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한국의 가치는 무엇인가? What Are Korean Values?

이태상

 

2021년 11월 23일자 미주 뉴욕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미국은 지금] 칼럼 '흔들리는 미국의 가치' 필자 김동찬 시민참여센터 대표는 "안타까운 것은 미국의 가치인 '평등에 기초한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대신해서 '총'이 더 중요한 미국의 가치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라며 "총기 휴대를 주장하면서 평등을 부정하고 인종주의를 선동하고 소수계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는 행위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의 가치인 평등에 기초한 민주주의와 인권을 수호하기 위한 노력을 중단해서는 안될 것이다."라고 칼럼 글 을 맺고 있다.

만년설로 생각 했던 북극의 얼음이 지구 온난화로 빠르게 녹고 있다. 그로인해 북극을 짓누르고 있던 얼음이 녹아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 균형을 이루고 있던 대륙의 판들이 움직이게 되면서 곳곳에서 지진과 화산 폭발이 일어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육지와 바다 속 수많은 곳이 사막으로 변하고 있고, 더워진 지구 온도로 인해서 농작물과 바닷속 어류들 생태계가 급격하게 바뀌면서 머지않아 인류는 심각한 식량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지구의 온도 상승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연쇄 작용과 나비 효과는 인류가 예상하지 못했던 재난에 직면하게 하고 있는데, 지구상 유일 강대국 미국이 가치의 혼란으로 힘이 빠지면서 또 다른 혼란들이 세계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인류는 지금 국가와 국가간, 그리고 각 나라 안에서는 인종, 계층, 연령, 성별로 분열하고 대결하는 양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지금 세계는 미국과 유럽이 한 편이고 중국과 러시아가 한 편이 되어서 세상의 주도권을 다투고 있다. 불과 수년 전만 하더라도 감히 미국에 대항할 나라가 없었고, 중국과 러시아도 늘 미국의 눈치를 보고 꼬리를 내렸는데 이제는 경제와 군사력 모두에서 서로 물러서지 않는 대결 국면이다. 지구온도 상승으로 북극의 얼음이 녹아서 연쇄작용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지구상 절대 강자였던 미국의 힘이 빠지면서 이런 연쇄작용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의 내부도 사실상 국제사회처럼 온통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절대 인구수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백인들의 주도권이 흔들리면서 인종혐오에 기반한 백인민족주의가 급부상하고 있다. 이런 백인민족주의의 부상은 인종주의, 반 이민, 반동성애, 총기 소유의 자유 등을 주장하면서 백인 거주지역을 중심으로 빠르게 정치세력화를 하고 있었고, 여기에 트럼프 전 대통령이 합류하면서 합리적 보수의 공화당을 백인민족주의 공화당으로 바꾸었다. 사실 이런 일들은 과거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역사적으로 경험했던 현상이다.

이 와중에 백인민족주의자들의 무력이라 할 수 있는 민병대에 힘을 실어 주는 결정적인 판결이 나왔다. 지난해 8월 25일 인종차별 항의 시위대에 총을 쏴 2명을 숨지게 한 백인 청년 리튼하우스에게 위스콘신 주 케노샤 카운티 법원은11월19일, 정당방위라는 무죄 평결을 내렸다. 리튼하우스는 일리노이주에 살면서 불법으로 공격용 소총을 구매하여 위스컨신으로 건너가 시위대에 발포를 하여 2명의 백인 남성을 죽이고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러면서 자신은 무법의 폭력시위를 좌시할 수 없어서 무장을 한 자경단이고, 또 그들의 공격에 살기위해서 정당방위로 총을 쏘았다고 했다. 그리고 리튼하우스는 백인 민병대와 수많은 공화당 정치인들 심지어 트럼프 전대통령의 찬사를 받았고 백인 우월주의 사회의 영웅이 되었다.

이 판결은 중무장한 백인민병대가 유색인종들을 마음 놓고 공격할 수 있도록 오해하게 할 수 있고, 앞으로의 시위는 비무장 시위가 아니라 무장 시위로 번질 수 있어서 자칫 인종간 분쟁이 발생했을 때 순식간에 무력충돌을 일으키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미국의 가치인 “평등에 기초한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 를 대신해서 “총”이 더 중요한 미국의 가치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총기 휴대를 주장하면서 평등을 부정하고 인종주의를 선동하고 소수계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는 행위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의 가치인 평등에 기초한 민주주의와 인권을 수호하기 위한 노력을 중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김동찬 시민참여센터 대표>
   
덴마크가 낳은 세계 최고의 동화 작가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Hans Christian Andersen(1805-1875)의 '벌거숭이 임금님 el vest it de l'Emperador/ The Emperor's New Clothes'에 등장하는 어린애처럼 '임금님 벌거벗었네'를 반복하자면, 애당초부터 '미국의 가치인 평등에 기초한 민주주의와 인권'이란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한 '구두탄口頭彈'이 아니었나.  미국이란 나라가 백인 기독교인들의 '총'으로 세워진 나라가 아닌가.

로마가 몰락하면서 서 유럽이 중세 암흑시대로 접어들었다가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자본주의 물질문명으로 거의 전 세계가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해 자연이 파괴되고 인류가 착취당해오지 않았는가. 

그러니 현재 극심한 기후변화와 코로나 팬데믹으로 전 세계 온 인류가 자멸위기 에 처한 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시점時點에 그 어떤 물질적인 정치나 경제 및사회제도 개혁보다 정신적인 혁명이 시급한 상태이다.  

우리 모두 우주 본연의 원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다름 아닌 우리 동양의 물아일체物我一體 피아일체彼我一體와 우리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홍익만물弘益萬物 그리고 천도교天道敎의 인내천人乃天 곧 코스미안 사상으로 말이다.  

자, 이제, 지난해 2020년 7월 13일자와 지난달 2021년 10월 4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우생이 제시한 '해법' 칼럼 글 둘 옮겨보리라.

[이태상 칼럼] <해법解法은 ‘하나’님이다>

“트럼프 집안에 우리 할아버지가 만들어 논 분열의 분파적 분위기는 나의 작은 삼촌 도널드가 언제나 유영해온 (썩은) 못 물이었고, 이 계속되는 분열의 분단과 분쟁은 다른 모든 가족 희생의 대가代價로 그만을 이利롭게(?) 할 뿐이다.”
 
“The atmosphere of division my grandfather created in the Trump family is the water in which Donald has always swum, and division continues to benefit(?) him at the expense of everybody else.”
 
주注: [이 인용문의 괄호 속 (썩은)과 이利롭게 다음 물음표(?)는 필자가 마음대로, 임의任意, 자의恣意로 삽입 첨가한 것임.]
 
2020년 7월 14일 출간되는 트럼프 대통령의 여 조카 메리 트럼프Mary l. Trump(1965 - )가 그녀의 신간 가족 메뫄(family memoir) ‘(너무 많은) 과잉過剩과 (밑 빠진 독같이 영원한) 불만족不滿足: 어떻게 우리 집안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을 만들었나(Too Much and Never Enough: How My Family Created the World’s Most Dangerous Man)’에서 하는 말이다.
 
이 책 내용을 한두 단어로 줄인다면 ‘독성적毒性的 긍정의 힘’, 영어로는 ‘toxic positivity’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저자 메리 트럼프는 트럼프 대통령의 알콜 중독자였던 맏형 프레드 트럼프 주니어 Fred Trump, Jr. (1938-1981)의 딸로서 임상 심리학 박사(Ph.D. in clinical psychology)이다.
 
이 책을 내가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만천하 세계 모든 사람들이 이미 다 잘 알고 있는 사실들을 새삼 폭로, 진단하고 있는 내용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
 
이것이 어디 비단 한 가정 한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일까. 인류 역사를 통틀어,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부계 사회에서, 그것도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이란 허상虛像/虛想에 사로잡혀 온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지 않으랴!
 
여호와 하나님 할아버지니 알라니 뭐니, 너무도 근시안적이고 소아병적이며 자멸적인 선민사상, 남존여비, 백인우월주의 등등, 우주 자연 만물을 인간의 희생양 제물로 삼아 온 인본주의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결과로 날로 심해가는 기후변화와 자연 생태계 파괴로 인한 오늘날 코로나 팬데믹, 그리고 앞으로 그 이상의 천재지변天災地變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해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너 죽고 나만 살자’는 이 만성 고질병을 치료하기 전에는 백약이 무효, 신음하고 있는 우리 인류에겐 단말마斷末魔의 비명悲鳴만이 있을 뿐이리라.
 
그렇다면 그 근본적인 해법解法은 무엇일까?
 
2014년 3월 15일 출간된 우생의 졸저 ‘무지코: 무지개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온 코스미안’ 서두에 실린 글 ‘온 인류에게 드리는 공개편지-코스모스 바다Open Letter - The Sea of Cosmos’를 아래와 같이 옮겨 보리라.
 
2013년 9월 12일자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페이지에 실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글 ‘러시아로부터 미국의 주의注意를 촉구하는 호소문’을 읽고 나는 극히 외람되나마 전 세계 인류 가족에게 드리는 이 편지를 이렇게 쓰게 되었습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9월 10일 미국 대통령이 전 미국 국민에게 행한 연설문을 신중히 검토해본 결과, 미국 정책의 ‘예외성’을 강조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며 “그 동기야 어떻든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예외적이라고 생각하도록 독려하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그의 적절한 지적에 독자의 한 사람으로 나도 전적으로 동감 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의 모든 존재물이 동물, 식물, 광물 할 것 없이 다 같은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나는 굳게 믿습니다. 유사 이래 인류 대부분의 비극은 두 가지 사고방식에서 기인했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그 하나는 독선독단적인 ‘선민사상(選民思想)’이고 또 하나는 어린 시절부터 세뇌되고 주입되어 온, 백해무익한 ‘원죄의식原罪意識’이라고 나는 봅니다. 우리 동양 선인들의 지혜로운 말씀대로 ‘피아일체彼我一體’와 ‘물아일체物我一體’ 곧 너와 내가, 모든 물체와 내가 하나임을 진작부터 깨달았더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비교도 할 수 없이 훨씬 더 좋아졌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너를 해치거나 도우면 나 자신을 해치거나 돕는 것이고, 자연을 파괴하거나 헤아릴 때 이는 나 자신을 파괴하거나 헤아리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독일의 신비주의자 야콥 뵈메(1575-1624)가 말했듯이 “영원이란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 그 자체가 되는 그 일순간’인가 봅니다.
 
나 자신의 얘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지금은 북한 땅이 되어버린 평안북도 태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차대전 종전으로 36년간의 일제식민지통치가 끝나면서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될 때 나는 남쪽에 있었습니다. 미국과 소련연방 미-소 냉전 긴장의 분출구로 동족상잔의 한국동란이 일어났으며 아직까지도 그 후유증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 아닙니까.
 
요행과 ‘죽기 아니면 살기’의 생존본능에 따라 모든 행운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오다 보니, 세상에 버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12남매 중 11번째로 태어나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한국전쟁 당시 나이 열셋에 집 없는 거리의 소년이 된 나는 어린 나이에 길을 떠났습니다. 삶의 의미와 나 자신의 진정한 자아의식을 찾아서…
 
동양-서양, 남쪽-북쪽, 어디 출신이든 큰 그림에서 볼 때 우리는 우주라는 큰 바다에 표류하는 일엽편주一葉片舟와도 같은 아주 작은 별 지구에 잠시 사랑의 무지개 타고Arainbow of Love 머무는 우주적 나그네 ‘코스미안 Cosmian’입니다.
 
현재 있는 것 전부, 과거에 있었던 것 전부, 미래에 있을 것 전부인 대우주를 반영하는 소우주가 모래 한 알, 물 한 방울, 풀 한 포기, 그리고 인간입니다. 이런 코스모스 우주가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사람이라면 그 어느 누구에게나 다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순간을 위해 우리 모두 하나같이 인생순례자 ‘코스미안’이 된 것이 아닐까요. 우리 모두 다 함께 ‘코스모스 칸타타Cosmos Cantata’ 합창을 부르며 하늘하늘 하늘에 피는 코스모스바다가 되기 위해…
 
15년 전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나는 다섯 딸에게 남겨 줄 유일한 유산으로 아빠가 살아온 삶을 짤막한 동화 형식으로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에서 내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무리 힘들고 슬프고 절망할 일이 많다 해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실연당한다 해도 누군가를 사랑해 본다는 것이 사랑 못 해 보는 것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렇게 사랑하며 사노라면 우리는 비상飛翔하게 되지 않겠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43세가 되도록 제 눈에 드는 남자를 만나지 못해 혼자 살아오던 내 둘째 딸은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영국 특수부대 비행기 조종사로 의병 제대한 피부암 말기 환자로 암환자 기금 마련을 위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올린 블로그를 보고 교신 끝에 지난해 2월 16일엔 그의 임박한 장례식 대신 그의 삶을 축하하고 기리는 파티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성에서 열었고, 3월 16일엔 에든버러 아카데미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 결혼식에서 나는 아래와 같은 시 한 편을 낭송했습니다. 이 시는 2013년 미국에서 출간된 졸저 ‘코스모스 칸타타: 한 구도자의 우주여행(Cosmos Cantata: A Seeker’s Cosmic Journey)’의 출판사 대표이자 시인 도리스 웬젤이 써준 축시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남녀 한 쌍에게
 
내가 만난 적은 없어도 이 두 젊은 남녀는
이들을 아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이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네.
 
내가 만난 적은 없어도 이 젊은 연인들은
서로에 대한 헌신으로 똘똘 뭉쳐 오롯이
호젓하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삶의 축배를 높이 드네.
 
내가 만난 적은 없어도 이 두 사랑스런 영혼들은
저네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전 세계에 여운으로
남는 감미로운 멜로디를 창조하네.
 
결혼식을 올린 지 5개월 후 8월 24일 46세로 남편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딸에게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딸 수아에게
 
사랑하는 남편 고든이 평화롭게 숨 거두기 전에 네가 하고 싶은 모든 말들을 다 하고 그가 네 말을 다 들었다니 그 영원한 순간’이 더할 수 없도록 복되구나. 난 네 삶이 무척 부럽기까지 하다. 너의 사랑 너의 짝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그 삶과 사랑을 그토록 치열하게 시적(詩的)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
 
사람이 장수하여 백 년 이상을 산다 한들 한 번 쉬는 숨, 바닷가에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에 불과해 우주라는 큰 바다로 돌아가는 것 아니겠니. 그러니 우리는 우리 내면의 코스모스 바다를 떠날 수 없단다.
 
사랑하는 아빠가
 
다음은 딸 아이의 조사弔辭 일부입니다.
 
그를 만난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도록 크나큰 행운이었는지. 우리가 같이한 13개월이란 여정에서 아무런 후회도 없고, 나는 내 삶에서 완벽을 기하거나 완전을 도모하지 않았으나 어떻게 우리 자신 속에서 이 완전함을 찾았으며, 우리는 불완전한 대로 완전한 사랑이란 절대균형을 잡았습니다.
 
(In September 2013, I wrote “An Open Letter: The Sea of Cosmos,” which was sent to U.S. President Obama and Russian President Putin.)
 
The Sept. 12, 2013, Op-Ed article in The New York Times: “A Plea for Caution From Russia” by Vladimir V. Putin, president of Russia, prompted me to write this letter to all my fellow human beings all over the world.
 
In concluding his plea, Mr. Putin says that he carefully studied Mr. Obama’s address to the nation on Tuesday (September 10, 2013) and that he disagreed about the case President Obama put forth when he stated that the United States’ policy is, “What makes America different. It’s what make us (the United States) exceptional.”
 
I, for one, concur with President Putin’s apt comment that “it is extremely dangerous to encourage people to see themselves as exceptional, whatever the motivation.”
 
From time immemorial, most, if not all, human tragedies have been visited upon us, in my humble opinion, by two major mindsets: One is the self-serving “chosen-species-racist” view, and the other is the harmful concept of “original sin” instilled in childhood.
 
I firmly believe in the truth that we, not only human beings, but all things in Nature are one and the same. We’d be far better off if we were enlightened early on to realize that we are relatedㅡ part of each otherㅡ as the ancient aphorism goes: ‘피아일체’ “pee-ah-il-che” in Korean phonetic alphabet and ‘彼我一體’ in Chinese characters, meaning that “we (you and I) are one and the same.”
 
Another aphorism goes: ‘물아일체’ “mool-ah-il-che” in Korean phonetic alphabet and ‘物我一體’ in Chinese characters, meaning that “all things and I are one and the same.”
 
Simply put, when I hurt or help you, I’m hurting or helping myself; when I destroy or divine Nature, I’m destroying or divining myself.
 
Perhaps that’s why and how it’s possible that eternity consists of a flash of a lightning-like moment when we become the very object of our love, as the German mystic Jakob Boehme(1575-1624) believed.
 
Let me further present my case in point. Born in now-North Korea, I happened to be in the south when the country was divided at the end of World War II, which ended the 36-year-old colonial rule of Korea by Japan; hence the Korean War in the heat of the Cold War tension between the two superpowers, U.S.A. and Soviet Union, and its ongoing aftermath.
 
By virtue of serendipity and survival instinct of “sink or swim,” I’ve always counted every stroke of luck as a blessing and believed nothing was to be discarded.
 
Eleventh of 12 children, I became fatherless at the age of five and homeless when I was thirteen during the Korean War, Consequently, I went on a journey at an early age, in search of the sublime in our human condition, seeking my cosmic identity in the greater scheme of things.
 
No matter where one is from, if we look at things from the big picture, we all are “cosmians arainbow” passing through as fleeting sojourners on this tiny leaf-boat-like planet earth floating in the sea of cosmos.
 
If each one of us, be it a grain of sand, a drop of water, a blade of grass, or a human being, is indeed a micro-cosmos reflecting a macro-cosmos of all that existed in the past, all that exists in the present, and all that will exist in the future, we’re all in it together, all on our separate journeys to realize that we must all sing the Cosmos Cantata together. No one is exceptional and all of us are exceptional.
 
When I was diagnosed with prostate cancer fifteen years ago, I started to compose a short, true story of my life in the form of a fairy tale for my five daughters as my only legacy. All I wanted to say in my writing was this:
 
Always changing and impermanent though life is,
Troubled and sorrowful though life is,
What a blessing it is to be born than not be born at all!
What felicity it is to love somebody,
Even if you may be crossed in love and heartbroken!
Isn’t it such a beautiful, blissful and wonderful experience?
To live and to love!
By so doing we learn to fly and to soar.
 
And a small portion of my daughter’s recent eulogy to her husband reflects those sentiments:
 
I spoke of how ridiculously lucky I felt to have met him.
How I had no regrets about anything on our journey.
I told him that I had never sought for perfection in anything in my life.
But that somehow, I had found it.
I had found it in “us.”
We were perfect.
Perfect in our imperfections too.
Our imperfectly perfect balance.
 
And Doris Wenzel, the American poet and publisher of my book Cosmos Cantata, reflected on their exceptional lives in:
 
To The Couple I Do Not Know
 
I have never met those two young people,
Impressing those who know them,
Inspiring those who don’t.
 
I have never met those two young lovers,
Wrapped in devotion to one another,
Celebrating life alone and with others.
 
I have never met those two sweet souls,
Securing a world of their own
While creating a lingering melody for the world.
 
After I learned of his (Gordon’s) passing at the age of 46, I emailed the following short message to my daughter:
 
Dearest Su-a,
 
It is good to know that Gordon listened and understood what you had to say for an “eternal” hour before he stopped breathing and he was gone so “peacefully.”
 
Su-a, you are such an amazing girl. I’m even envious of you, not only for having found “the love of your life” but more for living it to the best, to the fullest, so intensely, so poetically, very short thought it was only for 13 months.
 
Even if one lives to be over a hundred, still it will be nothing but a breath, a droplet of waves breaking on the shore, returning to the sea of cosmos. Thus we never leave “the sea inside.”
 
Love, DadXX
 
어떻든 전 세계를 식민지화하고 자연생태계의 질서를 파괴해 온 서양 물질문명의 ‘원죄의식’과 ‘선민사상’에서 어서 탈피하여 우리나라의 홍익인간과 홍익만물, 다시 말해 인내천 사상을 온 세상에 펼치는 것이 답이 되리라.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 말이어라.
 
자, 우리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신앙처럼 받드는 다음과 같은 말을 깊이 되새겨 보리라.
 
“강물은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고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따 먹지 않는다.
 
햇빛은 스스로를 위해 비추지 않고
꽃들은 스스로를 위해 향기를 내뿜지 않는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자연이다.
 
네가 행복할 때 네 삶은 좋다.
하지만 너 때문에 남들이 행복하면
그것이 훨씬 더 좋은 삶이다.
 
남을 위해 살지 않는 자는
삶을 살 자격이 없다.
 
우리의 본질은 봉사하는 것이다.”
 
“The rivers don’t drink their own water,
The trees don’t eat their own fruits.
 
The sun doesn’t shine for itself;
the flowers don’t give their fragrance
to themselves.
 
To live for others is nature’s way.
 
Life is good when you are happy;
but life is much better when others are happy
because of you.
 
Who doesn’t live to serve,
doesn’t deserve to live.
 
Our nature is service.”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의 참된 소명이고 친인파(親人派/波) 친지파(親地派/波) 친천파(親天派/波)로서 상생(相生)과 공생(共生)하는 길이 되는 것이리.   

<해법解法은 코스미안이다 Cosmian Is The Solution>

이태상
 
2021년 10월 1일자 미주 뉴욕판 한국일보 오피니언 [전망대] 칼럼 <영화 ‘오징어 게임’> 필자 조성내/ 컬럼비아 의대 정신과 임상 조교수의 감상문을 옮겨 본다.

이 영화가 재미있다고 신문에서 하도 떠들어대기에 나도 보았다. ‘오징어 게임(Squid Game)’’은 사람을 죽이는 혹은 죽게 하는 게임이다. 총으로 죽이는 것은 그래도 점잖다. 칼로 찔러서 죽이는 장면은 잔인하다. 이 게임에 참석한 숫자는 456명이다. 한 명당 1억 원이 배당된다. 6번 게임을 통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456억 원의 돈을 가져가는 게임이다.

첫 번째 “무궁화는 피었습니다. ”게임에서 거의 절반 가까이 총에 맞아 죽는다. 참가자들이 이런 게임은 너무 절망적이라면서, 투표로서 게임을 중단한다. 사회에 나와 보니, 빚에 쪼들리고, 돈을 벌 수 있는 희망은 전연 없는 절망이다. 그래서 죽음을 각오하고 다시 게임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네 번째 구슬치기 게임이 제일 마음을 쓰라리게 하는 게임이다. 주인공 성기훈이는 늙어빠진 오일남이라는 노인을 보호해왔다. 아무 누구도 이 노인하고 짝을 이루기를 싫어한다. 그런데 성기훈이는 자진해서 이 노인을 자기 짝으로 삼는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둘이는 구슬치기 게임을 해서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하는, 상대방을 죽게 하는 처절한 게임이었다. 한 사람은 손에 구슬을 쥔다. 상대방이 짝수냐 홀수냐를 알아 맞춰서 이기고 지는 게임이다. 게임에서 노인이 이기고 있다. 성기훈이가 지면 안 되는데! 성기훈이가 이겨야 하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성기훈이가 질까봐 겁이 났다.

이때 노인이 묻는다 “내 손에 든 구슬이 짝수인가 홀수인가?” 성기훈이는 홀수라고 대답한다. 노인이 손을 열어 보여주니 짝수다. 이때 노인은 성기운이에게, “아까 뭐라고 대답했지?” 하고 묻는다. 이때 성기훈이는 “짝수라고 했어요.”하고 거짓말을 한다. 노인은, “그러면 젊은이, 자네가 이겼네!” 그리고 구슬을 성기훈에게 준다. 노인은 일부러 져준다. 그리고 총에 맞아 죽는다.

민주화된 현대사회에서는 돈이 사람들의 삶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돈이 밥이다. 돈이 생명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마지막에, 노인 오일남이는 죽지 않았다.

노인은 말한다. 돈이 아주 많은 부자나 아주 가난한 사람에게는, ‘사는 게 재미가 없다.’ 사실 부자에게 돈을 더 버는 것은 ‘재미’가 되지 못한다. 아주 가난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돈을 벌 희망이 전연 없기에 ‘사는 게 또한 재미가 없다.’ 돈 많은 부자가 ‘재미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이 게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중요한 것이다. 그 희망 때문에 게임에 참여한다. 그리고 죽는다.

현실적으로는, 큰 부자들은 사회에 많은 기증을 하면서 삶의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노인은 사디스틱(sadistic)하다. 사람을 ‘죽이고 죽게 하는 게임’에서 재미를 보는 병적인 인간이다. 어찌 보면 모든 인간에게, 살인하고 싶은 무의식적인 욕망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이런 잠재된 살인욕망을 대신 만족시켜주기 위해서 사람들은 이런 살인마적인 영화를 열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성내/ 컬럼비아 의대 정신과 임상 조교수>

어쩜 이 영화가 현재 온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그 해법解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솝  우화寓話 하나가 떠오른다. 이 우화 블로그 하나 옮겨 보리라.

Daum블로그

꽃을 든 남자 [공교롭고 신기하게도 이 ‘꽃을 든 남자’는 나의 젊은 군복무 시절 펜팔로 잠시 사귀다 그녀 어머님의 반대로 헤어졌다가 25년 후 뉴욕에서 기적처럼 극적으로 다시 만나 우리 두 사람 다 재혼해 10개월 같이 사는 동안 김지원 소설가(2013년 1월 작고)가 나를 모델로 쓴 장편(상하 1-2권) 소설의 제목과 같음]

외나무 다리위의 염소 두마리  전설 때문에

이솝의 우화중에 외나무 다리위의 염소 두마리 이야기가 있다. 내용인즉 두마리의 염소가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 서로 양보하려 하지않고 먼저 건너가기 위하여 싸우다가 결국에는 둘다 외나무 다리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외나무다리의 전설을 감칠나게 써서 어린이들의 심금을 울리며 교양서적으로 나왔던 이솝 우화. 나의 서 어린시절 초등학교 다니던때 방학책에 외나무 다리 위에서 뿔을 맞대고 싸우는 그림과함께나와 염소 그림 에 색칠도 하고 그 글을 읽고 독후감도 썼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얼마가 지나간후 청소년기에는 이솝의 외나무다리 염소 페레디물로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염소들이 서로 싸우려다 다시 생각해보고 악수하고 서로 뒤돌아가 다리 양쪽에 서서 가위 바위 보로 우선순위를 정하고 이긴 염소가 외나무 다리를 건너고 반대편 에 서있던 염소는 기다렸다가 다시 건너는 성숙한 양보문화 캠페인 으로 외다리를 서로 차례대로 건너간 염소들이 뒤돌아서서 손 흔들 던 패러디물들이 유행하던 것을 본적이 있다

다시 수십년의 세월이 흐른 요즈음 염소들은 외나무 다리에서 싸우 다 둘다 떨어져 죽었다는 뉴스를 듣지 못한다. 지금의 아이들은 외 나무 다리가 뭔지도 모른다.  외나무 다리를 본적도 없다. 외나무 다리를 건너본적은 더더욱 없다 그래서 외나무다리를 건너는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지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나는 어린시절 날마다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소나무로 만든 외나무 다리를 건너 다녔다 중2때던가 한창 박정희 대통령 시절 새마을 운동 덕분에 외나무다리 통학을 면하고 직경이 큰 흄관을 연결하여 만든 제대로된 다리를 건너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여름철 장마가 오면 어김없이 유실되어 다시 아슬아슬한 외나무 다리 신세 를 져야 했다.

외나무 다리는 균형을 잘 잡고 건너가야 한다  건너는 도중에 바람 이라도 불어 균형이 흐트러지면 흐르는 하천에 풍덩 빠지기 쉽상이 다. 외나무 다리를 건널 땐  밑에 흐르는 물을 보면 안된다 똑바로 앞을 보고 균형을 잡으며 천천히 걸어야 한다.  발밑에 흐르는 물을 보고 걷다가는 멀미가 나서 물살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켜 마음이 동요되고 평정심을 잃어 끝내는 추락하고 만다. 

겨울철 외나무다리는 더욱더 위험하다. 추운 겨울 밤새 물에서 올라온 수증기가 외나무 다리에 유리막 코팅처럼 투명하게 얼어붙어 있어, 미끄러운지 어쩐지 육안으로는 확인하기가 힘든 경우도 있다.  자칫 방심하고 갔다가 아차 하는 순간 미끄러져 계곡물에 곤두박질치기 일수다. 나도 어린시절 외나무다리가 서리로 얼은 줄 모르고 건너다 미끄러져 책가방까지 몽땅 물에 흠뻑 젖어 오들오들 떨며 다시 집으로 돌아간 기억이 있다. 

그 후에도 어떤 때는 좀 늦었다고 서둘러 건너다가 미끄러져 빠진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들도 까맣게 잊고 산지 오래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흄관으로 만든 다리가 자꾸만 유실되자 몇년후에는 정부에서 튼튼한 시멘트 교각을 세워 교량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 이다. 고마운 정부 덕분에 외나무 다리의 추억도 까마득한 전설속 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에게 이솝의 외나무 다리 염소 이야기를 들려  주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정신 이상자 취급을 당한 다. 세상에 외나 무 다리가 어디있다고 그런 우스운 말을 하세요. 지금은 그런 거 안 통해요.  요즈음은 토목기술이 발달하여  크고 튼튼한 다리들이 얼마나 많은대 어리석게 외나무 다리에서 왜 싸워요. 불편하면 다리 놓으면 되고, 큰 물져서 고립되면 구조 헬기 보내달라고 휴대 폰으로 구조 요청하면 구해주는대요.

아저씨 지금은 다리가 너무 넓어서 염소 열 마리가 나란히 서서 안 싸우고도 그냥 비켜가도 충분해요. 어떤 짓궂은 녀석은 나보고 아저씨라 안하고 할아버지라 부르며 할아버지 그 시절 염소들은 멍청했나 봐요. 다리 하나 더 놓으면 되는데 라고 말하는 데 그 옆에 녀석은 한 수 더 떠서 할아버지  먼저 보고 미사일 쏴 버리든지 레이져 검으로 죽여버리고 가면 돼요.  아니면 지게 생겼으면 도망가 있다가 헬리콥터 부르면 돼요 한다.

요즘 아이들이 나쁜 게 아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가 시대에 뒤쳐진거지. 나는 시대에 뒤쳐진 이야기 보따리를  버릴수 없는 골동품처럼 간직하고 다니다 기회만 오면 자랑스레 호기심 많은 아이들에게 풀어 놓다가 쫓겨나곤 한다.

방문 판매원이 초인종을 누르면 호기심에 누구세요 하고  현관문 조금 열고 빼꼼히 고개 내밀어 바라보다 또 쓸대없는 장사치구나 하고 홱 돌아서 꽈당하고 문을 닫고 들어가버리는 아줌마들 뒤에 허탈하게 서있는 방판 아져씨가 되곤한다.

내 물건이 그렇게 하찮고  쓸대없는 물건인가?  왜이렇게 사람들이 문을 안 열어주지?  오늘도 빈손이구나. 오늘 집에가서 가족들 볼것 생각하고 허탈해하는 방판 아저씨 같은 기분이드는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내일부터는 외나무 다리가 아닌 넓고 튼튼한 한강 대교위에서 염소 두마리가 서로 영역 다툼을 하다 둘 다 한강에 빠져 죽었다고 말할 까. 아니면 욕심 많은 염소 두 마리가 한강대교 위에서 서로 다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머리를 맞대고 싸우다 둘다 머리가 깨져 죽었다고 말할까. 아니야.  그건 너무 억지 같아. 염소 두마리가  요즘은 넓은 다리 때문에 싸우지 않고 차선을 따라 질서 정연하게 서로 잘 통행 하고 있다고 할까. 아니야. 그건 너무 민망해.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고민되어 밤세 혼자 뒤척인다. 

행여 누가 알면 덜 떨어진 사람이라고 놀림 당하는것은 아닐지 불안해하며 수줍은 새색시 말못하는 가슴앓이로 애꿎은 밤을 뒤척인다.”

최근 (2021년 9월 21일) 미국에서 출간된 소설 ‘당혹감 Bewilderment’이 있다.  저자인 리처드 파워즈 Richard Powers 의 13 번째 소설로서 소설부문 2019년 퓰리처 상 Pulitzer Prize을 수상했고 2021년 영국의 부커상 Booker Prize .최종 후보 리스트에 올랐던 소설 ‘웃 이야기 The Overstory (2018)’ 이후 첫 작품이다.

‘웃 이야기’는 네 그루의 나무가 아홉 명의 미국인과의 관계에서 삼림森林 숲을 통한 자연 파괴 사례를 심각하게 다룬 소설이다.

이 신작新作 ‘당혹감’은 우리가 심각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볼 시점時點이라고 이렇게 묻고 있다. 

‘What if it is our calling to be the equals of all living things rather than agents of their domination?’

우리(인류 인간)가 다른 생물을 지배할 만물지영장萬物之靈長이 아니고 다 같이 공생共生 공존共存해야 할 다 같이 존귀한 존재 들이란 거다.

이는 옛날 옛적부터 우리 동양의 선인先人들이 일찍부터 깨닫고 밝힌 우주 만고의 진리가 아닌가.  피아일체彼我一體/물아일체 物我一體와 우리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홍익만물弘益萬物 그리고 우리 천도교天道敎의 인내천人乃天 곧 코스미안사상 말이다.     

미국 시인 루실 클립튼 Luiclle Clifton (1936-2010)도 이렇게  경고성警告性 지적을 한 바 있다.   

“큰 그림에서 생각하건대 우주는 우리(인류)에게 그 무엇을 하라고 요청하지 않고 그 무엇이 되라고 한다.  이 둘 – 무엇을 하는가와 무엇이 되는가 – 은 전혀 아주 다른 일이다.  In the bigger scheme of things, the universe is not asking us to do something, the universe is asking us to be something.  And that’s a whole different thing.”

이 말을 내가 이해 해석하기로는 우리 모두 우리 본연本然의 ‘코스미안’이 되라는 뜻이리라.

자, 이제 최근 (2021년 9월 8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칼럼 우리 반추해보자. 

[이태상 칼럼] '우린 모두 크게 봐 같은 하나 전태일全泰壹이다'

2021년 9월 4일자 뉴욕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삶의 뜨락] 칼럼 '그대' 필자 정명숙 시인은 우리와 같은 몽고족인 아메리칸 원주민 인디언의 수난사를 이렇게 추적해보고 있다

[삶의 뜨락에서] 그대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그냥 ‘그대’라고 부른 다고 한다. 그 자체로 존중이고 사랑이다. 자연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고 믿고 자연의 섭리에 충실하며 가장 자연 친화적이고 아름다운 자연에 순응하며 살았다. 

인디언들은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인들이나 그리스 로마 시대 이래 유럽인들처럼 서로 땅따먹기로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연대하며 사는 놀라운 지혜를 보여주었다.

1620년 100여 명의 영국인 청교도들이 종교의 박해를 피해 60여 일의 항해 끝에 신천지인 미 대륙 플리머스에 도착한다. 지금 아프가니스탄 난민들과 다를 것이 없다. 그 당시 이 백인 난민들은 척박하고 처참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자가 일 년 후에는 반으로 줄었다고 한다. 이 낯선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이 대륙의 주인인 원주민들은 백인들에게 옥수수 재배법, 낚시, 메이플 시럽 만들기 등을 가르쳐준다. 

1675년 그 당시 추장인 필립 왕과의 전쟁을 시작으로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차츰 미 대륙을 빼앗기게 된다. 인디언들의 생계 수단인 버펄로 멸종 작전은 버펄로 한 마리를 죽이면 인디언 10명 을 죽이는 것과 같다는 이론 아래에 50년 만에 버펄로는 멸종위기 를 맞는다.

14대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으로부터 200만 에이커의 땅을 15만 달러에 팔도록 강요당한다. 1830년 7대 대통령인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인디언 추방법을 강행하여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모든 인디언을 강제 이주시킨다. 체로키 인디언들 1만4000 명이 강제 이주 길인 눈물의 여정을 떠나 오클라호마의 불모지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떼죽음을 당해 1200명이 남는다. 

현재 미 대륙에는 310개의 인디언 보호구역이 정해 있으며 미국 영토의 2.3%만을 차지하고 있다. 전기, 상하수도 시설도 없는 광활한 황무지에 도착한 인디언들의 생계는 막막했다. 미 정부는 인디언 보호구역에 기숙학교를 설립해 인디언 문화를 말살하고 백인문화에 동화시키고자 했다. 그들의 생계에 도움을 주고자 카지노를 세우고 운영권을 준다. 카지노를 접한 원주민들은 그들의 분노와 한을 도박과 술, 마약까지 손을 대 미래가 없는 절망적인 삶의 악순환을 맞는다. 원주민 청소년의 자살률은 미국 같은 또래의 청소년에 비해 12배나 높다는 통계가 나왔다. 그들은 차라리 다른 곳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호소한다.

2017년부터 I have a dream foundation의 수장을 맡은 딸아이가 몇 주 전에 Cherokee Nation이 있는 오클라호마에 날아가 그 나라의 지도자들을 만나고 왔다. Education is Power라는 주제로 중대사를 논의하고 서로 파트너가 되어 청소년들이 꿈을 갖고 그 꿈을 실현 하도록 돕고 그들에게 동기부여를 심어주고 돌아왔다. 자신을 사랑 하고 자존심을 지켜주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삶은 진정한 교육에서 배운다. 고등교육만이 우리의 빈약한 사고를 윤택하게 해준다고 믿고 나와 내 딸아이는 같은 비전을 갖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과 이민정책, 난민사태, 아시안 혐오 등의 사태를 겪으면서 미국 시스템이 한계에 봉착한 게 아닌지 의심이 간다. 청교도들이 17세기에 유럽사회의 전통과 시스템이 한계에 부딪 혔을 때 인디언들이 도와주었듯이 인디언들이 정식 교육을 받고 정체성을 찾아 그들의 지혜로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높고 맑은 영혼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정명숙 / 시인> 

널리 보도되지는 않았었지만 9.11 직후 클린턴은 (그 당시) 미국이 겪고 있는 테러에 의한 고통은 미국과 기독교인들이 인류에게 저지른 원죄原罪에서 비롯한 것임을 상기시켰다.

자신의 모교인 조지타운 대학에서 행한 연설에서 테러는 수백 년 전부터 이 땅에 존재했고, 우리는 노예제도를 기초로 국가를 건설 했으며 수많은 노예들이 이유 없이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땅이나 자원을 빼앗기 위해 원주민들을 죽였고 그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했다.

우리는 아직도 그 죗값을 다 갚지 못했다.첫 번째 십자군 원정 때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을 교회에 가둬 불태웠으며 예루살렘 신전 언덕에 살고 있던 모든 이슬람 교인들을 살해 했다. 중동에서는 아직까지도 이 일을 잊지 못하고 있다.그 연설문 영문 일부를 인용 하면 이렇다.

"terror, the killing of noncombatants for economic, or religious reasons, has a very long history, as long as organized combat itself, and yet it has never succeeded as a military strategy standing on its own...Those of us who come from various European lineages are not blameless.  Indeed, in the first Crusade, when the Christian soldiers took Jalusalem, they first burned a synagogue with 300 Jews in it, and proceeded to kill every woman and child who was Muslim on the Temple Mount...I can tell you that that story is still being told today in the Middle East and we are still paying for it."

인류 역사 유사 이래 늘 그래왔겠지만, 특히 최근 한 세기 동안 자연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인문 사회 과학자들까지도 무질서해 보이는 혼돈의 카오스 속에서 질서 정연한 코스모스를 발견한다. 물리 화학 생물학 분야는 물론 금융경제 시장에서도 모든 것이 불가분不可分의 연관성聯關性을 갖고 계속 변화 발전 진화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철학자 종교인이 아니라 해도 우리 모두 누구나가 다 우주 천체 자연이건 인류나 민족 또는 개개인에 있어서건 단편적으로 분해 분석하면 무의미하고 상관없어 보여도 이 모든 자연현상이나 인간사人間事를 종합해 볼 때 그 어떤 뜻과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것이리라

다시 말해 카오스의 불행과 비극조차도 우리는 긍정적으로 이해 하고 수용해 낙관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몇 년 전 당시 현행 8개의 한국사 검인정교과서를 단일화하겠다는 정부방침으로 국회 내에서뿐만 아니라 외부에서까지 찬반 토론이 활발했고, 국정화에 반대하는 각계 성명이 잇달았었다. 도대체 역사 란 무엇인가 우리 생각 좀 같이 해보자.

“선생님, 역사란 무엇입니까?”

한 젊은 제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고 “역사란 믿을 수 없는 것일 세.”라고 언론인 출신 작가 이병주(1921-1992)는 답했다고 한다.

그는 장편소설 ‘산하’의 제사題辭로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적었다. 역사歷史란 승자勝者의 기록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만 잘 보려면 그 배경背景과 이면의 사정事情을 살필 수 있는 심안心眼을 가져야 하리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1506)를 그 한 예로 들어보자. 미국에선 1934년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에 의하여 10월 12일이 콜럼버스 날Columbus Day 미연방 공휴일로 정해졌다가 1971년 10월의 둘째 월요일로 변경되었다.

신대륙 발견 500주년을 기해 National Geographic 잡지가 ‘콜럼버스가 우리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콜럼버스를 보았다’라는 남아메리카 사람들의 시각視覺을 소개하면서 콜럼버스의 비판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콜럼버스가 남미대륙에 상륙한 이후 150년 동안 1억 명에 달하던 원주민들의 숫자가 30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며, 그들은 콜럼버스 를 인류 역사상 최대의 학살을 촉발한 침략자로 보게 되었다. 베네수엘라Venezuela의 우고 차베스Hugo Chavez (1954-2013) 대통령은 “10월 12일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꾸라!”라는 대통령령을 내리기도 했다.

미국 미네소타 대학 인권센터에서는 콜럼버스를 ‘사상 최악의 인물’로 모의재판에 기소했는데, 배심원들은 12시간에 걸친 심리 끝에, 7개의 죄목인 노예범죄, 살인, 강제노동, 유괴, 폭행, 고문, 절도에 대해서 유죄라고 평결하였고, 재판장은 죄목 하나마다 50년씩 계산해서 통산 350년의 사회봉사활동을 콜럼버스에게 선고하였다.

이 같은 현상은 아직도 세계 도처에서 인종과 민족, 국가 간 그리고 개개인 사이에서도 사회 전반에 걸쳐 갑을 관계로 계속 반복되고 있지 않나. 흔히 속된 말로 ‘억울하면 출세하라’느니, 적자생존 適者生存이니, 약육강식弱肉强食이하지 않는가.

아, 그래서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대종사는 “모든 사람에게 천만 가지 경전을 다 가르쳐 주고 천만 가지 선善을 장려하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니라, 먼저 생멸生滅 없는 진리眞理와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진리를 믿고 깨닫게 하여 주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라고 했으리라.

이 ‘생멸 없는 진리’와 ‘인과응보의 진리’를 내가 한마디로 줄여 풀이하자면 ‘우리는 하나’라고 수 있지 않을까. 자연을 포함 해서 내가 너를 위하면 곧 나를 위하는 게 되고, 내가 너를 다치게 하면 내가 다친다는 진실眞實말이다. 이것이 바로 코스미안 사상이며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로 명명백백明明白白해지고 있는 사실事實이 아닌가.

호기심에 가득 찬 아이들은 말끝마다 “왜 Why?”라고 묻는다. “네가 좋아야 나도 좋으니까,” 이것이 정답正答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어른들도 아이들처럼 “왜?”라고 묻고, 전쟁과 파괴의 카오스Chaos를 초래하는 대신 사랑과 평화의 코스모스Cosmos를 창조해가면서 밝고 아름다운 새로운 코스미안 역사를 써보리라.

우리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의 ‘평화를 위한 기도문祈禱文’ 같이 외워보리라.

하늘에 계신 위대하신 영靈이시여

우리를 평화와 이해理解의 길로 인도하소서

우리 모든 자연 만물 형제자매로 함께 살게 하소서

지구 어머니 품에 잠시 머무는 삶이오니

우리에게 주신 모든 축복에

우리 눈을 뜨게 해주소서

위대한 영이시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Prayer For Peace

Oh Great Spirit who dwells in the sky,

lead us to the path of peace and understanding,

let all of us live together as brothers and sisters.

Our lives are so short here, walking upon Mother Earth’s surface,

let our eyes be opened to all the blessings you have given us.

Please hear our prayers, Oh Great Spirit.
- Native American Prayer

그리고 북아메리카 원주민 ‘크리(Cree)’ 부족의 이런 예언(豫言)도 있어라.

(코스미안) 여정旅程

지구가 병들어 죽어가면

모든 인종들 가운데서 한 종족이 나오리라.

그들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이 지구별을 살려 다시 푸르게 하리라.

The (Cosmian) Journey

When the earth is sick and dying,

There will come a tribe of people

From all races…

Who will put their faith in deeds,

Not words, and make the planet

Green again…

- Cree Prophecy

1855년 미국의 제14대(1853-1857)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 Franklin Pierce(1804-1869)에게 쓴 편지에서 아메리칸 원주민 인디언 추장 시아틀은 이렇게 말한다. (그 일부 요점만 아래와 같이 옮겨 본다. 영문 전문과 함께)

모든 생물은 다 같은 숨을 쉰다.

짐승, 나무, 그리고 사람 자신도.

그런데 백인들은 자신들이 들이쉬는

자연의 공기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여러 날을 두고 자리에

누워 앓다 죽는 사람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고약한 냄새를

전혀 맡지 못하는 것 같다.

백인들 또한 멸종하리라.

어쩜 다른 인종들보다 먼저.

계속해서 네 잠자리를

오염시키고 더럽혀 보라.

그러면 어느 날 밤 너는

네가 싼 오물에 숨 막혀

죽을 수밖에 없으리라.

대륙의 모든 들소 버팔로가

모두 너희들 손에 도살되고

들말 야생마가 너희들 손에

하나같이 다 길들여지는 날

숲과 들판 온 대륙 곳곳이

너희들이 지나간 냄새와

흔적으로 가득 차 버리고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가

그 빛을 잃는 날 무성하고 

울창하던 산림 자취도 없이 

사라졌어라.

독수리는 어디로 갔을까?

그림자도 없이 사라졌어라.

이것이 삶다운 삶의 종말을 고하고

다 죽은 목숨 조금 더 살아남기 위한

단말마적 몸부림의 시작일 뿐이리라.

[Some of our most influential roots are the original cultures of this land. The following letter, sent by Chief Seattle of the Dwamish Tribe in Washington to President Pierce in 1855, illustrates the dignity, wisdom, and continuing relevance of this native continental vision.]

THE GREAT CHIEF in Washington sends word that he wishes to buy our land. The Great Chief also sends us words of friendship and good will. This is kind of him, since we know he has little need of our friendship in return. But we will consider your offer, for we know if we do not so the white man may come with guns and take our land. What Chief Seattle says you can count on as truly as our white brothers can count on the return of the seasons. My words are like the stars– they do not set.

How can you buy or sell the sky – the warmth of the land? The idea is strange to us. Yet we do not own the freshness of the air or the sparkle of the water. How can you buy them from us? We will decide in our time. Every part of this earth is sacred to my people. Every shining pine needle, every sandy shore, every mist in the dark woods, every clearing, and every humming insect is holy in the memory and experience of my people.

We know that the white man does not understand our ways. One portion of land is the same to him as the next, for he is a stranger who comes in the night and takes from the land whatever he needs. The earth is not his brother, but his enemy, and when he has conquered it, he moves on. He leaves his father’s graves and his children’s birthright is forgotten. The sight of your cities pains the eyes of the redman. But perhaps it is because the redman is a savage and does not understand.

There is no quiet place in the white man’s cities. No place to listen to the leaves of spring or the rustle of insect wings. But perhaps because I am a savageand do not understand – the clatter only seems to insult the ears. And what is there to life if a man cannot hear the lovely cry of the whippoorwill or the arguments of the frogs around a pond at night? The Indian prefers the soft sound of the wind itself cleansed by a mid-day rain, or scented by a pinõn pine: The air is precious to the redman.

For all things share the same breath-the beasts, the trees, and the man. The white man does not seem to notice the air he breathes. Like a man dying for many days, he is numb to the stench.

If I decide to accept, I will make one condition. The white man must treat the beasts of this land as his brothers. I am a savage and I do not understand any other way. I have seen thousands of rotting buffaloes on the prairie left by the white man who shot them from a passing train. I am a savage and do not understand how the smoking iron horse can be more important than the buffalo that we kill only to stay alive. What is man without the beasts? If all the beasts were gone, men would die from great loneliness of spirit, for whatever happens to the beast also happens to the man.

All things are connected. Whatever befalls the earth befalls the sons of the earth.

Our children have seen their fathers humbled in defeat. Our warriors have felt shame. And after defeat they turn their days in idleness and contaminate their bodies with sweet food and strong drink. It matters little where we pass the rest of our days-they are not many. A few more hours, a few more winters, and none of the children of the great tribes that once lived on this earth, or that roamed in small bands in the woods will remain to mourn the graves of the people once as powerful and hopeful as yours.

One thing we know that the white man may one day discover. Our God is the same God. You may think that you own him as you wish to own our land, but you cannot. He is the Body of man, and his compassion is equal for the redman and the white. This earth is precious to him, and to harm the earth is to heap contempt on its Creator.

The whites, too, shall pass – perhaps sooner than other tribes. Continue to contaminate your bed, and you will one night suffocate in your own waste. When the buffalos are all slaughtered, the wild horses all tamed, the secret corners of the forest heavy with the scent of many men, and the view of the ripe hills blotted by the talking wires, where is the thicket? Gone. Where is the eagle? Gone. And what is it to say goodbye to the swift and the hunt? The end of living and the beginning of survival.

We might understand if we knew what it was the white man dreams, what hopes he describes to his children on long winter nights, what visions he burns into their minds, so they will wish for tomorrow. But we are savages. The white man’s dreams are hidden from us. And because they are hidden, we will go our own way. If we agree, it will be to secure your reservation you have promised.

There perhaps we may live out our brief days as we wish. When the last redman has vanished from the earth, and the memory is only the shadow of a cloud passing over the prairie, these shores and forests will still hold the spirits of my people, for they love this earth as the newborn loves its mother’s heartbeat. If we sell you our land, love it as we have loved it. Care for it as we have cared for it. Hold in your memory the way the land is as you take it. And with all your strength, with all your might, and with all your heart-preserve it for your children, and love it as God loves us all. One thing we know – our God is the same. This earth is precious to him. Even the white man cannot escape the common destiny.

이를 단 한마디로 줄이자면 우주만물이 다 하나이고 우리 모두 같은 숨을 쉰다는 만고의 진리 곧 코스미안사상을 밝힌 것이리라.

2019년 10월 14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린 우생의 항간세설 옮겨보리라.

[항간세설] 같은 숨을 쉰다 : 全泰壹

2012년 연말 발생한 미국 커네티컷주의 총기 난사 사건에 관해 미주판 H보 오피니언 페이지(2012년 12월 26일자)에 쓴 칼럼 에서 전종준 변호사는  이슬람을 ‘한 손에 코란, 한 손에 칼’이라고 지칭, 기독교 국가인 미국을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총’이라고 비유 하고 싶다 했는데, 만시지탄을 금할 길 없으나 시의적절한 지적 이라고 나도 공감했다. 반복되는 이런 비극과 참사가 미국의 원죄 에서 기인된 것 아닌가.

마치 희랍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코린트의 왕으로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로 계속해서 밀어 올리는 벌을 받음) 같이 달걀로 바위 치는 일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 그 한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1950년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영국의 석학이며 세계평화주의자 버트런드 러셀이 1966년 설립한 ‘러셀법정The Russell Tribunal, also known as the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이란 것이 있다. 1980년 11월 로테르담에서 열린 이 러셀법정에선 피해자인 미 대륙 원주민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증언을 듣고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인류역사상 가장 심한 박해를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인 인디언 들은 받아왔다. 대량 학살을 비롯해 저들이 살던 땅을 빼앗기고 저들의 인종적, 경제적, 사회적, 정신적인 인권을 모두 말살 당해 왔다.”
 
러셀법정은 정식 법정이 아니기 때문에 강제 집행력은 없지만 인간의 양심과 양식에 호소한다. 미국, 캐나다, 브라질, 파나마 등 남북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들이 다 원주민들의 최소한의 생존권과 저들 고유의 신앙을 존중하여 저들을 기독교인으로 강제로 개종시키지 말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1855년 미국의 제14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피어스Franklin Pierce (1804-1869)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디언 추장 씨애틀Chief Seattle (1786-1866)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생물은 같은 숨을 쉰다. 짐승, 나무와 풀, 그리고 사람들 자신 도 말이다. 그런데도 백인들은 자기들이 들이쉬는 공기를 알지 못하 는 것 같다. 여러 날을 두고 자리에 누워 앓다 죽는 사람 같이 자신들 의 고약한 냄새를 맡지 못하고 있다. 백인들 또한 시간이 지나면 멸종하리라. 어쩌면 다른 인종들보다 앞서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 이다.”

미 대륙의 원주민인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우리 한민족과 같은 몽고족이라고 하지 않나. 

이와 비슷하게도 수천 년 동안 터전으로살아온 땅을 유태인들에게 빼앗긴 중동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억울한 사정에 대해서도 이스라엘은 물론 2차대전 이후 이스라엘을 지지해온 서방 각국들 을 규탄할 러셀법정이 하루 속히 열렸으면 좋으련만...

실효성은 없지만 러셀법정이 인류에게 주는 메시지는 피부색깔이 다르고 믿는 종교가 다르다 해도 지구상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 같은 ‘인간가족’이라는 것이다. 

소위 청교도라 불리는 유럽의 앵글로색슨족인 백인 기독교 신자들 은 미 대륙으로 건너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주신 땅이라고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들의 땅을 뺏어 차지하듯이 유태인들은 중동 팔레스타인에서 살아온 아랍인들을 내쫓고 그곳에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이다. 

그런데도 자칭 기독교인들이 도덕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볼 때 "기도교인들만 아니면 우리 모두가 기독교인이 될 텐데?...But for the Christians, we could all be Christians.../If it weren't for Christians, I'd be a Christian..."라고 한 간디의 말이 생각난다.

더욱 목불인견인 것은 2차대전 때 독일 나치에게서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고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그들이 지금은 중동에서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을 박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란 선민사상에서 오는 자부심이 처음에는 유태인들에게 도움이 되었을는지 몰라도 종국에 가서는 다른 민족 으로부터 미움을 사서 따돌림을 받게 하는 것 아닐까.

이런 유태인들이 우리 한국인들에게 좋은 반면교사가 될 수 있으리 라. 타민족 가운데는 한국인을 동양의 유태인이라 한다지 않나.

우리 자신을 잠시 돌아보자. 한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 떠오른 다. 서울평화시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 둘의 나이로 몸을 불살라 죽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인간선언’ 이라 부른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 당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시대,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떤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시정하 려고 노력할 것"이라며 그는 싸웠고 그는 죽어 갔다.

그야말로 2천 년 전 예수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그는 죽기 얼마 전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다.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는 사람이 태어나 어떻게 사는것이 참되게 사는 것인지 가르쳐  주었고, 죽음으로써 참사랑이 무엇인지 일깨워주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어린 나이에 여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구두닦이를 비롯해 신문팔이, 껌팔이, 우산장사 등등 평화시장 재단 사가 되기까지 숱한 밑바닥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스물 두 해의 짧은 생을 사는 동안, 하루도 쉬어보지 못하는 날들이었다. 그렇게 성실히 일했건만 일당은 14시간 노동에 그 당시 커피 한 잔 값밖에 안 되는 50원이었다.

평회시장의 다락방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어린 여공들을 지켜 보며, 잘못된 사회현실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인간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 도달한다. 전태일, 그는 온 몸으로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다.

영원의 축소판이 순간이고 우주만물의 결정체가 모래 한 알, 물 한 방울,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구름 한 점, 별 하나, 나 하나이듯 그의 이름 그대로 우리 모두 전부 다 크게 보아 같은 하나임을 그의 삶을 불사른 죽음의 불꽃으로 밝혀 보여준 우리 모두의 ‘나’ 전태일 全泰壹의 명복을 빌면서 그의 부활과 재림 환생還生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지구상에서 노동운동이 필요 없어 사라지는 날 까지...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

 

전명희 기자
작성 2021.12.01 09:54 수정 2021.12.01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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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