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구 칼럼] 사막의 꽃

문경구

 

수많은 꽃 중에 내게 특별히 좋아하는 꽃이 무슨 꽃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좀 싱거운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물음이 내게는 별 의미가 없다고 해 놓고 문득 어떤 꽃들이 있기는 했었는가 어떤 의미로 어떻게 꽃을 좋아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꽃 이야기가 더 길어지면 고작 열흘도 못 피고 마는 꽃에 무슨 애착인지 허풍떠는 사람들의 속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 나의 답이다.

 

솔직히 장미꽃, 호박꽃, 몇 개의 꽃 이름밖에는 아는 꽃이 없다. 아무리 장미꽃이 아름다워 세상 사람들 관심을 모두 받아도 내게는 어쩌면 싫어할 수 있는 꽃이다. 그래서 어떤 하나의 꽃 속에 푹 빠져 보았던 감성의 성장기를 기억할 수도 없다.

 

나에게는 6.25 전쟁 통에 탱크가 밟고 지나간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피어났다는 민들레꽃 이야기가 더 아름답다. 그런 까닭이 있어 나에게는 아름답다는 장미도 소와 닭들의 관계처럼 서로 관심이 없다. 화원에서 온갖 꽃들을 다발로 묶어 모아놓은 바구니 속에 화려하게 차려진 자태로 사람들에게 팔려 가기를 기다리는 꽃들은 특별한 관심의 꽃으로 태어났을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가에 소 마차가 밟고 지나간 자리에서 꿋꿋하게 딛고 일어서는 잡초 같은 꽃들과 먼발치서 바라보는 들국화가 마치 나와 가장 친숙한 꽃으로 더 애착이 갔다. 그래서 어떤 꽃이든 나와 친숙해질 수 없다는 이유를 잘 안다. 꽃에 아무런 관심조차 주지 못한 나를 보는 세상에서도 모든 들꽃들은 그들의 자리에서 그렇게 익숙하게 피고 진다.

 

어느 날엔가 나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할 때부터 꽃 앞에서 혼자 중얼대는 내가 되어 있었다. 전혀 알 수 없는 분개나 원망 같기도 한 중얼거림을 꽃에게 내뱉고 있었다. 일 년에 비 한 방울조차 기대해 보기 힘든 겨울에도 거대한 저수지에서 끌어다 쓰는 물로 살아가는 캘리포니아의 부유한 꽃들을 보면서 인생을 그대로 표현하는 꽃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막을 지나다 만나게 되는 풀섶에서 듬성듬성 생존하는 잡초가 신기해서 가까이 들여다보면 가지 끝으로 얇고 작은 점박이 꽃들이 몸부림치는 모습을 본다. 척박한 땅에서 다음 세대를 위해 피려는 잡초를 보면서 내버려진 인생을 잡초처럼 사는 세상을 본다. 낮에는 펄펄 끓는 태양열과 친숙해야 하고 해가 지면 심장을 얼리는 밤 공기 속 사막 땅에서 피였기에 너무 외로운 꽃이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매일 제시간에 뿌려대는 스프링클러의 인위적인 물이 없는 사막 땅에서 귀한 봄비라도 내리면 비와 꽃의 귀중함을 만나게 되는 사막의 꽃 같은 인생도 있다. 봄이면 사람들은 화원으로 몰려들었고 꽃들은 좀 더 부유한 집안의 정원으로 팔려 가기 위해 한껏 꾸민 꽃단장으로 간택을 기다린다.

 

나에게는 꽃에 대한 남다른 습관이 있다. 꽃 같은 청춘이라고 했던가. 열흘의 청춘이 지고 말면 아무렇게나 쓰레기통 옆으로 버려진 시든 꽃화분에 관심이 크다. 다 죽어 간다고 버려진 화초에서 생명의 의미를 보고 싶었다. 버려진 핼쑥한 화분을 집으로 가져와 물을 주며 지켜보기를 좋아한다. 분명 화초의 생명에도 예술을 보게 된다. 싱그러운 푸른 잎 사이로 시든 누런 잎과 벌레 먹어 죽어 간 까만 잎들이 어우러져 있어야 화초가 지닌 예술이다.

 

나는 가위를 들고 화초에 가위질하는 일은 질색이다. 그대로 죽은 잎과 산 잎이 어우러진 모습대로 간직한 꽃의 모습을 좋아한다. 나는 그런 화초에서 꽃의 생과 나의 인생을 느낀다. 처음 화원에서 만났을 때의 싱그럽던 꽃 화분에서 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못한다. 그런 꽃들은 자존심을 지켜줄 주인의 보호만 기다리며 피고 지느라 꽃의 의미를 주지 못한다. 곧 다가올 늙음을 알려줄 줄 모른다. 그래서 이제까지 꽃만 나무라던 것이 후회스럽다. 그것은 인간인 나와 꽃이 함께 지불해야 할 대가라고 것을 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여름날 새벽, 커피 한잔과 아침 방송을 즐길 때 옆에서 세상 이야기를 들어 주는 친구같은 친숙하게 어울려 주는 꽃화분이 있는가 하면, 그림 옆에서 마치 그림을 위해 태어난 꽃도 있다. 그 삶의 의미를 모를 때는 생을 마치고 시드는 꽃들을 위로할 줄 모르고 보기 싫은 꽃이라고 퍼부었던 못된 나는 죄인이었다.

 

병실에 누워있는 환자 곁에 어느 님이 놓고 간 하찮은 꽃화분 하나로 상처를 치유하는 거룩함도 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심한 피로감이 몰려올 때도 나를 바라보며 무언의 화사함으로 위로해주는 화초들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커피 향처럼 안겨 오는 꽃도 있다.

 

빈자리에 남겨진 꽃을 나무랄 수 없다. 날리는 그 꽃잎을 따라 머물러 있던 쓸모없는 감정들을 훌훌 날려 보내라고 꽃은 내게 부탁하며 떠난다. 내 삶의 힘듦 속에서 반듯하게 살다가 신이 보내주신 사신을 얼른 알아보고 반갑게 따라나서는 길까지 모두가 꽃의 희생이 있다. 평생을 꽃과 의지하며 살다가 창가에 놓인 마른 꽃이 되어 가벼운 몸으로 가려면 더 꽃을 사랑해야겠다.

 

그것은 내 일상의 모습 그대로 내가 주인이 되어 살면서 지켜 낸 나다운 의미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자연의 섭리를 어기지 않고 자연처럼 살아가라는 꽃이 전해준 전언이다. 생각해 보니 내가 사랑한 꽃은 사막의 꽃이다. 계절을 모두 보내고 황량한 벌판에 남겨진 사막의 꽃처럼 스스로 그러하게 자연이 되어 살아야겠다.



[문경구]

화가

수필가

코스미안뉴스 칼럼니스트

문경구 kimurgin@hotmail.com


전명희 기자
작성 2022.01.11 11:27 수정 2022.01.11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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