dream
​When I wake up in the morning,
​I’ll be realizing life too was but a dream
When I wake up from life, dreaming.

​If so, while breathing and dreaming
​Shall I sing like a bird to raise a wind
​To dance with trees and grasses of
​The mountains and streams of the valleys?
​If so, while breathing and dreaming
​Shall I croak like a frog for rain
​To cleanse the earth of all the dirty and ugly things
​With the teardrops of the heaven?

​If so, while breathing and dreaming
​Shall I stretch out stalks like a snail
​To measure up inch by inch the height of
​The sky and the size of the earth?

​Or shall I listen to the song of
​The waves like a conch shell?

​Nah, like a bee, I’d rather call on beautiful flowers
​And dream sweet dream, collecting honey of love.

​I came here on earth uninvited and lived as my heart beat, always drunk on love. 

Every breath I breathed was a miracle, believing that one human moment is much more worthwhile than the divine eternity meaningless to mortals. 

Life is not so serious, and yet full of mystery and wonder. 

I was so happy with a whiff of wind, a ray of sunshine, a child’s laughter, and everything of the world as anything was better than nothing.

​I came to meet the ladies but I don’t know where they are. 

If you ask me if they exist, I cannot say they do. 

If you ask me if they don’t exist, I cannot say they don’t.

They are here and they are not here. They are the whole as one. 

You know that silence is the sound of time passing. Don’t you? They may be passing in silence, in and out of time. 

So please don’t ask me about the ladies. 

They are Cosmians Arainbow. For all of you, living here and now, are very Cosmians born Arainbow of Love.

​Thus as a Cosmian myself, my cosmic journey is open-ended.
 
* * * * *
 
An Afternote

Life is fulfilled every moment when it is lived in love. 

Life is totally wasted when it's written about without living it. 

This is not my case, I pray.

이어서 지난 2021년 7월 2일자 코스미안뉴스에 띄운 우생의 '공개 서신書信' 도 못 보신 독자를 위해 옮겨보리라.

[이태상 칼럼] 김원웅 광복회장님께 드리는 제2신

안녕하십니까.

지난 2020년 8월 18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제1신에 이어 오늘 2021년 7월 1일자 중앙일보 ‘소련군 해방군, 미군은 점령군’ 김원웅(광복회장) 고교생 영상 논란 기사를 보고 다시 몇 자 적습니다.
 
인류 역사 유사 이래 인간세계에서도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되어 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던가요.
 
1982년 미국에서 처음 개봉한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의 속편 격으로 2017년 개봉한 ‘블레이드 러너 2049 Blade Runner 2049’ 그 배경은 제목 그대로 2049년, 여기에도 이미 ‘지나간 미래’가 등장합니다. 인간의 정체성과 기억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문제를 던져주는 영화이지요.
 
지나간 미래이든 아직 오지 않은 과거이든 우리가 어떻게 보고 바라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게 아닐까요. 비근한 예로 함석헌평화연구소 황보윤식은 2020년 6월 25일 발표한 그의 글 ‘6.25 남북전쟁과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6·25전쟁이라는 말은 정치권력자들이 저들의 구린내 나는 음모 전쟁을 숨기는 용어다. 6.25 한국전쟁 또는 6·25전쟁'이란 말은 6·25남북국제이념전쟁 또는 6·25남북이념폭력전쟁이라는 말로써야 맞다. 6·25남북이념전쟁은 미국이 일본의 자본주의 경제의 부흥을 위해 판 함정에 우리 모두가 함정의 그물에 걸려 서로 희생을 당한 폭력전쟁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이 파놓은 함정과 음모에 북이 이에 말려들어, 공산주의이념세력(북-중공-소련)과 자본주의이념세력(남-일본-미국)이 우리땅에서 동서이념을 가지고 치고받은 폭력전쟁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남북한이 아직도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념이라는 농간에 놀아나 정신 나가고 혼 빠진 어릿광대 짓 ‘미친 춤 광무狂舞’를 추어 오고 있지 않습니까. 

흥미롭게도 없을 무無 춤출 무舞자는 장작더미를 잔뜩 쌓아 올린 것을 그 밑에다가 불을 질러서 태워버린다는 글자로 결국 공을 들여서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재로 변하여 아무것도 찾아낼수가 없다는 뜻으로 변한 것이라고 하네요.
 
북한의 ‘주체사상’이 실효성이 전혀 없는 허장성세(虛張聲勢)의 ‘구두선(口頭禪)’이라 해도 그 이름 아니 그 기백氣魄과 기상氣像만큼은 높이 평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풍자 해학적으로 표현해서 북극의 백색 (러시아) 곰이든 남극의 백색 (미국) 독수리든 동양의 황색 (중국) 멧돼지든 섬나라 (일본) 원숭이든 그 어찌 감히 백두산 (한국) 호랑이를 시험쥐 새끼 모르모트marmot나 기니-피그guinea pig 취급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든 때는 바야흐로 온 인류가 그동안의 모든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물아일체와 피아일체, 홍익인간/홍익만물 그리고 인내천의 우리 모두의 진정한 주체사상으로 더 이상 미루고 지체할 수 없이 공멸(共滅)이 아닌 공생(共生)을 도모할 때입니다.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으로서의 우리 모두의 진정한 주체성과 자의식을 절실 절박하게 깨달아 개명천지 코스미안 시대를 한반도에서부터 열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난해 띄운 우생의 제1신을 보실 기회가 없었을런지 몰라 아래와 같이 옮겨 드리오니 일독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2021년 7월 1일 미국 뉴저지에서
 
이태상 드림
 
김원웅 광복회장님께 드리는 제1신
 
안녕하십니까.
 
국민 통합의 계기가 돼야 했을 75주년 광복절 경축식 기념사에서 ‘친일 인사 국립현충원 파묘’와 ‘친일청산’을 강조하시면서 이승만 대통령을 “이승만(전 대통령의 직함도 생략한 채)이 친일파와 결탁했고 민족반역자(안익태 선생)가 작곡한 노래(애국가)를 국가로 정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 한 나라뿐”이라고 하셨다는 보도에 경악(驚愕)을 금치 못해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으로 이렇게 몇 자 적습니다.
 
‘인생은 짧다, 열심히 놀라.’
 
이 같은 광고 간판 문안이 몇 년 전 눈에 띄었습니다.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지나가는데 한국에서 만들어진 한국산인데도 영국 국기 그림을 붙인 영국 상표 리복(REEBOK) 운동화를 선전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산이라면 한국 상표를 달아야지 왜 굳이 외국 상표를 달아야만 할까. 혼자 잠시 생각했었지요.
 
그건 그렇고, 이 광고문구 그대로 놀기도, 살기도 바쁜 인생이고 세상인데, 우리 이제 제발 잠꼬대 같은 헛소리를 그만 좀 할 수 없을까 해서입니다. 

30여 년 전 언젠가 서울대 남궁호경(南宮鎬卿) 법학 교수는 서울대학보 ‘대학신문’에 기고한 글을 통해 아래와 같이 주장했습니다.
 
“대학가의 인공기(人共旗) 게양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보기 어렵다”고 “학생들의 행위는 북한의 실체를 인정, 남과 북이 대등하게 한 민족국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을 단순히 인공기라는 도형의 형태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이는 헌법상 명시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는 행위”로서 “평양냉면을 만들어 먹었다거나 북한에서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을 따랐다고 해서 문제 삼을 수 없듯이 국가보안법상 찬양 동조의 대상은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하는 활동에만 해당하며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한 처벌할 수 없다.” 따라서 “남북합의서 교환 이후 북한의 국호가 공식적으로 불리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인공기를 내걸어 북한의 실체를 인정했다는 점을 놓고 실정법 위반으로 보는 것은 무리다.”
 
눈 딱 감고 '보지' 아니하면, 안 보면 북한의 존재가 당장 없어지기라도 한다는 뜻으로 보지 ‘보’ 자(字)에다 안 보지 ‘안’ 자를 갖다 붙여 소위 ‘보안법’이란 것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었지요. 

1960년대 젊은 날 제가 한때 서울에서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스 법원 출입 기자로 뛸 때 당시 '피카소 크레용' 제조업자가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유인즉 스페인 화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가 좌경(左傾)이기 때문이란 말에 나는 담당 검사에게 이렇게 항의해 본 일이 있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같은 한반도에서 남한에 사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북한에 사는 우리 동포들이 마시는 공기를 같이 마시니까 또한 반공법 위반으로 걸려야 되는 게 아니냐? 그럴 경우 ‘반공법’의 ‘공(共)’ 자(字)를 공중에 자유롭게 떠도는 공기 ‘공(空)’ 자로 바꿔 써야 하지 않겠는가?!”
 
하기는 수많은 우리나라 애국자들을 때려잡던 일제 앞잡이 ‘사냥개들’의 버릇을 그대로 이어받아 부정부패한 독재정권의 시녀(侍女)나 졸개 노릇을 해온 것이 한국의 일부 공안 판-검사와 경찰 아니었습니까.
 
생각해보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로 역대 집권자들이 국민 위에 깔고 앉아 국민의 숨통을 조여 온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이란 방석이 저 한때 한국사회의 물의를 빚었던 사교(邪敎) 용화교(龍華敎) 교주 서백일(본명 한춘 1893-1966)이 수 많은 여신도들을 농락 겁탈하고 그들로부터 뽑은 음모(陰毛)로 만들어 즐겨 깔고 앉았었다는 ‘음모(陰毛) 방석’과 다를 바 없는 또 다른 ‘음모(陰謀) 방석’이 아니었습니까. 북한의 ‘김일성/김정일/김정은교(敎)’ 교주들은 말할 것도 없이 말입니다.
 
1993년 개봉된 작가 이청준의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를 저도 한국 방문 중 서울의 단성사에서 보았습니다. 때마침 종로 3가에서 데모대와 대치 중인 경찰이 쏘는 최루탄 가스로 눈물 콧물 흘려가면서. 아름다운 우리나라 산천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너무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예부터 우리는 자자손손 대대로 가슴 속에 깊은 한(恨)을 품고 살아온 민족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개인이고 민족이고 간에 한을 품어야 판소리 같은 소리가 나올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 니다. 우리말 사전에 보면 한할 한, 뉘우칠 한(恨) 자(字)는 한사(恨事), 유한(遺恨), 원한(怨恨), 다정유한(多情有恨)이라고, 원한을 품거나 유감으로 생각한다든가 회한(悔恨)이라 할 때처럼 뉘우치고 애석하게 여겨 후회한다는 뜻인데, 생각해보면 과거지향적으로 매우 부정적이고 건강하지 못한 감정인 것 같습니다.
 
미래지향적으로 진취적인 꿈을 꾸는 '희망'이란 단어와 대비해 볼 때, 마치 흐르지 못하고 고여 썩는 물밑에 가라앉은 앙금 찌꺼기 같은 것이 아닐런지요. 

그러나 ‘서편제’가 주는 아니 이 영화에서 내가 받은 한 가지 교훈은 한 사람의 소리꾼으로서도 그야말로 소리꾼 ‘명창(名唱)'이 되려면 한(恨)을 그대로 품고 있어서는 안 되고 그 한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013년 91세로 타계한 개리 데이비스(Garry Davis 1921-2013)는 1948년 5월 25일 파리 주재 미국대사관에 나타나 그의 미국시민권을 포기, 반납했습니다. 그 후로 ‘세계시민’으로 자신이 만든 ‘세계여권’ 제1호를 소지하고 65년 동안 ‘한 세계 (One World)’ 운동을 벌여 왔습니다. 수많은 나라를 여행하면서 입국을 거절당하기도 하고, 체포되어 감금되거나 추방당하기도 하면서. 그의 주장은 단순 명료했습니다. ‘국가’라는 나라들이 없다면 전쟁도 없을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나라 없는 사람이 아니고 다만 국적 없는 사람”이라며 1953년 ‘세계시민들의 세계정부(World Government of World Citizens)’를 창설, 설립해 세계여권, 세계시민증, 출생신고서, 결혼증명서, 우표와 화폐까지 발행해 왔습니다. 에스페란토(Esperanto)를 비롯해 7개 언어로 된 이 세계여권(World Passport)은 현재로선 부르키나 파소(Burkina Faso), 에콰도르 (Ecuador), 모리타니아(Mauritania), 탄자니아 (Tanzania), 토고(Togo) 그리고 잠비아(Zambia), 이렇게 6개국에서 공식적으로 이 여권을 인정하고 기타 185개국에서 경우에 때라 개별적으로(case by case) 존중해 주고 있답니다.
 
이 ‘한 세계(One World)’ 운동 지지자들 가운데는 알버트 아이슈타인(Albert Einstein1879-1955),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장-폴 사르트르(Jean-Paul 1905-1980) 등 지식층이 많지만 많은 안락의자 이론가(armchair theorist)와 달리 그는 평생토록 자신의 믿음과 생각을 몸소 실천 실행에 옮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90세에도 안주하지 않고 2012년 당시 런던 주재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동면(冬眠 holed up)’하고 있는 ‘위키릭스 (WikiLeaks)’의 창설자 줄리안 어산지(Julian Assange)에게 그의 명의로 발급된 세계여권을 전달했고 2013년 그가 임종하기 몇 주 전엔 러시아 정부 당국을 통해 미국의 스파이 정탐법 (espionage laws)을 위반한 혐의로 도피 중인 전(前) 미국 국가 안전요원(the fugitive former national security contractor) 에드워드 제이 스노든(Edward J. Snowden)에게 그의 세계여권을 발송했다고 합니다.
 
그는 노년에도 세계 각국 대학을 순방하면서 ‘한 세계(One World)’ 운동에 대해 강연하고 집필활동을 계속했습니다. 

다음은 그가 1990년 일본의 영자신문 ‘일간 요미우리(The Daily Yomiuri)’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국가라는 나라(The nation-state)는 무질서와 혼돈을 영속화하는 정치적인 허구이고 전쟁의 싹을 틔우는 터(The nation-state is a political fiction which perpetuates anarchy and is the breeding ground of war)”이며 “국가에 대한 충성은 합의 집단 자살 행위이다. (Allegiance to a nation is a collective suicide pact.)”
 
개리 데이브스 씨의 하나로 통일된 지구촌에 대한 열망은 아주 어린 나이에 싹텄다고 합니다. 유복한 가정에 태어나 자라면서 누리는 여러 가지 혜택과 특혜를 불편하게 느꼈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 타고 있던 해군 구축함이 이탈리아 연안에서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고 침몰해 그의 형이 전사하고 그 자신이 B-17 폭격기 조종사로 겪은 그의 전시 경험에서 촉발되었다고 합니다. 

1961년 출간된 그의 회고록 “세계가 내 나라다 (The World Is My Country) [후에 책 제목이 ‘내 나라는 세계다(My Country Is the World)’로 수정되었음]에서 그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독일 브란덴부르크 상공으로 첫 출격 이후 나는 양심의 격통을 느꼈다. (I felt pangs of conscience.) 내가 얼마나 많은 폭탄을 투하했나? 얼마나 많은 남자, 여자와 어린이들을 내가 살상 했나?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나 자신에게 계속 반문했다. (How many bombs had I dropped? How many men, women and children had I murdered? Wasn’t there another way? I kept asking myself.)”
 
그가 찾은 또 다른 길이란 (the another way) 국가 간의 국경을 없앰으로써 분쟁과 충돌을 없애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길이란 바로 우리 모두 우주 나그네 우주인 코스미안의 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글’이란 그리움이 준말, 절절한 숨 기(氣)가 절로 응축된 것, 그렇게 ‘그리는 그림이나 글’이란 ‘인생’이란 화폭에 ‘삶’이란 붓으로 ‘사랑’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쓰는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사랑,’ ‘죽음,’ ‘가슴,’ ‘눈물,’ 그리고 ‘안녕’이란 다섯 단어만 알면 오페라를 이해할 수 있다고 그 누군가가 일찍이 말했듯이, 진정코 ‘노래’란 목소리, 손짓, 발짓으로 부르는 것이라기보다 넋소리 몸짓 마음짓으로 ‘가슴 뛰는 대로’ 부르는 것으로, 이것은 미치도록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쓰는 ‘글,’ ‘사랑의 숨’ 찬 ‘숨소리,’ ‘삶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극히 외람되나마 아래와 같은 우생의 즉흥적인 졸시(拙詩)를 김원웅 회장님과 나누고 싶습니다.
 
너는 너의 마음대로 도는 너의 ‘마돈너’ 춤을
나는 나의 마음대로 도는 나의 ‘마돈나’ 춤을
우리 같이 추어 볼거나.
암흑과 혼돈, 전쟁과 분단
분열과 파탄, 이별과 이혼
심신부조화, 영육불일치의
카오스적 시대 졸업하고서
밝고 아름다운 통일과 화합
평화와 사랑의 천지창조로
새로운 코스미안의 시대를
우리 각자 가슴 속에 열어
코스모스 만발한 지구촌
우리 모두 사랑하는 가슴
‘사슴’ 같이 ‘노루’ 같이
춤추며 뛰어 놀아볼거나
‘모두 다 나’의 ‘모다나’ 춤
‘모두 다 너’의 ‘모다너’ 춤
우리 다 함께 추어 볼거나
하늘 하늘 하늘이 돌도록
땅 땅 땅이 꺼져버리도록
 
삼국유사에 나오는 ‘만파식적(萬波息笛)’ 이야기가 있지요. 신라의 신문왕(神文王)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文武王)의 아들로 신문왕 때 동해에 있는 거북 형상의 작은 산 하나가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었다는 절 감은사를 향해 왔다 갔다 움직였다고 합니다. 이에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으로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를 바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산에는 대나무가 하나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가 되는 기인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왕이 용에게 물으니 용의 대답이 해룡(海龍)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 장군이 마음을 합쳐 왕께 보낸 보물이 바로 낮에는 벌어지고 밤에는 합쳐지는 대나무였다고 말을 했답니다. 

이 대나무로 만든 피리가 만파식적으로 하늘과 바다와 땅이 만나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 선물을 준 것이랍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가 올 때는 맑아지고 바람은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용이 한 말 중에서 흥미로운 것은 왕이 소리로써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 한 점입니다. 그것도 나누는 소리가 아니라 합해진 소리로 세상을 화평하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만파식적’ 이야기는 2020년 8월 17일자 미주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페이지에 실린 조현용 경희대학교 교수 <아름다운 우리말> 칼럼 글 ‘피리를 불어라’ 그 일부를 원용(援用)한 것임]
 
‘남태평양 이야기,’ ‘하와이,’ ‘이베리아,’ ‘알라스카, ‘커리비언’ 등 많은 작품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독자를 갖고 있는 미국의 인기 작가 제임스 미치너(James A. Michener1907-1997)는 1992년 출간된 그의 회고록에 ‘세계가 내 (고향) 집이다(The World Is My Home: A Memoir)’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영국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미국 국부의 한 사람인 벤자민 프랭클린( Benjamin Franklin 1706-1790)의 권유로 미국으로 건너와 1776년 ‘상식(Common Sense)’이란 팜플렛을 비롯 일련의 책자를 집필 발행, 영국에 저항해서 미국의 독립을 쟁취할 것을 선동, 격려했으며 프랑스 혁명에도 관여했고, 노예제도에 반대하고 여성의 해방을 주창한 토마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이 기독교와 성서를 비판 공격한 그의 저서 ‘이성(理性)의 시대(The Age of Reason, 1794)’에서 그는 이렇게 천명(闡明)합니다.
 
“세계가 내 나라이고, 온 인류가 내 형제이며, 선행을 하는 것이 내 종교다. (The World is my country, all mankind are my brethren, and to do good is my religion.)”
 
“나는 한 하나님 이상을 믿지 않고, 이 세상 삶 너머 (다음 생)의 행복을 희망한다. 나는 모든 인간의 평등을 믿고, 우리의 종교적인 의무는 (사회) 정의를 구현하고,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모든 피조물의 행복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I believe in one God, and no more; and I hope for happiness beyond this life. I believe in the equality of humans; and I believe that religious duties consist in doing justice, loving mercy, and endeavoring to make our fellow creatures happy.”
 
몇 년 전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14세의 소녀 마힌 루츠 양이 미국 북 캐롤라이나주(州) 그린즈버러에 있는 페이지고등학교에 입학하려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입학 등록 서류 양식의 인종란을 공백으로 놔두었다고 학교 측에서 등록을 시켜주지 않고 인종란을 반드시 기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미 교육성에서 모든 공립학교로부터 학생들의 인종에 관한 자료를 요구하기 때문이라면서.
 
그러나 마힌은 인종란에 기재할 것을 거부했습니다. 마힌과 양친은 다 미국 태생으로 바하이교를 신봉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같은 우리 지구촌 한 인간 가족의 일원일 뿐이라고 우리는 굳게 믿기 때문에 인종이라면 오직 하나 곧 인류 밖에 없다”고 이들은 주장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학교측에서는 잠정적으로 마힌의 입학등록을 받아 놓고 워싱턴으로부터 혼혈아의 인종 구별에 대한 정부 당국의 새 규정과 지침이 시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신문 보도였습니다. 

이야말로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를 실천궁행하는 것으로 이러한 사람들이 바하이 신도들, 곧 코스미안들일 것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은 한 분 뿐이고, 세상을 어떤 특정 선민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모든 사람을 위해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또 이들은 우리가 인종과 국적과 남녀성별 그리고 종교를 초월해서 서로 눈에 보이는 이웃을 섬기는 것이 곧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라 믿는답니다. 

이 바하이교는 문(門)이라는 뜻의 ‘밥(Bab)’이라 불린 창시자가 1844년부터 전파해 하느님의 영광이란 뜻의 ‘바하울라(Bahaulah 1817-1892)’라고 불린 ‘밥’의 후계자 후세인 알라의 가르침을 따르나 어떤 고정된 의식도 성직자도 따로 없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와 같은 ‘바하이’교(敎)를 우리말로 바다 ‘바’ 자(字)에다 또 바다 (하이가 준) 해(海) 자(字) ‘바다’ 종교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고향은 바다 아니 우주 코스모스바다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 그래서인지, 우리는 언제나 바다를 그리는 향수에 젖어 저 아득히 멀고 먼 태곳적 파도 소리를 듣고 있나 봅니다. 

끝으로 제가 나이 열 살 때 지은 이 동시를 또한 김원웅 회장님과 나누고 싶어 옮겨 봅니다.
 
바다
 
영원과 무한과 절대를 상징하는
신(神)의 자비로운 품에
뛰어든 인생이련만
어이 이다지도 고달플까.

애수에 찬 갈매기의 꿈은
정녕 출렁이는 파도 속에 있으리라.

인간의 마음아 바다가 되어라.
내 마음 바다가 되어라.

태양의 정열과 창공의 희망을 지닌
바다의 마음이 무척 그립다.

순진무구한 동심과 
진정한 모성애 간직한
바다의 품이 마냥 그립다.

비록 한 방울의 물이로되
흘러흘러 바다로 간다.
 
The Sea
 
Thou,
Symbolizing
Eternity, infinity, and the absolute
Art God.

How agonizing a spectacle
Is life in blindness
Tumbled into Thy callous cart
To be such a dreamy sod!

A dreamland of the gull
Of sorrow and loneliness full
Where would it be?
Beyond mortal reach would it be?

May humanity be
A sea of compassion!
My heart itself be
A sea of communion!

I envy Thy heart
Containing passions of the sun
And fantasies of the sky.

I long for Thy bosom
Nursing childlike enthusiasm
And all-embracing mother nature.

Although a drop of water,
It trickles into the sea.

아, 이것이 한국인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코스미안 영가靈歌 Cosmian Spiritual Saudade for S(e)oul'이어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


전명희 기자
작성 2021.11.26 10:08 수정 2021.11.26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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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