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진형 칼럼] 동반 인연(同伴 因緣)

하진형


종교 용어에 시절인연(時節因緣)’이 있다고 한다. 인연도 때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나와의 인연이 있다면 그때에 올 것이고, 가까이 있는 것도 인연이 다했다면 멀어질 것이다. 예로부터 오는 인연 막지 말고 가는 인연 잡지 말라고 했으니 이는 사람의 의지로 다스려질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리라.

 

거의 40년도 넘었다. 친구는 한동네에 살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대도시로 이사를 갔는데 시골에서 보따리 이삿짐으로 나갔으니 말만 대도시지 역시 그곳도 시골이었다. 그곳에서 친구 어머니는 남편의 병간호를 하면서 아이들을 키워내었다. 자갈치시장에서 참으로 억척스럽게 날마다 전투를 치러내며 지켜낸 한 집안의 장수(將帥)였다. 그렇게 친구는 우리들의 영웅인 어머니 슬하에서 단련됐고 자갈치아지매의 자랑스런 아들이 되었다.

 

그리고 둘은 50살이 넘어서 우연히 어릴 적 옛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둘은 먼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했지만 내내 가까이서 살아온 것처럼 이내 가까워졌다. 그것은 둘이 아무것도 모르고 자라던 그 시절에 부모님들께서는 어려움 속에서도 추운 겨울 등에 땀이 나도록 뜨거운 마음을 나누고 계셨었고 그 인연이 잠시 멀어져 있다가 때가 되어 다시 이어진 것이다.

 

장석주 님의 시 대추 한 알에 보면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고 했다. 가을에 핀 국화도 소쩍새의 목 터진 울음이 있고, 단풍도 차가운 비바람을 많이 맞은 덕분에 곱게 물든다.

 

둘은 늦게 다시 만난 것을 모두 되찾으려는 듯 그 어떤 친구보다 서로를 이해하며 가까이 지냈다. 세월이 흐르며 퇴직을 해야 하는 나이가 되고 삶의 굴레에서 헤매기도 할 때 그 친구는 늘 곁에 있었다. 야박한 것이 세상인심이라고 정승이 죽자 정승집 개의 홀로서기는 너무도 힘들었고 시절인연에 따라 많은 이들이 떠나갔다. 나는 지금껏 누구와 걸어왔고, 진정한 친구가 과연 몇이나 될까.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꼽아 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인연은 시절인연을 뛰어넘어 동반인연(同伴因緣)이 되어 같이 걷고 있었다. 살고 있는 곳이 달랐지만 그들에게 물리적 거리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요즘 두 도시를 오가며 걷는다. 애초부터 그렇게 살았듯이 계산도 없이 아내들까지 동행하면서 걷는 것이다.

 

덕분에 지난달엔 무궁화호 열차 여행을 했고 이번엔 둘레길을 걸은 뒤에 바닷가에서 소주잔을 기울인다. 모든 것이 부모님들의 동반인연 덕분이었다. 부모님 네 분 중 마지막에 여행을 떠나시던 날 친구 어머님의 편안한 모습은 성자였었다. ‘어머니 방금 소천 하셨다고 말해 온 친구의 음성은 슬픔에 젖어 있었고 나는 초저녁 비에 젖었다.

덜컥 덜커덕, 덜컥, 덜커덕~’ 철로와 바퀴, 직선과 곡선이 만남을 반복하며 우리를 더욱 깊은 세상으로 끌어들인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이 여유롭다. 텅 빈 들녘에 번잡하게 움직이다 사라져 간 농부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지난겨울을 보내고 깨어나 뙤약볕 여름에서 벼들을 길러내고는 다시 가을이 된 들판이 그렇게 또 지난겨울을 닮아가고 있듯이 그들도 먼 곳을 함께 바라보며 걷는 것이다.

 

1시간 거리, 오가는 동안 터널들도 많다. 그러나 걱정 없다, 어두운 터널에 들어가도 종국적으로는 빠져나가 밝은 세상을 볼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또 동반인연 덕분에 열차가 좀 더 천천히 갔으면 하는 욕심도 생기는 것이다. 기분 좋은 욕심이고 함께 나누고 싶은 욕심이다. 겨울 노을이 아름다운 것은 그때 구름이 함께 있기 때문이고 바다에 떠 있는 섬도 둘 일때가 더욱 정겹다.

 

어느 산에서는 대나무 잎의 서걱거리는 소리를 듣고 또 어느 곳에서는 참나무 낙엽을 밟고 또 어디에서는 겨울바람을 맞으며 같이 걷는다. 그리곤 또 내일을 기약한다. 기다려지는 약속을 하고 그 기다림을 즐긴다. 모든 기다림의 시간은 설렘이고 누군가 같이 걸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오후 늦게 서서히 떠나가는 친구의 애마를 따라 구르는 낙엽을 보면서 다음 달엔 내가 그에게로 가고 있는 것을 그린다. 오늘의 동반인연이 과거 부모님들로부터 이어진 만큼 둘만의 것이 아님에 먼 후일까지 멀리 이어지리라는 소망을 함께 지닌 채. 

 


[하진형]

수필가

칼럼니스트

행정안전부 등록 범죄안전 강사

이순신 인문학포럼 대표(이순신 국제센터)

3회 코스미안상 금상

bluepol77@naver.com

전명희 기자
작성 2021.12.03 15:29 수정 2021.12.03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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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