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잡하고, 소음과 매연에 찌든 도심의 일상을 떠나 만나는 자유로움 속에서 숲속의 새소리와 계곡 물소리를 듣는다. 중심 잃은 듯 비틀거리며 방황하는 어리석은 중생의 가짜인 나 ‘가아(假我)’를 벗어 던져 버리고 싶을 때 마음을 열고 한 번쯤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 좋다. 마음을 닫고, 잠그고, 오므리면 들어올 수도, 열수도, 활짝 펼 수도 없을 때 닫힌 마음을 활짝 열고 가는 곳, 서산의 상왕산 아래 자리한 ‘개심사(開心寺)’였다. 이곳은 마음만 열고 와서도 안 된다. 마음도 깨끗이 씻어야 한다. 절간을 올라가는 초입에 오른편에는 ‘開心寺入口’그리고 왼편에는 마음을 씻으라는‘세심동( 洗心洞)’이라는 글귀가 자그마한 돌에 새겨져 있다. 장자의 ‘관수세심(觀水洗心)’을 떠 올린다.
마음을 열고, 마음을 씻고 절간을 살피는 중에 눈에 확 들어온 것 있었다. 마음의 뚜껑 하나 열었을 뿐인데 말이다. 바로 개심시의 범종각 기둥이었다. 한국의 전통 건축, 특히 기둥을 보면 정교하면서 자연스럽고, 화려한 하면서도 수수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범종각의 네 기둥은 달리 보였다. 한동안 서성이면서 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닫힌 마음엔 보이는 것만 보이지만 마음을 열고 씻은 마음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였다.
범종각은 사모 지붕을 받들고 있는 네 개의 기둥이 모두 굽고, 휘어져있다. 어느 산에 가든 휜 나무보다는 곧은 나무가 많은데 왜 하필 굽고, 휜 기둥을 세웠을까. 언뜻 보면 금방이라도 한쪽으로 쓰러질 것 같고, 주저앉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랜 세월 그러한 걱정은 상왕산 바람에 날려 보내라는 듯, 세속의 잣대로 보는 곧음이 좋고 굽음이 좋지 않은 편견을 버리라는 듯 굽고, 휜 자세로 오랜 세월 당당히 서 있다.
또 다른 곳, ‘지혜의 칼을 찾는다’는 ‘심검당(尋劒堂)’은 기둥뿐만 아니라 보까지 휜 목재를 사용한 것을 보면 당시 목공은 가능한 나무의 본래 모습을 그대로 살려야 한다는 생각, 무엇을 가공하고 덧붙임이 없는 말 그대로 스스로 그렇게 있는 자연스러운 모습과 형태를 살리지 않았나 싶다. 철학자 하이데거도 “자연이 모든 아름다움의 근원”이라고 했잖은가. 여기서 지혜의 칼이란 곧고 굽음,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경계를 넘어선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여는 이치의 ‘개심(開心)’과 더불어 마음을 고쳐야 할 ‘개심(改心)’을 한 참 생각하게 되었다.
노자의 근본은 반문화, 반문명적이지 않나 싶다. 인위적인 기존의 체계들, 특히 유가적인 것에 대한 해체론적인 사고가 바로 노자의 현대적 의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노자의 도덕경 22장에서 나온 “곡즉전 왕즉직(曲則全 枉則直) ”은 “굽으면 온전해지고, 구부리면 곧게 된다”라는 뜻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강하면 부러지고 곧으면 휘어진다’라는 말과도 같다. 어리석은 생각일지 모르지만, 범종각 기둥을 세운 사람은 노자의 도덕경에서 힌트를 얻었을 수도 있다. 인간관계에서도 직선적이고 올곧은 사고보다는 좀 더 여유 있는 곡선적이고 휘어져 너그러운 유형에서 친밀감을 느끼고 소통 또한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을까. 언젠가 인천의 송도에서 춤추는 듯하고, 물결치는 듯한 모양의 건물을 보면서 개심사 범종각의 굽고, 휜 네 기둥이 생각난 적이 있다.
1980년대 서양의 건축 양식 해체주의(Deconstructivism)가 있다. 어느 시대든 그 시대의 지배 담론과 비판 담론이 존재하면서 길항적 구도를 형성했듯, 직선과 직각 그리고 사각형 등의 건축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해체주의 양식이 시작되었다.
대부분 사각형 건물들에 대한 정형적인 질서를 중시하는 건축 양식은 가식의 세계관이고 또한, 불일치한 현실 세계관이라고 비판하면서 거기에 대한 반문명 양식 운동을 주창한 것이 바로 해체주의 건축의 경향이다. 대표하는 건축가인 프랭크 게리의 ‘프레드 앤드 진저’ 빌딩을 보면 건축물을 받치고 있는 기둥과 건물 자체도 심하게 비틀어져 있고 찌그러진 모습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해체주의 건축물을 볼 때마다 떠오른 게 바로 개심사 범종각의 네 기둥이다. 휘어지고, 굽어진 조형적 모습이 닮아서이다.
이렇듯 굽고, 휜 기둥이 오히려 올곧은 기둥이 되어 서 있는 범종각, 우린 서양에 앞서 해체주의적 심성을 가진 한국의 건축가들이 있었다. 서양의 해체주의가 네모지고 직선적인 조형관의 건축물에 의문부호를 던지면서 출발한다면, 범종각을 짓는 사람은 자연 그대로, 인공적 가미를 최소화 한데서 볼 수 있듯이 거스르는 자연이 아니라 순응하는 자연관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無用之用)을 발견한 저들에 의해서 굽고, 휜 기둥은 죽어서도 지금껏 살아 있는 역설을 아직도 보여주고 있다. 참다운 예술은 모순의 파열음에서 탄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역시 자연스러움에서 나온다는 것을 범종각에서 보고 느낄 수 있었다.
타성에 젖은 생각을 확 집어 던지고 날것으로 사고를 해보자. 그 당시 곧은 나무가 없어서 굳이 ‘굽고, 휘어진 기둥을 찾아 사용했을까?’ 하는 것이다. 우린 백자의 달항아리를 감상할 때도 약간 일그러진 것에 더 매력을 느끼듯이 정형화되고 표준화된 것에서보다는 약간 덜 채워진 다듬지 않은 미가공성에 대해 매력을 느낀 것 같다. 이것이 꾸미지 않고 가공하지 않은 날사고적인 한국 사람의 너그러운 익살이고 또한, 해학이 아닐까 한다.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문학작품 공모전 금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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