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영의 낭만詩객] 향수

이순영

누구나 그리움이 있다. 그리움은 인간의 본성이다. 본성 속에 있는 그리움의 대상은 자연이며 그 자연을 안고 살아갔던 곳이 고향이다. 연어처럼 고향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는 습성이 인간에게도 있다. 고향이라는 그리움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감정이다. 지구에 있는 시의 대부분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고 노래도 고향이라는 주제가 단골이다. 태어나고 자라는 곳은 내 육체와 정신의 토양이다. 꽃도 그 땅에서 뿌리를 내려야 꽃을 피우듯이 말이다. 이 지구에 사는 동안 내내 그리움이라는 향수에 시달리며 살아갈지 모른다.

 

생명을 가진 존재는 정신적으로 독립되어야 하고 정서적으로 따뜻해야 한다. 생존에 유리하기 위해 우리는 고향이라는 정서적 공간을 늘 준비해 두고 있다. 가족이라는 유대감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기 위해 마음을 늘 고향에 두고 있다. 한곳에 정착해서 살기 어려운 시대다. 좋은 직장은 대도시에 몰려 있고 좀 더 나은 삶은 고향보다 타향에 많다. 떠나서 더 좋은 곳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신新유목 시대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거나 어쩔 수 없이 타국에 살게 되면 향수병에 시달리며 시름시름 앓게 된다.

 

누구나 입속을 돌아다니면 노래 하나쯤은 가지고 산다. ‘넓은들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하며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열고 나온 ‘향수’를 흥얼거릴 때가 있었다. 서정적으로 감미로운 음색을 지닌 대중가수 이동원과 서울대 교수 테너 박인수가 듀엣으로 불러서 국민노래가 된 적이 있었다. 당시 테너 박인수는 대중가요를 불러서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국립오페라단에서 제명당하기도 했다. 아름답고 아련하고 누구나 즐겨 부르게 된 노래를 품위를 손상했다고 낙인찍은 것은 지금 들어도 좀 우습다. 예술에 귀하고 천한 것이 있는지 높고 낮음이 있는지 누가 정할 수 있고 또 누가 정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이없는 일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의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이 아련한 그리움의 시를 모르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할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정서, 의식 내부에 켜켜이 쌓인 자연에 대한 사랑이 정지용의 ‘향수’에 다 들어 있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가족애를 이 시에서 찾아낼 수 있다. 돈이나 명예도 그리움 앞에서는 대체 불가한 종잇조각에 불과할지 모른다. 좀 더 근원적으로 들여다보면 그리움이란 나의 내면과 소통하는 우주적 시간이다. 내 DNA를 다음 세대에 온전하게 전달하려는 내재적 체험이며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자기 생존을 최적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나라 모더니즘의 선구자인 정지용은 현대시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나라를 잃고 자식을 잃고 고향을 잃은 불행에 대한 자조이기도 했다.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1926년 『학조』 창간호에 「카페·프란스」를 발표하면서 등단하게 된다. 서정주, 이용악 등과 함께 3대 천재로 불리던 오장환이 정지용의 스승이다. 일제의 탄압이 가속화되자 정지용은 새로운 사조로 방향 전환을 모색한다. 그것이 이미지즘이다.

 

육이오가 터지자 정지용은 사망했다는 설과 월북했다는 설이 분분했다. 그런저런 이유로 그의 작품들은 금서로 묶여 있다가 시절 인연이 닿아 해금되었다. 이 아름다운 우리말의 보고 ‘향수’가 다시 우리의 가슴에서 그리움을 퍼 올릴 수 있었건 다행 중 다행이다. 이념이라는 포장지 따위에게 속박당하지 않았던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지금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며 입속을 돌아다니는 노랫소리에 그리움을 생각하곤 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

이메일eee0411@yahoo.com

 

작성 2023.07.20 09:48 수정 2023.07.20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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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