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의자·43
-문학놀이
문학이 놀이가 될 수 있을까요? 시인의 의자는 문학이 놀이가 되고 있는 현실이 참 우스웠습니다. 조선시대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이 모여서 수려한 자연경관을 찾아가서 시를 짓고 음주·가무를 즐기며 시회를 열곤 했지요. 그런데 이런 놀이에는 반드시 노래가 빠질 수 없지요. 기생들의 가야금 연주, 시조창, 그다음에 오락게임 같은 놀이를 곁들여 풍류를 즐겼을 겁니다.
옛날에는 노래가 궁중이나 백성들 사이에 일반화가 되어 있었지요. 그래서 공자는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면서 그 나라 백성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그 나라 백성들의 생활과 정세를 알아냈다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나라 고대, 중세, 근대 문학이 모두 노래가 그 근간이 되었다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백성들은 민요를 부르면서 자신의 생활에 대한 위안을 삼았고, 귀족들은 그들 나름대로 풍류를 즐기면서 행복을 추구했습니다.
최근 온 나라가 트로트 열풍에 휩싸여있습니다. 나훈아의 코로나19 국민 위로 트로트 방송공연의 “테스형”은 국민들에게 노래가 위안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깨달을 수 있었지요. 이렇게 위대한 예술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노래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이 민족에게 희망의 등불 역할을 해왔지요. 코로나시대 집안에 틀어박혀 답답한 우울증을 풀어내는데 나훈아의 공연은 트로트 열풍은 물론 국민들의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음악으로 치료하는 효과를 발휘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요즈음 우리나라는 문학놀이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문학이 어디 놀이가 되겠습니까? 조선시대 특권층만이 누리는 문학놀이가 일제강점기 선각자들의 민족계몽이나 저항운동의 일환으로 문학작품을 창작했을 뿐 아예 문학놀이는 할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해방과, 6.25 사변, 4.19, 5.16, 5.18 등의 역사적 질곡 속에서 억울하고 분노에 치를 떨고, 슬프고, 허무하고, 극한의 정서를 경험한 세대들이 경제성장과 더불어 절대적인 굶주림이 해결되고 잘살게 되자 자신의 존재에 대해 뒤돌아보는 여유를 갖게 되었나 봅니다.
산업화 이후 서구의 물질 문화가 들어와 정착함으로써 한국적인 공동체 문화가 해체되고 물질의 소유를 위한 행진이 개인과 사회의 유기적인 연대 체제가 물질 취득과 교환 수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따라서 공동체의 윤리 도덕이 무너지고 자기만 잘 살겠다는 동물적인 쟁취와 향유 문화가 결국 문학작품을 향유하는 독자가 아니라 내가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주체가 되려는 저돌적인 공상이 물질과의 교환가치 수단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양반 계급에 대한 동경, 스스로 상위 계급문화를 누림으로써 상류층이 되는 듯한 문학적 욕구 착란 증상이 시인되기, 작가 되기 열풍에 빠지게 되고, 이들끼리 모여 시회를 열어 자신의 존재의식을 표출하는 시낭송회를 열고 향유하는 문화가 창작 문학인 것으로 착각하는 집단 병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한국문단이 시끄럽습니다.
목소리 큰 놈이 제일이라는 문화적 후진성의 병리적 작태를 그대로 노출하면서 진실보다는 허명 의식, 자신의 존재를 필요 이상으로 부풀리는 과대망상 증상의 하나로 이런 사람들이 몇 푼의 돈을 지불하고 문예 잡지사 발행자로부터 문단 등단이라는 거창한 술수와 필요에 의해 문인 가짜 자격증으로 문인이라고 꺼들먹거리는 문학 놀이꾼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지역별로 장르별로 모임을 만들어 문학놀이로 자기네들끼리 조직체제로 감투를 만들고 감투에 해당하는 품위 유지비를 받아 단체 문학놀이판을 벌리고 있습니다.
시화전, 시낭송회, 문학의 밤, 문학인 대회 등등 문학놀이가 뜨겁습니다. 한번 문학놀이에 빠지면 시간 가는 줄도 모릅니다. 여기에 상업적 목적을 가진 몇몇 사람이 놀이마당의 주축이 되어 신나는 놀이판을 벌이고 그로 인한 이익금을 서로 나누는 물질 만능의 놀이판이 되었습니다. 문학상을 타려면 찬조금을 내거나 잔치 비용을 부담하고 문학잡지에 작품을 실으려면 정기구독자 노릇을 해야 하고 문학단체 회비를 내야 문학놀이에 끼일 수 있게 하고 문학놀이를 잘하면 정부에서 지원하는 지원금으로 공짜로 책을 낼 수 있지요. 문학놀이 판 주체자들이 주로 당국과의 친분 관계 로비활동으로 심사위원 자리에 끼이는 개연성이 많으므로 문학놀이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작품 수준과는 별도로 문예지원금도 듬뿍, 문학상도 듬뿍, 감투도 듬뿍, 보았지. 작품이 아니라 문학놀이 잘하면 이런 혜택을 원 없이 받을 수 있을 개연성이 크지 않겠어요.
문학은 작품이 생명이고 문학인은 좋은 작품을 창작하면 그뿐입니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홍길동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위대한 시인과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작품 속에 주인공이 독자들에게 더 알려지게 됩니다. 트로트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로트 명곡을 만든 작사가나 작곡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명곡만 남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것처럼 문학작품도 작품만 남지, 누가 문학놀이를 잘했다는 등 기록이 있다손 치더라도 의미가 있겠습니까? 부끄럽게 물질을 소유하고 사람들 요리를 이리저리 잘하는 날라리꾼이었다는 것만 역사는 기억할 것입니다.
이제 한국문단의 문학놀이판 이제 그만 두고 좋은 문학작품을 쓰는데 심혈을 기울이는 참다운 문학인으로 문학의 본질을 되찾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문학놀이판은 놀이가 끝나면 너무 허전합니다. 남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짧은 인생을 문학놀이로 시간 낭비하다가 만인들에게 사랑받는 문학작품을 한편도 못 남기고 저세상으로 가는 문학놀이판, 도박판을 빨리 청산하는 길이 문학인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길일 겁니다.
트로트 이야기가 나왔으니, 여기에 합당한 트로트가 생각나네요. 사마천 작사의 「꽃바람」입니다. 이 노래를 지은 작사가가 사마천이었다는 사실을 아마 모르고 있던 분들이 더 많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명작의 경우 시인과 작가는 자신의 문학작품이 먼저 만인에게 알려지지만, 그 작품을 창작한 시인이나 작가는 묻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정한 예술은 작품이 알려지고 작가는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데, 왜 거꾸로 문학작품은 없는데 자신이 문학가라고 알리려고 하는 어리석은 주객전도의 문학놀이를 계속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제 문학놀이를 그만두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선뜻 내놓는 정기구독료, 문학놀이판 회비로 짠돌이처럼 인색했던 가족들이나 이웃들과 조촐한 식사 자리나 마련하시는 것이 더 좋은 듯싶습니다. 이에 딱 맞는 노래가 생각나네요. 「꽃바람」이란 노래인데 이 노래도 가수인 한가빈이 더 알려지고 작사가인 사마천, 작곡가인 기호는 아마 모르고 있었을 겁니다. 노래는 노래 부르는 가수가 알려집니다. 시도 시인이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노래처럼 낭송가가 알려진다고 해서 낭송가가 시인이 아니란 것입니다. 낭송가는 낭송가일뿐 시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꽃바람
작사 : 사미천
작곡 : 기 호
노래 : 한가빈
꽃바람 꽃바람 꽃바람 내 인생아
인생이란 놀다가는 것
기쁜 일 슬픈 일 모두 사는 재미야
걱정하며 살지 말자
뒤돌아보면 얻은 게 더 많았던
이 얼마나 고마운 세월인가
꽃바람 꽃바람 꽃바람 내 인생아
하루하루 선물 같구나
꽃바람 꽃바람 꽃바람 내 인생아
인생이란 놀다가는 것
기쁜 일 슬픈 일 모두 사는 재미야
걱정하며 살지 말자
뒤돌아보면 얻은 게 더 많았던
이 얼마나 고마운 세월인가
꽃바람 꽃바람 꽃바람 내 인생아
하루하루 선물 같구나
뒤돌아보면 얻은 게 더 많았던
이 얼마나 고마운 세월인가
꽃바람 꽃바람 꽃바람 내 인생아
하루하루 선물 같구나
하루하루 선물 같구나
하루하루 문학놀이로 선물을 받을 생각을 하시지 마시고, 문학작품 창작의 선물을 받고 진정한 문학하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남의 시를 낭송하는 재미에 빠져 자신이 시인이라고 착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렇게 시가 멋있으면 직접 시를 쓰는 공부를 시작해서 좋은 시를 써보록 하세요. 자작시 낭송이라고 시도 아닌 노래 가사만도 못한 관념어를 잔뜩 나열해놓고 시인이 된 것처럼 낭송하여 억지 싸구려 동정 눈물을 흘리도록 관객에게 강요하는 것은 각설이와 다를 바 없지 않겠습니까? 낭송가 시인들의 화려한 무대 쇼맨십은 혼자만의 시인 망상에 젖어 무당 푸닥거리하는 짓이 아닐는지요?
[김관식 시인]
노산문학상 수상
백교문학상 대상 수상
김우종문학상 수상
황조근정 훈장
김관식 kks419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