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 흠명기 15년(554년)조에 성왕은 신라의 복병에 걸려 전사하고 왕자 여창이 신라군에 포위되어 있을 때 구원군으로 와서 뛰어난 활솜씨로 탈출로를 열어준 축자국조(筑紫國造) 얘기가 나오는데, 그를 안교군(鞍橋君)이라 칭송하였다고 되어 있다.
鞍橋는 [안다리]를 차자한 것이다. 鞍은 음차한 표기요, 橋는 사음훈차한 표기다. 橋가 ‘다리 교’자이다. [안다리]는 연진발음한 것이고, 응집발음하면 [안달]이다. 『국명풀이 백제』에서 설명했듯이 百濟의 실제 이름은 [온닮]인데, 한국인들은 [닮/tarm]을 “달”처럼 발음하기도 하고 “담”처럼 발음하기도 한다. [온달]을 연진발음하면 [온다라, 온다르, 온다리...] 같은 식으로 발현된다. 그러니까 안교(鞍橋)는 [안달(=안다리)]을 표기한 것으로 ‘백제’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안교군(鞍橋君)이라 불렀다는 말은 ‘백제임금’이라 불렀다는 말에 다름 아닌 것이다. 물론 아버지 성왕을 잃은 왕자 여창과 백제군이 축자국조를 성왕처럼 떠받들었다는 말은 아닐 테고, 그의 구원에 감사하고 그 공적을 높이 기려 큐슈백제(=백제담로)의 임금이라 불렀다는 말일 터이다.
필자는 이 안교군(鞍橋君) 역시 경행천황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550년에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우산성(牛山城; 경남 고성군 고성읍 우산리)을 공취한 달사(達巳) 장군도 경행천황과 동일인물이요, 구타모라(=거제도)에 고립된 여창왕자를 구해준 안교군(鞍橋君)도 경행천황과 동일인물이라는 얘기다.
『일본서기』 응신기 14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응신천황 14년은 서기 283년으로 되어 있지만 그 연도를 신뢰하기는 어려운 편이고, 응신천황 자체가 390년~420년 사이에 재위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응신기의 기사는 여러 다른 천황기의 조각들을 가져와 억지로 짜맞춰 넣은 것 같은 내용도 상당히 많으므로 그 연도를 아예 무시하고 읽는 것이 좋다.
이 해에 궁월군(弓月君)이 백제에서 와서 “신은 저희 나라의 인부(人夫) 120현(縣)을 이끌고 귀화하고자 하였으나 신라인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加羅國)에 머물러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을 보내 궁월군의 인부를 가라에서 불러들이도록 하였으나 3년이 지나도록 습진언이 돌아오지 않았다.
궁월군(弓月君)이라는 백제인의 인명이 보인다. 弓月(궁월)은 [큰달]을 차자한 표기라 생각된다. 弓은 ‘크다’는 뜻의 한국어 [큰]을 음차한 표기이고 月은 [달]이라는 인명조성어를 사음훈차한 표기일 수 있다.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다.
한국어 ‘크다’에 해당하는 일본어는 ‘오오(おお)’이다. 한국의 인명 [크달(→크다라)]과 일본의 인명 [오오다라]는 그 어원과 유래가 서로 다르지만 ‘Big man, Great person’을 의미하는 이름으로 유어병용(類語竝用)이 되었을 수도 있다. ‘숭례문’과 ‘남대문’은 언어적인 면에서는 완전히 다른 이름이지만 동일한 문을 가리키고, ‘밤실, 밤골, 밤말’의 [실, 골, 말] 역시 그 어원과 유래는 전혀 다르지만 의미와 가리키는 대상은 같다. [밤실]을 [밤골]이라고도 하는 것은 유어병용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궁월군(弓月君) 역시 [큰달]을 표기한 것으로 [오달]을 표기한 경행천황의 이름과 같은 의미를 지닌 이름이며,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유어병용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하는 근거는 일본인들이 본래 [안닮]을 표기한 百濟를 “쿠다라”라고 잘못 읽는다는 현실에 기인한다. 본래 百濟(백제)는 [안닮]을 표기한 것이고 巨濟(거제)가 [크닮]을 표기한 것인데, 둘이 지닌 의미도 비슷하고 혼용을 하다 보니 百濟를 “쿠다라”라고 잘못 읽게 된 것이다.
궁월군(弓月君)이 의다랑(意多郞)과 동일인일 가능성에 대하여 논하려면 이들이 활동했던 시기가 비슷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무열기 3년조 백제 의다랑 사망 기사는 501년이 아니라 561년 무렵일 것이라고 추측한 바 있다. 궁월군의 망명 기사는 응신 14년(283년)조에 실려 있지만 잘못 끼워 넣은 것이고 역시 560년대 전후에 있었던 일로 봄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의 활동시기가 바로 그 무렵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 가츠라기 소츠히코)은 구형왕의 손자인 솔지공(率支公)과 이름이 똑같고 동일인으로 여겨진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서기 532년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할 때 상손 졸지공도 데리고 갔다고 되어 있으므로, 그 때에 이미 출생해 있었으니 560년대에는 30대 후반 정도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라 할 수 있다. 신공황후 62년조 기록 역시 262년이 아니라 562년 임오년의 일로 봐야 옳으며, “신라 공격의 명을 받은 습진언이 신라로부터 미녀 두 명을 받고는 신라를 공격하지 않고 가라를 공격했다.”는 내용 그대로라 할 것이다. 습진언(=솔지공)은 아버지 세종(=노리부)과 삼촌 무력(武力) 등 일족 모두가 신라의 고위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친 신라적인 행보를 하고 신라와 손잡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정리해 보면, 응신천황은 150년 전인 서기 400년대 초반에 실존했던 인물이지만 응신기 14년조 궁월군 관련 기록은 후대에 있었던 일을 편찬자들이 고의로 혹은 착각에 의한 실수로 훨씬 이전의 천황기 속에다 잘못 끼워넣은 것이며, 실제로는 562년 혹은 그 전후에 있었던 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궁월군(弓月君)은 의다랑(意多郞) 즉 경행천황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오타라]와 [크달]은 어원적으로는 다른 말이지만 같은 의미를 지닌 이름이고, 우리가 흔히 ‘맏딸, 큰딸’을 혼용하기도 하듯이 당시 사람들도 유어병용(類語竝用)을 했을 수 있다.
이상으로 『일본서기』 제12대 경행천황의 이름에 대하여 알아보았는데, 전체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경행(景行)은 [호도아루]를 표기한 보행(步行)에서 변형표기된 것으로 추측된다. 무열기 3년조에 보이는 백제 의다랑(意多郞)과 동일한 이름이다. 의다랑은 아마도 의부다랑(意富多郞; 오호타라)에서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경행천황의 화풍시호인 대족(大足) 혹은 대대(大帶)는 각각 [오타라시] [오타이]를 표기한 것으로 발음만 약간 다를 뿐, 동일한 이름을 적은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28년(550년)조에는 달사(達巳)라는 장군의 이름이 실려 있는데, 경행천황의 화풍시호인 대족(大足; 오타라시)과 달사(達巳)는 일맥상통하는 이름이다.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99%라고 확신한다.
또한 『일본서기』 흠명기 15년(554년조)에는 성왕의 전사 후 신라군에 포위되어 있던 백제왕자 여창을 구출한 축자국조 얘기가 나오는데, 그 활약 덕분에 안교군(鞍橋君)으로 칭송을 받았던 인물 역시 경행천황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경행천황의 재위연대는 서기 71년~130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순 엉터리이며, 실제 월삭간지를 대조해 보면 531년~564년 정도로 추측이 된다. 경행천황은 구마모토 남쪽 구마천(球磨川) 하류 야츠시로(八代)시 인근에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되는 큐슈백제(=백제담로)의 통치자였는데 562년(임오년) 화랑 사다함에 의해 전단성(栴檀城)이 함락된 이후 그 후손들은 일본열도 중부지역으로 옮겨간 것으로 추측된다. 궁월군(弓月君)의 망명기사는 바로 그 일의 기록이라 할 것이다.
종래의 연구자들은 일본 오우치(大內) 가문의 족보에만 전해지고 있는 백제 임성태자(琳聖太子)에 대하여 성왕의 손자일 것으로 추측하곤 했는데, 참으로 어설픈 연구요 한심한 추측이라 생각한다. 임성태자는 바로 이 경행천황의 손자이거나 증손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임성태자에 관해서는 『임나의 인명』 “3-12) 초벽추경(草壁醜經), 임성태자(琳聖太子)”를 참고하시기 바라며, 이만 끝내기로 한다.
[최규성]
전 MBC 작가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