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기자: 전명희 [기자에게 문의하기] /
2021년 11월 18일자 미주 뉴욕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살며 생각하며] 칼럼 '가슴은 클수록 좋다' 필자 고성순 수필가는 "세상의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되 생각이 가슴으로 내려 마음을 건드리는 시인의 마음처럼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렇게 적고 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가지를 흔든다. 우수수 잎사귀들이 비처럼 내린다. 가슴이 철렁한다. 가을은 좀처럼 나에게 틈을 주지 않는다. 나무들은 언제나 이때 즈음이면 이별을 고한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지만, 나약한 우리 인간들은 정서를 이야기한다. 푸른 하늘 아래를 서성거리며 시를 읊기도 하고 종종 어둑해지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눈시울도 적신다. 마음이 생겨서 그런 것이다. 쓸쓸함, 그리움, 슬픔, 그런 마음들이 가슴으로 들어온다.
며칠 전 꿈을 꾸었다. 기억나는 것이 신기하다. 내가 사람들을 몇 모아 놓고 시에 대해 이야기 했다. 시란 생각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 마음을 건드려야 글이 나온다고 했다. 시도 못 쓰는 내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나? 참 알 수 없는 것이 내 마음이다.
살면서 세상일에 집중하다 보면 마음이 작아진다. 마음을 담아두는 가슴도 쭈그러진다. 나는 종종 용서란 말을 한다.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는 어려운 숙제이다. 미워 죽겠는데 용서하라니 미칠 노릇이다. 주기도문을 바치다가 문득 주위의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면 결코 신에게서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진리를 깨달았다. 모순투성이인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은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것을 꺼린다. 인간답게 사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생각과 말과 행위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생각과 말은 그럴듯해도 올곧은 마음이 없으면 아무 쓸 데가 없다.
선한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마음에 온통 탐욕만 담아두면 가슴은 좁아진다. 나의 가슴은 신성한 곳이다. 그런 좋은 곳에 온통 욕심과 분노와 이기심과 자만으로 가득한 마음을 담아둘 수는 없다. 노래 부르다가도 눈물 흘리고 바람 부는 대로 흩어져버리는 낙엽을 보고도 울컥하는 마음이 차라리 났다. 세상 모든 것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미국 인디언(American Indian)의 마음은 참 아름답다. 그런 마음을 지닐 수 있는 것도 축복이다. 기독교 신앙을 앞세워 개척정신을 부르짖으며 인디언들을 무차별 학살한 초기 이민자들의 마음은 고귀하였을까? 교리를 가르치며 신을 믿으라 한 그들에게 한 족장의 추장은 말한다. “우리 땅을 빼앗고 우리의 형제자매를 죽이고, 우리를 핍박하는 것을 허락한 신을 믿으라니요. 저희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우리의 형제이고 고귀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치는 저의 신을 믿겠습니다.”
사랑도 마음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분노하고 강요하며 상대방을 바꾸려 하는 것이 당연시된다. 별을 헤아리며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 어린아이들을 아끼는 하는 마음. 남을 배려하는 마음. 그런 마음들을 가슴에 담아 두었으면 좋겠다. 나의 좁은 가슴을 넓히려면 스스로 변해야 한다. 필요 없는 걱정. 끊임없는 욕심들은 다 꺼내 버리고 강한 의지로 나의 나약함과 게으름을 이겨내야겠다. 노력 없이 어찌 스스로 바꿀 수 있겠는가? 새해가 오기 전 미리 마음을 다져야 한다. 사람이면 누구나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했던가? 그 행복을 위해서 가슴을 크게 만드는 것은 나의 앞으로 목표이다. 세상의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되 생각이 가슴으로 내려 마음을 건드리는 시인의 마음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거듭 말하지만 가슴은 클수록 좋다. 여성 폄하의 뜻으로 말한 것이 결코 아님을 눈치챘을 것으로 믿는다.
<고성순 수필가>
2021년 3월 5일과 9월 11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칼럼 글 둘 우리 재음미해보자.
[이태상 칼럼] '순간순간의 숨이 시가 되어라'
미국에선 매년 4월을 ‘국가적인 시의 달’로 기린다. 시에 대한 서양 유명 시인 작가들 말을 좀 인용해보리라.
1. “시는 일반적인 보통 언어를 우주의 숨결로 승화시킨다. 생각을 벼르고 감정에 신경과 피를 섞어 단어라는 굳은 껍질 속에 영글게 한다. Poetry is ordinary language raised to the Nth power. Poetry is boned with ideas, nerved and blooded with emotions, all held together by the delicate, tough skin of words.”
—Paul Engle, from an article in The New York Times.
2. “평생토록 시 한 줄 쓴 일 없어도 시의 감성에서 고결한 기쁨을 맛보는 사람이 진정한 시인이다. He who draws noble delights from sentiments of poetry is a true poet, though he has never written a line in all his life.”
—George Sand, from The Devil's Pool.
3. “시란 여러 사람과 같이 나누는 것이 아니다. 밤에 잠자리에서 마음속 깊은 생각을 하면서 이 사적(私的)인 세계를 공개하는 것이다. Poetry is not an expression of the party line. It's that time of night, lying in bed, thinking what you really think, making the private world public, that's what the poet does.”
—Allen Ginsberg, from Ginsberg, A Biography.
4. “시인이 된다는 건 하나의 상태이지 직업이 아니다. To be a poet is a condition, not a profession.”
—Robert Graves, in response to a questionnaire in Horizon, 1946.
5. “시는 노력해서 얻는 감성이 아니다. 감성은 자연스럽게 생성되지만 그 판별력은 예술적인 기술로 얻어진다. Poetry is emotion put into measure. The emotion must come by nature, but the measure can be acquired by art.”
—Thomas Hardy, as quoted in The Later Years of Thomas Hardy by Florence Hardy.
6. “시는 지상에 살면서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바다 동물의 일지(日誌) 저널이다. 시는 미지의 알 수 없는 장벽을 무너뜨릴 음절을 찾는 일이다. 시는 무지개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또 없어지는지 말해 주는 마법의 각본이다. Poetry is the journal of the sea animal living on land, wanting to fly in the air. Poetry is a search for syllables to shoot at the barriers of the unknown and the unknowable. Poetry is a phantom script telling how rainbows are made and why they go away.”
—Carl Sandburg, from The Atlantic, March 1923.
7. “시는 개별적 특수성이 아닌 정교한 과잉성으로 독자를 경탄시켜야 한다. 독자 자신의 가장 지고(至高)한 생각을 표현하는 언어로 마치 독자 본인의 기억을 떠올리도록 말이다. Poetry should surprise by a fine excess and not by singularity - it should strike the reader as a wording of his own highest thoughts, and appear almost a remembrance.”
—John Keats, from On Axioms and the Surprise of Poetry.
8. “시는 세상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덮고 있는 베일을 걷어 올려 익숙한 일상적 사물들을 그렇지 않은 특별한 것들로 보이게 해주는 것이다. Poetry lifts the veil from the hidden beauty of the world, and makes familiar objects be as if they were not familiar.”
—Percy Bysshe Shelley, from A Defence of Poetry and Other Essays.
9. “이해되기 전에 느끼게 해주는가가 진순한 시의 시험대이다. It is a test [that] genuine poetry can communicate before it is understood.”
—T. S. Eliot, from the essay "Dante."
10. “시란 강렬한 느낌이 즉흥적으로 넘처나는 것으로 고요히 침잠(沈潛)한 감정에서 발원(發源)하는 감성이다. Poetry is the spontaneous overflow of powerful feelings: it takes its origin from emotion recollected in tranquillity.”
—William Wordsworth, from "Preface to Lyrical Ballads."
11.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논쟁을 통해 수사학(修辭學) 화법(話法)을 도출(導出)하지만 자신과의 토론을 통해 시를 짓는다. We make out of the quarrel with others, rhetoric, but of the quarrel with ourselves, poetry.”
—William Butler Yeats, from PER AMICA SILENTIA LUNAE.
12. “그래서’는 시인이 (쓸 수 없는) 몰라야 하는 단어이다. 'Therefore' is a word the poet must not know.”
—Andre Gide, from Journals.
13. “나는 정의하리라. 시어(詩語)들이란 미(美)의 리듬을 창조하는 거라고. I would define ... the Poetry of words as The Rhythmical Creation of Beauty.”
—Edgar Allan Poe, from "The Poetic Principle.
14. “시는 시인이 자신의 내재하는 사적(私的)인 느낌이지만 독자들도 또한 자신들의 느낌으로 인정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Poetry ... is the revelation of a feeling that the poet believes to be interior and personal which the reader recognizes as his own.”
—Salvatore Quasimodo, from a speech in New York, quoted in The New York Times.
15. “시인은 보이지 않는 걸 보여주는 사람이다. The poet is the priest of the invisible.” —Wallace Stevens, from Opus Posthumous.
2016년 6월 6일자 미주판 중앙일보 ‘문학산책’ 칼럼 ‘시론으로 삶을 배우다’에서 김은자 시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이메일 한 통 왔다.
“김 시인님, 시집을 내려고 준비해 둔 시를 어제는 모두 내다 버렸습니다. 모름지기 시인은 삶으로 시를 쓰는 것이거늘, 삶은커녕 가슴으로 쓴 시조차 한 편 없으니 맛이 없어요. 컴퓨터에 저장해 놓은 시를 모두 날려버렸어요. 참 이상한 것은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것처럼 시원하다는 거예요. 원고 청탁이 들어 와도 줄 시가 없으니 시를 살아야 할 일만 남았네요.”
나는 기가 막혔다. 몇 년을 피를 토하며 썼을 시들을 삭제해 버렸다니 그건 또 무슨 궤변인가? 생각을 거듭할수록 안도현 시인의 시론집이 떠올랐다. ‘가슴으로 쓴 시가 진짜 시다.’ 나는 펜을 들었다.
“L 시인 님, 시를 살겠다고 원고를 날려버렸다는 편지를 읽고 화가 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시를 살아야겠다는 시인 님의 궤변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쓰라는 시론집에 의하면, 그는 대학 시절 시는 쓰는 것이 아니고 살아야 한다는 대학 선배들을 향해 문학적 허영이라고 대들었다고 합니다. 시에 빠진 초년병에게 세상에 무서울 게 있었겠나요. 그때 선배들의 말이 지금 제가 보기엔 히트입니다. 자네 시는 그래서 뒷심이 약한 거야. 그 이후 그는 거의 1년 동안이나 뒷심이라는 말을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민이 깊어질수록 문학의 무거움 속으로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시를 공중분해 시키고도 버젓이 살아있는 L 시인 님, 축하합니다. 밑지는 장사는 아닐 것을 확신합니다.”
이상의 글을 읽고 나는 L 시인과 김 시인 두 분께 깊은 경의를 표하고 큰 박수를 보냈다. 나 역시 열 살 때 나 자신에게 하는 독백으로 ‘바다’라는 동시를 지어 평생토록 밤낮으로 주문 외듯 기도하듯 하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해왔다. 글이란 종이에다 펜으로 쓸 게 아니라 인생이란 종이에다 삶이란 펜으로 사랑의 피와 땀과 눈물이란 잉크로 써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 한 예를 들어보자.
2016년 5월 31일 세계 서핑 리그 피지 여자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3위를 차지한 베타니 해밀톤(Bethany Hamilton)은 온몸으로, 그것도 팔이 하나 없는 몸으로 더 할 수 없도록 아름다운 시 한 편을 썼다. 하와이 출신 베타니는 서핑 좋아하는 부모 따라 걷기 전부터 바다에서 살면서 13살 때인 2008년 10월 이른 아침 서핑을 나갔다가 상어의 공격을 받아 왼쪽 팔을 잃었다.
또 한 예를 들어보자. 2016년 6월 3일 세상을 떠난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도 백인이라는 ‘백상어’에게 물려 팔이 아니라 두 날개를 잃고도 ‘나비처럼 떠서 벌처럼 쏘는’ 어두운 밤하늘에 반짝이는 시를 썼다.
흑인이란 이유로 레스토랑 입장을 거절당하자 알리는 올림픽에서 딴 금메달을 오하이오 강물에 던져버리고, 백인들이 노예에게 준 성을 쓰지 않겠다며 자신의 캐시어스 클레이(Cassius Clay)란 이름을 버리고 캐시어스 엑스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가 이슬람 지도자 엘리야 무하마드의 이름을 따 아예 ‘무하마드 알리 (Muhammad Ali)’로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그는 “나는 알라를 믿고 평화를 믿는다. 백인 동네로 이사할 생각도 없고 백인 여자와 결혼할 생각도 없다. 나는 당신들 백인이 원하는 챔피언이 되지 않을 것이라’라고 외쳤다.
옛날 로마 시대 노예들을 검투사로 죽기 살기 싸움을 붙이고 즐겨 관람하던 잔인무쌍한 경기의 잔재인 복싱이란 링에서보다 링 밖의 세계란 무대에서 알리는 약자들의 인권 챔피언이었다. 1942년 흑인 노예의 손자로 태어난 알리는 스스로를 ‘민중의 챔피언(People’s Champion)’이라고 불렀고, 1967년 베트남전 징집 대상이 되었지만 “이봐, 난 베트콩과 아무런 다툴 일도 없다. 어떤 베트콩도 나를 깜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Man, I ain’t got no quarrel with them Viet Cong. No Viet Cong call me nigger.”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해 선수 자격을 박탈당하고 징역 5년 실형을 선고받았었다. 알리가 남긴 수많은 시적(詩的)인 말 중에 내가 좋아하는 12마디 인용해보리라.
1.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일은 이 지상에서 지불할 내 숙박료다. Service to others is the rent you pay for your room here on earth.”
2. “날짜를 세지 말고 매일이 보람되게 하라. Don’t count the days; make the days count.”
3. “어떤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면 내 가슴이 믿게 되고 그러면 내가 그 생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If my mind can conceive it, and my heart can believe it-then I can achieve it.” Jesse Jackson said this as early as 1983, according to the Associated Press, and Ali used it in his 2004 book.
4. “너를 지치게 하는 건 네가 오를 산들이 아니고 네 신발 속에 들어 있는 돌 조각이다. It isn’t the mountains ahead to climb that wear you out; it’s the pebble in your shoe.”
5. “내가 얼마나 지독한지 약조차 병이 나 앓게 된다. I'm so mean, I make medicine sick.”
6. “불가능이란 단지 그들에게 주어진 세상을 바꿔야 할 가능성을 탐색하는 대신 그 현실에 안주하려는 소인배들이 둘러대는 거창 한 단어일 뿐이다. 불가능이란 사실이 아니고 의견이며 선언이 아니다. 도전에 맞서는 대담성이다. 따라서 불가능이란 가능성이고 한시적이며 아무것도 아니다. Impossible is just a big word thrown around by small men who find it easier to live in the world they’ve been given than to explore the power they have to change it. Impossible is not a fact. It’s an opinion. Impossible is not a declaration. It’s a dare. Impossible is potential. Impossible is temporary. Impossible is nothing.”
7. “위험을 무릅쓸 만큼 용감하지 못한 자는 인생에서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리라. He who is not courageous enough to take risks will accomplish nothing in life.”
8. “나이 스물에 본 대로 나이 쉰에도 똑같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그는 30년 동안 그의 삶을 헛산 것이다. A man who views the world the same at 50 as he did at 20 has wasted 30 years of his life.”
9. “곰팡이 난 빵에서 페니실린을 만들 수 있다면 당신에게서 뭔들 만들 수 없으랴. If they can make penicillin out of moldy bread, they can sure make something out of you.”
10. “상상력이 없는 사람은 날개가 없는 거다. A man who has no imagination has no wings.”
11. “피부색 때문에 그 누구를 미워하는 건 잘못이다. 미워하는 사람의 피부색이 어떻든 간에 잘못된 일이다. Hating people because of their color is wrong. And it doesn't matter which color does the hating. It's just plain wrong.”
12. “하루하루 매일이 네가 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라. 그런 날이 꼭 올 테니까. Live everyday as if it were your last because someday you're going to be right.”
아, 우리 각자의 삶, 아니 순간순간의 숨이 시가 되어라.
자, 이제, 85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얻게 된 '결론(?)'으로 한 코스미안의 '반시론反詩論을 개진開陣해보리라.
1837년 출판된 단편작으로 한국에선 <벌거벗은 임금님>(El vest it nou de l'Emperador/The Emperor's New Clothes)으로 알려진 덴마크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Hans Christian Andersen(1805- 1875)의 민속 동화에 나오는 어린애처럼, 아니 모든 천둥 벌거숭이 어린이들 같이, 타고난 반골기질 때문인지, 나 또한 '성상聖像/우상偶像파괴자破壞者 iconoclast/ 이단자異端者 contrarian/반권위反權威 자유사상가自由思想家 libertarian 답게 아주 어릴 때부터 '시인'이란 칭호稱號에
생리적인 알르레기성 거부반응이 있있다.
세상에 '시' 쓰는 사람이 따로 있을 수 있을까. '시인'은 시만 쓰는 사람일까.
실제로 삶을 살아보는 대신 사는 시늉만 하면서 고답적으로 문화적인 귀족 특권층으로 행세하는 '이슬 먹고 구름똥 싸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리움'이 준 말인 '글'과 '그림'은 종이나 화폭에다 펜과 붓으로 쓰고 그리는 게 아니고 인생이란 바탕에다 삶이라는 필체로 사랑의 피와 땀과 눈물로 쓰고 그리는 것이라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아무리 훌륭한 문학이나 예술 작품이라도 한없이 무궁무진하도록 경이롭고 신비로운 우주 자연 만물과 사랑으로 숨쉬고 사는 삶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믿게 되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실물'보다 그 '모조품'을 더 애지중지 하는 걸 이제껏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니 삶이 산문散文 prose 이라면
사랑은 시詩 poetry 가 되리라.
[이태상 칼럼] 코스미안은 우상偶像/성상聖像 파괴자
2021년 9월 8일자 미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정숙희의 시선] 칼럼 '백남준, 문화 테러리스트' 필자는 백남준을 이렇게 소개한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샌프란시스코로 올라가 현대미술관(SFMOMA)에서 하는 특별전을 보고 인근 와인산지를 여행하는 것이 작은 기쁨이다. 작년에는 팬데믹으로 쉬었지만 2019년에는 앤디 워홀의 대형 회고전을 보았고, 그 전해에는 뭉크 전을, 그 전에는 르네 마그리트를, 또 그 전에는 마티스/디벤콘 전시를 보았다.
올해는 백남준이었다. 그리고 이 전시는 그동안 보았던 모든 특별전을 압도할 만큼 최고였다. 백남준 하면 여러 개의 TV모니터가 돌아가는 이미지들이 떠오르지만, 그렇게 맥락 없이 한두 점 감상하는 것으론 백남준이란 희대의 예술가를 이해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나 역시 백남준의 50년 커리어를 입체적으로 소개한 이 전시를 보고난 후에야 처음으로 그의 천재성에 전율하게 되었다.
특히 청년시절 독일에서 그가 벌인 전위 행위예술의 기록을 비디오와 사진으로 직접 보면서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전시장 초입에서 마주친 ‘손과 얼굴’ 비디오, 슈토크하우젠의 ‘오리기날레’ 퍼포먼스 동영상은 너무도 강렬해서 백남준이라는 예술가를 완전히 다른 시각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젊고 잘생긴 백남준이 온몸으로 퍼포먼스를 펼치는 모습은 충격이고 해방이었다. 그는 피아노를 부수고, 바이올린을 산산조각 내는 퍼포먼스를 통해 서구의 ‘고급예술’을 파괴했고, 존 케이지가 매고 있던 넥타이를 싹둑 잘라버림으로써 권위와 형식에 저항했다. 이런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고 지금은 놀랍지 않지만 1960년대 초에 이런 ‘액션뮤직’은 예술계를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독일 언론이 그를 ‘아시아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라고 불렀던 것이 놀랍지 않다.
유감스럽게도 백남준(1932-2006)의 삶과 예술은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상당히 불균형적으로 소개된 면이 있다. 해외에서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로 유명해진 80년대 중반에야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미술가’로 소개되었기 때문에 그의 예술과 철학의 근원인 60∼70년대 행위예술 활동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탓이다.
백남준은 근본적으로 음악가였다. 대부호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당시 희귀했던 피아노와 전축이 있는 집에서 자라며 어려서부터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고, 홍콩과 일본에서 미술사학과 미학, 작곡과 음악사학을 공부했다. 졸업논문은 ‘쇤베르크 연구’였다. 1956년 독일로 유학해 뮌헨대학교와 쾰른대학교에서 건축, 음악사, 철학 등을 공부했고, 프라이부르크 국립음대에서 전위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나면서 자유정신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서도 음악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수십대의 TV 모니터가 숲을 이룬 ‘TV 가든’과 세계를 위성 생중계로 처음 엮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바이 바이 키플링’은 영상만큼이나 음악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특히 좋았던 것이 거의 모든 작품에서 만나는 유머와 익살이다. 백남준이 추구한 인생의 재미(fun)가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마지막 전시 룸에서 만난 ‘시스틴 채플’의 경이와 감동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백남준의 작업은 너무 방대하고 어려워서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고, 사실 그럴 역량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오래전 내가 만난 백남준, 그 잠깐의 이야기를 풀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1988년 초, 샌타모니카의 ‘도로시 골딘’ 갤러리에서 서부지역 첫 백남준 초대전이 열렸다. 오프닝에는 주류 언론들이 잔뜩 몰렸고, 멜빵바지를 입은 백남준은 누구든 카메라를 들이대면 히죽 웃는 표정을 지어주는 모습이 꼭 ‘바보’ 같았다. 무슨 질문에든 단답형 또는 동문서답으로 말하는, 기자들이 싫어하는 유형의 그는 시끄럽고 복잡한 오프닝 와중에 나에게 인터뷰를 당하며 앉아서 졸기까지 했고, 나는 그를 깨워가며 질문하느라 진땀을 뺐다. 지금 생각해보면 애송이 기자를 놀린 거였지 싶다.
그때 백남준 인터뷰와 예술세계에 관해 통판 2페이지 빼곡히 특집기사를 썼다. 그리고 그 신문을 뉴욕으로 부쳐주었던가 보다. 시간이 꽤 지난 후 두툼한 봉투가 날아왔다. 열어보니 내가 보냈던 신문이 구깃구깃 아무렇게나 접힌 채 들어있었고, 기사 위에 붉은 색연필로 크게 친 동그라미가 보였다. 기껏 공들여 쓴 기사에 낙서를 해서 되돌려 보내다니, 자존심도 상하고 화가 나려는 순간, 빨간색 한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빼어날 ‘수’(秀)였다. 아무 설명도 편지도 없고 단지 그것뿐이니, 해석은 내 몫이었다. ‘기사를 잘 썼다는 칭찬이구나’ 지금껏 나는 그렇게 ‘자뻑’하고 있다.
사실 백남준을 인터뷰하기 전 잔뜩 긴장했던 나는 열심히 공부를 했다. 당시는 인터넷도 없었고, 한국 서점이나 도서관도 없어서 자료 찾기가 힘들었다. 어렵사리 미국 신문기사들과 잡지비평들을 구해다가 모두 읽었는데, 그 덕에 백남준이 비디오아티스트가 되기 전에 전위음악가로서 활동했던 이력을 종합적으로 쓸 수 있었다.
언급했다시피 그 때만 해도 한국 언론은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라는 사실만을 집중 보도했기 때문에 그가 음악을 했다는 사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그 점이 기특했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 내용이 쓰인 부분에 동그라미를 치고 ‘秀’를 썼으니 말이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참 엉뚱하지 않은가? 한자 한 글자 휘갈겨 쓴 신문지를 접어서 기자에게 다시 부치다니…. 그 신문지를 잘 간직한다고 했는데, 지금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SFMOMA의 백남준 전시는 10월3일까지 계속된다. 미국에서는 1982년 뉴욕 휘트니 뮤지엄, 2000년 구겐하임 뮤지엄 이후 약 20년만이자 미 서부에서의 첫 회고전이다. 언제 다시 이런 전시를 만날 수 있을지, 많은 사람이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정숙희 논설위원>
자고이래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유인Free Spirit'들은 하나같이 우주적 자연인 나그네 '코스미안 Cosmian'들로 '우상偶像과 성상聖像 파괴자Iconoclast'들이 아니었나.
2020년 4월 7일자와 8월 5일자 그리고 9월 14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항간세설 칼럼 세 편 아래와 같이 옮겨보리라.
[이태상의 항간세설] '인생은 호스피스, 아니 놀이터'
현재 전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역병 코로나바이러스는 1947년 출간된, 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 알배르 카뮈 (Albert Camu 1913-1960)의 소설 '페스트(The Plague)가 사실적으로 예시한 바가 있다.
카뮈는 프랑스 영토인 알제리 북부 도시 오랑을 덮친 재앙으로 페스트를 지목했다. 도저히 인간의 척도로 이해할 수 없는 재앙, 페스트. 인간들은 페스트의 한복판에서 비극적이며 부조리한 세계를 절감하는 한편, 그 속에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고,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고뇌한다. 카뮈는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 속에 이 역병을 앓고 있다. 세상의 그 누구도 이 역병에 면역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Everyone has it inside himself, this plague, because no one in the world, no one, is immune.)”
몇 년 전 발생한 코메르스(코리안 메르스) 사태 이전부터 한국에선 마스크가 새로운 패션으로 자리 잡아 흰색, 검은색, 녹색에 파란색까지 어울린 마스크들의 행진에 그 기이한 풍경을 외국 언론은 놓치지 않았다. 허핑톤 포스트는 이런 대한민국의 모습을 화보로 엮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서양 사람들의 행태에 비한다면 양반이다. 비근한 예로 동양인이 개고기를 먹는다고 야만인이라고 흉보면서도 서양인들은 예수의 상징이란 양의 양고기를 즐겨 먹는다. 내가 보기에 '고기는 고기'일 뿐이다. 소고기, 돼지고기, 물고기, 예수의 살과 피를 섞었다는 빵과 포도주 등 가릴 것 없다.
개가 맹인안내견, 반려견, 애완견, 폭발물 탐지견, 범인이나 실종자 탐색견, 사냥개, 군견과 경찰견 등등, 인류에게 지대한 공헌을 해오고 있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만, 야생의 이리나 늑대가 길들여져 인간의 충복으로 구차한 목숨을 부지해오고 있는, 마치 거세당한 내시 같은 신세가 몹시 딱하고 안쓰러울 뿐이다.
이것이 어디 개뿐이던가. 이 개 같은 세상에서 개 같이 살고 있는 개 같은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서양에서 남자들이 개 목줄 매듯이 넥타이를 매기 시작하면서, 제가 속한 조직과 기관에 구속되어 숨통 막히는 신앙이다 이념이다 사상이다 온갖 허깨비 같은 주의 주장과 신앙심이다 애국심이다 애사심이다 하는 속박에 묶인 노예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어디 그뿐인가. 여성의 경우엔 더 혹독한 족쇄를 발에 채워오고 있지 않나. 마치 가축처럼 가정이란 울타리 안에 가둬 두기 위해 옛날 중국 계집애들의 발이 자라지 못하도록 어려서부터 꽁꽁 묶어 놓았듯이 서양에서는 중세 시대 십자군 시절 정조대로 여성의 성기에 자물쇠를 채웠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성의 성노리개 패션 명품이란 마네킹으로 남성에게 예속시켜오고 있다. 미스코리아, 미스월드, 미스유니버스니 하는 상품 레벨까지 붙여서 '뇌색녀' 아닌 '골빈녀'를 전 세계적으로 각국마다 대량으로 생산해오고 있다.
아, 그래서였을까. 얼마 전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 셰릴 샌드버그(Sheryl Sandberg 1969 -)의 남편 장례식에 참석한 1,700여 명의 조문객 가운데 넥타이를 맨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버드대학 출신으로 미국 재무장관 비서실, 구글, 페이스북 성공신화를 써온 그녀에게 남편이 러닝머신에서 쓰러져 숨지자 데이브(Dave)가 생전에 넥타이를 싫어했기 때문에 넥타이 없는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고 한다. 데이브는 그녀의 남편이자 론치 미디어 설립자 겸 서베이몽키 최고 경영자 데이비드 브루스 골드버그(David Bruce Goldberg, the founer of LAUNCH Media and the CEO of SurveyMonkey 1967-2015)를 지칭한 것이다.
2006년 뉴욕에서 치러진 백남준(1932-2006)의 장례식에선 존 레논의 부인 오노 요코(Yoko Ono 1933 - )를 비롯한 400여 명의 참석자들이 옆자리에 앉은 조문객의 넥타이를 자르는 깜짝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는 1960년대 백남준이 독일에서 작품 발표를 하다 갑자기 청중석에 앉아 있던 그의 스승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의 넥타이를 잘라 스승을 모독한 것이 아니라 '자유인(Free Spirit)'의 새로운 시대를 연 역사적인 퍼포먼스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백남준의 영향 때문인지 베르린에는 특이한 규칙이 있는 사교 클럽이 있는데, 중년층이 주요 고객인 이 클럽에서 남자들은 넥타이를 착용해야 하는 것이 그 첫 번째 규칙이고, 여성에게만 주어진 파트너 선택권을 가진 여자가 마음에 드는 남성을 발견, 가위로 싹둑 넥타이를 자르면 그 남자는 무조건 춤 (내지 추측컨대 베드까지) 파트너가 돼야 하는 게 그 두 번째 규칙이란다. 따라서 이 클럽은 여성 손님들로 대호황이라던가.
그렇지 않아도 첨단기술과 결합한 성(sex)과 영화 속 사랑이 우리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인공지능-가상현실-통신혁명이 결합해 육체적 파트너 없이 성적 욕구 해소가 상용화되고 있지 않은가. 센서 칩을 통해 실제와 유사하게 만지고 느끼는 감각 구현에 박차를 가해 특정 부위 크기 조절 약물까지 개발되고 있다는 보도다. 그리고 유전자를 물려준 부모가 여럿인 아기와 낳아준 부모보다 일찍 수정된 아기 등 복잡 다양한 상황 발생이 예고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처럼 현실보다 더 매력적인 사이버 연인이 가능해진 세상에서 구태의연하게 시대착오적인 로봇화된 남자와 여자로 도태되지 않으려면 어서 모든 남성은 넥타이를 풀어버리고 모든 여성은 하이힐을 하이킥으로 걷어차 버리고 사람으로 돌아가 짧다면 눈 깜빡할 사이처럼 짧은 인생살이 사람답게 살아볼 일 아닌가. 더 이상 개 같이 살지 말고 말이어라.
그게 불가능하다면, 개보다는 차라리 고양이를 닮아 보는 건 어떨까. 여기서 우리 이병률 시인의 시 '고양이가 울었다'를 음미해보리라.
“고양이 한 마리가 동네 골목에 살았다. 검은 비닐봉지와 살았다. 검은 봉지 부풀면 그것에 기대어 잠들었고 검은 봉지 위로 빗물이 떨어지면 그것을 핥아먹으며 살았다. 어느 날 검은 봉지가 사라졌다. 바람에 날리기도 하였을 것이고 누군가가 주워가기도 하였을 것이나 아주 어려서부터 기대온 검은 봉지를 잃은 고양이는 온 동네를 찾아 헤매다 죽을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다. 검은 봉지를 형제 삼아 지내온 날들. 고양이가 울었다. 잠든 형제를 위해 자꾸 자리를 비켜주던 날들, 뼛속으로 뼛속까지 바람이 불었다."
이 시를 장석주 시인은 이렇게 풀이한다.
"만일 사람이 고양이라면 저마다 '검은 비닐봉지'와 같은 무엇을 갖고 산다고 할 수 있다. 돈이건 권력이건, 우정이건 우매한 자기 확신이건. 혹은 신앙이건 예술이건! 사람은 본질에서 고독하고 불안하고 무기력하기에 기댈 만한 무언가를 구한다. '검은 비닐봉지'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인간적 욕망과 환상이 투사되면 장미 꽃봉오리나 무지개로, 목숨이나 신앙으로 변한다. 그걸 잃으면 정신줄을 놓고 죽을 것처럼 아프기도 할 것이다."
하기는 사람이 개만큼이라도 됐으면 좋으리라. 미국의 유머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이 갈파했듯이 "굶주린 개에게 먹이를 주면 개는 너를 물지 않는다. 이것이 개와 인간의 차이점이다. (If you pick a starving dog and make him prosperous, he will not bite you. This is the principal difference between a dog and a man.)" 이 말을 우리 인간들은 잊지 말아야 하리라.
[이태상 칼럼] '우린 애초부터 우주인 코스미안이다'
"인간은 다행성(多行星) 종(種)일 필요가 있다.(Humans need to be a multiplanet species.)"
지난 일요일 '스페이스 X’ 미(美) 민간 우주 왕복 첫 성공 후에 테슬러 창업자 일론 머스크(Elon Musk, 1971 - )가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위에 인용한 머스크의 말처럼 우리 ‘인간은 다행성 종일 필요가 있다’라기 보다 우린 애초부터 우주인 코스미안이 아니었던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의미 없고 형태 없는 혼돈의 카오스에서 질서 정연하고 아름다운 우주 코스모스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현재 전 세계 온 인류가 창궐하는 코로나바이러스와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과 홍수 물난리며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도 혼돈의 카오스를 겪고 있지만 우주적인 큰 그림에서 보자면 코스모스를 출산하기 위한 산고(産苦)를 치르는 것이리라.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에게도 큰 영향을 준 19세기 러시아의 철학자 니콜라이 페도르비치 페도르브(Nikolai Fyodorovich Fyodorov 1829-1903)는 "인류가 당면한 가장 절실한 문제는 죽음이고 이 죽음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라고 했다.
우리가 우리 부모로부터 우리 생명을 받았으니 (우리 우주) 부모에게 생명을 돌려드리는 것이 자식 된 우리 의무이자 도리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 죽음이란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과 미세분자 (molecules)의 해체를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해체된 이 모든 요소와 분자들을 다시 제대로 조합만 하면 잃어버렸던 생명을 되찾게 될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해체 분해된 분자들은 지구를 떠나 우주 공간으로 흩어져 떠돌다가도 어쩌면 다른 별에 정착해서 다시 생명체로 부활할 수 있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지구에 태어나 살다 죽은 생명체들이 다른 별로 이주해서 생명이 연장되고 영생불멸한다는 얘기다. 이는 모름지기 동물, 식물, 광물, 아니 생물, 무생물 가릴 것 없이, 우주 만물이 우주 생명체의 DNA란 말이리라.
우리 의식이 어떻게 우리 두뇌로부터 생기는지 아직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우리가 지구 어디에 살고 있든 우리는 이미 인공지능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같은 것을 보고 느끼며 소통하고 있지 않나. 그야말로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이 사회적 내지 영적으로 교신하고 교감하게 되었다.
‘자아’란 것이 하나의 환상이고 환영에 불과하다면 이 자아의식이 어떤 기구나 기관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이동하고 전달되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드로소필라 멜라노가스터(drosophilia melanogaster)라 불리는 과실 파리(fruit fly)가 있다. 유전 연구 대상이 된 이 해충은 135,000개의 뉴론(neurons) 시냅시스(synapses)로 구성되어 있는데 수년 내에 그대로 복제가 가능하리라고 과학자들은 내다 본다. 어떻든 인간의 두뇌는 거의 1천억(100billion) 개 뉴론을 갖고 있는데 이 숫자는 은하계에 있는 별들의 숫자와 맞먹는다고 한다.
아, 그래서 영국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1834)도 그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으리라.
“내 다정한 친구야! 뭐든 네가 꾀한다고 부끄러워할 거 없다. 4,000년도 못산다고 생각할 수 없지. 그 정도만 산다 해도 네가 하고 싶은 일 다 할 수 있지 않겠니. 정녕코, 그만큼만 살더라도 네가 하는 일에 더러 문제가 좀 생기겠지만 걱정하지 마라. 항상 낙관하고 꿈꾸다 죽거라!
(My dear fellow! Never be ashamed of scheming – you can’t think of living less than 4,000 years, then that would suffice for your present schemes. To be sure, if they go on in the same ratio to the performance, then a small difficulty arises; but never mind! Look at the bright side always and die in a dream!)”
콜럼버스가 그랬듯이 우리도 어디로 향하는지는 막연히 안다 해도, 어디에 도착할지는 전혀 모르는 일이어라.
지난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은 “대통령에 당선되면 UFO와 관련된 진실을 국민에게 알리겠다. 로스웰의 51구역에도 진상조사팀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공약까지 했었다.
1947년 7월 미국 뉴멕시코주(州) 로스웰(Roswell)에서 벌어진 일을 로스웰 사건이라 부르는데, 그때 거기서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증거가 있는지, 있다면 그 증거를 믿을 수 있는지, 아직까지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미군은 비밀리에 띄운 실험용 기구가 추락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UFO 추종자들은 외계 생명의 우주선이 추락한 것을 미국 정부가 은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로스웰 사건은 UFO로 주장되는 가장 잘 알려진 사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로스웰 사건과 관련해 2008년에 나온 책 ‘외계인 인터뷰(Alien Interview)’가 있다. 저자 로렌스 알 스펜서(Lawrence R. Spencer)가 로스웰 사건 때 간호사로서 외계인과 텔레파시 (telepathy)로 인터뷰했다는 마틸다 맥엘로이(Matilda MacElroy)라는 여성의 메모를 60년 만에 묶어냈다는 책이다.
이 책에서 로스웰 외계인은 생체구조가 없는 순수한 영적 존재로 묘사되었고 생존 외계인의 전언으로 그들 중 일부가 인체에 오래전부터 인간과 공존해 온 것으로 되어 있다.
1997년 개봉된 미국 공상과학 SF 영화 ‘검은 옷 입은 남자들 (Men in Black )’의 흥미로운 설정 중 하나는 지구인 중 상당수가 사실은 외계인으로 앨버트 아인슈타인, 빌 게이츠, 엘비스 프레슬리, 마이클 조던 등 특출난 인물들이고, 이들 외계인들이 오래 전부터 지구인과 공존하면서 문명의 발달을 주도해왔다는 것이다.
2005년엔 사건 당시 로스웰 기지 제51구역(Area 51) 공보장교로 사건을 담당했던 월터 하우트(Walter Haut 1922-2005)가 유언을 통해 의혹이 모두 사실이라고 폭로하는 등 꽤 신빙성 있는 증언이 잇따르면서 이 로스웰 사건은 다시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제51구역은 미국 네바다주(州)에 위치한 군사 작전 지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정식 명칭은 그룸 레이크 (Groom Lake) 공군기지로, 위도 51도에 위치하고 있어 통상 ‘제51구역’이라 불리고 있다.
1955년 정찰기인 U-2기를 최초로,,ㅏ 네바다주(州)에 보내면서 설치된 곳으로, 이후 신무기의 개발 및 시험을 위한 철저한 비밀 기지로 건설되었다. 그동안 미 정부는 해당 기지에 대해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다가, 2013년 6월 미국중앙정보국(CIA)의 355페이지 짜리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해당 지역의 실체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 비밀기지가 특히 화제를 모은 이유는 이곳에서 UFO를 봤다는 제보가 많다 보니, 외계인 연구, 비밀 신무기 연구 등을 위해 설치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기 때문이다.
추락한 UFO의 잔해가 이곳으로 옮겨져 연구되고 있다는 설과, 로스웰 사건과 관계되고 있다는 설과 ‘그레이 외계인’이라고 불리는 외계인들이 있다는 설 등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여 UFO 마니아들로부터 큰 관심을 끌어오고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로스웰 사건은 지금도 ‘살아있는 신화’로 남아 ‘검은 옷 입은 남자들’ 외에도 ‘스타워즈(Star Wars)’ 와 ‘인터 스텔라(Interstellar)’ 등 수많은 SF 영화의 기폭제가 되어 왔다.
동의어의 쓸데없는 반복을 영어로 ‘토탈로지(tautology)’라 하는데 지구인과 외계인을 구별한다는 것부터가 토탈로지의 중언부언(重言復言)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지구인이든 화성인이든 금성인이든 모두가 우주에서 생긴 존재들이라면 다 대우주라는 매크로코즘(macrocosm)에서 온 ‘외계인(外界人)’인 동시에 소우주라는 마이크로코즘(microcosm)의 어느 한 별에 ‘내계인(內界人)’으로 잠시 머물다 떠나가는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Cosmian)’이라 해야 하리라.
지난 2016년 3월에 있었던 인간대표격인 이세돌과 인공지능의 화신이라 할 알파고의 대결을 전후해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리면서 인류의 미래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 1928-2016)는 농경시대인 제1의 물결, 산업화시대인 제2의 물결 다음으로 제3의 물결인 정보혁명을 예고했었는데, 그 다음으로 우리는 이제 제4의 물결인 인공지능혁명을 맞고 있는 것 같다.
기계가 인간처럼 아니 인간 이상으로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 인간은 어찌 될 것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상과학소설 같던 일들이 현실이 되고 있지 않은가. 컴퓨터의 성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날로 발전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인공지능이 인류에게 공헌할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로 부정적인 결과만 초래할 것인지에 대해 과학자, 발명가, 미래학자들은 상반되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몇 사람의 말을 들어 보자.
미국의 발명가이며 미래학자 레이 쿠르츠웨일(Ray Kurzweil, 1948 - )은 인공지능이 2029년까진 인간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믿는다. 각종 질병을 치료하고 자연환경의 오염을 제거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technology)의 가능성을 감안하면, 우리는 인공지능의 위험성을 통제하면서도 긍정적인 면을 활용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스탓업 인큐베이터 와이 컴비네이터 (Startup Incubator Y Combinator)의 전(前) 대표이자 현재 오픈 에이 아이(Open AI)의 CEO 샘 앨트만(Sam Altman, 1985 - )은 현재 모든 사람이 사용 가능한 인공지능의 오픈-소스 버전 (open-source version)을 개발 중인데 자체를 검열 사찰해서 인류에게 유익한 용도만 고안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한다.
베스트셀러 저자이면서 순수 이론물리학자 겸 미래학자인 미치오 카쿠(Michio Kaku, 1947 - )는 실질적이고 긴 안목을 갖고, 인공지능을 21세기 말의 문제라며 만일 그때까지도 탈선하는 인공지능을 통제할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그 로봇 두뇌에 칩을 넣어 꺼버리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기업가로 자선사업을 해오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인 빌 게이츠(Bill Gates, 1955 - )는 가까운 장래엔 저성능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하는 도구가 되겠지만 몇십 년 후에 고성능 초지능 기능체계(super intelligent systems)로 발전하면 우려할 일이라고 전망한다.
영국의 블랙홀 물리학(Black hole physics)의 개척자로 저명한 천체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1942-2018)은 인공지능이야말로 인류역사상 최대의 사건(the biggest event in human history)으로 기적적이고 불행한 사태라며, 우리가 이 인공지능의 위험을 피할 방법을 강구하지 못한다면 인류의 종말을 고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스웨덴의 철학자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 인류 미래연구원 원장 (Director of The Future of Humanity Institute at Oxford University)' 닉 보스트롬(Nick Bostrom, 1973 - )은 인공지능이 급작스럽게 악성화되어 인간들을 없애버릴 수 있을 거라며, 경제적인 기적과 기계문명의 경이로움을 이룩하겠지만 그런 세상이란 마치 어린이들이 없는 디즈니랜드(Disneyland without children)와 같을 거란다.
‘스페이스 X’ CEO일론 머스크는 인공지능을 우리의 실존적인 최대 위협(our biggest existential threat)이라며, 악마를 불러오는(summoning the demon) 것이라고 걱정한다.
아, 그렇다면 인류의 종말을 가져올 제4의 물결 인공지능 카오스 바다에 익사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서 제5의 물결 정신 아니 영성 혁명 (Spiritual Revolution)을 일으켜 코스모스 바다로 항해 아니 비상하는 코스미안으로 돌아가야 하리라.
무궁무진(無窮無盡)한 우주에 가득 차 있는 물질을 어두운 물질 (dark matter)이라고 한다. 독일어로는 dunkle Materie라고 과학자들은 부르지만 이 보이지 않는 물질(this invisible matter)은 사랑임이 틀림없어라.
인터넷에서 뽑은 글을 독자들과 나눠보리라.
한 소녀가 산길을 걷다가 나비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버둥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소녀는 가시덤불을 제치고 들어가 거미줄에 걸려있는 나비를 구해주었습니다. 나비는 춤을 추듯 훨훨 날아갔지만, 소녀의 팔과 다리는 가시에 찔려 붉은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그때 멀리 날아간 줄 알았던 나비가 돌아와 순식간에 천사로 변하더니 소녀에게 다가왔습니다. 천사는 구해 준 은혜에 감사하다면서 무슨 소원이든 한 가지를 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소녀는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그러자 천사는 소녀의 귀에 무슨 말인가 소곤거리고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소녀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해서 엄마도 되었으며 할머니가 될 때까지 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녀의 곁에는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 있었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녀를 사람들은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예쁜 소녀는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 임종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할머니가 죽기 전에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웃으시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소녀였을 때 나비 천사를 구해 준 적이 있지. 그 대가로 천사는 나를 평생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 주었어. 그때 천사가 내게 다가오더니 내 귀에 이렇게 속삭이는 거야.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소원을 들어 드릴게요. 무슨 일을 당하든지 감사하다고 말하세요. 그러면 평생 행복하게 될 거에요.’
그때부터 무슨 일이든지 감사하다고 중얼거렸더니 정말 평생 행복했던 거야. 사실은 천사가 내 소원을 들어준 게 아니야. 누구든지 주어진 일에 만족할 줄 알고 매사에 감사하면 하늘에서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지.”
이 말을 끝으로 눈을 감은 할머니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평온함이 가득했습니다.
[이태상의 항간세설] '틀을 깨고 뒤집어 보기'
요즘 코로나바이러스 역병(疫病)으로 ㄹ
온 지구촌이 유령 마을 (Ghost Town)로 변해 사람들의 사회활동이 거의 멈추고 집안에 격리되다 보니 옛날 우리 조상 원시인들이 동굴 속에 살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만 같다.
그때는 몸 성한 남자들은 산과 들로 사냥 나가고 여자들은 먹을 식량을 위해 밭농사나 열매 채집하러 외출하면 동굴 속에 남아있는 병약자(病弱者)들은 무료(無聊)함을 달래느라 동굴 벽에 그림도 그리고 글씨도 새겼다지만, 이제 현대인들도 그동안 외부 바깥세상으로만 팔던 정신을 내면으로 돌려 각자 우주 속의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의의를 성찰해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아니랴.
‘왜 그렇게 사니? 미련 곰탱아’
2015년 6월 25일자 한국일보 오피니ㅕㅑ언 페이지 좌측 하단에 실린 사진 한 장 속 입석조형물에 붙어 있는 포스터 같은 문구였다. 그 앞엔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땅바닥에 돗자리 같은 매트를 깔고 뭔가가 담긴 검은 비닐 주머니들 사이에 비스듬하게 앉아 앞에는 큰 함지박에 여러 가지 떡을 놓고 있다. 그 바로 옆엔 벗어 놓은 슬리퍼 같은 신발 한 켤레가 놓여 있는데, 이 사진 밑에 ‘아주머니, 자리 잘못 잡으신 듯’이란 사진 설명 캡션(caption)을 류효진 멀티미디어부 기자가 달아 논 것이었다.
이 문구 '왜 그렇게 사니? 미련 곰탱아'를 이제 와선 이렇게 좀 바꿔봐야 하리라. '그동안 왜 그렇게 살았니? 미련 곰탱아'
우리 모두 단군 할아버지와 곰 할머니의 후손이라면 이와 같은 지탄을 받아 마땅하리라. 예부터 '도(道)'라 하는 것은 도가 아니고 '진리'라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하듯이, '정도(正道)'도 없고 '공식(公式)'이란 것도 공식이 되는 순간 더 이상 공식이 될 수 없으리라.
자기 몸의 건강상태를 스스로 측정할 수 있는 자가 건강 측정기가 최근 몇 년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하자 애플부터 마이크로소프트까지 공룡기업들이 시계처럼 손목에 찰 수 있는 '웨어러블(wearable)'이라는 시장에 뛰어들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 시장의 최강자는 2007년 설립된 '핏빗(Fitbit)'이라는 소기업이다. 핏빗의 현 웨어러블 시장 점유율은 85%로 한 해 2,600만대 이상의 판매량을 올리고 있다. 따라서 이 회사 창업주인 한인 제임스 박(James Park 1977 - )을 하루아침에 보유주식 6.6억 달러의 억만장자로 만들어줬다.
미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나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와 마찬가지로 제임스 박도 하버드를 중퇴했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와 미 컴퓨터 업계의 3인자로 오라클 창업자인 래리 엘리슨 역시 대학 중퇴자다. 이들 모두가 대학이란 박스에 들어갔다가 그 틀을 박차고 나온 사람들이다.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 2015년 한국일보 연예스포츠 양승준 기자가 '후회 없이 노래, 나홀로 무대서 눈물. 기획형 아이돌의 그림자'란 기사에서 지적한 아이러니가 있다.
'어, 나 왜 울지?' MBC '일밤ㅡ복면가왕'에서 두 번이나 가왕을 차지한 그룹 에프엑스 멤버 루나는 좋은 노래 들려줘 고맙다는 심사위원의 말에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가면을 벗은 루나는 (이 무대에서는)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주목받을 기회가 많은 아이돌이 6주 동안이나 얼굴을 가린 채 노래를 하고 후회 없이 노래 불렀다며 울다니 아이러니가 따로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양 기자는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
"'복면가왕'은 웃음 뒤에 가요계 '기획형 아이돌'의 그림자를 내비친다.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기획사에 발탁되고도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기획사가 그룹의 색깔과 앨범의 콘셉트를 정하고, 여기에 조립하듯 가수를 끼워 맞추다 보니 노래가 '대박'이 나도 가수들에겐 '내 노래'로 남지 않는다. 아이돌 음악을 두고 '공장에서 찍어 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같은 날짜 한국일보 연예스포츠에 이재훈 기자가 소개한 호주 싱어송라이터 렌카(Lenka Kripac 1978 - )의 새 앨범 '더 브라이트 사이드(The Bright Side)'의 타이틀곡 '유니크 (Unique)' 는 평소 자신이 행복해야 음악적인 결과를 보장 받는다고 믿는 렌카의 음악 철학에 맞는 작업 방식으로 탄생했고 시종일관 듣는 이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한다. 이 밖에 화사하고 밝은 분위기의 '프리(Free),' 이미 싱글로 공개된 '고 디퍼(Go Deeper)'와 '블루 스카이스(Blue Skies)' 등 렌카의 인장이 박힌 밝고 행복한 노래로 가득하단다.
또 한편 영국 아니 세계에서 가장 진보주의적 일간지라 할 수 있는 '더 가디언(The Guardian)'은 얼마 전 한류 그룹 '투애니원(2NE1)' 멤버 씨엘을 집중 조명하면서 기존 스타일 틀에서 벗어난 그녀의 '우주적이고 몽환적인' 비트를 극찬했다.
앞서 언급한 렌카의 노래 제목들처럼 우리 모두 각자가 전무후무(前無後無)하고 유일무이(唯一無二)하게 이 세상에 태어난 '유니크'한 존재들이라면 모든 틀을 깨고 벗어나 우리 내면의 우주 속으로 깊이 들어가 아름다운 코스모스의 푸른 창공 '블루 스카이스'로 자유롭게 날아볼거나. 국가와 민족, 인종과 성별, 종교와 이념, 직업과 계층, 또는 학벌이나 지방색, 심지어는 가족이라는 인연의 사슬까지도 끊어, 모든 틀을 다 깨부수고 말이어라.
어쩜 이것이 바로 현재 코로나바이러스가 인류에게 주는 엄중한 지상명령 '사회적인 거리 두기 (멀리하기)'의 최후통첩 (ULTIMATUM)이라는숨은 메시지(Hidden Message)이리라.
2015년 개봉된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이 있다. '토이 스토리' 시리즈, '니모를 찾아서,' '월ㅡE,' '업' 등 걸작 애니메이션을 만든 픽사의 작품으로, 2009년 '업'으로 노인의 이루지 못한 꿈과 소년의 부푸는 꿈을 수천 개의 풍선을 달고 날아다니는 집으로 형상화해 극찬을 받은 피터 닥터(Peter Hans Docter 1968 - ) 감독이 연출한 것이다.
"제 딸이 11살 때였어요. 굉장히 엉뚱하고, 창의적이며, 쾌활한 성격의 아이였는데 이 아이가 갑자기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아이로 바뀌더라고요. 그때 생각한 거죠. 내 딸의 머릿속에 어떤 변화가 생긴 걸까 하고요. '인사이드 아웃'은 이런 감정들(내 아이 머릿속/ 가슴속 감정들을) 의인화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한 영화입니다."
2015년 6월 26일 서울 성동구 한 극장에서 열린 화상 기자간담회에서 "사람들이 감정을 공유하고, 관계를 쌓아가면서 더 풍성해지는 삶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밝힌 닥터 감독의 말이다.
이 영화에서 다룬 기쁨, 슬픔, 분노, 반항, 경계심, 5가지 감정 중에서도 특히 '슬픔'의 중요성을 그는 강조했다. "모두가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슬픔이 없는 삶은 없다. 슬픔은 인간이 서로에게 의지하게 하며 공동체 의식을 살아나게 하는 감정이다"란 설명이었다.
우리 뇌가 과거 기억을 편집한다고 하듯이 우리가 감지하는 '현실'이란 것도 편집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선별해서 우리가 감지하게 되는 현실을 편집할 수 있지 않을까. 몇 년 전 표절 시비에 휘말린 신경숙 작가는 필사(筆寫)로 문학수업을 했다는데, 2015년에 출간된 고두현 시인의 '마음 필사'란 책이 있다.
잡다한 감정 중에서 어떤 감정에 집중하는가에 따라 우리 각자의 현실도 달라지는 것이리라. 예를 들어 여름 바캉스 계절을 맞아 시원한 바닷가나 경치 좋은 산장으로 휴가를 간다고 하자. 가는 길에 또는 행선지에 도착해서 유쾌한 일도 불쾌한 일도 겪게 되겠지만 어떤 일에 마음 쓰느냐에 따라 우리 여행 자체가 즐겁거나 그렇지 못한 것이 될 수 있다. 우리 '마음 필사'를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현실'을 편집하게 되는 것이리라.
우리 생각 좀 해보면 모든 것이 대조적이고 상대적이 아닌가. 어둠이 있어 빛이 있고, 슬픔이 있어 기쁨이 있으며 죽음이 있어 삶이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전자(前者)에 집착할 때 '지옥'이 되고 후자(後者)에 치중할 때 '천당'이 되는 것이리.
자, 이제, 85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얻게 된 '결론(?)'으로 한 코스미안의 '반시론反詩論을 개진開陣해보리라.
1837년 출판된 단편작으로 한국에선 <벌거벗은 임금님>(El vest it nou de l'Emperador/The Emperor's New Clothes)으로 알려진 덴마크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Hans Christian Andersen(1805- 1875)의 민속 동화에 나오는 어린애처럼, 아니 모든 천둥 벌거숭이 어린이들 같이, 타고난 반골기질 때문인지, 나 또한 '성상聖像/우상偶像파괴자破壞者 iconoclast/ 이단자異端者 contrarian/반권위反權威 자유사상가自由思想家 libertarian 답게 아주 어릴 때부터 '시인'이란 칭호稱號에
생리적인 알르레기성 거부반응이 있있다.
세상에 '시' 쓰는 사람이 따로 있을 수 있을까. '시인'은 시만 쓰는 사람일까.
실제로 삶을 살아보는 대신 사는 시늉만 하면서 고답적으로 문화적인 귀족 특권층으로 행세하는 '이슬 먹고 구름똥 싸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리움'이 준 말인 '글'과 '그림'은 종이나 화폭에다 펜과 붓으로 쓰고 그리는 게 아니고 인생이란 바탕에다 삶이라는 필체로 사랑의 피와 땀과 눈물로 쓰고 그리는 것이라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아무리 훌륭한 문학이나 예술 작품이라도 한없이 무궁무진하도록 경이롭고 신비로운 우주 자연 만물과 사랑으로 숨쉬고 사는 삶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믿게 되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실물'보다 그 '모조품'을 더 애지중지 하는 걸 이제껏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니 삶이 산문散文 prose 이라면
사랑은 시詩 poetry 가 되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