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우린 모두 천재天才, 우재宇才 코스미안으로 살아야지

이태상

“정념은 지나치지 않으면아름답지 않다. 사람은 지나친 사랑을 하지 않을 때는 충분히 사랑하지 않은 것이다.”

제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은 ‘세상은 좁고 할 일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라는 것은 우리 가슴 뛰는 대로 (뛰는 만큼) 살(아보)자는 거지요. 충분히 사랑하자(사랑해보자)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지나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가슴 아프다고 말할 때는 이웃의 슬픔과 아픔을 더 좀 나눌 수 없거나 그 누군가를 더 좀 사랑할 수 없어 안타까울 때입니다. 가슴 뛰는 대로 살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고 강조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천재처럼 노력하고 바보처럼 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나 다 하늘이 준 재능을 타고난 천재입니다


‘구슬이 서 말’ 같은 천부의 재능을 열심히 바보처럼 꿰는 인재가 되자는 거지요.

우리는 먹고 보고 듣고 읽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꿈꾸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꽃을 보는 눈은 꽃이 되고, 별을 보는 눈은 별이 되며, ‘너’를 좋아하면 나는 ‘너’가 되지요. 이렇듯 신념의 힘으로 ‘사랑의 요술’을 부리는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입니다.

“영원이란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 그 자체가 되는 섬광처럼 번쩍이는 그 일순간이다. Eternity consisted of a flash of a lightning-like moment when we became the very object of our love.”라고 믿었다는 독일의 신비주의자 야콥 뵈메 Jakob Boehme(1575-1624)의 말이 문득문득 되살아납니다.

현대 과학, 특히 양자역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없고, 과거, 현재, 미래도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현대 천문, 물리, 생물, 화학에서는 별과 우리 인체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요소가 같은 원소라고 하지 않습니까?

캐나다계 미국 가수 조니 미첼Joni Mitchell Canadian-American singer-songwriter(1943- )이 “우리는 우주진宇宙塵 (cosmic dust) we are stardust”이라고 노래하듯 우리 모두가 저 ‘어린 왕자 The Little Prince’(Novella by Antoine de Saint-Exupéry)처럼 별에서 왔다가 별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어린 왕자’처럼 순수를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 별(우주)로 돌아가야하지 않을까요.

저는 어린아이가 곧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도 우리가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지요. 어린아이에게는 참도 거짓도, 선도 악도, 아름다운 것도 추한 것도, 옳고 그른 것도, 귀하고 천한 것도, 남자도 여자도, 너도 나도 따로 없고, 동물 식물, 광물도 어린아이와 같은 하나지요.

사람은 나이를 먹어서 늙는 게 아니고 이상을 버릴 때 늙는다고 로마의 키케로[(라틴어: Marcus Tullius Cicero)는 기원전 106년 1월 3일 이탈리아 아르피눔에서 태어나 기원전 43년 12월 7일(율리우스력) 포르미아에서 사망한 로마의 정치인 ...Wikipedia]는 말했습니다. 

 

“시인의 반란(反亂/叛亂)은 어김없이 근본적으로 보수적(保守的) 이다. 정치적으로가 아니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 정신적으로, 그것도 땅과 공기, 해와 달과 별,  또는 인간의 꿈 같은, 주어진 것들에 대한 깊고 심원(深遠)한 사상적 경외심(敬畏心)에 찬 보수적이란 말이다. The revolt of the poet is invariably conservative at its roots. Not politically conservative, but imaginatively conservative, with a profound regard for what is given, as earth or air, sun or moon or stars, or the dreams of man.”    

미국의 시인 시드 코만(Cid Corman1924-2004)의 말입니다. 
 
옛 페르시아의 시인 오마 카얌(Omar Khayyam, 1048-1131)은 이렇게 노래했죠.
 
“이 순간에 행복하라. 이 찰나가 네 삶이니. 시집 한 권, 술 한 병,   빵 한 덩어리 그리고 그대가 나뭇가지 아래 내 옆에 앉아  노래 한다면, 이 황막(荒漠)한 광야(廣野/曠野)도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지상(地上/至上)의 천국(天國)이 되리니. Be happy for this moment. This moment is your life. Here with a Loaf of Bread beneath the Bough, A Flask of Wine, a Book of Verse - and Thou Beside me singing in the Wilderness - And Wilderness is Paradise enow.”
 
“아, 우리가 맛볼 수 있는 걸 만끽하리.  술도 없고, 노래도, 노래 부를 사람도, 끝도 없는, 흙먼지 티끌로 우리 또한 돌아가기 전에! Ah, make the most of what we yet may spend, Before we too into the Dust descend; Dust into Dust, and under Dust to lie Sans Wine, sans Song, sans Singer, and — sans End!”
 
“사려(思慮) 깊은 영혼(英魂/靈魂)은 고독이라는 열쇠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베일 속으로 침잠(沈潛)하리니. The thoughtful soul to solitude retires. There was the Door to which I found no key; There was the veil through which I might not see.”
 
“어제, 이날 이때의 광증(狂症)이 생겼어라. 내일의 침묵 (沈默)  또는 승리(勝利)의 개가(凱歌) 절망(切望/絶望)의 비가(悲歌)도. Yesterday This Day’s Madness did prepare; Tomorrow’s Silence, Triumph, or Despair:”
 
“마시자. 네가 어디서 왔으며 왜 왔는지  모르나니, 마시자. 네가 어디로 왜 가는지 모르나니. Drink! for you know not whence you came nor why: drink! for you know not why you go, nor where.”
 
“움직이는 손가락은 글씨를 쓰고 글이 쓰여진 다음엔 없어진다네. The moving finger writes, and having written moves on.”
 
 “너의 모든 경건한 신앙심이나 너의 모든 슬기로운 지략(智略)으로도 이미 쓰여진 글씨 한 줄의 반도 지울 수 없다네.  Nor all thy piety nor all thy wit, can cancel half a line of it.”
 
“사람들이 창공(蒼空)이라 부르는 거꾸로 뒤집혀 반전(反轉)된 푸른 하늘 창궁(蒼穹) 아래 벌레처럼 기면서 살다 죽는  우리가 아닌가. 그렇다고 허무한 이 창공으로 도움을 청해 우리 두 팔 뻗어 손을  벌리지는 마세. And that inverted Bowl they call the Sky, Whereunder crawling coop'd we live and die, Lift not your hands to It for help — for It As impotently moves as you or I.”
 
“사람들이 자신들의 간절함으로 품는 세속적인 희망도 잠시 번갯불처럼 번쩍 빛나다가 사막 모래밭에 떨어지는 눈발 조각같이 곧 스러지는 것이리. The Worldly Hope men set their Hearts upon Turns Ashes — or it prospers; and anon, Like Snow upon the Desert's dusty Face, Lighting a little hour or two — is gone.”
 
“그러니, 자, 네 잔을 채우게. 겨울이 지나고 다가오는 봄 불볕에 자네가 입고 있던 참회(懺悔)의 겨울옷을 태워버리게.  시간이란 세월의 새가 잠시 날개를 펴 펄럭이다 날기 시작하네. Come, fill the Cup, and in the fire of Spring Your Winter-garment of Repentance fling: The Bird of Time has but a little way To flutter — and the Bird is on the Wing.”
 
시인일 뿐만 아니라 수학자, 천문학자,  철학자이기도 했던 오마 카얌은 ‘사랑’ 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도 남겼습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이리.
어떻게 사랑할지를 모르는 가슴(마음)이라면,
사랑에 취할 줄 모르는 가슴이라면.
사랑을 하고 있지 않다면 어찌 네가
눈부신 찬란한 햇살을 그리고 또 부드럽게
몽환적(夢幻的)인 달빛을 보고 감상할 수 있으리.”
 
“천 가지 후회를 가슴에 안고 우리는 떠나간다네.”
 
“술을 마시고 달을 쳐다보며 저 달이 그동안 수많은 문명과 문화가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을 생각해보게.”
 
“네 가슴에 사랑의 장미꽃 심었을 때 네 삶은 헛된 것이 아니었으 리.”
 
“나는 사랑하는 연인들의 행복한 한숨 소리를 소중히 여기지만 위선자들이 지껄이는 기도소리는 경멸한다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네 사랑이 술병이 술잔 사랑하듯 하기를 나는 빈다네.  살펴보게나, 알알이 포도알들이 제 소중한 피를 나누듯, 주고받는 입술과 입술이 어떻게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지를,”
 
“사랑하는 나의 님이시여, 새가 죽을 준비할 때처럼 나도 내 슬픔 일랑 숨기리오.”
 
 

‘코스미안의 기도문’을 이렇게 제안해 봅니다.
 
생각건대
삶의 다른 한쪽
죽음을 의식하고
사는 것 이상의
종교도
 
죽음을 안고
사는 삶을
더할 수 없이
잘살아보는 것
이상의 예술도
 
사랑으로 숨 쉬고
사는 사랑 이상의
삶도 없지 않으랴.
 
정녕 삶의 본질이
사랑이 아니더냐.
 
삶의 숨결이 사랑이요.
삶의 날개가 사랑이요.
삶의 승화가 사랑이요.
삶의 꿈꾸기 사랑이요.
삶의 완성이 사랑이요.
 
삶의 알파와 오메가도
오로지 사랑 아니더냐.
 
사랑을 모르고 사는 억만년보다
사랑하는 한 순간이 그 얼마나
한없이 더 보람되고 복된 것이랴.
 
미칠 바에는
삶에 미치고
사랑에 미치리라.
 
취할 바에는
삶에 취하고
사랑에 취하리라.
 
정말
미치도록
취하도록
죽도록.
 
Wasn’t love
the essence of life,
indeed?!
 
Breaths of life were love.
Wings of life were love.
Dreams of life were love.
Completion of life was love.
 
Weren’t the beginning and
the ending of life love?!
 
I’d rather live for a moment in love
than for million years out of love.
Yes, this would be infinitely more blissful.
 
Were I to be mad,
I’d get mad in living.

Were I to be mad,
I’d get mad in loving.
 
Were I to be drunk,
I’d get drunk in life.

Were I to be drunk,
I’d get drunk in love.
 
Really, madly, drunkenly
to death!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
 

작성 2023.07.22 10:17 수정 2023.07.22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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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