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영의 낭만詩객] 청포도

이순영

두려움 없는 삶이란 존재할까. 그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사는 것일까.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배신하고 두려움 때문에 자살하고 두려움 때문에 마음을 문을 걸어 잠근다. 두려움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정신의 적이다. 그런데 옥살이만 열일곱 번이나 한 시인이 있었다. 그 시인의 나라는 식민지 지배로 황폐해진 나라였다. 그 시인의 이름은 이원록이다. 그러나 본명보다 육사라는 죄수의 번호로 불렸다. 두려움을 시의 언어로 바꾸어 극복한 사람, 두려움 때문에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던 사람, 그 사람을 우리는 이육사라고 부른다. 

 

칠월만 되면 ‘청포도’가 생각난다. 상큼하고 달콤한 청포도의 계절에 청포도는 마음 저 깊은 곳에서 퍼 올리는 찬우물 같은 것이다. 우리 고장에도 청포도가 익어가고 다른 고장에도 청포도가 익어가겠지만 청포도라는 어감이 주는 느낌은 우리 가슴에 잠들어 있는 죽은 희망의 세포를 깨우는 것 같다. 칠월과 청포도는 동의어 같다. 이육사 덕분이다. 이육사는 청포도 하나로 칠월을 청포의 대명사로 만들어 놓았다. 빼앗긴 나라에서 시인이 할 수 있었던 가장 아름다운 저항은 모국어도 짓는 ‘시’였을 것이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나라 없는 백성이 겪었을 두려움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칠월의 태양만큼이나 뜨거웠을 것이다. 알알이 익어가는 청포도처럼 그 안에 무수한 두려움이 희망으로 바뀌는 꿈을 꾸며 시간을 견디었을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무엇이든 해야 했던 시절, 이육사는 사회주의자가 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도쿄에 유학하여 킨죠(錦城) 예비학교를 1년간 다니다가 중퇴하고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하여 중국대학(中國大學) 상과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중퇴했다. 이육사는 김원봉에 대해서 “중국의 부르주아 계급과 야합하고 사상이 애매한 비계급적 인간”이라고 거침없는 쓴소리를 쏟아놓곤 했다. 

 

이념의 노예로 살아야만 했던 시절의 문인이란 얼마나 가혹했겠는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광야’, ‘강 건너 노래’, ‘꽃’ 등은 그가 문인으로서의 빛나는 가치를 지녔다는 걸 알 수 있다. 1943년 일제에 의한 한글 탄압이 계속되자 이육사는 한시만 쓰면서 저항 의지를 꺾지 않았다. 독립운동으로 옥살이만 17년 했던 이육사를 두고 저항 시인 보다는 독립운동가로서의 평가가 우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대에 시인인 윤동주는 서훈 3급이고 이육사는 서훈 4급이다. 윤동주와 이육사는 해방을 눈앞에 두고 옥사했는데 사회주의자였던 이육사에게 민주주의 국가인 우리는 조금 야박한 평가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동인 활동이 활발했던 1937년 김광균, 윤곤강과 함께 ‘자오선’을 발간하면서 청포도, 교목, 절정, 광야 등을 발표했다. 독립운동을 위해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이 죽는 바람에 귀국했다가 그해 6월에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베이징으로 압송된다. 결국 이육사는 1944년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고 만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먼 타국에서 죽은 이육사의 시신을 동생 이원창과 이병희가 수습해서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그리고 1960년이 돼서야 고향 안동시로 이장했다. 

 

동생 이원조도 좌파 문인으로 활동했다. 해방되자 월북해서 고위직을 지내다가 박현영과 함께 숙청되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육사는 동생 때문에 북한 정권 수립과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사회주의자라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동생 이원조가 해방 직후인 1946년에 형 이육사의 작품집 ‘육사시집’을 발간했다. 이육사는 신조선사. 중외일보사, 조광사, 인문사 등 언론기관에 종사했다. 한시와 시조는 물론 논문과 평론, 번역과 시나리오까지 문학에 대해 다재다능함을 보여주었다.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다. 코로나로 못 갔던 여행을 봇물 터지듯 떠나고 있다. 여행의 계절 칠월은 이육사의 청포도가 익어가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히지만 우리의 삶이란 늘 궁핍하고 결핍투성이다. 천정부지로 올랐던 물가는 여전히 널뛰기하고 만원이 넘는 밥 한 끼도 버겁다. 언제쯤 좋은 시절이 올까. 이육사가 그리워하던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고 조촐한 파티를 할 수 있을까. 청포도가 익어가는 칠월에 이육사가 기다리던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지만 이천이십삼년 내가 기다리던 손님은 신나는 몸으로 청포(靑布)를 입고 찾아와 주려나 기다려진다.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

이메일eee0411@yahoo.com

 

작성 2023.07.06 10:12 수정 2023.07.06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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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