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4일 중앙선데이 [배영대 曰] <’생각 없는 생각’ 찾는 ‘반가사유(半跏思惟)’> 필자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은 “우리의 ‘반가사유상’에는 조그만 근육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자의식 의 의지가 무화(無化) 혹은 무아(無我) 상태에 이르렀음을 상징한다 고 볼 수 있다”며“삼국시대의 반가사유에서부터 오늘날 멍때리기 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에서 명상의 흐름은 유유히 이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고 이렇게 고찰考察하고 있다.
<배영대 曰] ‘생각 없는 생각’ 찾는 ‘반가사유(半跏思惟)’>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기획한 ‘사유의 방’ 전시는 요즘 같은 겨울의 송년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듯하다. 지난 주말 방문했을 땐 오전 시간이어서 그런지 예상보다 한산했다. 덜 붐빈 덕분에 조용히 ‘사유의 의미’를 사유해볼 수 있었다.
이 전시의 한국어 제목은 ‘사유의 방’인데, 입구에 세운 안내문의 영어 표현을 보니 ‘A Room of Quiet Contemplation’이라고 적혀 있다. ‘조용히 명상하는 방’이라고 풀 수 있겠다. 사유와 명상은 어떤 관계일까? 사유는 어떤 생각을 거듭하는 것일 수 있고, 명상은 그런 생각들을 모두 내려놓는 것에 가까운데, 언뜻 반대로 보이는 이 두 단어가 같은 공간을 안내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으니 의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국시대 조각에 담긴 ‘사유’의 역설 근육질의 로댕 작품과 비교 되는 ‘무아’ 전시장 안에는 삼국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반가 사유상(半跏思惟像) 2점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사유의 방’ 이란 제목은 반가사유상의 ‘사유’를 그대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영어 안내문은 이를 ‘명상(Contemplation)’으로 풀이한 것이다. ‘사유의 방’이란 전시에 명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은 영어 표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반가사유상은 대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으로 불리어 왔다. 작품의 재질인 ‘금동’을 맨 앞에 붙여 부르기도 한다. 반가사유의 주어인 ‘미륵보살’은 깨달은 사람을 가리키는 불교 용어다. 반가사유는 불교적 사유, 즉 깨달음을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 전시의 공간 처리는 돋보였다. 소극장 규모의 공간 중앙에 다른 유물은 전혀 없고 반가사유상만 배치했다. 탑돌이 하듯 돌아 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사유의 의미다. 반가사유의 깨달음은 어떻게 사유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과 함께 거론되기도 한다. 철학자 고 (故) 김형효 교수는 근육의 유무로 두 작품을 비교한 적이 있다. 근육은 자아(自我)의식을 상징한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육안으로도 근육을 확인할 수 있는데, 자의식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반가사유상’에는 조그만 근육의 흔적조차 보이 지 않는다. 자의식의 의지가 무화(無化) 혹은 무아(無我) 상태에 이르렀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나만 더 가지려는 생각, 나만 다 옳다는 생각을 되돌아보는 것이 무아적 사유의 출발이고, 반가 사유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탐욕으로 가득 찬 사유를 내려놓 는 사유라는 점에서 반가사유는 ‘사유 없는 사유’라는 역설적 표현 을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유의 역설’을 알아차린다면 자세는 어떤 자세여도 괜찮을 것이 다. 양쪽 발을 각각 다른 쪽 다리에 엇갈리게 얹는 ‘결가부좌(結跏 趺坐)’를 하든, 한쪽 다리만 얹는 반가부좌이든 자세가 문제는 아니 라는 얘기다. 앉아서만 명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걸어 좋고, 서서 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누워서도 할 수 있다. 특히 내년 대선을 준비하는 우리 정치인들이 이 ‘역설적 사유’의 의미를 음미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최근 워싱턴포스트(WP)가 한국의 ‘멍때리기(Hitting mung) 현상’ 을 보도했다. 코로나 펜데믹과 부동산 가격 폭등, 급속히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한국인들이 조용한 카페 같은 피난처를 찾아 힐링한다는 기사였는데, 이번 반가사유상 전시 까지 함께 소개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WP 기사에서 멍때리기는 일종의 명상으로 소개되는 것 같다. 실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아 보인다. 필자 역시 명상과 멍때 리 기의 차이를 크게 부각하기보다는 그 공통점을 더 많이 존중하 고 싶다. 그렇게 보면, 삼국시대의 반가사유에서부터 오늘날 멍때 리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에서 명상의 흐름은 유유히 이어진다 고 볼 수 있겠다.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
자, 이제 ‘멍때리기’ 3제題로 지난 2019년 1월 4일과 10월 17일 그리고 2020년 5월 4일자 코스미안뉴스에 올릴 우생의 칼럼 글 셋 옮겨보리라.
멍때리기 제1제題Theme 1: ‘모음의 실종 What Do the Missing Vowels Mean?’
요즘 미국에선 어린애들처럼 말장난이 유행이다. 문장이나 단어, 단체명에서 모음(母音)을 생략하고 자음(子音)만 나열하는 방식이다. 언어의 진화라기보다는 퇴화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한두 가지 예를 들자면 원래는 ‘The Management’란 이름으로 출발한 록 밴드가 이제는 그냥 'MGMT' 로 불리고, 텀블러(Tumblr)나 플리커(Flickkr)와 같은 회사 이름에서 모음 ‘에(e)’를 빼버리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을까. 이와 같은 모음의 실종이 오늘날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젊은 세대의 풍조를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음이 실종되면 점차 자음까지 사라지게 될 것이고, 그러면 언어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모음의 실종이 모성(母性)의 실종을 의미한다면 이는 동심(童心)의 실종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면 어린이들의 지상천국은 사라지고 어른들의 지상지옥만 남게 될 것이다.
그래도 비관하지 않고 간절히 바라는 바는, 그동안 행동 없이 말로만 뇌까려 온 사랑, 인권, 자유, 평등, 평화와 같은 언어는 몽땅 집어치우고, 묵묵히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우주와 자연의 계시라고 생각된다.
프랑스 시인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1854-1891)는 그의 시 '모음'에서 다섯 개의 모음인 '아 에 이 오 우'에 다섯 가지 색깔을 부여했다. ‘아’는 검은 색, ‘에’는 하얀 색, ‘이’는 빨간 색, ‘오’는 파란 색, '우'는 초록 색을 배정하면서 언젠가는 그 이유를 밝힐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 후에 쓴 다른 시 '지옥의 한 계절’에서 “(모음들) 색깔을 내가 정했지만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면서 거기에 대한 설명을 거부했다. 그 이유를 우리는 그가 남긴 말 한 마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천재성은 마음 내키는 대로 동심을 되찾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모두는 말을 배우고 언어를 익히기 전에 천심(天心)인 동심을 타고나지 않았던가?
What Do the Missing Vowels Mean?
There is a fashion in American language culture these days to be playful like children, leaving out the vowels in names, sentences and words.
For example, the rock band that was originally named as ‘The Management’ is now simply called MGMT and tech companies like Tumblr and Flickr, are dropping 'e's. People are signing their (ever-briefer) correspondence “Yrs”. They say that the first step in the stage of language’s evolution, or rather devolution, has already happend.
How come? This may be reflecting the reality that nowadays young people are avoiding marriage and having children.
From this trend we can infer that missing vowels will be followed by missing consonants, and it will eventually lead to dispensing with language altogether.
Furthermore, if missing vowels mean missing mother nature, it will be followed by missing childhood, and consequently, the heaven on earth of childhood will disappear, while only living hell of adults will remain.
Not to be so pessimistic, I pray, good riddance to all the talk of love, equality, freedom, human rights and peace without walking the walk. This must be the divine revelation that we should start living these ideals instead of just talking the talk in lip service.
In his sonnet “Vowels”, the French poet Jean Nicolas Arthur Rimbaud (1854-1891) names the five vowels, linking each to a color: “A black, E white, I red, U green, O blue: Vowels.” Although he continues in the second line of the poem, “I will someday tell of your latent birth,” subsequently, in his work, Une Saison Enfer (A Season in Hell), he would write, “I invented the color of vowels! I withheld the translation of it.”
Perhaps we can find the missing explanation in this short Rimbaud quote: “Genius is the recovery of childhood at will.”
In retrospect, weren’t we all born with the celestial divinity to enjoy our childhood before we learn to speak in any language?!
멍때리기 제2제題: ‘언감생심焉敢生心이어라’
‘도(道)라고 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 2천 5백여 년 전에 살았던 노자가 남긴‘도덕경’을 한 마디로 이렇게 풀이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진리라고 말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이것은 ‘데리다의 해체 철학’이란 연구서를 펴낸 한국 정신문화연구원 김형호 교수(철학) 가 한 인터뷰에서 데리다의 해체주의 사상을 요약한 말이다. 이것 은 불교와 노장사상 그리고 원효의 화쟁사상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1998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그리스 영화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Theo Angelopoulos 1935-2012)의 ‘영원과 하루(Eternity and a Day)’는 1994년 ‘율리시스의 시선 (Ulysses’ Gaze)’을 찍는 동안 급작스런 심장마비로 이태리 출신 배우 지안 마리아 블론테를 잃고 나서 살 날이 딱 하루 남았다고 하면 어찌 할 것인가란 생각에서 죽음을 소재로 만들었다고 한다. 죽음을 하나의 경계선 변경으로 다룬 것이다.
이 영화는 보는 이들에게 사람이 태어나 병들고 늙어 죽을 때까지 겪고 맛보는 갖가지 희망, 젊음과 향수, 사랑 등의 맥을 짚어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두 어린 아이가 나누는 대화 속에 한 아이가 시간이 뭐냐고 묻는다. 그 해답은 고대 희랍의 철인 헤라클리투스(Herclitus, c.540-c.480)의 것이다. ‘시간이란 바닷가에서 조약돌 줍고 노는 한 어린 아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또 다른 고대 희랍의 철학자 파메니데스(Parmenides c. 515-450 B.C.)의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정의대로 그 당시 65세의 그 자신이 늙어가고 있는 만큼 정말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그는 말했다.
살아있음에 감사하면 되지 그 이상의 영예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는 구상 시인(1919-2004)은 1998년 내놓은 그의 마지막 시집 ‘인류의 맹점’에서 유언 대신 ‘임종고백’을 남겨 놓있다.
나는 한평생, 내가 나를 속이며 살아왔다. 모두가 진심과 진정이 결한 삶의 편의를 위한 겉치레로서 그 카멜레온과 같은 위장술에 스스로가 도취마저 하여 왔다. 더구나 평생 시를 쓴답시고 기어 (綺語) 조작에만 몰두했으니 아주 죄를 일삼고 살아왔을까!
2000년에 출간된 '열여덟 산골 소녀의 꽃이 피는 작은 나라'에서 영자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나에게 삶은 하나하나가 시가 된다면서 일기로 시를 만들라고 하네."
영자의 아버지 이연원 씨는 그 후로 강도에게 살해되었고 불교 신자이던 영자는 비구니가 되었다는데 그 뒤 이 강원도 두메산골 부녀의 유고시집 ‘영자야, 산으로 돌아가자’가 나왔다.
체코의 시인으로 198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Jaroslav Seifert 1901-1986)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 써놓은 자신의 비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수많은 사람이 써 온 수많은 시구에 나도 몇 줄 보태어 보았지만 귀뚜라미 소리보다 못한 것이었음을 잘 알고 있네. 달나라에 사람 의 첫발을 내디딘 발자국은 아니었어도 어쩌다 잠시 반짝했다면 내 빛, 내 소리 아니고 반사한 것뿐이네. 나는 사랑했다네. 시를 쓰는 언어를. 그러나 변명은 않겠네. 아름다운 시어를 찾는 것이 살생보다 낫다고 믿기 때문이라네.”
스웨덴의 한림원은 1990년 노벨문학상을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 오 파스(Octavio Paz 1914-98)에게 수여하면서 ‘관능적인 지성 과 인간적인 성실성을 특징으로 한 드넓게 트인 시야의 정열적인 시인’이라고 그를 칭송하면서 다음과 같은 그의 시 한 편을 그의 문학적인 신조로 인용했다.
내가 보는 것과 내가 말하는 것 그 사이에
내가 말하는 것과 내가 말하지 않는 것 그 사이에
내가 말하지 않는 것과 내가 꿈꾸는 것 그 사이에
내가 꿈꾸는 것과 내가 잊어버리는 것 그사이에
시가 있다.
이를 어쩌면 내가 이렇게 풀이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시심(詩心)을 갖고 내가 바라보는 만물의 시정신과
그 억만 분의 일이라도 나타내 보려는 내 문장 그 사이로
그렇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너무도 보잘 것 없는 시늉과
제대로 형언할 가망조차 없는 무궁무진한 진실 그 사이로
이토록 내가 말할 수도 알 수도 없이 신비롭기 그지없는 현상과
내가 상상하고 꿈꿀 수 있는 환상의 세계 그 사이로
땅과 하늘이 맞닿은 듯 아련히 저 지평선 같은 그 이상 너머로
물안개처럼 피어올라 구름처럼 사라지는 망상의 그림자가
마치 유령이 지나치듯 잠시 도깨비불 번득이는 것
그따위 그것이 모름지기 시라는 것이리라.
멍때리기 제3제題: ‘가슴으로 철학하기’
코로나19 사태로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격리된 상태에서 당면한 실존적인 문제를 풀어보려고 애쓰는 가운데 혹자는 실존 주의의 선구자로 불리는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신학자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So/ren Aabye Kierkegaard Kierkegaard 1813-1855)의 두 가지 사상 ‘개체성’과 ‘신앙의 도약’을 떠올리게 되리 라.
지난해 출간된 평전의 제목이 이채롭다. ‘가슴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의 불안한 삶(Philosopher of the Heart: The Restless Life of So/ren Kierkegaard 2019)의 저자 클레어 카라일(Clare Carlisle, 1977 - )은 그의 철학을 이렇게 요약한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 앞날이 미지인데, 이 삶 자체 속에서 우리가 어찌 살아야 할지를 알아내야 한다…마치 달리는 기차에서 내릴 수 없듯이 그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삶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노릇이다.”
“We must work out who we are, and how to live, right in the middle of life itself, with an open future ahead of us… Just as we cannot step off the train while it is moving, so we cannot step away from life to reflect on its meaning.”
‘개체성이 진리고 진리가 개체성’이며, ‘개체성이 종교적인 문제로 의심이 신앙의 요소이고 신의 존재나 구세주의 종교적인 교리에 대해 그 어떠한 객관적인 확실성도 얻지 못하게 한다’고 본 그의 ‘죽음에 이르는 병(덴마크어로 Sygdommen til Do/den, 영어 로는 The Sickness Unto Death, originally published in 1849)’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지만 절망을 느낀다는 것 은 자신과 신과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고통이기 때문에 축복’ 이라고 주장했다.
2019년 6월 13일자 코스미안뉴스 항간세설 칼럼 ‘사랑의 원형질(原形質) 상사병(相思病)’을 나는 이렇게 끝맺었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은 병이며,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 는 것은 인간뿐이다. 인간은 동물 이상이기 때문에 절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병으로부터 치유되는 것이 기독교인의 행복이다’라고 주장했다지만 어쩜 그가 몰라도 한 참 모르는 소리를 한 게 아니었 을까. 그가 ‘상사병’을 앓아보지 못한 까닭 아니었을까.
이 상사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고 ‘영생에 이르는 약’이 될 수 있어서이다. 그리고 이 쓰도록 달콤한 약(藥)을 통해 너도 행복 하고 나도 행복하며 우리 모두 다 행복할 수 있어서다. 한없이 끝 없이 서로 상(相), 생각할 사(思), 앓을 병(病)을 앓다 보면 이 ‘상사병(相思病)’이 어느 틈에 ‘상사약(相思藥)’이 되어 영세무궁 토록 행복한 영생불멸(永生不滅)에 이르게 되리라.
어떻든 키르케고르가 현재 많은 사람들이 앓는 우울증의 성(聖)스 러운 ‘환자’였었다면 현대인들의 세속적인 우울증 예방 치료 처방 전을 하나 소개해보리라.
특히 남녀 부부 사이에서 특효가 있을 법해서다. 왜냐하면 상대방 의 말을 어떻게 새겨듣고 반응하는가가 가장 중요힐 테니까. 남자 는 여자가 복합적인 두뇌와 신체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도 잊지 말아야 할 테고, 여자는 남자가 아메바처럼 단세포 동물이란 사실을 항상 명심한다면 가정폭력 같은 일 없이 만사 형통하고 만세동락할 수 있을 테니까.
몇 년 전 프랑스 파리 시내 바타클랑 극장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 직후 독일 베를린시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 정문 앞 촛불과 꽃들 사이에 피아노를 한 대 갖다 놓고 한 피아니스트가 존 레논(John Lennon 1940-1980)의 노래 ‘상상해보게(Imagine)’를 연주했 다.
상상해보게
하늘에 천국도 없고
땅속에 지옥도 없다고
상상 좀 해보게
어렵지 않다네.
하늘 아래 우리 모두
오늘을 산다고.
목숨을 뺏고 바쳐
죽이고 죽을
국가나 종교 또한 없다고
상상 좀 해보게
아주 쉽다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사는 것을…
할 수만 있다면
아무도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고
상상 좀 해보게
욕심부릴 것도
굶주릴 것도 없이
세상 모든 것을
우리 모두 다 같이
나눠 쓰는 것을…
공상 몽상한다고
그대는 내게 말할지 몰라도
나 혼자만이 아니라네.
언젠가 그대도
우리와 함께 손잡으면
우리 모두 한 가족
하나가 될 것이네.
Imagine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 for today
Ah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You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You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특히 “종교 또한 없다고(And no religion, too) 가 더할 수 없이 절실할 뿐이다. 석가와 예수 등 모든 성인, 성자들이 사랑과 자비 의 박애주의(博愛主義)를 몸소 친히 실천궁행(實踐躬行)으로 보여주었건만 어찌 이들의 이름으로 조직된 종교의 이름으로 인명을 살상하는 천하의 만행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인류역사 이래 모든 경전에 기록된 성인, 성자들의 가르침이 존 레논의 ‘상상해보게(Imagine)’ 이 노래 한 곡에 너무도 단순명쾌 하게 요약되어 있지 않은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있을 수 없으리 라.
그리스의 수학, 천문학, 철학자 탈레스(Thales of Miletus c. 624/623-c. 548/545 BC)가 하루는 하늘을 너무 열심히 쳐다 보며 길을 걷다가 시궁창에 빠지는 것을 본 하녀가 웃음을 터뜨렸 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철학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철학자들이란 그 해답은 모르 지만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라고 하는가 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철학자일 수밖에 없다면 나 또한 한두 가지 의심을 해보리라.
결코 그 정답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수수께끼 중에서 내가 어려서 부터 지대한 관심을 가져온 사랑과 섹스, 성(性)의 진실에 대해서 말이어라.
몇 년 전 보도된 한 미혼모의 증언이 있다. “12살이던 2004년 맥시코시(市)에서 납치당한 후 성매매를 강요당해 아침부터 밤 까지 하루 30명씩 4년간 4만 3,200번이나 강간당했다”라고 칼라 하신토(당시 24세)는 CNN에 털어놓았다.
목표를 채우지 못하거나 몸이 좋지 않아 쉬고 싶다고 하면 구타가 잇따랐고, 1년쯤 지나 13살이던 때 한 호텔에서 손님을 받고 있는데 경찰이 호텔을 급습해 손님을 쫓아낸 일이 있었다. 하신토 는 자신이 지옥을 탈출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찰은 그녀에게 음란한 포즈를 취하게 하며 이를 비디오로 쵤영했다. 미성년자인 그녀가 구해달라며 울고불고 매달려 봤지만 아무 소용 이 없었다.
15살이던 2007년에는 뚜쟁이와의 사이에서 딸도 한 명 낳았으 나 뚜쟁이는 딸마저도 그녀를 옥죄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하신토는 2008년 멕시코 경찰의 인신매매 일소 작전으로 4년에 걸친 성매매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그 후로 성매매 일소를 위한 싸움에 앞장서고 있다. 그녀는 미 하원 외교위원회 세계인권소위원회에서 인신매매의 피해에 대해 증언했고, 그녀의 증언은 성범죄자들의 신상정보를 공유 하도록 하는 하원 결의안 통과에 도움이 됐다.
이것이 한 소녀의 수난기라면 중세 유럽의 성가대 소년들은 소프 라노 음성을 유지하기 위해 변성기 전에 거세를 당했고, 노래를 잘 할 수 없게 되면 남창 노릇 밖에 다른 생활수단이 남아 있지 않았다 고 한다.
12세기 십자군전쟁 당시 한번 출전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십자군 기사들은 나 이외 모든 놈이 내 여자에게 접근을 못 하도록 하겠다 는 지극히 단순 무식한 욕망에서 내가 죽으면 너도 죽어야 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아내나 여인에게 정조대를 채우는 것이 대유행이었 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아프카니스탄, 인도, 파키스탄 등 지역에서는 딸이든 누이든 아내든 엄마든 여자가 자유연애를 하거나 강간을 당하면 그 피해자에 대해 남자 가족들이 ‘명예살인’을 자행하고 있다. 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는 어린 아동들까지 지하드(Jihad)라 불리는 ‘성전’이나 부족 간 전투에 동원해 전사나 ‘자살 폭탄 테러리스트’로 희생시키고 있다.
이처럼 여호와니 알라니 신(神)의 이름을 빙자(憑藉)한 살육지변 (殺戮之變)과 사랑이란 미명(美名)하에 성차별과 성폭력이 시대 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저질러지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공산주의다. 자본주의다, 사회주의다, 하는 인위적인 이념에 세뇌 되고 중독되어 진정한 사랑과 인성(人性)을 상실해가고 있지 않나.
‘이모지(emoji)’란 알파벳이 아닌 그림 문자를 처음으로 ‘2015 년의 옥스퍼드 단어’로 옥스퍼드 사전이 선정했다. 이 ‘이모지’란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얼굴(face with tears of joy)’ 이미지로 노란 원 안에 다양한 표정을 넣은 이모지의 종류 는 1,000개가 넘지만 옥스퍼드 사전에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얼굴’만 등재 됐다. 옥스퍼드 사전은 매년 영어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오거나 트렌드가 된 단어를 선정하고 있다.
싱어송라이터 루시아(본명 심규선)의 정규 2집 ‘리아트 & 셰이드‘ (Light & Shade) 챕터 2’는 아픔을 다스리는 ‘음악 위로’ 의 절정을 선사한다는 평이다. 특히 ‘아플래’는 수많은 짝사랑의 노래로 ‘모든 실연녀(失戀女)의 여신(女神)’으로 거듭난 그녀의 장기인 웅장하면서 서정적인 선율이 일품이란다. 타이틀곡 ‘너의 존재 위에’는 인생이라는 기나긴 여행 속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깨달음으로 스스로 완성된 노래라고 한다.
울다가 웃다가 아니면 웃다가 울다가 하는 게 인생이라면 웃음과 눈물이야말로 삶의 빛과 그림자라 할 수 있지 않나. 태어나는 것이 낮이라면 죽는다는 것은 밤이 아니겠는가. 산다는 게 사랑하는 거 라면 사랑하면 할수록 슬퍼지지 않던가. 너무너무 기쁘다 못해 눈물이, 너무너무 슬프다 못해 웃음이 나지 않는가. 해도 해도 더 할 수 없어 가슴이 아리고 저리도록 아프기만 할 뿐이다. 태어나 서, 사랑할 수 있어, 한없이 기쁘지만, 동시에 또한 한없이 슬픈 일 이 아닐 수 없다. 조만간 언젠가는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너무도 냉엄(冷嚴)한 자연의 이치(理致)가 말이어라.
그러니 아프니까 사랑이고, 슬프니까 사랑이리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