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영의 낭만詩객] 강촌

이순영

어느 한 시대를 살았던 누군가가 나를 설레게 한다. 그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사건들을 만날 수 있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들은 기록이라는 역사로 남고 우리는 그들의 기록을 읽으며 슬프고 아름답고 추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에 흠뻑 빠져든다. 요즘처럼 되는 일 없고 어이없는 사건 사고로 불안할 때는 더욱 그렇다. 신물 나는 정치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하고 왕이 된 아이들에게 말 한마디 못 하는 어른들을 보는 것도 참 기가 차다. 이럴 때 좋은 시 한 편 읽으며 위로받는 호사를 누려도 좋을 것이다.

 

요즘 누가 시 한 편 읽으며 마음을 달랠까마는 좋은 시 한 편이 주는 위로는 생각보다 깊고 넓다. 읽는 시대를 지나 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읽는 것에 최적화된 동물이다. 우리 유전자에 각인된 활자의 추억은 여전히 읽는 것에 대한 환희를 준다. 늦은 밤 도로를 달리는 차들을 보면서 느꼈던 먹먹함을 나는 한 편의 시로 달래곤 했다. 고독이라는 보약에는 꼭 ‘시’와 ‘시간’과 ‘역사’가 함께 들어가야 약발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두보를 만나는 시간은 잘 다린 보약 한 첩 먹는 기분이다. 특히 ‘강촌’이라는 시가 들어간 보약을 한 사발 마시고 나면 힘이 생긴다.

 

맑은 강물 한 굽이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데

긴긴 여름 강마을은 일마다 그윽하다.

들보 위의 제비들은 절로 갔다 절로 오고

물 위의 갈매기들은 서로 친하고 서로 가깝다.

늙은 아내는 종이 위에 바둑판을 그리고

어린 아들은 바늘을 두들겨 낚싯바늘을 만든다.

다만 벗이 쌀을 좀 보내 준다면야

미천한 몸 그 밖에 무엇을 또 바라겠는가?

맑은 강물 한 굽이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데

긴긴 여름 강마을은 일마다 그윽하다.

들보 위의 제비들은 절로 갔다 절로 오고

물 위의 갈매기들은 서로 친하고 서로 가깝다.

늙은 아내는 종이 위에 바둑판을 그리고

어린 아들은 바늘을 두들겨 낚싯바늘을 만든다.

다만 벗이 쌀을 좀 보내 준다면야

미천한 몸 그 밖에 무엇을 또 바라겠는가.

 

누구나 인생의 절반은 괴로움이다. 아니 인생 그 자체가 괴로움으로 탄생한 것인지 모른다. 두보의 인생도 평생 괴로움으로 지리멸렬했다. 벗이 쌀을 보내 주기를 바랄 만큼 가난했다. 괴로움 중의 가장 큰 괴로움은 가난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시인이 가난하다는 건 진리에 가깝다. 시인은 자연의 친구여서 가난한 걸까. 욕심이라는 걸 부리지 않아서 가난한 걸까. 시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가난하니 시인에게는 태생적 가난이 따라다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시를 잘 지었던 두보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세상을 유랑하는 떠돌이 시인일 뿐이었다. 그렇게 세상을 떠돌면서 시를 짓고 사람들을 만난다. 철학자도 만나고 정치가도 만나고 고관도 만나고 농부도 만난다. 두보의 시를 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노래해 시의 완성자가 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는 작업을 시를 통해 한 것이다. 

 

사랑이 죄다. 사랑의 다른 말은 파멸이다. 당나라 현종은 나라가 태평 성대해지자 사랑에 올인했다. 현종은 자기 아들의 부인이었던 양귀비를 사랑하고 말았다. 그렇다. 사랑이 죄다. 사랑이 파멸의 씨앗이다. 시아버지 현종을 홀린 양귀비를 등에 업고 그의 오빠 안녹산이 난을 일으켜 나라를 절망에 빠뜨렸을 때 두보도 모든 걸 잃었다. 가족과 헤어지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온갖 고생을 하다가 어찌어찌해서 가족을 이끌고 난리의 불길이 닿지 않는 사천 성도로 가서 친구의 도움을 받게 된다. 그러니 어찌 세상을 비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고통을 온몸으로 겪어낸 민중들의 삶을 기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보와 따뜻한 친구였던 이백이 고위공무원으로 궁궐에서 시를 지으며 술로 세상을 조롱하고 인생을 소비할 때 두보는 세상을 떠돌면서 가난에 시달렸다. 어느 해 이백과 두보가 만나 교류할 때 두 시인은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고주망태가 되어 한 이불에서 같이 쓰러져 잤다고 한다. 이 두 시인은 술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정부의 빈민구제용 비축미까지 암시장에 내다 팔아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이백이야 능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두보가 술을 그렇게 마셔댔다는 건 조금 의아한 일이다. 하긴 술이 아니면 그 지난한 세월을 버틸 재간이 두보에게도 없었을 것이다. 

 

두보가 49세 되던 해에 청두 완화계 가에 초당을 짓고 어느 여름날 ‘강촌’이라는 시를 지었다. 강이 흐르는 마을에서 욕심 없이 살아가지만, 가난을 면치 못해 친구가 쌀을 좀 가져다주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마음을 그대로 반영한 시다. 솔직하지만 애처롭다. 사는 게 뭔지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두보가 애처로우면서도 위대하다. 욕심 없이 살아가려는 자유의지가 위대하고 그 자유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겪어야 할 가난이 애처롭다. 삶이라는 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처럼 애처롭고 위대한 존재다. 

 

달을 잡으러 강물에 뛰어들어 죽은 이백이나 굶주리다가 잔칫집에서 폭식으로 체해서 죽은 두보나 그들이 기록한 ‘활자’의 추억은 우리를 즐겁게 하고 있다. 요즘 유튜브의 강렬한 맛에 중독되었다면 활자의 추억을 끄집어내어 문학의 진짜 맛을 보면 아! 하는 감탄사가 나올 것이다. 두보가 살았던 강촌의 여름을 우리도 한번 느껴보면서 21세기 가난은 가난도 아닌 것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 시성詩聖이 된 천 사백 년 전 두보의 가난에게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

이메일eee0411@yahoo.com

 

작성 2023.08.03 09:53 수정 2023.08.03 09:54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한별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horts 동영상 더보기
2025년 4월 25일
2025년 4월 25일
전염이 잘 되는 눈병! 유행성 각결막염!! #shorts #쇼츠
2025년 4월 24일
2025년 4월 23일
2025년 4월 22일
나는 지금 '행복하다'
2025년 4월 21일
2025년 4월 20일
2025년 4월 19일
2025년 4월 18일
2025년 4월 17일
2025년 4월 17일
2025년 4월 16일
2025년 4월 15일
2025년 4월 14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5년 4월 13일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