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0일자 미주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주말에세이] 칼럼 ‘금과 알코올’ 필자 김홍식 내과의사-수필가는 술의 해독을 의학적으로 설명한 후 “당신은 필요한 존재”예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해 주세요.” 라는 말은 그 지독한 술도 끊을 수 있는 용기를 준다. 회복의 소망은 사랑의 종소리를 타고 온다는 ‘만병통치약 ‘사랑’을 이렇게 처방하고 있다.
[주말에세이] ‘금과 알코올’
홀리데이 시즌이 다가 오고 있다. 보고 싶었던 사람들과 만나는 기쁨 에 설레 인다. 기쁨에 들떠서 술을 많이 마시는 분들이 적지 않아 염려된다. 요즘 우울한 상황이 계속되어서인지 10대 사망 원인 안에 들어가는 간 질환 중, 알코올에 의한 간 경화 환자들의 사망을 병원 에서 많이 보고 있다. 간이 굳어지면 중요한 역할인 대사와 해독 작용, 영양소의 가공과 저장, 혈당 조절, 단백질 합성, 호르몬 조절, 면역 기능 등이 마비되면서 위험에 이르게 된다.
일반적으로 간경화라 부르는 ‘간 경변’은 간에 염증이 생겼다가 사라 지는 과정이 장기간 반복되면서 간세포가 손상돼 간이 점차 굳어지는 질환을 말한다. 원인으로는 만성 B형, 알코올, 만성 C형 간염이 있으 며 그 외에도 지방간염, 자가 면역성 간염, 경화성 담관염 및 유전질환 도 있다. 그중에서 알코올은 다른 원인에 의한 만성 간 질환을 빠르게 악화시키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도 간경변증을 일으킬 수 있다. 비만 이나 2형 당뇨, 지방 과다섭취도 간경화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건강 한 섭생이 중요하며 간경화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간염에 대한 치료, 금주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알코올은 간경화 뿐 아니라 암을 유발하는데, 유럽성인 남자 10명중 1명(10%), 여자 30명중 1명(3%)이 술로 인해 암에 걸린 것으로 나타났다. 남자는 식도암, 후두암, 인두암, 대장암, 직장암 순으로 많이 나타났고 여자는 대장암보다 유방암의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났다. 이유는 술의 주성분인 알코올이 인체가 흡수한 발암 물질을 녹여 점막이나 인체 조직에 쉽게 침투할 수 있게 해주고 또 간이 알코올 분해를 위해 만드는 강한 독성물질인 아세트알데히드가 DNA의 복제를 방해하거나, 활성산소를 만들어 DNA를 파괴해 암을 직접적 으로 일으키기 때문이다.
술은 높은 열량을 가지지만 단백질, 비타민 및 무기질 등 영양학적 으로 중요한 성분은 하나도 없다. 곡물이나 과일의 즙이 발효해서 생긴 것이 발효주인데 대개 1~8%의 알코올을 함유하며 함유량이 높아도 12% 정도이다. 효모가 생존할 수 있는 최대 알코올 함유량이 13%이기 때문이다. 알코올의 농도가 급격히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8세기경 이슬람 연금술사들과 화학자였던 자비르가 값 싼 금속을 금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다 혼합된 물질의 끓는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어 증류기를 발명하면서 부터이다. 알코올은 끓는점이 섭씨 78도이고 물은 100도 이기 때문에 발효주를 가열하여 물이 끓기 전에 증기상태로 올라오는 알코올을 따로 모아 가공한 증류술 을 만들게 된다. 그 당시에는 마시기 위한 것이 아닌 향수와 다른 화학 물질의 원료로 사용되었다. 13세기 프랑스 의학자였던 빌뇌브 교수가 증류주를 만드는 방법을 더욱 발전시켰고 증류주가 만병통치 약이라는 뜻의 ‘생명의 물’ 이라 이름 붙였다.
14세기 중반 창궐해 유럽 전체 인구 3분의 1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페스트의 공포는 알코올의 확산을 부추겼다. 페스트의 원인도 모르고 치료제가 없는 상황에서 알코올이 이 불가사의한 질병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인해 알코올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때까지 알코올은 약용이 목적이었다. 그 이후 인류는 다양한 곡식, 과일과 심지어 선인장의 뿌리의 발효주까지 증류시켜 다양한 술들을 만들어 냈다.
값싼 금속으로 귀한 금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연금술사들은 금 대신 독한 알코올을 만들어 내었다. 인간이 좋아하는 금보다도 쾌락을 주는 알코올은 더욱 영향력이 있었고 더 즐길 수 있기 위해 계속 도수가 높은 알코올이 필요한 것이 우리들의 역사였다. 간경화, 암, 각종 부작용으로 인간을 파괴시키는 알코올의 위력에 공포감을 느낀다. 알코올 중독자들도 술을 끊으려고 하지만 쉽지 않아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무엇이 깊은 수렁에서 빠져 나오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느 분의 경험담을 들었다. 그와 가족들은 아버님의 심한 알코올 중독으로 십 수년 간 고통을 당했는데, 술독에 빠져있던 분께 “아버님, 저 이제 대학가서 공부해야 되는데 아버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아버님 사랑 합니다”라고 간절히 이야기 했더니, 술 중독 아버지가 그 다음날로 술을 끊고 일하러 나가기 시작하였고 아들을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신은 필요한 존재”예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해 주세요.”라는 말은 그 지독한 술도 끊을 수 있는 용기를 준다. 회복의 소망은 사랑의 종소리를 타고 온다.
<김홍식 내과의사∙수필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주기도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리라.
기독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임한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있사옵나이다.아멘.
The Lord’s Prayer
Our Father, who art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us our trespasses as we forgive those who trespass against u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Amen.
이를 본떠 ‘코스미안의 기도문’을 이렇게 제안해보리라.
생각건대
삶의 다른 한쪽
죽음을 의식하고
사는 것 이상의
종교도
죽음을 안고
사는 삶을
더할 수 없이
잘살아보는 것
이상의 예술도
사랑으로 숨 쉬고
사는 사랑 이상의
삶도 없다면
정녕 삶의 본질이
사랑이 아니더냐.
삶의 숨결이 사랑이요.
삶의 날개가 사랑이요.
삶의 승화가 사랑이요.
삶의 꿈꾸기 사랑이요.
삶의 완성이 사랑이요.
삶의 알파와 오메가도
오로지 사랑 아니더냐.
사랑을 모르고 사는 억만년보다
사랑하는 한 순간이 그 얼마나
한없이 더 보람되고 복된 것이랴.
미칠 바에는
삶에 미치고
사랑에 미치리라.
취할 바에는
삶에 취하고
사랑에 취하리라.
정말
미치도록
취하도록
죽도록.
Wasn’t love
the essence of life,
indeed?!
Breaths of life were love.
Wings of life were love.
Dreams of life were love.
Completion of life was love.
Weren’t the beginning and
the ending of life love?!
I’d rather live for a moment in love
than for million years out of love.
Yes, this would be infinitely more blissful.
Were I to be mad,
I’d get mad in living.
Were I to be mad,
I’d get mad in loving.
Were I to be drunk,
I’d get drunk in life.
Were I to be drunk,
I’d get drunk in love.
Really, madly, drunkenly
to death!
지난해 2020년 11월 8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칼럼 글 옮겨보리라.
[이태상칼럼] ‘마시자 삶의 술, 사랑을 (Let’s Drink Love, the Wine of Life)’
“시인의 반란(反亂/叛亂)은 어김없이 근본적으로 보수적(保守的) 이다. 정치적으로가 아니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 정신적으로, 그것 도 땅과 공기, 해와 달과 별, 또는 인간의 꿈 같은, 주어진 것들에 대한 깊고 심원(深遠)한 사상적 경외심(敬畏心)에 찬 보수적이란 말이다. The revolt of the poet is invariably conservative at its roots. Not politically conservative, but imaginatively conservative, with a profound regard for what is given, as earth or air, sun or moon or stars, or the dreams of man.” 미국의 시인 시드 코만(Cid Corman1924-2004)의 말이 다.
옛 페르시아의 시인 오마 카얌(Omar Khayyam, 1048-1131)은 이렇게 노래했다.
“이 순간에 행복하라. 이 찰나가 네 삶이니. 시집 한 권, 술 한 병, 빵 한 덩어리 그리고 그대가 나뭇가지 아래 내 옆에 앉아 노래 한다면, 이 황막(荒漠)한 광야(廣野/曠野)도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지상(地上/至上)의 천국(天國)이 되리니.Be happy for this moment. This moment is your life. Here with a Loaf of Bread beneath the Bough, A Flask of Wine, a Book of Verse - and Thou Beside me singing in the Wilderness - And Wilderness is Paradise enow.”
“아, 우리가 맛볼 수 있는 걸 만끽하리. 술도 없고, 노래도, 노래 부를 사람도, 끝도 없는, 흙먼지 티끌로 우리 또한 돌아가기 전에! Ah, make the most of what we yet may spend, Before we too into the Dust descend; Dust into Dust, and under Dust to lie Sans Wine, sans Song, sans Singer, and — sans End!”
“사려(思慮) 깊은 영혼(英魂/靈魂)은 고독이라는 열쇠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베일 속으로 침잠(沈潛)하리니. The thoughtful soul to solitude retires. There was the Door to which I found no key; There was the veil through which I might not see.”
“어제, 이날 이때의 광증(狂症)이 생겼어라. 내일의 침묵 (沈默) 또는 승리(勝利)의 개가(凱歌)
절망(切望/絶望) 의 비가(悲歌)도. Yesterday This Day’s Madness did prepare; Tomorrow’s Silence, Triumph, or Despair:”
“마시자. 네가 어디서 왔으며 왜 왔는지 모르나니, 마시자. 네가 어디로 왜 가는지 모르나니. Drink! for you know not whence you came nor why: drink! for you know not why you go, nor where.”
“움직이는 손가락은 글씨를 쓰고 글이 쓰여진 다음엔 없어진다네. The moving finger writes, and having written moves on.”
“너의 모든 경건한 신앙심이나 너의 모든 슬기로운 지략(智略) 으로도 이미 쓰여진 글씨 한 줄의 반도 지울 수 없다네. Nor all thy piety nor all thy wit, can cancel half a line of it.”
“사람들이 창공(蒼空)이라 부르는 거꾸로 뒤집혀 반전(反轉)된 푸른 하늘 창궁(蒼穹) 아래 벌레처럼 기면서 살다 죽는 우리가 아닌가. 그렇다고 허무한 이 창공으로 도움을 청해 우리 두 팔 뻗어 손을 벌리지는 마세. And that inverted Bowl they call the Sky, Whereunder crawling coop'd we live and die, Lift not your hands to It for help — for It As impotently moves as you or I.”
사람들이 자신들의 간절함으로 품는 세속적인 희망도 잠시 번갯불 처럼 번쩍 빛나다가 사막 모래밭에 떨어지는 눈발 조각같이 곧 스러지는 것이리. The Worldly Hope men set their Hearts upon Turns Ashes — or it prospers; and anon, Like Snow upon the Desert's dusty Face, Lighting a little hour or two — is gone.”
“그러니, 자, 네 잔을 채우게. 겨울이 지나고 다가오는 봄 불볕에 자네가 입고 있던 참회(懺悔)의 겨울옷을 태워버리게. 시간이란 세월의 새가 잠시 날개를 펴 펄럭이다 날기 시작하네. Come, fill the Cup, and in the fire of Spring Your Winter-garment of Repentance fling: The Bird of Time has but a little way To flutter — and the Bird is on the Wing.”
시인일 뿐만 아니라 수학자, 천문학자, 철학자이기도 했던 오마 카얌은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도 남겼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이리.
어떻게 사랑할지를 모르는 가슴(마음)이라면,
사랑에 취할 줄 모르는 가슴이라면.
사랑을 하고 있지 않다면 어찌 네가
눈부신 찬란한 햇살을 그리고 또 부드럽게
몽환적(夢幻的)인 달빛을 보고 감상할 수 있으리.”
“천 가지 후회를 가슴에 안고 우리는 떠나간다네.”
“술을 마시고 달을 쳐다보며 저 달이 그동안 수많은 문명과 문화가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을 생각해보게.”
“네 가슴에 사랑의 장미꽃 심었을 때 네 삶은 헛된 것이 아니었으 리.”
“나는 사랑하는 연인들의 행복한 한숨 소리를 소중히 여기지만 위선자들이 지껄이는 기도소리는 경멸한다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네 사랑이 술병이 술잔 사랑하듯 하기를 나는 빈다네. 살펴보게나, 알알이 포도알들이 제 소중한 피를 나누 듯, 주고받는 입술과 입술이 어떻게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지를,”
“사랑하는 나의 님이시여, 새가 죽을 준비할 때처럼 나도 내 슬픔 일랑 숨기리오.”
“우리는 사랑의 길을 가다 죽으리. 운명 아니 숙명의 발길이 우릴 짓밟으리. 그래, 나를 유혹하는 젊은 여인이여,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의 입술을 내게 주오. 내가 먼지 티끌로 돌아가기 전에”
이런 사랑의 한 구도자(求道者)로 현대 서양 문학사상 가장 정열 적이고 감동적인 시를 썼다는 영국 웨일스 출신 시인 딜런 토마스 (Dylan Thomas 1914-1953)를 들 수 있으리라.
특히 죽음과 종교와 Sex 그리고 사랑의 여러 가지 무드와 스타일 로 무아(無我)의 황홀지경(恍惚之境)에서 부르짖는, 고음(高音) 으로 오르기도 하고 비통(悲痛) 침울(沈鬱)한 저음(低吟/低音) 으로 가라앉기도 하는 언어의 발음(發蔭/發音)과 발성(發聲)에 매료(魅了)되고 집착 했던 그는 미국 순회강연 도중 39세로 그의 삶을 일찍 마감했다.
당시 검시관(檢屍官)의 진단서(診斷書)에 기재된 사망 이유는 그가 하룻밤에 스트레이트로 위스키를 연거푸 열여덟 잔이나 마신 그의 ‘두뇌(頭腦)에 대한 모독(冒瀆)’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전에 쓴 ‘그리고 죽음이 지배하지 못하리라 (And death shall have no dominion, 1933)’에서 그는 이렇게 예언했다.
“미칠지라도
그들의 정신은
말짱할 것이오.
바다에 빠져도
그들은 다시
떠오를 것이오.
연인들은 없어져도
사랑은 남을 것이오.
그리고 죽음이 결코
지배하지 못하리라.
And death shall have no dominion
“Though they go mad
they shall be sane,
Though they sink through the sea
they shall rise again;
Though lovers be lost
love shall not;
And death shall have no dominion.)”
마치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로마서 6장 9절) "Knowing that Christ being raised from the dead dieth no more; death hath no more dominion over him.” (Romans 6:9) 라고 했듯이…
그가 술(alcoholic spirits)에 취했었든 아니면 성령(Holy Spirit)에 취했었든 간에 일면으로는 주정뱅이 협잡 사기꾼 식객(食客)이었던 딜런 토마스도 예수처럼 그가 살아생전에는 꿈도 못 꾸던 영광(榮光/靈光)을 사후(死後)에 누리게 되었으니 말이어라.
그의 산문(散文)과 희곡(戱曲)을 통해 유감없을 정도로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탕진(蕩盡)한 시인(詩人)으로서 게걸스러운 그의 영혼은 그가 정말 성령(性靈/聖靈)에 취했었든 안 했었든 간에 성신(聖神/性腎)의 거룩한 제단(祭壇)에 펼쳐지는 시심(詩心)의 향연(饗宴/香煙)에 참석하게 되어 흔희작약(欣喜雀躍)하였으리.
영국 런던 테임즈 강가에 자리한 웨스트민스터성당 ‘시인(詩人)의 코너 (Poets’ Corner, the name traditionally given to a section of the South Transept of Westminster Abbey because of the high number of poets, playwrights, and writers buried and commemorated there.)’에 한 자리를 차지, 그의 기념비가 1982년 건립되었다. 그것도 그에 못지않게 방종(放縱) 방탕(放蕩)했던 19세기 낭만주의 바람둥이 시인 바이런경(Lord George Golden 1788-1824)의 기념비 바로 옆에.
‘코스미안의 기도문 The Cosmian’s Prayer’
생각건대
삶의 다른 한쪽
죽음을 의식하고
사는 것 이상의
종교도
죽음을 안고
사는 삶을
더할 수 없이
잘살아보는 것
이상의 예술도
사랑으로 숨 쉬고
사는 사랑 이상의
삶도 없다면
정녕 삶의 본질이
사랑이 아니더냐.
삶의 숨결이 사랑이요.
삶의 날개가 사랑이요.
삶의 승화가 사랑이요.
삶의 꿈꾸기 사랑이요.
삶의 완성이 사랑이요.
삶의 알파와 오메가도
오로지 사랑 아니더냐.
사랑을 모르고 사는 억만년보다
사랑하는 한순간이 그 얼마나
더 한없이 보람되고 복된 것이랴.
미칠 바에는
삶에 미치고
사랑에 미치리라.
취할 바에는
삶에 취하고
사랑에 취하리라.
정말
미치도록
취하도록
죽도록.
Wasn’t love
the essence of life,
indeed?!
Breaths of life were love.
Wings of life were love.
Dreams of life were love.
Completion of life was love.
Weren’t the beginning and
the ending of life love?!
I’d rather live for a moment in love
than for million years out of love.
Yes, this would be infinitely more blissful.
Were I to be mad,
I’d get mad in living.
Were I to be mad,
I’d get mad in loving.
Were I to be drunk,
I’d get drunk in life.
Were I to be drunk,
I’d get drunk in love.
Really, madly, drunkenly
to death!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