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비단길
1. 흉노의 멸망과 몽고의 탄생
동서양의 문화와 문명의 교류는 비단길에서 시작되었다. 문명의 길을 연 것은 흉노(돌궐突厥)이고 문명을 교류시킨 것은 서하국(西夏國)이며 문화를 교류 발전시킨 것은 몽골(蒙古) 제국이다. 그들의 뒤엔 낙타를 탄 색목인(色目人) 상인이 있었다.
11.2세기 동양은 신비의 세계였다. 동서양의 문화가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를 가로막는 톈산산맥과 카라코람산맥, 그리고 타클라멘트 사막이 거대한 장벽이었다. 이 장벽을 허물고 동서문화를 교류시킨 것은 흉노의 서하인이었다.
기원전 동양의 맹주는 흉노였다. 흉노가 한나라에 정복당하여 3갈래로 분산되었다. 서쪽으로 진로를 찾아간 서흉노와 동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한 동흉노, 몽골 평원으로 정착한 원흉노였다. 서쪽으로 진로를 찾은 흉노(훈족)는 동유럽과 이슬람, 투르크로 진출했고 몽고로 정착한 원흉노는 몽골과 돌궐, 거란 민족으로 존치했으며 동북으로 간 흉노는 조선과 여진으로 자리를 잡았다.
거대 흉노를 정복한 한나라는 당나라로 번창하여 송나라로 맥을 잇다가 다시 동북 흉노 여진의 대공세로 멸망하고 말았다. 여진의 금나라는 명을 치고 명은 북송 남송, 그리고 서하로 분산되었다. 대전환기의 막강한 세력은 북 흉노의 여진이었다. 여진은 거란을 치고 금나라를 세우면서 중원은 다시 흉노의 나라가 되었다. 여진은 송을 치고 서하를 압박하여 몽고를 손아귀에 넣었다. 몽고의 남하 정책은 서하 때문에 번번이 실패하였다. 몽고는 서하와 7번 전쟁을 치러 모두 실패하였다. 오랜 전쟁 끝에 칭기즈칸은 서하를 멸망시켰으나 전투 중에 죽는 비극을 맞았다.
‘몽고인들이여, 서하인을 몰살하라. 개새끼 한 마리도 남기지 말고 죽여버려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그 후도 서하는 몽고인에게 철천지원수였다. 몽고는 서하를 점령하고 금나라와 대전을 치르지만, 금나라 기병대에게 항상 밀렸다. 한편 금나라는 몽고와 손을 잡고 송을 치려는데 몽고가 배신하고 송과 손잡고 금을 공격한다. 금나라는 송. 몽고 2개의 전쟁을 치르다가 1234년 멸망한다.
2. 서하(西夏)인의 비단길
서하는 비단길의 중앙에 선 문명국이었다. 시조 왕은 송나라 이원호이고 백성은 퉁구스, 티베트, 돌궐(거란) 그리고 몽골인이었다. 서하는 사막과 고산준령에 있는 나라지만 동서문명이 교합하는 문명국이었다. 서하는 어떤 나라인가? 여진의 금나라에 망해 서역으로 도주한 거란인과 송나라가 망하여 서역으로 도주한 북송 인들이 합작하여 만든 나라이다. 민족은 거란(돌궐) 민족이고 통치자는 송나라 인이었다. 그러나 몽고는 서하를 정복하고 문화와 역사를 없애버렸다.
중앙아시아 서역 사람들은 중국의 문명을 동경하고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거대한 산맥과 사막의 자연 장애로 길이 막혔다. 몽고 역시 남하를 꿈꿨지만 늘 서하에 막혀 진출을 못 했다. 서하는 동양의 문화를 서역으로 뻗게 하는 길을 열어 부를 축적하였다. 비단길을 열어 동·서 무역을 관장한 신비로운 나라였다. 실크로드를 통해 색목인 (푸른 눈)상인들이 대거 서하로 몰려 금나라로 들어갔다. 색목인은 위구르인, 탈루스인, 아랍인, 그리스 로마인, 중앙아시아인, 유럽인, 소위 푸른 눈을 가진 무역상들이다.
서하는 낙타를 타고 사막과 산맥을 넘어온 색목인의 무역을 허용하였다. 이들은 송나라, 금나라, 몽고로 나가서 장사를 하였다. 소위 색목인 상인, 또는 이슬람 상인이라고 한다. 그 대표적인 상단이 베네치아의 상단이었다.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는 몽고에서 13년을 거주하면서 비단길의 문화를 소개한 장사꾼이었다.
서하인은 동양도 아니고 서양도 아닌 신비로운 다민족 국가였다. 몽고인을 철저하게 괴롭힌 서하는 결국 몽고에 처참하게 망하고 비단길은 몽고인들이 차지하였다. 금나라는 무역 상권을 빼앗기 위하여 서하와 몽고를 위협하였다.
3. 몽고제국은 색목인이 세웠다.
기원전 흉노는 방대한 제국이었다. 몽골 제국은 흉노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이다. 투멘 왕의 전성기를 아들 선우가 이어받아 전성기를 누렸으나 BC 201년 한나라에 망하고 동서로 갈라져 사려졌다. 서쪽으로 간 흉노는 투르크(돌궐)와 볼가강 변에서 훈족으로 힘을 키웠다. 동유럽을 정복하고 게르만 민족을 대이동 시켜 로마를 멸망시켜 ‘신의 채찍’이란 아틸라는 흉노의 후예이다. 몽고 초원에 남아 있던 원 흉노는 세력을 구축하여 몽고를 탄생시킨 테무친은 끈질긴 싸움으로 서하를 정복하고 그들을 앞세워 금나라를 치고 몽골 제국을 창설하였다.
1206년 칭기즈칸 테무친은 1215년 금나라를 정복하고 1225년 사마르칸트를 정복한다. 1227년 서하와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죽는다. 그는 사망하기 전에 네 아들 장자 (주치). 차자(차카타이), 3자(우구데이), 4자(톨루이)를 불러 세계 정복을 명하였다.
“내 후계자는 3남 우구데이로 낙점한다.”선언하자 장남 주치가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 몽고의 전통은 장남이 이어받는 것이 원칙이 아닌가요?,“무슨 소린가? 네놈은 우리의 혈통이 아니란 것을 세상이 다 안다. 그렇다면 내가 장자이다. 그러니 내가 왕업을 승계받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2남인 차카타이가 대항하였다. 장남 주치가 칼을 뽑아 들었다. “어디서 그딴 소릴 하느냐? 네놈을 죽이고 말 것이다.”순간 차카타이도 칼을 빼 들었다. 두 사람이 난투가 벌어졌다. 칭기즈칸이 호통을 쳤다. “지혜는 없고 용맹만 있어서 네놈들은 안 되는거야. 대업은 3남 톨루이에게 승계하니 네놈들은 스스로 초원을 정복하여 나라를 세워라.”
칭기즈칸은 3자인 우구데이(오고타이)에게 왕권을 승계하였다. 우구데이는 2대 칭기즈칸이 되었다. 그리고 아들 카이자에게 황권을 물러주었다. 그리고 카이자의 공주 쿠툴룬은 중앙아시아 제국의 왕과 결혼하여 식민지 확장에 나선다.
그리고 장남, 차남, 4남은 영토개척에 나선다. 1225년 4남 홀라구는 서아시아. 러시아 정복에 나섰고 주치와 아들 바투는 남러시아 정복에 나섰으며 오고타이(우구데이)는 금을 멸망시키고 1241년 폴란드와 헝거리를 정복하였다. 주치 아들 바투는 1243년 킵차크 칸국을 건설하고 톨루이 아들 뭉케는 1252년 이슬람의 서아시아 이락크를 공격하여 네 아들과 손자들이 대제국을 만들었다. 몽고는 1258년 이슬람 정복, 1279년 남송 정벌, 그리고 대원으로 국명을 바꾸어 4칸 제국을 통치하였다. 그리고 칭기즈칸의 8명의 딸은 점령국의 왕비가 되었다.
4. 칭기즈칸의 색목인 여인들(공주와 며느리)
몽골 제국의 점령행로는 비단길을 만들었다. 그런데 비단길의 주인은 색목인 상인들이었다. 몽고는 색목인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정복하였다. 마르코 폴로의 기행문에 보면 원나라 궁엔 색목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몽고 전통을 교육받는 식민국의 왕자와 인재들이 벌떼처럼 웅성거렸다. 이들은 몽고의 통치이념을 전수받고 돌아가서 군주로 거듭났다.
몽고는 서하인을 앞세워 비단길 무역로를 열었다. 몽고의 공주와 며느리가 비단길 무역과 상권을 휘어잡는 앞잡이였다. 그들 공주와 며느리들은 자국의 경제력을 몽고로 집약하였다. 바로 이슬람 상인과 중앙아시아 상인들에게 동양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몽고는 막강한 상인들의 경제력과 금나라 기마병을 앞세워 초원을 정복하고 서쪽으로 세력을 뻗어나갔다. 정복 세력을 이끈 것은 색목인 상인들이었다.
초원의 500만 몽고 민족이 세계를 지배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이들 색목인의 경제력이 뒷받침했기 때문이고 말을 타고 질주하는 금나라 기병대의 기마 전술과 중대한 전투 무기는 금나라식 거증기와 포탄 투척기 및 성곽을 부수는 기계의 활용과 목축민의 풍부한 식량이 있어서 가능했다.
몽고인은 ‘점령지는 소유할 뿐 통치는 하지 않는다.’점령은 하되 통치는 현지인에게 맡겼다. 따라서 몽골 제국의 엘리트들은 몽고 인이 아니고 색목인들이었다. 그들을 잘 활용한 인물들이 칭기즈칸의 여인들이었다.
테무친 가계의 부인들은 거의 색목인들이었다. 몽골 제국은 크게 4개의 율루스와 57개 소국을 통치하였다. 4칸국은 오고타이 칸국(중원. 금 몽고), 일 칸국(서아시아), 차카타이 칸국(중앙아시아), 킵차가 칸국(남러시아)에 100만 명의 몽고인은 지배계층이고 4칸국의 행정통치는 100만의 색목인들이 맡았다. 그들이 통치한 부속국 인구는 약 7,000만 명이었다.
몽골 제국의 사위와 왕비들은 거의 색목인들이었다. 칭기즈칸의 부인 포르테는 푸른 눈의 퉁그스(서하) 여인이었다. 그리고 칭기즈칸의 공주들은 거의 색목인과 결혼하여 그곳의 통치자가 되었다.
칭기즈칸의 아들들은 모두 칸국의 영장이 되었고 딸들은 색목인과 결혼하여 실크로드를 열어 몽골 제국의 경제를 부강케 하였다. 큰딸 알라카이는 고비사막의 옹구스 통치자와 결혼하여 친정을 도왔고 둘째 딸 알알춘은 위구르 왕과 결혼하여 실크로드의 경제권을 장악하였고 세째 톨라이는 이슬람 칸투의 우르크족 왕과 결혼하여 천산산맥의 무슬림을 다스렸고 넷째 치체겐은 바이칼의 오리이트족의 족장과 결혼하여 시베리아 경제권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칭기즈칸의 친족의 딸들은 16국 식민지 국왕의 왕비로 보내 막강한 권리를 확보하였다. 예를 들어 고려는 충자 6명의 왕은 몽고의 공주와 결혼하였다.
5. 실크로드 제국의 부활이 예상된다.
역대 비단길에서 이슬람, 오스만 투르크, 몽고제국이 탄생했다. 방대한 몽골 제국은 162년 만에서 망하고 말았다. 이유는 방대한 제국을 통치할 주체 문화가 없었다. 다민족 때문에 흥했고 다민족 때문에 망했다. 그러나 다시 비단길에서 제국의 탄생이 예상된다.
몽고 식민지배를 받은 국가들이 그 문화의 세력권에서 부활을 꿈꾼다. 이슬람 문화와 오스만 튀르크 문화, 제정 러시아 문화 및 동유럽의 문화의 바탕이 몽고이며 중국 동남아 인도, 한국 등 세계 70여 개 몽고 식민지 나라들도 몽고제국의 얼을 지니고 있다. 몽고는 1206년에 건국하여 1368년에 주원장의 명나라에 망하고 고향인 울란바토르로 돌아간 슬픈 역사를 맞았다. 원나라 마지막 왕 순치제의 황후 기황후는 동몽고를 만들어 그 아들 티모르는 사마르칸트를 점령하고 새로운 부활을 꿈꾸었다.
몽고의 부활은 티모르 왕의 공주 만두하이가 동몽고 티모르의 새로운 몽고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녀가 몽골 제국의 부활을 일으켰으나 대제국의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젠더, 페미니즘의 평등이라는 이상을 실현하였다. 그러나 다시 만두하이 후예가 실크로드에서 몽고 정신의 부활을 일으키고 있다.
[김용필]
KBS 교육방송극작가
한국소설가협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마포지부 회장
문공부 우수도서선정(화엄경)
한국소설작가상(대하소설-연해주 전5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