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석 칼럼] 거기 빈 의자가 있었다

허석

그 들판은 혼자가 아니었다.

 

여름은 메숲지고 웃자란 초목은 풀벌레로 분주하여도 시골 들판은 언제나 여유롭고 한가롭다. 산새들이 제 기량 것 고음을 내지르고 자갈밭 개울물은 아이들처럼 재잘거려도 비어있는 대지는 공허로 적요하다. 

 

가끔 지나다니는 경운기 탈탈거리는 소리마저도 자연의 일부인 양 정겹고 넉넉하여 어딘가에 풀썩 주저앉아 잠시 쉬어가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의자가 없으면 어떠랴. 참외밭에 깐 지푸라기도, 호박마다 받친 똬리도 그들의 의자라고 불러주던 시인*의 말처럼 자연은 걷는 곳이 모두 길이고 철퍼덕 주저앉는 곳이 모두 의자다.

 

마을도, 인적도 드문 허허로운 시골길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차창 밖 무심코 눈을 돌린 길가에 의자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흔한 플라스틱 의자도 아니고 고급 호텔에나 있을법한 중세 유럽풍의 꽃무늬 의자였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문양이 조각된 우윳빛 나무틀에 장미 넝쿨무늬로 곱게 새겨진 고급 천이 눈에 더 도드라져 보였는지 모른다.

 

산 중턱에 배가 얹혀있다고 하면 생경하면서도 호기심이 일듯이 들판에 꽃무늬 고급 의자가 생뚱맞게 놓여 있는 것도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주변은 일 년 내내 계절이 오고 가는 허허벌판일 뿐 덩두렷한 산과 논밭 외에는 특별한 배경이나 풍광이 있는 곳도 아니었다. 막 촬영을 끝낸 영화 한 장면인 것처럼, 의미 있는 설치예술작품 전시처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으면서도 새뜻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 의자 너머로 삶의 이정표 같은 한 모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의자는 우리 주변 어디에서든지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다. 조연이면서도 주연처럼 크게 돋보이거나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와 같다. 굳이 나서지 않으면서도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의자는 육체적 휴식뿐 아니라 긴장을 늦출 수 있는 정신적 위안의 공간이다. ‘빨리빨리’를 잠시 멈추고 ‘조금 천천히’, ‘조금 느리게’ 가는 시간의 기표(記標)이자 기의(記意)다.

 

때로는 사람을 기다리고 만나는 장소로, 권위의 상징으로, 직업의 자리로, 대화의 장으로,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으로 향한 버팀목의 표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 의자다. 삶이 항상 타동사만이 아니라면 그 의자라는 존재가 꿈꾸는 희망의 메시지와 이상을 연결해주는 매개체 역할로 다가올 수도 있다. 혹, 모른다. 의자를 볼 때마다 누군가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의 존재가 되어 지난 세월에 대한 애착과 연민의 흔적으로 남아있을지도.

 

빈 의자를 보면 어딘지 모르게 삶의 여유와 여백을 느낀다. 비어있어 외로움이 아니라 비워두어 오히려 내적 충만감과 안정감 같은 것이다. 퍽퍽하게 살아왔던 삶의 무게중심도 낮추고 생채기 난 마음의 안식과 내려놓음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자식이 어머니의 품에 기대어 위안받듯이 땀을 식히고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쉼터 같은 존재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멍하니 하루를 앉아있어도 조금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뺏길까 봐 일어서지 못하는 이기적인 빈 의자가 아니다. 나만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비워놓은, 무장과 경계를 허문, ‘나는 너의 아픔을 알고 있다.’라며 위로와 배려하는 마음이 깃든 빈 의자이다. 지친 몸으로 다가가면 문을 활짝 열어 따뜻하게 반겨주고, 속내 깊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어주고, 언제나 내 편인 양옆에 있어 줄 것만 같은 의자이다.

 

누구나 한평생 수많은 의자를 만난다. 학창 시절 교실에서 만났던 나무 의자, 사랑하는 이와 얼굴을 맞대던 식탁 의자, 공원에서 쉬어가던 벤치. 하지만 꼭 그렇게 마음 편한 의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입시나 입사를 위해 경쟁을 해야 하거나 지친 몸을 잠시 기댈 버스에서의 빈자리처럼 남보다 내가 먼저 차지하고 싶은 욕심을 부릴 때도 있었다. 비어있지 않을 때도 많았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빈자리가 있을 때는 얼마나 다행스럽고 행복했던가.

 

저 시골길의 빈 의자는 누구를 위해 가져다 놓았을까.

 

주변은 논밭에서 일하는 농부나 어쩌다 지나가는 길손 외에는 한적한 곳이다. 설마 근처 논밭 주인이 자기 휴식을 위해 그런 고급 의자를 준비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고 지체 높으신 양반이 찾아올 곳도 아니고, 지나다니는 승용차가 잠시 정차하기도 불편해서 여행객을 위한 쉼터 자리도 아닌 것 같다.

 

연유야 따로 있겠지만 내심 엉뚱한 상상을 품어본다. 특별히 누구만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어쩌면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혼연한 뜻은 또 아니었을까. 욕망과 권위의 상징으로 존재하는 자리가 아니라 잘났던 못났던, 출세했던 못했던, 시골 사람이든 도시 사람이든 간에 열심히 살아온 삶 앞에서는 누구나 앉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비록 누군가의 치기일지 모르지만, 세상 살면서 그렇게 삶의 의미와 가치를 명징하게 내세워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싶다. 

 

지나가는 길손이 피로한 다리를 잠시 쉬었다 가면 어떻고, 밭일하던 아낙이 그늘에 휴식을 취하면 어떠랴. 어차피 외롭고 지친 자들을 위한 마음의 장소일 것이다. 저 길가의 빈 의자가 결코 쓸쓸해 보이지 않는 것은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는 자의 애달픔이 아니라 누군가를 맞이하고 위로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 같은 넉넉함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도 그런 빈 의자를 두고 살아왔는지 의심이 든다. 

 

남들 앞에 화려하고 보기 좋은 의자가 되려고만 하지 않았을까. 특별한 이해관계도 없는데 누군가 다가오거나 마음을 터놓으려 살짝 기대는 것조차 거절하지나 않았을까. 나에게 엄격하고 상대에게 온전함을 요구하는 완벽을 내세우느라 남들이 곁에 앉기 부담스러워하거나 돌처럼 딱딱해서 불편한 의자는 아니었을까. 바람 한 점 드나들 수 없는 마음의 벽을 허물지 못해 누군가 주위만 서성대다가 힘없이 돌아서지나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같은 문법, 같은 온도를 가진 사람, 나와 정서와 문화와 가치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편견과 선입견으로 꽉 채워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앞만 바라보고 사느라 비상구처럼 의자 하나 그늘 밑에 내놓을 줄 몰랐고 내 주장으로만 사느라 숨구멍처럼 마음 한구석 비워둘 줄을 몰랐다. 누구에게나 삶의 논리와 이유가 있을 것인데 무엇이든 내 방식, 내 입장, 내 가치대로 해야 직성이 풀렸다. 상처를 받는 것도, 손해를 보는 것도 나부터, 내 처지에서만 따지며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의자를 가지고 있다. 사람마다 모양과 크기가 다르고 놓여 있는 자리도 제각각이다. 어쩌다 다리가 부러진 의자도 있고 힘에 부쳐 삐걱거리는 의자도 있을 것이다. 삶이란 자신의 의자를 만들고 고쳐가며 사는 일이다. 이왕이면 여럿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면 어떨까. 아무리 훌륭한 의자라도 혼자만을 위한 의자는 함께 나눌 여백이 없어 따뜻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자신을 알아주고 이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또다시 힘을 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빈 의자는 틈을 여는 것이고 곁을 내어주는 일이다. 경계를 지우는 스푸마토 기법처럼 마음의 문을 연다는 뜻이다. 무엇이 기쁨인지, 무엇이 슬픔과 아픔인지 함께 하겠다는 것이다. 수혈도 헌혈도 없이, 남의 의자에 앉지도 않고 내 의자에 남을 앉힐 마음도 없이 혼자서만 잘하면 잘 사는 줄만 알았던 지난날이 후회스럽다. 

 

언젠가 차에서 내려 그 빈 의자에 앉아보고 싶다. 고독한 휴식과 쉼터를 위한 원두막 같은 저 빈 의자, 은자의 침묵 같은 모습으로 변함없이 거기 있어 준다면 고향 가는 이 길이 훨씬 더 유정해지지 않을까. 

 

* 이정록 시인 <의자>에서 부분 인용

 

[허석]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 

 

작성 2023.07.11 11:14 수정 2023.07.11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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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