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부터 도착까지 끈질기게 따라붙던 백도의 여름 길은 떠나고 없다. 지금은 엷은 겨울 햇살이 왠지 힘없이 느껴지는 사막길이다. 긴 운전 끝에 찾아가는 애리조나는 삭막한 겨울도 마냥 아름답다. 나의 정열로 맥박을 지켜주던 열대의 밤처럼 겨울 매력은 따로 있다.
더위도 그 누구도 문을 두드리지 않는 새벽은 내가 사는 곳의 날씨와 비교가 되지 않게 춥다. 하늘이 시작되기 전 잠깐 찾아오는 새벽 공기 속으로 어느 곳에서도 눈치채지 못했던 신비로운 신의 비밀이 스쳐 지나간다. 아름다운 새벽은 오직 나와 하늘만이 아는 신의 정원 속 비밀이다.
내가 이 사막 땅의 주인이고 왕이라고 소리치고 싶어진다. 모닝커피 생각에 들렀던 호텔 카페에서 만난 노부부와 가벼운 목인사를 했다. 영감님의 긴 수염과 풍채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으로 평생을 백만장자로 살았을 것 같은 점을 쳐 본다. 노년이 부유해 보이는 저 백인 노부부의 힘에 겨운 발걸음을 보는 것조차도 여행의 기쁨은 같다.
두 손 꼬옥 쥐고 아름다운 곳으로의 여행만 했을 것 같은 저 노부부에게 찾아오는 늙음이 얼마나 안타까울까. 그들의 뒷배경으로 한쪽 벽을 둘러싼 대형 밋션 사진마저 운치를 돋군다. 나에게 여행의 의미는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하늘의 신비를 누군가가 일러주는 느낌이다. 턱수염이 대왕 같은 노인을 보면서 갑자기 나라의 임금은 하늘이 내린다는 그 의연한 말이 이 아침에 느껴졌다.
아마도 오는 동안 라디오 속으로 등장했던 한숨투성이의 한국사의 현재와 미래의 정치 이야기를 들었던 탓 같다. 백성이 의지하고 살 임금은 바로 하늘이니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하늘엔 하나님도 계신다고 하니 모든 것이 웬만하면 손발이 잘 맞을 것 같다. 그러니 어진 임금을 내려주시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을 듯싶다.
그럼 어리석은 임금은 누가 내리는 것인가. 신에게 묻고 싶다. 혹시 하늘의 실수로 잘못 내린 임금은 전적으로 하늘의 책임이 아닌가. 운전하면서 듣던 한국, 내 나라 조국의 뉴스 속에는 하늘이 쏘옥 뒤로 빠졌다. 새로운 왕을 선택한다는 게 하늘의 힘이 아니면 아니 된다는 것을 꼭 이때만 되면 이해할 수 있겠다.
어린 시절 자주 사생대회를 주로 고궁으로 나갔다. 그 고궁 속에서 살았던 왕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늘 어수선하게 느껴지던 덕수궁 보다는 후원이 인상 깊던 창덕궁의 우거진 숲을 내가 제일 좋아하던 궁궐이었다. 유난히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 같던 비원이었다. 나는 어린 그때에도 이렇게 첩첩산중 같은 구중궁궐에서 어떻게 외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을까. 전화도 라디오도 없는 세상에서 소식이라면 파발마를 타고 달려와 전해주는 소식이 유일했을 그때를 늘 궁금해했었다.
궁궐 밖의 백성들이 왕의 대책 없는 해괴한 소리를 들을 수 없어 대궐 밖에서 궐기를 못 하던 그때와는 비교하기 어려운 일이 분명하다. 요즘 사람들은 온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손에 들고 다닌다. 언제든지 폰을 열면 온갖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래선가 정치인들은 무슨 말을 들으면 한순간도 지체없이 상대를 볼썽사나운 공격으로 나선다. 어디 그뿐인가? 요즘은 선거 때에 못 된 왕과 하늘이 짜고 치는 투표조작 이야기도 듣는다. 공정한 정치를 할 것이라고 믿었던 순진한 백성을 기만한다. 그 기만의 결과를 지켜보는 일을 그 옛날 궁 안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생각을 해 본다.
그때의 왕과 충신들은 하늘이 내린다는 믿음 하나로 백성들을 위하니 지금처럼 혼란의 정치는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같다. 교통과 통신시설이 전혀 없었던 그 옛날에는 사신들이 왕의 서신을 들고 중국으로 가는데 함흥차사의 세월이 걸렸던 그때에도 지금처럼 혼란스럽다는 말이 없다.
외교면에서는 북의 인민들이 아침을 남쪽에서 먹기 위해 숟가락만 챙겨 들고 걸어 내려오게 지도를 쫙 펼쳐 놓고도 아무런 해답이 없다고 한다. 엄청난 힘과 비용은 국민이 들이고 무조건적 생색이 넘쳐나게 합의한 평화협정의 열매는커녕 쭉정이도 못 찾는 격이라고 들었다. 나라의 주인을 뽑아야 하는 일에 북의 투표조작도 능히 상상할 수 있다는 소름 돋는 소문도 돌아다닌다고 들었다.
더 이상 자신의 사리사욕만 생각하는 우둔한 나라의 왕이 또 나오지 말아야 한다. 하늘에게 물어보는 길밖에 없는데 나라의 왕은 어리석은 백성이 뽑아놓고 하늘을 탓하냐고 한다. 억지춘향식 공신들이 나라를 이끄는 큰 그릇을 자꾸 엎어 버리는 권력이 문제라고 귀띔한다. 자국의 이익과 백성을 부유하게 할 반듯한 지도자를 뽑아 해외순방을 다니며 나라의 위상을 세울 수 있기를 기대하는데 자꾸 능력 없는 불쌍한 왕만 생겨났다.
이제는 현명한 지도자를 뽑아 우리도 갈 길이 먼 산행은 그만했으면 좋겠다. 어리석은 임금을 낸 하늘의 책임은 어떻게 된 거냐고 묻기 전에 국민 스스로 책임이 필요할 때이다. 어떻게 흑싸리 껍데기 같은 왕만 보냈냐고 하늘을 원망하기 전에 백성 스스로 흑싸리를 팔광으로 만들어 내는 지혜를 쌓아야 하겠다.
어느 나라 국왕치고 풍류와 황금을 마다할 왕 있더냐. 그것 없이 누가 왕 노릇을 하랴. 모두 감안하고 이해하는 순진한 백성들을 위하여 적당한 양만 챙겼으면 좋겠다. 역대 임금들이 자리에서 내려온 뒤에는 곧바로 국립학교 형집행과로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이는 일은 분명 하늘의 순리가 맞다. 태평성대를 누리게 하겠다는 왕의 허무맹랑한 언약보다 사필귀정을 믿는 순진한 백성들을 하늘은 절대로 모른 척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꼭 하늘의 뜻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이제라도 제대로 된 어질고 총명한 왕을 보낸다면 그럼 나는 그 왕이 뽑는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짐을 싸리라. 그렇게도 잊지 못하는 아름다운 비원의 정원을 거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사막을 여행하다 보면 꼭 만나고 싶은 또 다른 비밀스런 느낌이 바로 왕과 백성이 함께 가야 하는 일이다. 풀 한 포기의 생명도 허락하지 않는 사막 땅에서 나는 하늘의 기운을 만난다.
화가
수필가
코스미안뉴스 칼럼니스트
문경구 kimurgin@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